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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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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이글스(Hanwha Eagles)
㈜한화이글스(Hanwha Eagles)

㈜한화이글스(Hanwha Eagles)는 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KBO 소속 프로야구단이다. 홈 구장은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의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이다. 제2 구장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의 청주야구장이며, 퓨처스 구장은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의 서산야구장이다. 현재와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1986년 3월 8일 빙그레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다. 1998년 11월 1일 구단 이름을 한화 이글스로 변경하였다.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창단 이래 유일하게 우승하였다. 그 후로는 11년만에 2018 준 플레이오프를 진출했다. 마스코트는 위니, 비니, 수리이다.[1]

연혁[편집]

  • 1985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참가를 희망한 한화그룹에서 1월 15일 창단 준비 위원회를 발족시킨다. 다음 날인 1월 16일 한국야구위원회로부터 제 7구단으로 승인받게 되고 3월 11일 연고지를 대전으로 삼은 ㈜빙그레 이글스 야구단이 설립되고 감독으로 배성서 감독이 취임한다. 그해에는 2군 리그에 참가했다.
  • 1986년 3월 8일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3월 9일 청주야구장에서 빙그레 이글스 창단식을 개최한다. 그해 처음으로 1군 리그에 참가했다. 하지만 86시즌에서는 청보 핀토스에게 밀리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청보는 만약 빙그레가 86시즌 꼴찌를 면했다면 구단 역사를 모두 꼴찌로 장식하는 기록을 세울 정도의 약팀이었으니 이 시기 빙그레가 얼마나 못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기 리그는 7위로 마감했으나 후기 리그에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해체로 트레이드 된 장명부와 이상군의 활약으로 6위를 한다. 하지만 신생 구단의 한계와 얕은 선수층으로 정규 리그 7위를 기록했다.
  • 1987년 2번째 시즌에는 전기리그 6위와 후기리그 공동 5위로 후기리그 공동 5위로 간신히 정규리그 6위를 기록했을 뿐 특별한 성적을 내비치진 못했다. 그해 처음으로 빙그레 이글스에서 외야수 이정훈 선수가 신인왕으로 올랐다.
  • 1988년 3년 계약 기간이 만료된 배성서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김영덕 감독을 영입하여 정규 시즌을 2위로 마감한 빙그레 이글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3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창단 이래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정규 시즌 1위 팀 해태 타이거즈와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내리 3경기를 지게 된다. 경기를 잡고 분위기를 타는 듯했으나, 결국 6차전에서 져서 2승 4패로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쳤다.
  • 1989년 창단 4년 만에 빙그레 이글스는 6할의 승률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 우승을 한다.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태평양 돌핀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이기고 올라왔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태평양을 잡았다. 88시즌에 이어 또 다시 빙그레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만났다. 1차전에서는 빙그레가 에이스 이상군의 호투와 이강돈의 홈런으로 승리했다. 2차전에서도 4대 2로 앞선 상황이었지만 유격수 장종훈이 공을 뒤로 빠뜨리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4대 4 동점, 이어 희생플라이까지 맞으며 역전패하고 만다. 결국 그 후 3경기를 모두 지면서 1승 4패로 두 번째 준우승을 기록하게 된다.
  • 1990년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2패를 당하여, 포스트 시즌을 마감했는데 주전 유격수 장종훈이 시즌 막판 어깨부상에 시달렸으며 이 탓인지 같은 해 시즌에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렸다가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져 준플레이오프 2패로 탈락했는데 장종훈은 1차전 대타로만 출전했으며 장종훈 외에도 이정훈 등 타자 쪽에서 부상 선수가 많았다. 정규리그 4위였던 삼성이 빙그레(3위), 해태(2위)를 연달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빙그레는 최종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 1991년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2위에 올랐다.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올라온 삼성 라이온즈와 플레이오프에서 만났다. 결과는 3승 1패로 빙그레 이글스가 한국 시리즈에 올라갔다. 한국시리즈에서 정규 시즌 우승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4번째로 만났다. 하지만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0승 4패로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 해 주전 유격수 황대연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연습 도중 허리를 다쳐 시즌을 마감해 내야수비에서 허점을 드러낸 것이 컸다.
  • 1992년 이 해 빙그레 이글스는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81승 2무 43패(승률 0.651)로 2위 해태와 10.5 경기차의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팀 홈런 146개를 기록하였으며, 신인 정민철은 14승(13선발승), 송진우는 19승(8구원승이 포함되어 있어 그 해 최다 선발승은 윤학길 이강철(이상 17선발승)에게 돌아감), 이상군도 10승(5선발승)을 했고, 팀의 주축 장종훈은 무려 41개의 홈런을 날렸다. 이정훈은 타율 0.360이라는 고타율을 기록하고 25개의 홈런을 날렸으며, 이강돈도 0.320의 타율과 13개의 홈런을 날렸다. 정규 시즌을 우승한 빙그레는 삼성과 해태를 꺾고 올라온 정규 시즌3위 롯데 자이언츠와 격돌했다. 이글스 팬들은 그동안 번번이 자신들의 앞을 가로 막았던 해태가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첫 우승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결과는 또 다시 1승 4패의 준우승이었고, 이로써 빙그레의 4번째 한국시리즈 도전도 실패로 끝났는데 전년도 주전 유격수였던 황대연이 1991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연습 도중 허리를 다쳐 시즌을 마감한 데다 같은 해 한국시리즈 종료 후에는 군 입대를 하여 내야수비가 갈수록 부실해져 정규시즌에서 132개 실책으로 최다실책 2위를 기록했고 이렇다 할 대형투수(15선발승이상)(당시 한국시리즈 진출 팀이었던 롯데가 15선발승 이상 투수를 2명 배출(윤학길 17선발승, 염종석 15선발승))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컸다. 특히, 전년도 16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을 기록한 한용덕이 그 해(1992년) 6승을 올린 후 5월 20일부터 1승도 없이ㅣ 8연패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보여 결국 9승(모두 선발) 11패로 마감해야 했고 급기야 다음 해(1993년)까지 2년 연속 9선발승(전년도와 같은 11패)에 그쳤으며 한용덕과 같은 대전 출신인 정민철도 같은해(1992년)시즌 중반 부상으로 결장하자 좌완 소방수 송진우가 전천후로 등판해야 했다.
  • 1993년 이 해 빙그레 이글스는 부진에 시달렸다. 주축 외야수 이정훈 선수가 부상을 당했고, 장종훈 선수도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었다. 베테랑 투수 한희민은 김영덕 감독과 갈등을 빚어 삼성 라이온즈로 박철희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었고 다른 투수들은 부진했다. 이 시즌 동안은 프로 2년 차를 맞이했던 투수 정민철이 13승을 거두며 홀로 고군분투했다. 1993년에는 좌완 투수 구대성 선수가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해이기도 했지만, 구대성은 기대와 달리 프로 데뷔 첫 해에 부진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 시즌 후 그 해 11월 1일 모그룹명을 팀으로 쓰기로 하고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을 바꾸었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도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 빙그레를 떠나게 되어 김영덕 감독의 퇴장과 함께 빙그레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다. 한편, 1989년부터 다이에 호크스의 가을 캠프에 유망주들을 보냈지만, 김영덕 감독과 달리 소위 '미국통'이었던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면서 일본과의 커넥션이 끊어지기도 했는데 역대 최고인 8연속 10선발승 이상(92~96년 13선발승 97년 14선발승 98년 10선발승 99년 17선발승)을 기록한 정민철과 포크볼의 황제 이상목, 고졸신인으로 들어와 아쉽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음에도 3할을 치며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박지상(이상 94년)을 끝으로 다이에 캠프보이들이 대가 끊겼다.
  • 1998년 강병철 감독이 성적 부진의 이유로 올스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7월 9일에 경질당했다. 강병철 감독은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한대화 감독과 김성근 감독과 더불어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경질된 감독이다. 북일고등학교 감독출신 수석코치 이희수가 감독 대항으로 남은 시즌을 치렀고, 시즌 후 정식 감독이 되었다.
  • 1999년 1999년부터 새로이 양대 리그가 출범함에 따라, 각 리그 1·2위 팀이 상대 리그의 1·2위와 교차로 플레이 오프로 치르게 되었다. 매직 리그 2위인 한화 이글스는 드림 리그 1위인 두산 베이스를 맞이하여 4전 전승으로 19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드림 리그 2위인 롯데 자이언츠는 매직 리그 1위인 삼성라이온즈와의 대결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그 해 외국인 타자 댄 로마이어와 제이 데이비스가 힘을 보탰으며, 로마이어는 그 해 45홈런을 기록했다. 정민철은 무려 18승을 기록했다. 모두 5차전을 벌인 결과 롯데 자이언츠를 4승 1패로 이기고 한화 이글스는 유일하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였다. MVP는 구대성으로 선정되었다.
  • 2000년 우승 다음 해인 2000년, 3할 타자 3명-20홈런 타자가 5명이나 되는 타선을 갖고도 시즌 7위로 추락했다. 이유는 투수진 운영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화 이글스의 약점은 불펜이었다. 1999년 18승을 기록한 에이스 정민철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진출에 이어 전 해 14승을 거둔 이상목이 부상으로 이탈했다. 시즌 후 이희수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했고, 다혈질의 댄 로마이어는 방출되었다. 시즌 후 구대성도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했다.
  • 2001년~2002년 감작스런 구대성의 공백에 한화는 2001년 내내 마무리 투수 부재에 시달렸고, 2002년에는 장종훈이 역대 최악의 성적(타율 .248/12홈런)을 기록하며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다. 2001년 5할이 안 되는 승률로 4위에 올랐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 해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 내야수 김태균이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2년 7위를 기록한 후 이광환 감독은 경질되었으며 후임으로는 이광환 감독이 2년 계약을 맺으면서 감독 부임할 당시 수석코치를 맡았던 사람이자 지역연고(대전) 출신인 윤동균 코치가 거론됐지만 감작스럽게 팀을 떠나 좌절됐고 이광환 감독의 LG감독 1기 시절 후임으로 발탁됐는데 유승안 감독은 이광환 감독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된 윤동균 전 코치의 OB감독 시절 후임 물망에 오른 백인천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경동고 MBC출신, 포수, 엽기적이면서 이상한 성격,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 점, 서북식 발성과 발음 등의 공통된 점을 가졌다.
  • 2003년~2004년 유승안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도 2003년 5위, 2004년 7위로 부진하였으며 유승안 감독은 의욕적으로 세대교체에 나선 것이 좋았으나 노장 선수들을 지나치게 외면하여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003년 시즌 후 프런트와의 마찰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외야수 송지만을 잃게 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잠실 두산전에서 3:0으로 뒤지고 있던 8회, 1사 만루의 위기, 타자는 외야수 최경화이었다. 안타 하나에도 2점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점수 차가 벌어지면 경기가 힘들어질 수 있겠다고 판단한 한화 이글스의 유승안 당시 감독은 무조건 내야 병살을 유도하기 위해 시프트를 지시하게 된다. 그에 따라 유승안 감독은 좌익수 이영우를 내야로 불러들이는 내야 5인 수비망을 펼친다. 땅볼만 나왔다면 병살로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좌측으로 날아가는 2타점 적시타였다. 이영우가 제 수비 위치에 있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지만 좌익수가 없는 바람에 1점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2점을 내주고 말았다. 이는 일명 유승안 시프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 2005년 김인식 감독의 부임 첫 해로 정규 시즌 4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준 플레이오프에서 SK와이번스와 맞붙어 3승 2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이스에 3전 전패를 당해 한국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 2007년 제이콥 크루즈와 세드릭 바워스를 영입하면서 정규 시즌 3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정규 시즌 4위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었다. 2승 1패로 삼성 라이온즈에게 2006년 한국시리즈 패배를 되갚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으나 2005년에 이어 3전 전패의 성적으로 또 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 2008년 외야수 덕 클락과 좌투수 브래드 토머스를 영입하고 시즌 중반까지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시즌 중반을 지나 주전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 베이징 올림픽의 후유증 등으로 인하여 정규 시즌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대신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핵심 투수 류현진이 병역을 해결한 게 다행이었고, 소집 해제로 돌아온 마정길이 새로운 셋업맨으로 부상했다.
