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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틀리프 다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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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Wilhelm Daimler)
다임러(Daimler AG)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Wilhelm Daimler)는 독일의 컴팩트 고속 내연기관(가솔린엔진) 발명가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제조기업 다임러(Daimler AG)의 창시자이다.

1883년에 다임러와 그의 평생 파트너인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는 다임러의 드림(Daimler's Dream)이라 불리는 실린더 수평배치식 압축주입 액화석유 엔진(horizontal cylinder layout compressed charge liquid petroleum engine)을 개발하여 고속가동을 실현하였으며 운송분야의 응용에 가능하게 하였다. 1885년에 실린더수직배치식 버전을 개발한 뒤 Petroleum Reitwagen이라 불리우는 세계 최초의 2륜 내연기 모터싸이클(two-wheeler, internal combustion motorcycle)에 적용하고 이듬해에는 사륜 승객 수송 차량과 배에 적용하였다. 1890년에 다임러 모터 코퍼레이션(Daimler Motoren Gesellschaft(DMG), 영어 Daimler Motors Corporation)을 설립하고 1892년에 첫 번째 자동차를 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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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 1834년-1863년

고틀리프 다임러는 1834년 3월 17일에 제빵사 요하네스 다임러(Johannes Däumler)와 프레데리카(Frederika)의 아들로 뷔르템베르그(Wurttemberg)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근처에 있는 쇼른도르프(Schorndorf)에서 출생하였다. 1852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 고등기술학교에서 고급 기술을 배웠으며 1853년에 그라펜스타덴(Grafenstaden)에 위치한 홀레 운트 쉬빌케(Rollé und Schwilque, R&S)라는 공장에 취직하였다. 일을 잘한 덕에 1856년에 회사가 철로 기관차를 제작할 때 22세의 젊은 나이에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Stuttgart's Polytechnic Institute)에 진학하여 2년간 기술을 연마하였다. 증기엔진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다임러는 증기엔진이 대체될거라는 확신을 가졌으며 그 시대에 개발 된 가스엔진의 영향으로 값싸고 간단한 소형엔진을 개발할 생각을 가졌다. 1861년에 다임러는 R&S를 그만두고 파리를 방문하였으며 그 뒤에 잉글랜드로 건너가 그 해 겨울부터 맨체스터(Manchester) 고튼(Gorton)에 있는 정상급 엔지니어링 회사 베어 피콕 앤 컴퍼니(Beyer, Peacock and Company)에서 1863년 여름까지 근무하면서 공작기계에 관한 지식들을 쌓았다.

□ 1863년-1880년

독일로 돌아온 다임러는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주 괴핑겐(Göppingen)의 Geislingen an der Steige에 있는 다니엘 스트라유비 기계공장(Maschinenfabrik Daniel Straub)에서 툴, 제분소와 터빈 등의 디자인을 하다가 1863년에 공구제조업체 Bruderhaus Reutlingen에 취직하여 검사자로 일하였으며 후에 주관으로 되었다. 그 시절에 다임러는 15세의 고아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을 알게 되었다. 다임러의 노력으로 회사는 수익을 보게 되었으며 그러다가 1869년 7월에 회사를 떠나 철도 기관차와 바곤 제조업체 Maschinenbau Gesellschaft Karlsruhe로 취직하였다.

1872년 8월에 N.A. Otto & Cie사가 도츠(Gasmotoren-Fabrik Deutz, Deutz.AG[1])로 리브랜딩하면서 다임러를 기술이사로 초빙하였으며 다임러는 빌헬름 마이바흐를 수석 디자이너로 데리고 갔다. 1876년에 오토는 14년의 노력끝에 기화연료의 압축주입 4 행정 사이클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시스템은 4개 피스톤 행정((흡입-압축-폭발-배기)에 특징을 가졌다. 오토는 이 발명으로 증기엔진의 주도적인 상황을 대체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허의 권리를 가지고 오토와 다임러는 시비가 있었으며 1880년에 다임러는 자신과 마이바흐의 특허에 대한 보상금 11만 2천 마르크에 해당하는 도츠 주식을 받고 사직하였다. 마이바흐도 그 뒤에 사직을 하였으며 다임러를 따랐다.