  • 2009년 외야수 덕 클락이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고 넥센 히어로즈와 계약하여 이적했지만, 투수 브래드 토머스와 재계약하고 우투우타 외 야수인 빅터 디아즈를 영입하고 투타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디아즈의 떨어지는 수비력과 효율성 없는 타격 능력 등을 고려하여 시즌 도중 빅터 디아즈를 방출하고 투수 에릭 연지를 영입하여 남은 시즌을 소화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팀 내 최고의 타자 김태균이 4월까지 타율 4할을 넘기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4월 26일 두산 베어스의 포수 최승환과 홈 승부 도중 충돌하며 뇌진탕 증세를 보였고, 이후 페이스가 급락하며 팀의 타격을 책임지는 데 실패했다. 이 시즌에는 KIA 타이거즈에서 신종길을 상대로 한 트레이드로 영입한 외야수 강동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여러 악재로 인하여 정규시즌 8위를 기록함으로써 1986년 팀 창단 원년 일로 최초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된다. 한편 팀의 레전드 투수인 송진우와 정민철이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으며, 두선수의 배번인 21번과 23번은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 김인식 감독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물러났다. 시즌 후 내야수 이범호와 김태균이 FA를 선언하고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하였다.
  • 2010년 상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한대화가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의 후임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다. 리빌딩을 주 목표로 했던 2010년에는 호세 카페얀홀리오 데폴라라는 2명의 우완 투수를 용병으로 영입했다. 시즌 전 시범 경기 중 셋업맨 마정길이 며일영을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지만, 마일영은 부상으로 인해 이적 후에도 부진했다. 팀의 투수진을 책임지고 있던 송진우, 정민철 등의 베테랑 투수들이 2009년 시즌 중 은퇴하는 바람에 유원상, 김혁민 등의 신인급 투수들이 팀의 선발진을 급하게 맡게 되어 에이스 류현진을 제외한 투수진이 괴멸해 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강동우와 김태완 등 팀의 주전 타자들이 부진하여 성적이 암울한 전망을 나타내었으나 경찰청에서 제대한 우타 외야수 최진행이 새로운 다이너마이트 주포로 거듭남으로써 암울한 한화 구단에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 해 최진행은 이대호에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했다. 한대화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두산 베어스의 유격수 이대수를 투수 김창훈과 조규수의 2:1 트레이드로 영입하여 주전 유격수로 출전시켰고 같은 팀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내야수 정원석을 2루수로 영입했다. 넥센 히어로즈에서 2009년에 방출된 외야수 전근표도 팀에 합류했고 시즌 중 KIA 타이거즈의 1루수였던 장성호안영명, 김다원, 박성호와 3:3 트레이드해 이동현, 김경언과 함께 한화에 데려왔다. 그러나 장성호는 스프링 캠프 불참, 훈련 부족 및 부상 등의 이유로 형편없는 성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 중 이동현은 이듬해 시즌 중 방출당했고, 안영명은 이범호의 보상선수로 이듬해 복귀했다. 호세 카페얀은 시즌 초반 기대를 모았으나 잦은 야수 실책과 적은 득점 지원으로 인해 승리를 기록하지 못하고 11패에 그쳐 시즌 중 방출되어 좌완 투수 프랜시슬리 부에노를 시즌 중 영입하게 된다. 팀의 주포의 부재와 류현진을 제외한 투수진의 몰락으로 투타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2010년에도 2년 연속 최하위인 8위를 기록했다. 좌투수 박정진이 방출 직전에 한대화 감독에 의해 다시 중용되어 준수한 활약을 했다. 갑작스러운 팀 리빌딩을 이유로 시즌 후 몇몇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 FA를 선언한 포수 이도형과 투수 최영필과도 계약하지 않았다.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강타자 이영우는 부진 끝에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고, 마지막까지 레전드로 남았던 투수 구대성도 KBO를 떠났다.
  • 2011년 한화 이글스는 리빌딩의 핵심 주전 타자인 김태완, 송광민, 정현석 등이 병역을 이행하게 되어 전력이 더 약화되었다. 2010년에는 선수 관리에 심각한 구멍을 보이며 시즌 중 내야수 송광민이 현역 입대를 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 때 부상을 안고 있었던 송광민은 훈련소에서 귀가 조치를 받은 후 수술을 받아 시즌을 마감한 후 이듬해 재검을 받고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는 등 큰 진통을 겪었다. FA를 선언하여 일본 소프트뱅크로 이적했다가 2011년 국내 복귀를 타진했던 내야수 이범호를 KIA 타이거즈에 빼앗기게 되면서, 3루수 딜레마와 동시에 프런트의 무능력한 구단 운영으로 이글스 팬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2011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한화 이글스는 4월 승률이 3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악의 부진을 겪어 2011년 최하위를 예상한 게 맞아 떨어 지는 듯했다. 핵심 투수 류현진은 시즌 초 연패를 당해 크게 슬럼프에 빠졌고 이후 근육통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이에 코칭 스태프의 보직 변경이 있었고, 급기야 구단 운영진이 총 사퇴까지 이루어졌다. 외국인 투수 오넬리와 데폴라는 성적 부진으로 시즌 중 방출당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5월 12일 잠실 LG전에서 벌어진 조인성과 전현태의 홈 플레이트 충돌 사건 이후 한화는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이며 급격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투수진에선 김혁민, 양훈 등의 젊은 선발진이 각성했고, 전년도에 부활한 셋업맨 박정진이 뒷문을 맡아 무결점의 호투를 선보였으며, 프로 10년 차의 잊혀진 언더핸드 유망주 투수 신주영이 2군에서 올라와 평균 자책점 0점대의 호투를 이어갔다. 2010년 트레이드 이후 부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장성호 역시 부상에서 복귀하여 전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맹타를 선보이자 전체적인 타선의 집중력도 급상승, 5월 이후 팀 득점권 타율이 3할을 넘기며 상승세를 탔다. 결국 5월 이후의 한화는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끈기 있는 면모를 보이며 몇 차례의 기적적인 역전승을 포함, 5할여의 승률을 유지하며 순위를 6위까지 끌어올렸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대 이상의 리빌딩 솜씨를 보인 한대화 감독에게 "야왕(野王)'이라는 별명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또한 6월에는 데폴라를 보내고 2010년까지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외야수 카림 가르시아를 영입하여 장성호, 최진행, 가르시아로 이어지는 꽤 짜임새 있는 중심 타선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가르시아는 복귀 후 2번째 시리즈(대 KIA 타이거즈)전에서 2011년 6월 15일과 16일에 걸쳐 프로야구 통산 4번째 두 경기 연속 만루 홈런을 터뜨렸고, 팀은 14일 유격수 이대수의 만루 홈런을 더하여 3일 연속 만루 홈런이라는 KBO 리그 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기며 다이너마이트의 부활을 알렸다. 결정적일 때마다 패하여 하위권에서 맴돌았지만 새로 영입한 데니 바티스타와 카림 가르시아의 활약에 힘입어 LG 트위스와의 공동 6위를 기록함으로써 2년 만에 꼴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대수가 그 해 골든 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수상하여 다시 한 번 "연습생 신화"를 썼고, 장종훈 이후 21년 만에 빙그레 시절을 통틀어 한화에서 유격수 골든 글러브 부문을 배출했다. 그해 시즌 후 스토브 리그에서 FA를 선언한 셋업맨 송신영을 영입했고, 동일본 대지진과 허리 부상 등으로 일본 무대 적응에 실패한 내야수 김태균이 복귀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 리그 투수 박찬호는 계약금과 연봉을 전액 기부하면서 한화 이글스를 통해 한국프로야구 무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 2012년 2012년 한화 이글스는 김태균과 송신영, 박찬호를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또다시 최하위인 8위로 추락했다. 배스와 숀 헨은 기대 이하로 방출당했고, 많은 탈삼진에도 에이스 류현진이 타선의 빈타 속에 9승 9패로 부진했다. 올스타전을 반환점으로 한화는 달라지는 듯했으나 다시 후반기로 갈수록 하락세로 치달았다. 그 후로도 여러 팀을 상대하여 매우 처참한 성적을 보여 주었다. 결국 8월 28일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었다. 한용덕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고 그 후 한화 이글스는 나아진 경기 플레이를 보여 주는 듯했지만 얇은 선수층을 극복하지 못하며 시즌 최종 순위 8위로 마감했다.
  • 2013년 2012시즌 후 김응용 감독이 새로 선임되어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류현진이 포스팅에 입창하여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한용덕 감독대행은 사의를 표명한 이후 류현진이 이적한 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박찬호는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FA로 부진하였던 송신영은 NA 다이노스의 전력 보강 선수로 이적했다. 또한, 2012년 시즌 이후에 팀의 베테랑이었던 장성호와 롯데가 선발한 신인 투수 송창형을 트레이드했다. 시즌 후 김태완과 정현석이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했다. 김응용 감독 영입과 류현진을 포스팅을 통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시키면서 280억 원이라는 거금을 입수함에 따라 FA영입 등을 포함한 대대적인 리빌딩을 통한 김응용 체제가 기대되었으나, FA 영입에 완전히 실패함에 따라 초반부터 불안한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불안함은 2013년 시즌 초부터 바로 표면에 드러났다. 시즌 개막 후 13연패를 기록하여 KBO리그 한 시즌 개막 최다연패 신기록을 세우는 불명예를 얻었으며, 3할 이상을 회보하지 못하는 승률로 인해 일찌감치 4강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처했다. 2013년 8월 10일자로 팀 타율은 0.264로 리그 5위, 팀 장타율과 팀 총득점은 각각 0.347과 320점으로 리그 최하위에 위치하고 병살은 96개로 타 구단에 비해 월등히 높은 상황이다. 한편 팀 사사구는 434개로 두산(436개) 다음으로 많았으며, 방어율은 5.56으로 역시 리그 최하위를 달리고 있어 투타 양면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노출되었다. 또한 김응용 감독의 파격적인 선수 운용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다. 2013년 4월 12일부터 2013년 4월 14일 간의 LG 3연전에서 격일로 김혁민을 선발 투수로 기용하였으며, 송창식을 마무리로 활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등판시키거나 세이브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도 등판시켰다. 유창식의 경우, 4월 26일부터 5우러 4일까지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여섯 차례(4월 26일, 28일, 30일, 5월 1일, 3일, 4일) 등판시키는 등 일반적이지 않은 투수 운용으로 인해 팬들로부터 투수를 혹사시킨다는 지적이 있었다. 특히 유창식의 경우, 이 시기 이후에 2군으로 보낸 이후 복귀하지 않고 있어 혹사 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유창식의 경우와 같이 선발과 계투의 경계를 허물고 전날의 선발 투수를 계투로 기용하거나 전날 계투로 등판한 투수를 다음 날에 선발로 등판하는 등의 기용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한화 선발투수 가운데 유일하게 불펜을 겸하지 않은 투수는 바티스타뿐었지만, 바티스타마저도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구속이 떨어지는 데드 암 증상을 보이고 있어 투수 혹사로 인한 전력 약화 문제가 심해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결국 이브랜드와 바티스타는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다. 결국 시즌 최종 성적으로 신생팀인 NC 다이노스에게 밀리며 최하위이자 9개 구단으로 치러진 첫번째 시즌에서 KBO 리그 팀 사상 최초로 9위를 기록한 팀이 되었다.
  • 2014년 2013 시즌이 끝나자 FA 기간을 통해서 내부 3명(이대수, 한상훈, 방정진)과 계약에 성공하였고, KIA 타이거즈의 이용규와 SK 와이번스의 정근우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2차드래프트를 통해 이동걸, 이성진, 최윤석 선수를 영입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22일에 열린 2차 드래프트에서 이여상만 롯데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았고, 정근우의 FA 보상 선수를 지명하려던 SK 와이번스에서는 데려갈 만한 선수가 없다는 입장을 밝혀 여전히 한화 이글스에서는 얇은 선수층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시즌 최종 성적은 또 다시 최하위인 9위를 기록했고 최근 6년 동안 5번 최하위 성적을 기록하며 최악의 암흑기를 보냈다. 결국 2014년 시즌 종료 후 김응용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는 대신 한화 이글스 제10대 사령탑으로 김성근 감독을 선임했다.
  • 2015 2014 시즌이 끝나자 FA 기간을 통해서 내부 1명(김경언)과 외부 3명(권혁, 배영수, 송은범)과 계약에 성공하였고, 타팀에 방출된 8명(황선일, 권용관, 이주호(이하 LG 트윈스, 임경완 (SK 와이번스), 오윤 (넥센 히어로즈), 채기영, 정유철, 신정윤 (이하 고양 원더스)) 계약했다. 하지만 가을야구에는 참여받지 못했다. 최종순위는 6위다.
  • 2016년 2015 시즌이 끝나고 FA 기간을 통해서 내부 2명(김태균, 조인성)과 계약하였고, 외부 2명(심수창, 정우람)을 영입하였다. 최종순위는 7위이다.
  • 2017년 2017년 시즌 초반 부진한 팀 성적, 구단 프론트와의 불호 등의 이유로 2017년 5월 23일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고 잔여 경기는 이상군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최종 순위는 kt와 삼성을 제친 8위였고, 주요 선수들이 대부분 부상이 많았다. SK 와 KIA에서 영입되어 한화의 기둥이 된 정근우, 이용규의 FA 기간이 지났지만 두 선수 모두 부상이 많았고 그들의 2017년 경기 실적이 좋은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근우는 적은 기간과 금액으로 계약했다.
  • 2018년 2018년 두산 베어스에 코치로 있던 한용덕이 한화이글스 감독이 되었다. 모든 외국인 선수가 방출/영입되고 재러드 호잉제인슨 휠러, 키버스 샘슨이 10개 구단 중 외인 연봉의 합 최소 금액으로 영입되었다. 이들 중 제이슨 휠러는 성적 부진으로 방출되었고 그를 대신할 선수로 데이비드 헤일이 영입되었다. 시즌 전부터 하위권으로 분류가 되었고 초반에 부진을 면하기 어려웠지만, 5월 이후 순위가 급상승해, 최종적으로 두산, SK에 이어서 3위로 마감했다. 2007년 이후 11년 만에 가을야구(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되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넥센 히어로즈를 만나 1승 3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 2019년 2018년 외국인 투수 키버스 샘슨, 데이비드 헤일과 재계약하지 않고 새로운 외국인 투수 워릭 서폴드와 채드 벨을 영입했다. 지난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둔 제러드 호잉과는 재계약했다. 하지만 3월 17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를 앞두고 한용덕 감독은 이용규와의 불화로 육성군 행을 통보했다. 2019년 11월 23일 한화의 유망주였던 김성훈 선수가 실족사로 세상을 떠났다. 2019시즌을 9위로 마치며 다시 암흑기가 찾아왔다.
  • 2020년 2차 드래프트를 통하여 kt 이해창, 두산 정진호, 이현호를 영입해 포수와 외야수의 경쟁이 뜨거워졌다. 또, 롯데에서 방출된 김문호를 영입하고 트레이드를 통해 장시환을 영입했다. 그러나 시즌 14연패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시즌 최다 연패 기록을 갱신하는 등 시즌 초반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6월 7일 한용덕은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최원호 2군 감독이 감독 대행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쇄신에도 불구하고 이 연패를 끊지 못했으며 18연패까지 이어져, 삼미 슈퍼스타즈와 리그 최대 연패 타이를 기록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18연패를 1985년에 기록한 바 있다.

[1][2]

문제점[편집]

신인 육성, 인프라 개선 등 기본적인 투자 미비[편집]

가장 큰 문제점은 한화 이글스가 근 5~10년 동안 신인 육성, 인프라 개선 등 기본적인 투자가 너무 미비했다는 것이었다. 2004년~2009년 동안 다른 구단이 신인 드래프트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행사했던 것과 달리 한화 이글스의 경우에는 4~6명의 선수만 뽑고 패스했을 정도로 근시안적으로 팀을 운용했고, 그러다 보니 그 때 뽑은 선수들이 성장해 전력을 형성하고 있어야 할 현재 기본적인 전력조차도 없는 게 당연하다. 2005년~2007년 423 시절이 오히려 독이 된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얼마나 선수가 없는지 SK 와이번스는 정근우의 보상선수를 지명하지 않고 그냥 보상금만 받았을 지경이었다. 정병희, 윤규진, 신주영, 안영명 등 싹수가 보였던 쓸만한 신인들은 김인식 시절 혹사로 빠르게 전력에서 사라졌다. 특히 김인식 감독 초기에 혹사당한 정병희는 이제는 제대로 기억하는 팬들조차 없는 게 현실이며, 결국 FA로 풀린 김민재를 영입하면서 SK 와이번스에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이적한 뒤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2010년 말 SK에서 방출당했다. 혹사에서 재활의 반복을 거친 윤규진은 팬들에게 새가슴 의혹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방출생이나 타 팀의 잉여자원을 트레이드로 영입, 또는 외국 출신인 정원석, 강동우, 이대수, 박찬우를 데려와 1~2년 정도 잘 써먹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기 신인 선수 육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런 순수들은 나이가 있었던 탓에 언제 부진해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3]

신인 지명이나 관리의 엉망[편집]

신인 지명이나 관리도 엉망이었는데 기껏 뽑은 선수들은 방상규나 최우석, 김원석 같이 멘탈이 문제가 되는 선수들이 여럿 있었고, 신민기처럼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거나 최진호처럼 뺑소니 사고를 저질러 흑역사가 된 케이스도 있었다. 또한 김용주나 윤기호같이 자질이 모자라고 몸 상태에 문제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북일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지명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윤기호는 부상이 있는 걸 알면서도 북일고 출신이란 이유 하나로 전준우를 지명할 기회를 버리고 뽑았다. 김용주는 북일고 시절의 혹사도 있었고, 고교 야구에서도 한계가 빤히 보이는 선수였는데도 1지명으로 뽑았다.[3]

투수진 육성 실패[편집]

특히 투수진 육성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실패했는데, 김인식 시절에 신인 드래프트에서 야수 지명을 줄이고 투수만을 집중적으로 모았음에도 신발 투수의 경우 2007년 세드릭 바워스가 11승, 장민철이 12승과 2.90의 평균자책을 기록한 이후로 2008년 이후 유일하게 시즌 10승을 성공한 안영명이나 양훈, 김혁민 등이 한 시즌이나마 희망을 보여주나 했지만, 혹사 등으로 인해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면서 바로 원상 복구되기를 반복했다.[3]

불펜진 육성 실패[편집]

그렇다고 불펜진 육성은 성공했나 하면 그런 것도 아닌 것이 같은 기간 동안 한화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불펜 투수는 2010~2011시즌의 '노망주'박정진과 2012시즌 이후의 송창식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 저 둘 모두 기존의 자원을 어찌어찌 키운 수준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박정진은 나이 때문에 언제 부진해도 이상하지 않고, 송창식은 2013시즌의 혹사 후유증으로 2014시즌을 완전히 말아먹었다. 2016~2017년이 되고 기존의 송창식, 방정진, 삼성에서 사 온 권혁, 이동걸, 정대훈이나 심수창, 윤규진, 안영명등이 불펜으로서 뛰고 있지만, 이 들의 나이는 30대~40대의 베테랑으로 언제 퍼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다. 그나마 서산구장이 생긴 지금은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야수 지명을 줄여 부족해진 야수진을 타 팀 방출선수나 신고선수로 때웠지만 그것도 2009년 끝으로 한계에 이르렀고, 이 와중에 투수진조차도 붕괴되면서 결국 현재의 빈약한 팀 전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매 년 한 명씩을 지명한 포수진에서도 주전 포수 육성에 실패하면서 노장 신경현이 계속해서 포수 마스크를 써야 했을 정도였다. 멀리 보면 이 신인 육성의 문제점이 1990년대부터 보였는데, 실제로 한화가 1996년 홍원기, 이영우, 송지만, 임수민으로 대표되는 신인 4인방 이후부터 제대로 육성에 성공한 선수는 김태균, 이범호, 류현진, 최진행 정도에 불과하며, 특히 상위 순위로 지명해서 키워낸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 중에서 류현진, 김태균은 고졸 1년차부터 1군 리그를 폭격한 천재였고, 약빨인 최진행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남는 건 이범호 단 1명 뿐이다.[3]

군 입대 선수 관리 엉망[편집]

군 입대 선수 관리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타 구단의 경우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이후부터 신인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선수 육성에 힘쓰고 있었다. 보통 신인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일찌감치 병역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여 미래를 내다보기 마련인데, 한화의 경우에는 2년 연속으로 드래프트에서 4~6명의 선수만 뽑은 걸로도 모자라 김인식 시절부터 쓰지도 않을 유망주를 군대도 보내지 않고 2군에대가 썩혀놓으면서 기본적인 선수 군 복무 관리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가 2010년 송광민의 시즌 도중 현역 입대이다. 감독이 한대화, 김응용인 시기에는 이런 점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는 있다.[3]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과한 의존[편집]

팀 특성 상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이상군, 강석천, 이정훈, 이강돈, 한용덕, 장종훈, 송진우, 장민철, 구대성, 이영우, 신경현, 제이 데이비스와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굉장히 많았고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선수들이 1990년대 후반~2013년에 모두 은퇴를 선언하면서 전력에 균열이 생겼고, 가뜩이나 신인 육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과 프랜차이즈 스타의 은퇴가 겹쳐져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3]

감독 선임 문제[편집]