□ 1880년-1890년

도츠를 이직한 뒤 다임러는 1882년에 칸슈타트(Cannstatt)에 워크샵을 구축하고 소형엔진의 개발에 착수하였으며 그 해 9월에 마이바흐도 가담하였다. 1883년에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리그로인(ligroin)을 연료로 사용한 소형 고속 엔진의 특허를 출원하였으며 그 당시 기타 발명가들이 발명한 엔진 대비 가볍고 작았다. 1897년에 보쉬(Bosch)가 전기점화방식이 나오기 전까지 엔진 점화방식은 핫 튜브 점화방식을 적용하였다.

1885년에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카뷰레이터를 개발하여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가능하게 하였으며 그 뒤 실린더수직배치식 엔진을 개발하고 이를 적용하여 전 세계 최초로 라이트바겐(Reitwagen)이라 명명한 내연기관 모터사이클을 개발하였다. 1896년에 사륜코치에 1.1마력 462cc 가솔린엔진을 탑재한 자동차를 개발하였으며 시속 16km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보트, 시내마차(street-car)와 트롤리(trolley), 풍선 등에 모터를 적용하여 각 분야에서의 사용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889년에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기존의 마차차체에 모터를 탑재하는 방식을 개변하여 현재의 휠체어와 유사한 스틸 휠 자동차를 개발하였으며 스틸휠웨건(Stahlradwagen)으로 명명하였다. 1890년부터 프랑스의 푸조에서 이에 기반한 스틸휠웨건을 생산하였다.

□ 1891년-1900년

모터보트에서 궤토차에 이르는 여러 분야에서의 엔진소요량의 증대에 비추어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사업을 확장하기로 하였으며 화약제조상인 막스 두텐호퍼(Max Duttenhofer), 공업가이자 은행가인 킬리언 본 슈타이너(Kilian von Steiner), 탄약 제조상인 빌헬름 로렌츠(Wilhelm Lorenz) 등의 투자를 접수하고 1890년 11월 28일에 다임러-모토론-게샬프트(Daimler-Motoren-Gesellschaft, DMG)을 설립하였다.

주식회사의 사업구도를 꺼려하는 다임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물러나고 마이바흐 역시 1891년 2월에 회사에서 이직하였다. 1892년에 DMG는 첫 번째 자동차의 판매를 달성하였으며 그 해에 다임러는 심장병으로 휴양을 시작하였다. 1893년에 귀환한 다임러는 DMG의 돌아가 통제권을 가질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마이바흐와 손을 잡아 엔진개발을 지속하였다. 개발에는 아들인 폴(Paul)도 참여시켰다. 1894년에 이들은 3 번째 엔진 포이닉스(Phoenix)를 개발하였으며 그 뒤에 마이바흐가 개발한 스프레이 노즐 카뷰레이트(spray nozzle carburetor)를 적용한 4기통 엔진을 개발하여 파리에서 루벤까지 달리는 역사 최초의 경주대회에서 DMG엔진을 탑재한 자동차들을 압도하였다. DMG의 주가는 폭락하였으며 파산의 위기에 몰린 DMG는 협의를 추진한 뒤 다임러와 마이바흐를 복직시키고 다임러와 마이바흐가 개발한 엔진을 생산하였다.

1900년에 다임러는 66세의 나이에 별세하였으며 1978년에 자동차 명인전당에 올랐다.[2][3]

각주[편집]

  1. "DEUTZ remembers its founder N.A. Otto", DEUTZ AG, 2012-06-14
  2. 중세시대 펜, 〈내연엔진 발명가 다임러〉, 《네이버 블로그》, 2021-02-27
  3. "Gottlieb Daimler", Wikipedia>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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