감독 선임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모습들이 드러났는데, 일단 김인식 시절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과 1번의 준우승을 달성했지만, 믿음의 야구, 재활 공장장 이미지에 가려진 무차별 투수 혹사와 노장 선호로 인하여 이미 주축 선수들의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던 한화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한대화 경질 이후 김응용 또한 2004년 이후 10년 가까운 현장 공백으로 인해 어제 등판한 투수를 다음날 선발투수로 등판시키는 등 1980~1990년대 야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고, 팬들의 성원 속에 취임한 김성근 역시 불펜 투수에게 100이닝 이상을 소화시키는 등의 혹사와 무리한 작전/팀 운용 등으로 최신 야구관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전히 팀의 평균 연령층이 높고 뒤늦은 리빌딩에 나서고 있는 한화와는 처음부터 전혀 맞지 않은 인물임을 증명했다.[3]

선수의 고령화[편집]

사실 한화가 암흑기가 시작되는 조짐은 이미 200년대 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2년 연속 우승을 노렸던 200년에는 정민철의 일본 진출로 인한 투수진의 붕괴로 인해 전체 7위에 그쳤고, 2001년에 잠깐 4강에 들기도 했지만, 승률은 겨우 4할 후반에 불과했고 당시 최하위였던 롯데 자이언츠와는 단 2경기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보통 같으면 이 무렵에 리빌딩에 착수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프런트에서는 당장의 성적만을 바라보며 내일이 없는 팀 운용을 감행했다. 그래도 2002~2004년에는 비록 가을야구 진출은 실패했지만 깔아주는 팀들이 있어서 그럭저럭 꼴찌만은 하지 않으며 적당히 중하위권에서 머물렀다. 이후 2005년부터 3년 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고 2006년 류현진의 포텐이 제대로 터지며 1번의 준우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주전 선수들의 고령화가 심각했고, 결국 이 선수들이 모두 은퇴하면서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3]

2012년까지 유일 2군 훈련장이 없던 구단[편집]

무엇보다 한화 이글스는 2012년까지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2군 전용 훈련장이 없었다. 친환경 구장이라고 까였던 KIA 타이거즈도 어쨌든 함평군에 2군 훈련장이 있었고, 심지어 당시 매년 선수 팔아서 운영하던 넥센 히어로즈조차도 연고지에서 머나먼 강진군이라 해도 자기네 2군 훈련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화 2군은 계룡대 연병장이나 인근의 대전고등학교 운동장을 전전하면서 연습을 했다. 다른 팀들은 전용구장에 웨이트 시설에 기숙사에 식당에 재활 센터까지 갖춰놓고 1년 내내 연습시킬 때 한화는 그때그때 남의 운동장을 빌려서 눈치보면서 연습하고, 심지어 구장을 못 구해서 퓨처스리그 경기가 연기되는 경우도 있었다. 설령 200년대 중반 패스했던 신인지명을 모두 행사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선수 육성이 된다면 그건 기적일 것이다. 비슷하게 암흑기를 헤매던 롯데 자이언츠가 2007년 상동야구장이 완공된 이후 유망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구단이 얼마나 투자에 미비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단, 한화도 조금은 할 말이 있었던 것이 2군 훈련장 건설이 늦어진 것은 대전 광역시 대덕구의 탓이 크다. 2007년 대덕구 덕암동에 2군 훈련장을 짓기로 양해 각서까지 체결해 놓고 행정 절차 핑계대며 무려 4년 넘게 질질 끌어 삽마저 못 뜬 것이다. 결국, 팀 성적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참다 못해 서산시에 짓겠다고 발표해 버리니 그제서야 대덕구는 양해각서까지 체결해놓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했다며 반박 보도 자료까지 돌렸다. 다행히 2012년 초 서산시 성연면 사산테크노밸리에 2군 훈련장 착공 계획이 수립되었고, 2012년 12월에 드디어 서산 야구장이 문을 열었다.

여담으로 대덕구 덕암동의 그 부지에는 2015년에 대전 시티즌의 클럽하우스와 연습장이 들어섰다.[3]

전문성이 떨어지는 선수 출신 코치[편집]

몸 상태, 기량 미달 선수임에도 북일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명하는 것과 같이 선수 시절 이름을 날렸거나 프랜차이즈 출신 선수들을 대우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연수도 없이 코치진에 무혈 입성한 이상군, 송진우, 조경택, 정민철 등 능력 없는 코치들 때문에 제대로 된 선수 육성이 이뤄지지 않은 부분도 문제를 키웠다. 대표적으로 정민철은 투수 기용, 교체 타이밍 등에서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이상군은 투수 코치로 있으면서 선수들의 구위, 제구, 투수폼 등을 망가뜨리고, 용병 스카우터로도로 배스나 션 헨 같은 수준 미달 용병을 데려와 무능력함을 증명했다. 송신영의 FA영입은 또한 그렇다. 조경택 또한 배터리 코치로는 무능력해서 명포수라는 반어법이 등장할 정도였으며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외에도 타이거즈 출신 등 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외부에서 수혈한 코치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3]

수비능력 0[편집]

신인 드래프트의 실패와 무능력한 코치진의 시너지가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게 바로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였다. 매년 마무리 훈련과 스프링캠프에서 지옥 훈련을 한다고 하는데 시즌 초에 보면 오히려 퇴보해 있고, 시즌 말 즈음 가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싶다가 다음 해에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희망고문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3]

드래프트 시스템에 피해자[편집]

2011년부터 신생팀 NC 다이노스, kt wiz가 창단하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꼴지하고도 전체 1순위로 신인을 지명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고 있는데, 그렇게 북일 팜의 윤형배, 류희운, 청주고의 주권을 NC, KT가 지명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또한 LG 트윈스가 2008 드래프트에서 대학진학이 예정된 나성범을 쓸데없이 지명하는 바람에 2012 드래프트에서 대졸 최대어 나성범을 1라운드 1픽에서 뽑을 수 없었고 결국 2라운드 1픽으로 NC에 빼앗겼다. 강승호나 심재윤 등 북일팜 야수들을 LG 트윈스에 뺏기고 나서 지명한 야수들 중 조정원이나 한승택 등을 빼면 1군 경험이 없으며 그나마 한승택은 경찰청 입대를 앞두고 KIA 타이거즈에 FA 보상선수로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저정원 역시 김성근이 제대하는 하주석, 오석진을 써먹겠다고 고집을 부린 탓에 경찰청이나 상무는 못가고, 현역으로 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ㄹ자 드래프트의 피해를 보았다는 평이 많다. 보통 드래프트는 상위 픽의 가치가 하위픽의 가치보다 훨씬 높은데, 대부분 아마야구풀은 강백호급의 특급 인재가 나오지 않는 한 상위 20번의 픽 중 1번, 20번을 받는 최하위 팀이 10번, 11번을 받는 우승팀에 비해 큰 메리트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 드래프트에서도 제주도 + 대졸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신인 지명에서도 문제를 드러냈다. 이것은 한일 월드컵 특수로 인해 당시 체육계 유망주들이 전부 축구로 몰려가 버린 탓에 특급 신인이 씨가 마른 상황에서 현재의 하위권 팀들은 치고 올라가는 데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3]

용병 선정 실패[편집]

용벙 선정(특히 특수용병)에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 된 이후로 타자용병에선 재미를 많이 봤지만 투수 쪽에선 영 꽝이였다. 한화 역사상 10승 이상 혹은 30세이브 이상을 거둔 투수용병이 키버스 샘슨(13승), 세드릭 바워스(11승)와 미치탈보트(10승), 알렉시 오간도(10승), 브래드 토마스(31세이브),워윅 서폴드(12승,10승), 채드벨(11승)정도밖에 없을 정도이다.[3]

미래를 보지 않는 팬과 회장[편집]

팬과 회장도 문제인데 리빌딩을 하려고만 하면 성적이 안 나온다고 온갖 비난을 해대고 야구계 사정에 잘 모르는 기업인인 김승연 회장이 여론만 듣고 마음대로 해대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레전드 트레이드 하지말라고 전화로 훼방 놓고 결국 돈먹는 잉여가 돼버린 사건은 유명하다. 가장 최근 사건이 김성근 감독 영입건인데 프런트의 의견은 무시하고 김성근 사단을 어마어마한 거액을 주고 앉혀왔는데 당연히 김성근은 30년간 해왔던 보인스타일대로 하고 한화는 그걸 버틸 팀이 아니었다. 리빌딩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팀에 단기적으로는 강한 듯 보이나 장기적으로 팀 뎁스를 아예 때려부수는 자칭 야신을 명장이랍시고 앉히고 절대 권한을 쥐어주었다.[3]

평균 연령대가 높은 선수진[편집]

2016년 9월 기준 한화 선수진의 평균 나이는 31세다. 그나마 주목받은 젊은 선수는 양성우, 하주석, 이태양, 김민우, 김재영 정도로 아예 없지는 않지만, 양성우와 하주석은 최진행의 부상과 권용관 등 내야진의 부진이 아니었다면 올라와 보지도 못했을 선수들이고, 둘 다 군대에서 몸을 만들어 온 것이지 김성근이 딱히 뭘 해준 것은 없다. 이태양은 김응용이 밥 지어 먹이며 키운 걸 2015년 김성근의 과도한 훈련으로 토미존 수술을 받아 시즌 아웃된 바로 다음 해에 재활 등판의 명목으로 올렸음에도 겨우겨우 잘 던져주는 것이고, 불펜 알바를 간혹 할 때마다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한화의 10년을 책임질 수 있었을 김민우는 안 그래도 두 번의 수술과 부상 위험이 큰 투구 폼과 구종을 가진 선수임에도 작년부터 보직없이 굴려지고 특투와 투구 폼 교정을 받다가 '우완 류현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어깨 관절와순 손상으로 고인이 되어벌렸다. 시범경기에서 4경기 15이닝 ERA 0.60의 무시무시한 피칭을 보여준 대졸신인 사이드암 투수 김재영은 잦은 퀵후크와 보직 변동으로 본래의 구위와 제구력을 잃고 2군에 주로 머물렀으며, 여러 차례 병살타를 유도하는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점수 차가 7~10점 정도로 크게 벌어지지 않으면 나오지조차 못하고 있다. 17시즌 김성근 감독이 자진사퇴 형식으로 경질되고, 이상군 대행에 의해 김재영이 선발로 제대로 된 기회를 받기 시작했고, 노장 선수들을 연달아 웨이버 공시 형태로 방출시키며 그 빈자리를 신인급 투수, 야수들을 정식 선수로 등록하거나 1군 무대에 올리는 등 리빌딩이라고 할만한 작업 시작되었다. 이 중 그나마 가능성을 보여준 건 후반기 5연속 QS를 기록한 김재영 정도이다. 18시즌 이정훈 스카우터의 주도 하에 신인 드래프트에선 즉전감 대졸 선수를 아예 뽑지 않고 10명을 모두 고졸 선수로만 채우는 등 연령대 감소에 힘쓰고 있다.[3]

역대 드래프트[편집]

~2000년대 중반[편집]

대전팜은 북일고, 대전고, 공주고, 청주고, 세공고 정도밖에 없어서 숫적으로 크게 열세였으며 질적으로도 북일고를 제외하면 나머지 팜들도 그저 그런 수준이었기에 고졸우선지명과 연고지역 1차 지명 제도를 폐지하는데 앞장선 구단이며 결국 고졸우선지명은 1999년 지명을 마지막으로 폐지하고 연고 1차 지명도 2009년 드래프트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가 부활했지만 22년부터 다시 폐지가 예정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고졸 우선지명과 1차지명이 폐지된 그 해에 한화의 팜 내부지역에서 그 해의 최대어가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고졸우선지명의 경우에는 조규수, 마일영이 배출되었고 한화의 스카우트진들은 고뇌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화는 조규수를 택했다. 재미있는 건 이 조규수는 2010년 두산에 트레이드 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일영을 트레이드로 영입해서 결국 두 선수 모두 한화에 몸을 담아보게 되었다. 1차지명의 경우에는 2010년에 연고 고교인 천안북일고에서 신정락이 배출되었는데(고교 졸업은 2006년) 2010년 신인지명부터 1차지명이 폐지되었기에 전체 1번으로 LG 트위스가 신정락을 지명했고 한화는 라운드 4번으로 북일고 투수 김용주를 지명하였다. 22년도 역시 북일고의 1학년들 중 투수 최대어이자 프로야구 역사에서도 손꼽힐 수준의 투수 유망주로 기대되는 심준석의 뒤에 지명받을만한 타자 최대어인 양재호가 있어, 심준석이 메이저로 직행하고 한화가 혹여나 꼴찌를 하지 않으면 역사가 반복될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팜에서 특이점으로는 북일고가 팜 내에 좋은 선수가 없다는 1차적인 이유에 한화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라는 정치적인 이유까지 겹쳐 북일고 선수가 지명되는 선수가 많다는 점이다. 2010년에 들어서 이러한 현상이 더 심화돼서 1차지명 부활 후 비 북일출신 1차지명이 청주고 출신 황영국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에 비해 이상군, 김태균, 안영명, 유원상 정도를 제외하면 꾸준히 픽한 북일고에서 배출해낸 주전급 선수가 그다지 없기에 반발도 많다. 이 때문에 빙그레 시절부터 북일파와 비북일파(대전고, 공주고, 세광고, 청주고(청주기공고)등) 간의 갈등이 팀 내에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에 대해 애초에 근거가 빈약하다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과거의 신인 픽의 방침은 유난히 선수가 가진 하드웨어에 집중하여 뽑는 경향이 강했으며 조금이라도 애매하면 무조건 덩치를 보고 픽하고 했다. 제일 대표적인 케이스가 오승환을 거르고 뽑았던 양훈이다. 투수진은 물론이고 야수진도 대체로 덩치있는 선수를 우선적으로 봤는데 이 덕분에 덩치가 있기 좋은 코너 포지션의 거포 유망주는 항상 쌓아놓고 있었고, 10년대 후반 들어 팀 타선이 심각하게 막장화가 되기 이전까지 팀 내 주포역할을 해줄 장타능력을 갖춘 타자는 항상 한 명씩은 데리고 있었다. 19시즌 이전 최악의 시즌이었던 2010년 시즌에도 최진행이 타자진에서 버티고 있었을 정도이다. 반대로 야구 센스와 스킬을 장기로 삼는 선수는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 때문에 테이블 세터가 될 만한 타자와 사이즈가 작아야 하는 내야 센터 라인의 선수들은 꾸준히 기근을 겪었다. 99년대 후반부터 장기간 1번타자로 뛰었던 이영우조차도 작은체구는 아니었다. 이영우가 군 입대 후 커리어가 꺾인 뒤 강동우가 이 자리를 메꾸다가 결국 2013년 시즌 이후 정근우, 이용규를 FA로 영입하면서 메꿨다. 이상할 정도로 포수 지원을 수집하는 경향도 있다. 정범모, 한승택, 이준수, 이희근, 박노민, 엄태용 등이 있다. 그러나 지명 빈도와 투자에 비하면 육성능력 부족으로 결과물은 그저 그랬고 결국 포수도 트레이드로 틈을 메꿨다.[2]

2004년~2009년[편집]

04년 이후 09시즌까지 신인 픽을 굉장히 허술하게 했으며 한화이글스의 가장 큰 몰락 원인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신인 드래프트를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04년에 한화는 야구단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기 위하여 여러 방법을 사용했는데, 신인 드래프트에서 뽑은 선수를 줄이는 게 그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04년 5명 지명을 시작으로 하위 지명에서 대학에 진학이 결정된 선수를 뽑는 등 정식 계약을 해야 하는 선수의 숫자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육성능력 부족이 겹치면서 몰락의 시작이 됐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지역 안배를 해준다고 지역출신에 실링이 떨어지는 선수들을 뽑았다가 역시나 별 성과를 못 내고 은퇴하는 것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첫 번째 실책은 김인식 감독의 재임 기간이다. 혹사로 매년 필승계투 한두 명을 갈아먹으면서 시즌을 보냈던 시절 그 갈아먹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투수픽에 픽을 집중했다는 것이다. 2006년 드래프트에는 1차 포함 상위 6명 중 4지명 정범모를 제외하면 4명이 투수였으며 2007년은 1차 포함 상위 7명 중 4명을, 2008년 6명 중 4명이었다. 이러한 발픽의 최고 절정은 2009년 지명이었다. 이 해에 7명 중 5명이 투수, 대졸로 상위를 다 채우는 노골적인 즉전감 불펜 수집을 시도한 것이다. 프로야구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00년대 이후로는 대졸 선수는 고교 때 프로 진출에 실패하거나 하위 지명을 받은 선수들이 차선책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강해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전부 프로에 와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화는 아예 작정하고 고졸로만 채워버린 것이다. 게다가 하위지명에서는 포텐을 보고 선수들을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픽을 포기해버렸다. 결국 장기간 1군에서 살아남은 선수는 고졸 장민재였다는 것을 보면 이 시기의 근시안적인 픽이 얼마나 팀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해였다. 근본적으로 근시안적으로 뽑기도 했지만, 육성 팥에서도 장기간 투수를 집중적으로 모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투수를 키워내는데 실패했다. 김혁민이나 유원상, 허유강과 황재규 등 짧은 기간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들도 존재하긴 했으나 몇몇은 가능성만 보여줬고 몇몇은 재활의 신이라고 불리는 김인식 감독에 의해 재활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이런 투수들도 몇 되지 않았고, 최진호나 윤기호, 구본범처럼 아주 2군에서 버로우를 해버린 케이스가 더 많았다. 이시기에 야수쪽에 픽을 많이 쓰지도 않았는데, 그나마도 정범모, 최연오, 이희근 등 포수에 집중하면서 픽을 했다. 1차 지명인 박상규와 김희성, 그리고 2차 지명자인 오선진과 김강 전부 포함해 단 4명만이 김인식 감독 기간에 상위에서 제대로 픽한 야수자원이었다. 박상규와 김희성이 붕괴한 지역 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픽한 자원임을 고려하면 정말로 제대로 상위에서 지명한 야수는 김강과 오선진 단 두 사람인 뿐었다. 하위 픽을 한 선수도 몇 명 없었으며 당연히 오래 못가 방출되었다. 이 이외의 자원은 신고선수나 영입선수로 때웠다. 이렇게 굉장히 투수에 치우친 지명을 몇 년간 이어간 결과 당연히 신인 야수에서 새롭게 나오는 자원이 증발해버렸으며 결국 야수 부족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2010년 시즌 중에 2군에서 몇 명의 야수가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지자 경기에 나갈 야수가 부족한 처참한 상태를 맞이하게 됐다.[2]

2010년~현재[편집]

한화 프런트는 2010년에 들어서야 문제점을 인식하고 허둥지둥 드래프트의 방향성을 수정하게 된다. 10드래프트에서 상위 지명으로 2지명 김재우를 지명하고 4지명 이상훈을 데려오면서 그동안 픽이 없었던 중견 자원을 픽했으며 야수자원이 대폭 모자르게 되자 이러한 경향을 버리고 10명을 꽉 채워서 지명한 뒤에 모두 계약했다. 또한, 야수자원의 픽도 상당히 많았는데 2011년에는 포수 나성용, 유격수 강경학, 1루수 김용호, 외야수 임신호와 오준혁에 투수로 픽했지만 이후 외야수로 키울 예정인 문재현까지 총 6명의 야수를 뽑았지만, 트레이드 된 오준혁이나 잦은 부상으로 재능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강경학을 제외하면 전부 그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은퇴하였다. 2012년에는 아예 전체 1픽을 최대어 신일고 내야수 하주석에 사용하면서 드래프트 역사상 최초 야수 1순위 지명을 사용했다. 이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그동안의 떡대와 하드웨어를 보고 픽하는 경향을 버리고 야구센스와 스킬을 장기로 삼는 선수들을 픽했다. 양성우 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10지명에서 1차 지명으로 라이트팬 조차도 프로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 평가받던 북일고의 에이스 김용주를 1지명하는 등 지역 안배를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임기영, 이태양, 오준혁 등 재능있는 선수들을 한 해에 하나 둘 씩은 찾아내곤 했다. 이렇게 오랜 드래프트에서의 삽질을 마무리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운도 한화의 편이 아니였다. 하필 팀이 최악의 암흑기를 겪고 있던 그 때 신생팀들이 창단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기에 언급된 하주석도 NC가 우선지명으로 두 명의 선수를 데려가고 남은 선수였고, 1년뒤에는 지역고교인 북일고의 에이스이자 전국구 에이스인 윤형배를 지명할 수 있는 기회가 NC 다이노스의 우선지명으로 인해 날아갔고 1차지명 제도가 부활한 첫 해인 2013년 6월 발표된 10번째 구단 kt wiz의 우선 지명 선수 두 명 중에서도 당초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북일고 류희운이 예상을 깨고 포함되며 한화이글스는 멘붕했다. 충청팜에서 1차로 지명할 만한 선수가 류희운뿐이었다. 이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2014년에도 kt wiz가 우선지명으로 청주고 투수이자 조선족이라 군 면제가 기존으로 장착되어 있는 주권을 지명하여 또 다시 연고지 최대어를 뺏겼다. 그나마 북일고 김범수가 있어 2013년 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2년 연속 연고지 탑급 유망주를 뺏겼으니 한화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2009년부터 팀 성적이 바닥을 기고 있는데 연이은 신생팀 창단으로 인해 한화가 온전히 1라운드 1픽을 행사한 적은 유창식 단 한 번 뿐이다. 게다가 김응룡, 김성근 감독 시기에 한 해에 한두명씩 주었던 유망한 어린 선수들이 이 시기에 다수 유출되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건 각 감독의 항목으로 넘기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출들이 10년대 후반과 20년대 초반 타선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추가로 하필 김원석같이 재능은 보였으나 사고를 치고은퇴한 선수들이 있었다는 점도 불운 중 하나였다. 원인이 뭐였던 간에 10년대 초반의 픽은 결과적으로 몇년에 걸쳐 실패를 겪었고, 이 시기에 배출한 주전은 하주석과 이태양 단 두명이며 이태양은 18년 이후로 하락세 후 트레이드, 하주석도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그나마 오랜기간 2군에서 육성자원으로 분류되면서 팀에 잔류하고 있던 어린 투수들이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 점이 위안거리였다. 2004년~2009년, 2010년~2015년까지의 두 시기에 이어 세 번째 시기는 김민우 김범수라는 두 선발 유망주를 동시에 배출해낸 15드래프트를 시작으로 16시즌 이후라고 볼 수 있다. 15시즌만 하더라도 지역안배를 위주로 드래프트를 했으나 이 이후로는 기존 드랩 기조를 완전히 버렸다. 지역안배를 완전히 버렸으며 투수진도 하드웨어와 제구를 중점으로 보던 것에서 벗어나 구위를 위주로 보고 있으며, 야수의 경우에는 매년 특정 포지션의 선수를 보강하는 식으로 픽하고 있다. 이 이후의 신인 픽들은 전처럼 발픽은 절대로 아니고, 아직 온전히 결과가 나올 정도로 지나지는 않았으나 조금씩 결과가 나오고 있다. 투수 쪽의 경우 충분히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꾸준히 한두명씩 패전처리라도 할만한 선수를 뽑아내면서도 픽도 꾸준히 평타를 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육성 시스템도 마침 제대로 잡히기 시작하여 투수진이 무너진 2009년 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된 투수층이 생기고 있다. 특히 2018년도 리그 정상급 불펜이었던 박상원을 제외하면 정상급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는 없으나 고만고만하게 1군에서 버텨줄만한 선수들은 정말 오랜만에 다수 보유하게 되었으며, 돌아가면서 필승조 역할을 하고 있다. 대다수가 어린 투수들이라 성장이 기대되는 점이 안심되었다. 야수진은 아직도 애매하다. 18년대 역대 한화 내야 센터라인 신인 중 가장 좋은 페이스로 선수 커리어를 시작한 정은원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며 기대치가 있어 보이는 선수들은 전부 큰 결점을 보이면서 1군에 적응하는데 실패했으며, 특히 장타력이 있는 타자를 단 한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렇게 야수들을 배출해내지 못한 것이 20시즌 야수진 대붕괴의 원인이다. 이 때문에 18시즌 정도부터 전조가 보이기 시작하자 과감하게 상위 드래프트권을 전부 야수에 몰방한 19드래프트를 시작으로 장타력을 갖춘 야수들의 수집에 들어갔다.

최종적인 결과는 좀 더 시간을 보고 지켜봐야 하지만, 일단은 육성쪽으로 공을 넘길 정도의 성과는 내는 중이다.[2]

응원단[편집]

응원단장[편집]

  • 홍창화
한화이글스의 응원단장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서울 쪽을 다녔고 중/고등학교는 안양시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2006년부터 2년간 한화 이글스 응원단장을 역임했다가 2008년 SK와이번스 응원단장이 되었다가 시즌이 끝나고 후임 한화 응원단장이었던 박홍구와 자리를 바꿔 한화이글스로 돌아왔다. 시즌 중에는 남자배구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여자배구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크 응원단장을 맡고 있다. 2013~14시즌에는 오랜만에 남자 농구로 돌아와 부산 kt 소닉붐의 응원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원주 동부 프로미를 거쳐 현재 안양 KGC 인심공사 응원단장을 맡고 있으며, 2021년부터는 한화와 같은 연고지인 대전 하나 시티즌 응원단장까지 맡으면서 축구 응원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대전 두 개의 춘계 스포츠팀 응원단장을 맡게 되었다.[4]

치어리더[편집]

  • 김해리
걸그룹 립버블의 전 멤버이며 현재는 치어리더로 활동 중이다. 충남 서천이 고향이고 고등학교는 화성에서 졸업했다. 립버블 싱글 2집 활동부터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탈퇴했다. 당시 활동명은 엘라였으며, 립버블을 탈퇴한 이후부터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걸그룹의 험난한 벽을 느꼈고, 우울증이 와서 몇 달 동안 집에만 있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언니(유하영 치어리더)가 김리나 단장을 소개해 줬고, 경기장에 초대를 해줬다고 한다. 당시 배구 경기가 열렸던 장충체육관을 갔는데, 치어리더들이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에 반해버렸고 치어리더 오디션을 바로 봐서 당당하게 통과했다. 현재는 립버블에서 멤버로 있던 리아와 같이 트윙클 치어리더팀에 속해 있다. 2020년에는 KIA 타이거즈와 전남 드래곤즈를 응원했고, 2021년에는 한화 이글스와 FC안양을 응원하게 되었다.[5]
  • 김유나
2013년 고2 시절 프로농구 창원 LG 세이커스의 홈구장 창원체육관에서 '여고생 치어리더'공연이 펼쳐졌고 그 자리에서 김유나의 재능을 알아본 선배 김연정 치어리더는 이후에 김유나의 고향팀인 NC 다이노스 구단에 추천을 했고 2014년부터 마산 야구장에 등장하며 치어리더로 데뷔했다. 2016년~2017 겨울 시즌에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배구에서 주로 활약했지만, 부산 KT 소닉붐에서 잠시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비록 2017년 선배였던 김연정 치어리더가 갑작스럽게 한화 이글스로 전격 복귀를 했지만 고향이자 친정인 NC 다이노스를 1년 더 맡은 뒤 고향이자 연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2108년에는 김연정 치어리더가 응원하고 있는 축구팀인 울산 현대에서 활약을 통해 치어리더를 계속해서 활약을 하면서 Mr&Ms 창원 스포츠모델 1위에 선정되었다. 2019년부터 김연정 치어리더가 맡고있는 한화 이글스의 응원단으로 활약을 하게 되면서 한화 팬들에게도 비타민이라는 긍정적인 평을 얻었다. 2109~2020시즌에는 3년 전 잠시 얼굴을 보였던 부산 KT 소닉붐에서 풀타임으로 활약을 했고 부산이 연고지만 창원에도 제2연고지가 있는 여자프로눙구팀인 부산 BNK썸에서도 예 창원 마산 팬들에게 응원을 하면서 축구, 농구, 배구에서도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귀여운 매력'이 대표하는 수식어 중 하나다. 앳된 얼굴로 응원의 흥을 돋우지만 프로다운 매력 또한 있는 치어리더로 팬들에게 매너가 좋은 평으로 알려졌다.[6]
  • 김연정
같은 고향 출신인 박기량과 더불어 대한민국 치어리더계의 양대 산맥으로 여겨진다. 치어리더 10년 이상을 활약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 인기 치어리더 중 하나다. 2008년 겨울 시즌부터 데뷔하면서 2009년 한화 이글스와 2009~2010 부산 kt 소닉붐에서 본격적인 치어리딩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김연정은 에스컴과 잠시 결별했다. 이 후 데뷔 동기였던 박기량이 팀장으로 있는 소속사 RS COMPANY에 들어가게 되었고, 2012년 시즌에는 롯데 자이언츠 치어리더로 활동하며 박기량과 함께 '경성대 전지현', '롯데 여신'으로 이름을 알리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의 몸값만 1억이 넘었고, 응원단상석 앞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동이 나는 등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고 방송도 여러 번 타게 되었다. 야구 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창원 LG 세이커스 치어리더로 4년 만에 돌아와 함께 활동하며 신화방송에도 출연하였고, 신혜성에게 애교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김연정은 다시 박기량과 결별하게 된다. 2013년 시즌부터는 신생 구단인 NC 다이노스 치어리더로 들어가게 되었고, 에스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농구를 제외한 그 후에도 역시 여러 방송과 매체와의 인터뷰를 자주 가졌고, NC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야구 치어리더 인기 투표를 하면 꼭 상위권을 차지하는 강자이지만 박기량에게 밀려 1위는 못 하고 3년째 2위만 한다. 2014년부터는 은퇴한 이미경의 뒤를 이어 치어리더 팀장을 맡고 있다. 2015년 6월 25일 드디어 라디오스타까지 진출했다. 2015~2016 시즌에는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떠나게 되면서 농구 응원을 하지 않았지만 2016~2017 시즌에는 2010~2011 시즌 정규리그 우승 이후 오랜만에 고향의 농구팀인 부산 KT 소닉붐에서 다시 농구 응원을 하게 되다가 2017~2018 시즌에는 박기량 치어리더팀이 kt를 맡게 되면서 농구 응원을 하지 않게 된다. 2016~2017 시즌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에서 치어리더 생활 첫 우승을 경험했다. 2017년 김연정은 6년만에 한화 이글스 치어리더로 복귀했다. 팀장급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확정이었다. 하지만 이나경 등 기존 치어리더 들이 타팀으로 이적하게 되면서 한화 이글스 치어리더의 대격변이 일어났다. 또한 NC 다이노스에는 인천 전재랜드 엘리펀츠의 치어리더 팀이 오게 되었다.(NC 다이노스는 김연정 치어리의 결별 이후 그 해 평균관중과 창단 첫 최하위 때 급속도로 줄어들었짐나 한화 이글스는 2015시즌부터 한 시즌 최다 60만 관중의 신기록을 넘어 김연정 치어리더의 전격 복귀 이후 2018시즌 11년만의 포스트 시즌 진출 소위 가을야구 때 팀 창단 쵤초 70만 관중 돌파의 신기록을 작성하며 KBO 대표 인기구단임을 증명한다) 한화로 이적한 이후 NC 팬들은 당연히 아쉬워했지만 한화 팬들은 자신들의 간판스타였던 김연정이 돌아와 기쁘다는 반응이다. 2017~2018 시즌부터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치어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2019~2020 시즌에는 여자프로농구 6번째 팀이자 사상 첫 부산~경남 연고지로 새로 창단한 부산 BNK썸의 초대 치어리더로 활약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2016~2017시즌 이후 3년 만에 자신을 만들어주었던 부산 kt 소닉붐의 치어리더로 복귀했다. 이로써 치어리더로는 사상 처음으로 부산 남녀프로농구단을 모두 맡은 치어리더로 또 성장하게 되었다. 2020년에는 아프리카 채널과 심지어는 스포츠인들도 개설하고 있는 유튜브인 일명 유튜버로서 팀 동료 후배들과 소통방송을 여는 모습까지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다. 자신도 소통을 강조하는 스타일이고 팬들에게도 이 부분은 변함이 없는 편이다.[7]
  • 박소영
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충청남도 당진에서 5살때까지 거주했다. 한양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2020년에 전남 드래곤즈에서 활동했으며 2020년부터 안양 KGC 인삼공사 와 2021년부터 한화이글스, FC안양에서 활동하고 있다.[8]
  • 박재령
부산 출신으로 2017~2018 시즌 배구에서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에서 본격적으로 치어리딩을 시작했다. 2018 시즌 울산 현대 축구부터 준비를 했고 2019시즌부터 한화 이글스의 치어리더로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2018 시즌 한화 이글스 야구의 시범경기 출정식에서 잠깐 활약을 하기도 했다. 2019~2020 시즌에는 농구에서 3년 전 잠시 데뷔무대를 가졌던 고향의 농구팀인 부산 kt 소닉붐에서 풀타임으로 활약을 하기도 했고 산업은행 여자농구단을 인수하여 새로 창단한 고향의 여자 농구팀인 부산 BNK썸에서도 같이 활약을 하며 대선배인 김연정 치어리더와 함께 고향인 부산 연고 남녀 프로농구단을 모두 응원을 했다. 2020 시즌에는 한화 이글스에서 2년 연속을 이어가고 있고 울산 현대 축구 또한 경기 일정상 응원전을 이어가고 있다.[9]
  • 이소림
대전 출신으로 현재는 충청북도에 거주하고 있다. 2003년생으로 야구 응원단 치어리더 중에서 최연소이다. 2019년부터 인천 흥국생명에서 활동했으며 2020년부터 안산 OK금용그룹에서 활동하다 2021년부터 한화 이글스와 대구FC에서 활동하고 있다.[10]
  • 서유리
다른 치어리더보다 훨씬 에너지가 넘치며, 인터넷상에서 또한 최고의 흥신으로도 유명한 치어리더이다. 2015년에 데뷔했으며 2016년 고향인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 출신으로 치어리더를 시작했다. 이후 2년뒤 한화 이글스 응원단의 치어리더로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당시 막내인 조연주 치어리더와 함께 뉴페이스였는데 이은지 치어리더가 사정상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응원을 잘하면서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 박수를 받게 된다. 2018년부터 고향인 축구팀인 대구FC를 응원하면서 흥행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더니 이해 창단 첫 FA컵 우승을 하게 된다. 2018~2019 시즌부터 현대 캐피탈 스카이워커스와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배구로 실내종목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2019~2020 시즌에는 처음으로 과거 대구 오리온스가 대구에 있었는데 과거 2011년 충격적인 고양이라는 연고 이전으로 인해 김연정 치어리더의 고향인 부산 kt소닉붐과 부산 BNK 썸 농구에서도 활약을 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2020년에는 대구 FC의 랜선 응원과 한화 이글스에 대한 응원을 이어가기도 했다. 2020~2021 겨울 시즌에는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그 와중에 부산 kt 소닉붐 응원시절의 한 농구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농구에 대한 흥을 고백했다. 대신 본인의 아프리카tv 개인방송과 개인 사업을 했다. 2021년에는 다시 활약하게 된다.[11]
  • 박지민
2019년 상반기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치어리딩을 시작했다. 울산 현대 축구를 시작으로 야구에서 2019년 한화 이글스 응원단으로 활약했다. 한화 팬들은 경험이 일천한 신예의 치어리더에 놀라기도 했는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2019시즌 한화 응원 시절 자신의 밝은 에너지를 팬들과 나누는 응원을 고백했다. 2019~2020 겨울 시즌에도 응원을 이어갔다. 배구에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를 응원했고 부산과 창원이 포함된 경남권 여자농구팀인 부산 BNK 썸에서 활약했다. 2020년에는 울산 현대에서 활약했고 2021년 한화 이글스의 응원단으로 복귀했다.[12]

영구 결번[편집]

21 송진우[편집]

송진우는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자, 그의 장남은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외야수 였던 송우석이고, 차남은 KBO 리그 키움 히어로즈의 외야수인 송우현이고, 조카는 KBO리그 LG 트윈스의 투수인 이우찬이다. 세광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실업팀인 '세일통상'을 거쳤고, 서울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2989년 계약금 4,000만원의 조건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한화 이글스를 포함하여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만 활동한 프래나이즈 스타였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1989년 시즌부터 2009년 시즌까지 총'21시즌 동안 통산 200승 이상, 2,000탈삼진 이상'을 기록했다. 2009년 1월 13일, 양준혁, 전준호와 함께 성구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2009년 8월 16일, 프로생활 20년을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2009년 9월 22일, 한화 이글스는 그의 등번호 '21'번을 영구 결번 처리했으며, 2009년 9월 23일에 은퇴 경기를 치렀다. 2010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임명되며 복귀했다.[13]

23 정민철[편집]

정민철은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자 현 KBO리그 한화 이글스의 단장이다. 충청남도 대전시(현 대전광역시)출생으로 1992년 대전고를 졸업하고 고졸 지명으로 한화 이글스의 전신인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다. 입단 초기 등번호는 55번이었고, 150대 초반의 빠른 직구와 각도 큰 커브로 선발 투수진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데뷔 첫해 14승(13선발승), 이듬해 13승(모두 선발)을 거두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일본 프로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후 일본에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했다. 2005년 등번호를 23번으로 바꿨다. 2009년 9월 12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5회 클리닝 타임에 그의 은퇴식이 치러졌다. 은퇴식에서 그는 팬들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코치로서의 포부를 말했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8년 연속 10선발승 이상(92~96년 13선발승 97년 14선발승 98년 10선발승 99년 17선발승)(역대 연속 두자릿수 선발승 최고 기록), 2점대 평균자책점, 109승(106선발승) 62패, 평균 투구 이닝 188이닝 등으로 기록을 남겼다. 또한 1990년대 전체에서 보았을 때, 선발투수 중 평균자책점(2.80), 완투(60), 완봉승(19),선발승(106) 1위를 했으며, 그가 데뷔한 1992년도부터 1999년까지 다승, 탈삼진, 이닝, 방어율, WHIP, 완투, 완봉승, 선발승 모두 그가 1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90년대 최고의 선발 투수로 평가받고 있다. 선동열은 자신의 후계자로 그를 지목했으며, 이종범은 본인이 경험한 최고의 공으로 그의 직구를 꼽았다. 그리고 박경완은 자신이 받아 본 공들 중에서 최고는 그의 직구였다고 말했다.[14]

35 장종훈[편집]

장종훈은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내야수이다. 선수 시절 타격 5관왕을 차지한 한화 이글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등번호 '35'번은 한화 이글스 구단 최초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으며, 2011년 KBO 리그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1루수 부문에 뽑혔다.[15]

52 김태균[편집]

김태균은 전 BKO 리그 한화 이글스의 내야수, 지명타자이자, 현 KBO 리그 한화 이글스 단장 어드바이저, KBS N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다.[16]

인기와 팬덤[편집]

광역연고 개념으로 보면 연고지인 대전과 제2연고지인 청주를 비롯한 충청권 전역이 한화 이글스의 연고 지역이다. 팬 밀집지를 들자면 대전과 제2홈구장이 있는 청주, 한화 전통의 팜 북일고가 있는 천안, 2012년 최고연봉으로 한화에 입단한 MLB 124승 투수인 박찬호선수의 고향 공주, 그리고 한화 이글스 팜의 야구부가 있는 홍성군과 새로이 생겨난 대한민국 최고의 신도시 세종시 등의 인구 밀집지를 들 수 있다. 다른 도와 달리 매우 성장하고 있는 충청도와 함께 발맞춰 팬도 많아지고 있다. 참실, 문학, 고척, 수원 원정경기를 매진시키는 것을 보면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를 포함해서 경기도 등 수도권에도 팬층이 형성되어 있다. 홈구장이 아닌 수원 케이티 워즈 파크에서도 강세를 보인다.
  • 팬 유입에 특이점
팀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기나긴 암흑기를 겪었지만, 이전부터 한화 팬덤은 조용하지만 탄탄했다. 대전, 충청 전역을 위시해 충북, 충남 대다수 지역들이 한화의 지지기반 지역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한화 팬덤은 잘 나갈 때 보다 오히려 암흑기 때 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늘 놀림의 대상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놀림들과 나는 행복합니다 와 부처님 탈을 쓰고 목탁을 든 팬짤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인기를 끌었으며, 이런 개그 짤들로 한화 이글스를 알게 된,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비록 약팀이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과 연연하지 않고 묵묵하면서도 늘 열정적인 응원을 보내주는 착한 팬덤이라는 이미지가 감동적으로 보인 덕분에 높은 인기를 구사하게 되었다는 점이 팬 증가의 이유로 흔히 지목된다.
  • SNS에 힘입은 한화
이처럼 #나는_행복합니다, #오늘도_졌다, #보살, #부처, #해탈, #한화는_못말려 등등의 한화를 대표하는 어구나 단어들은 해시태그로 쓰기 좋다는 점이 SNS를 주로 하는 여성들한테도 매력적으로 작용했는지 여성 팬들의 유입이 상당히 많았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서 검색결과는 한화 이글스가 롯데 자이언츠, 기아 타이거즈에 비해서 월등히 많다. 이는 카프조시라고 불리는 히로시마의 여성 팬들과 암흑기의 유입된 점, 연고지와 관련이 없지만 팬이 된 점, 응원 방식에 재미를 느껴서 팬이 된 점 등등이 상당히 유사하다. SNS를 잘 이용하지 않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한화의 인기는 증가했다. 여성들이 착한 팬덤에 끌린 것과 정 반대로 이쪽은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 칙칼코마니, 핫도그녀 등등 개그 구단의 이미지에 끌린 사람들이 많다. 인터넷에서는 한화팬이라는게 자학개그성 드립에 용이하기도 하고,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한화는 알기 때문에 이걸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으며 관심 끌기도 좋은 이유 덕분에 BJ, 스트리머, 유튜버, 페북스타, 트위터리안 등등 인터넷 유명인들 중에는 한화팬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더구나 김성근이 감독으로 오면서 노리타들이 유입되는 악재가 있었음에도 근성있는 이미지는 더욱 강해졌으며 성적도 예년에 비해 상승하여 이것이 호재로 작용해 2015년부터는 평균 시청률도 KBO 1위를 하는 등 점점 더 팬덤이 경고해졌다. 비록 2016년 다시 성적이 하락했지만, 2017년에는 김성근을 경질하며 한화 팬덤의 암적 존재인 노리타들도 숙청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고, 새로이 주류를 차지한 팬들은 성적을 보고 이 팀을 응원한 게 아니라서 그런지 여전히 충성스러운 팬심을 자랑한다. 2018년엔 큰 논란 없이 흥행하는 성과를 보이면서 대전구장은 연일 매진에 원정구장까지 수많은 팬들이 찾아가 구장을 매진시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 인터넷을 타고 온 일반인들은 점점...
한화 이글스 말고 한화 팬덤 자체도 인터넷에서 인기가 많은데 앞서 말한 부처님 탈을 쓴 팬, 목탁을 치던 팬 외에도 핫도그녀, 해탈한 표정의 어린이 팬 등등의 짤들이 유행했다.원래부터 골수 한화팬들 중에는 유입팬들의 이런 면을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도 많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그런 감정은 좀 누그러진 편이다. 물론 대다수 팬들은 이러한 면을 보고 팬이 된 라이트 팬들과 다르게 보살드립을 싫어하는 건 확실히 맞다. 한화의 인기를 상승 시키는데 보살드립이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구단 자체가 희화화 되었고 팬들 또한 승리를 위해 한화를 응원함에서도 패배 자체를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프레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라이트 팬중에선 여전히 한화팬과 결혼하면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 같은 보살드립의 파생형들을 두고 즐기고 있으나 이런 라이트 팬들이 점점 빠져들어 헤비 팬이 되고 나면 이들도 이랬던 과거를 부정하고 보살드립을 싫어하게 된다. 당장 유병재가 2018년에 한화 구단에서 시구를 했을때 나왔던 반응은, "팬들과 한화 선수들을 희화화 해놓고 어딜 시구하러 등장하냐"는 반응이 주를 이뤄 유병재를 비판 했었다. 즉, 이병재만 해도 본인이 밝힌 것처럼 그간 한화팬이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라이트하게 야구를 보며 보살드립을 하고 다니던 과거 모습에서 시간이 지나면 시구까지 하게 될 정도로 한화팬이 된 상태에선 보살드립들을 일절 언급을 하지 않으며 이를 배척하는 팬으로 발전 했다고 볼 수 있다.
  • 한화 인기를 부정하는 입장
이러한 한화의 인기를 부정하는 측에선 한화의 관중 수가 타 팀보다 현저히 적은 것을 근거로 삼는데 이는 홈구장인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와 청주구장의 총 관중 수를 합해도 23,500명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삼성의 홈구장인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는 24,000석으로 대전과 청주를 합한 수보다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한화로썬 1년에 있는 대전 홈경기를 매진 시켜도 936,000명 밖에 채우지 못 한다. 청주경기가 모두 매진 된다는 가정하에 합하면 겨우 100만명이 넘어가는 수준이다. 그런 상황에서 70만명을 초과해 최다 관중을 찍었는데도 한화가 비인기 구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또한 홈구장이 아닌 잠실, 문학 같은 대형구장에서 원정 경기가 열려도 한화팬들이 3루를 꽈 채우는 상황이 늘 연출된다. 아예 2018년 원정구단 관중수 통계에서 전통적으로 원정팀의 팬수 덕에 인기팀 반열에 오른 KIA, 롯데를 꺾고 1등을 차지하여 한화가 인기팀이라는 수식을 다는데 문제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한화의 인기가 2010년대 중반에야 올라왔다고 저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90년대 빙그레 이글스 시절부터 이미 4대 인기팀에 속했다. 그 롯데 자이언츠조차 넘어섰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이다.
  • 시청률이 높은 한화
인기의 척도로 떠오르고 있는 케이블 시청률 면에서도 한화는 전국구 인기팀인 KIA-롯데 다음급의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KBO리그 시청률 TOP10리스트를 보면 2018년에는 한화의 경기가 5경기로 KIA-롯데에 이어 세 번째, 2019년에는 6경기로 KIA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올라가 있다. 한국갤럽이 매년 조사하는 프로야구 선호도 조사에서도 한화는 2015년부터 KIA-롯데-삼성에 이어 4위를 꾸준히 마크하고 있다. 각종 데이터 측면에서도 적어도 KBO의 흥행과 지상파 방송국들의 시청률을 챙겨주는 보증수표로 불리기도 했고, 2020년 좋지 못한 성적을 거뒀지만 기아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에 이어 한화 이글스가 정규시즌 시청률 3위를 기록하여 다시 한번 KBO 인기 구단임을 증명했다.
  • 여론조사 결과
2020년도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 한화 이글스를 좋아한다는 응답이 10개 구단 중 5위이며, 특히 18~29세 연령대에서는 11%로 전체 1등을 차지하며 젊은층의 높은 팬심이 통계로 나타나고 있다. 2021년도 한국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한화 이글스를 좋아한다는 응답이 10개 구단 중 4위이며, 노시환, 정은원, 김민우, 강재민, 김범수 등 젊은 피들이 점차 팀의 주축으로 자리잡기 시작하고 수베로 감독 등 외국인 코칭스태프 사단의 부임 역시 젊은 팬들의 유입에 긍정적인 요소이다. 네이버 스포츠 MY팀에서도 한화 이글스를 관심 팀으로 설정해놓은 사람이 KBO 타 구단보다 많다. 2020년 6월 기준, 한화 이글스가 약 33만명, 그 뒤를 32만명의 KIA 타이거즈가 쫓고 있다. 의외로 팬덤이 크기로 유명한 롯데 자이언츠와 LG트위스는 20만명대이다. 여전히 80~90년대에 날렸던 아재 팬덤이 많은 기아, 롯데, 삼성과는 달리, 한화는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50대 이상의 직관이 줄어들고 20~40대가 다수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관람객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 악성 홀리건
인기가 많은 구단인 것과는 별개로, 악성 홀리건도 많았던 구단이다. 구단 측에서 관람석 보안 관리를 빡세게 한 이후로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세대 교체에도 불구하고 일부 팬에게는 홀리건 문화가 세습되었는지 관람석에서 몰지각한 형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고 있다.
  • 한화와 타기업간의 협업
한화 이글스의 높은 젊은 층의 인기와 KBO리그 자체의 높은 인기덕에 한화 구단과 일반 대중 브랜드와의 일명 콜라보로 불리는 협업 기획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일반 기성복 브랜드이자, 콜라보 상품이 주력 상품인 스파오, 슈펜과 협력하여 팀 콜라보 의류 및 신발을 출시하고도 했었는데, 2019년엔 슈펜에서 KIA와 함께 진행했고, 2020년엔 스파오에서 LG와 함께 진행했다. 또한 식품 업체인 풀무원, CJ제일제당, 하림과도 프로야구팀 최초로 콜라보 식품을 내놓기도 했는데, 2019년엔 풀무원과 "포기하지 마라탕면"이라는 라면 제품을 출시 했고, 2020년엔 CJ제일제당과 "이글이글 왕교자"라는 만두 제품을 출시했다. 또한 같은 해에 하림의 계열사인 선진포크와 "불꽃삼겹"이라는 간편식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때문에 위의 콜라보 의류나 콜라보 식품들이 유통되었던 기간에는 야구장과 관련 판매점이 아닌 일반 쇼핑몰과 번화가에 있는 의류 판매점, 대형마트, 백화점 그리고 동네에 있는 평범한 마트나 슈퍼에서 한화 이글스의 로고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젊은 층에서의 높은 인기 때문인지 2021년 시즌에는 왓챠와의 합작으로 한 시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국내 스포츠 팀 최초로 제작할 예정이다. 이 소식을 들은 팬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인데, 죽어도 이글스 드립이 나오기도 하는 등 낮은 성적 때문에 내용이 좋지 않게 될까봐 우려를 하는 팬들이 많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극적인 장면이 나올 수도 있기에 기대하는 팬들도 상당히 많다.[2]

지역 사회 공헌[편집]

세상에 없던 말[편집]

세상에 없던 말은 국내 25만여명의 농아인들이 야구를 이해하고 야구를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기획한 야구 수어 프로젝트이다. 국립국어원에 등록된 25,000개의 수어 중 야구 관련 단어는 단 3개에 불과했다. 국내 25만명의 농아인들이 야구를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총 14개의 농아인 야구팀은 경기 시 서로 다른 수어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농아인들이 야구를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 필요한 필수 야구 용어 135개를 선별하여 수어 제작 전문가, 야구 전문기자 등의 전문가와 함께 야구 수어를 제작했다. 또한 교육용 사전 내 다중 노출이미지를 사용하고 교육용 영상 내 정면/측면 수어 동작 및 중계 영상 등을 활용하여 정확도를 높였다. 야구 수어 사전에는 필수 야구 수어 난이도 순 배열과 속도, 방향, 반복 기호를 추가하여 보기 쉽게 구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야구 수어 사전은 출판 후 전국농인학교 교장 협의회와 국립 서울 농학교, 대한 농아인 야구 협회 등에 기증했다. 출간 이후에도 전국농아인야구대회 후원과 농인 올스타팀과 연예인 야구단의 이벤트 경기를 개최하는 등 농아인들이 야구를 꾸준히 이어가며 일상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부문에서 지원하고 있다.[17]

락앤볼 캠페인[편집]

한화이글스의 락앤볼(Rock & Ball)은 넓은 공간, 복잡한 룰, 비싼 장비 등을 대폭 축소시켜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연령에 관계없이 쉽게 야구를 접하고, 직접 체험하여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든 프로젝트이다. 야구에 필요한 인원을 팀 당 3명으로 줄이고, 야구장 베이스 거리를 3분의 1로 축소한 9m 정삼각형의 내야와 좁은 외야를 가진 가장 최소화 된 삼각 형태의 경기장을 구성했다.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생활 스포츠를 제공하고, 캐치볼을 넘어서 팀 플레이에서 오는 야구의 재미를 알려 일상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하나의 키트에 담아 락앤볼 키트를 제작했다. 한화이글스의 락앤볼 키트는 편의성과 휴대성을 고려해 창의적으로 디자인한 것이 특징으로 키트의 독특한 삼각형 형태의 경기장의 형태에서 착안했다. 경기장 라인을 그리는 마스킹 테이프와 사용자의 안전을 고려한 스펀지 재질의 소프트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고 보관할 수 있는 튼튼한 삼각형의 박스로 만들었다. 락앤볼 키트는 디자인 우수성을 인정받아 2020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2020 IDEA 디자인 어워드, 2021 iF 디자인 어워드 등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다.[18]

업사이클링 캠페인[편집]

한화이글스 선수들이 땀과 열정으로 사용하던 야구배트는 경기 중에 종종 부러지는 일이 생긴다. 부러진 야구 배트 대부분은 폐목재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 또 프로야구 한 경기에서 사용되는 공은 약 100개 정도인데 투수가 던진 공에 상처가 생기면 그 공은 경기에서의 생명을 다한다. 훈련용으로 그리고 지역의 초, 중, 고 야구부에서 대물림 되는 공 또한 프로야구 시합구의 영광을 뒤로하고 쓰레기 통으로 향한다. 성공회 내전 나눔의 집에서 보호 중인 청소년들은 가정을 떠나 사회 속에서 홀로서기 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가 아닌 세상이라는 테두리에서 청소년들이 마주하는 벽은 생각보다 높다. 아이들이 보다 안전하고 재미있게 꿈꿀 수 있는 언덕이 필요했다. 2018년부터 한화이글스는 대전지역 청소년쉼터 청소년들과 함께 쓸모 없는 야구배트를 활용한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매월 1회 한화이글스 임직원들이 성공회 대전 나눔의 집에서 운영 중인 '청소년공방 민들레'에 찾아가 청소년들과 함께 샤프, 볼펜, 시계, 키링 등을 만드는 자원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업사이클링 제품을 직접 만들고, 판매하는 경험을 통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작은 연습을 하고 있다. 배트와 야구공을 활용한 키링, 야구공 사인액자 등 제품을 만들고 있다. 선수들도 작업에 함께 하고 있다. 시즌에는 공방으로 직접 찾아갈 수는 없지만, 청소년들이 만든 야구공 키링, 사인액자에 직접 사인을 하며 함께 참여하고 있다.[19]


각주[편집]

  1. 1.0 1.1 한화 이글스〉, 《위키백과》
  2. 2.0 2.1 2.2 2.3 2.4 한화 이글스〉, 《나무위키》
  3. 3.00 3.01 3.02 3.03 3.04 3.05 3.06 3.07 3.08 3.09 3.10 3.11 3.12 3.13 3.14 5886899678〉, 《나무위키》
  4. 홍창화〉, 《나무위키》
  5. 김해리〉, 《나무위키》
  6. 김유나(치어리더)〉, 《나무위키》
  7. 김연정〉, 《나무위키》
  8. 박소영(치어리더)〉, 《나무위키》
  9. 박재령〉, 《나무위키》
  10. 이소림〉, 《나무위키》
  11. 서유림〉, 《나무위키》
  12. 박지민(치어리더)〉, 《나무위키》
  13. 송진우 (야구인)〉, 《위키백과》
  14. 정민철〉, 《위키백과》
  15. 장종훈〉, 《위키백과》
  16. 김태균 (1982년)〉, 《위키백과》
  17. 사회공헌-세상에 없던 말〉, 《한화 이글스 공식홈페이지》
  18. 사회공헌-락앤볼 캠페인〉, 《한화 이글스 공식홈페이지》
  19. 사회공헌-업사이클링 캠페인〉, 《한화 이글스 공식홈페이지》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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