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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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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촌(鑛山村)이란 광산을 끼고 이루어진 마을로 주민의 대부분이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그 가족이다.[1] 특히 탄광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뒤로, 광산촌은 소멸하거나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탄광 폐광[편집]

태백 장성광업소 탄광 갱도 모습

우리나라 산업화의 최대 동력이었던 '석탄'을 생산해온 탄광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대한석탄공사 노동조합이 공사 산하 3개 광업소를 조기 폐광하는 데 잠정 합의했다. 이로써 1903년 처음 석탄을 생산하기 시작한 후 120년 만에, 1950년 석탄공사가 출범한 지 70년 만에 탄광이 문을 닫게 됐다.

석탄공사 노조는 석탄공사 원주 본사에서 열린 노사정협의체에서 2023년 말 전남 화순광업소, 2024년 말 태백 장성광업소, 2025년 말 삼척 도계광업소를 차례로 폐광하기로 잠정 합의했다고 밝혔다.

1950년 11월 장성, 도계, 함백, 나전, 영월, 화순, 은성, 화성, 성주 등 9개 탄광으로 설립된 석탄공사는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2022년 기준 강원 태백・도계, 전남 화순 등 3개 광업소만이 운영되고 있다. 만약 노사정협의체 합의대로 2025년까지 3개 광업소가 문을 닫으면 국내에는 삼척시 도계읍에서 민간이 운영하는 경동 상덕광업소만이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산업 전사'로 불리며 산업화의 일등 공신으로 대접받아온 전국 주요 광업소는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1960~1980년대 초는 석탄의 전성기였다. 전국에는 광산 300개가 성업했고 한때 5만명이 넘는 광부들이 탄을 캤다. 1980년대 초, 7급 공무원 월급이 11만원 정도일 때 광부의 평균 월급은 25만원을 웃돌아 목돈을 만지고 싶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탄광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광부가 되기 위한 경쟁률이 50대1에 달하기도 했고 철저한 체력·신체 검사를 빗대어 당시 '동원탄좌 입사는 육사 입학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에 1978~1989년 매년 평균 187명의 광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석탄은 1980년대 후반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석유가스가 보급되면서 수요가 크게 줄었다. 1988년 2564만t에서 2020년 91만t으로 96%가 감소했다.

정부는 폐광을 하는 대신 석탄 대체 산업을 발굴・육성하고 지역 지원 프로그램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태백 등 탄광 지역 주민들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탄광산업 활황으로 한때 전국의 부러움을 샀던 지방자치단체에도 비상이 걸렸다. 태백시는 장성광업소가 폐광되면 경제적 피해 2359억원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태백시 관계자는 '장성광업소가 폐광되면 종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많아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다'면서 '2024년 말 폐광 전까지 탄광을 대체할 산업과 실직 위기에 놓인 탄광 종사자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말했다.[2]

광산촌 기록 책자[편집]

사북공공도서관에서 대규모 석탄산지로 광산노동운동의 진원지이자 폐광에 맞섰던 주민운동의 발상지인 정선 광산촌 공동체를 지켜오던 주민들의 생생한 구술 형태로 기록한 책자를 발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서관은 주민참여 구술기록집 '광산촌 공동체의 기억2'를 펴냈으며, 기록집에는 사북임대아파트 관리소장인 정해수(남, 68)씨를 비롯해 사북2리 서양덕(여,75)씨, 도사곡아파트 주민 정원구(남, 74)씨, 사북2리 이숙자(여, 68)씨, 고토일 주민 윤여흥(남, 58)씨 등 5명의 주민들이 전하는 옛 광산촌의 생생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기록집은 탄광촌 주민들의 생활 및 경제활동, 탄광 운영 모습 등 탄광마을의 변천사까지 잊혀져가는 삶과 희미해지는 기억을 주민이 스스로 찾아내고 전하는 이야기를 구술자와 면담자의 대화형태로 기록했으며, 당시의 사진까지 첨부해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아울러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지역사 연구팀은 근현대 교육사 자료의 조사・수집을 통해 지역사료조사 사진첩 '잊혀진 학교, 사라진 풍경'을 발간했다.

1986년 초・중・고 92개소에서 폐광 이후 급격한 인구감소로 학교의 통폐합이 이뤄지고 현재는 35개소만 운영되고 있는 현실과 사라진 57개 학교의 흔적을 담은 사진첩이다.

소풍을 가 도시락을 까먹던 사진과 반공웅변대회, 애국조회, 퇴비 숙제 등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시절 그 모습을 담은 40여장의 옛 사진과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낸 정겨운 감정을 고스란히 글로 표현했다.[3]

광산촌 정비[편집]

광산촌 아파트의 변신[편집]

아파트가 헐린 탄탄마을 모습

강원 태백 국내 1호 광산촌 아파트가 '탄탄마을'로 새롭게 변신한다. 전국 광산촌 최초의 아파트인 장성동 화광아파트가 42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첨단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장성동 화광아파트는 광산업이 번창하던 1978년 6월 대한석탄공사가 광부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지은 국내 첫 광산촌 아파트다. 당시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어지던 아파트를 산골마을 광산촌에 지어 화제가 되기고 했다. 지상 3층, 25개동 규모로 지어진 아파트에는 320가구가 입주했다. 이후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조치로, 광원들이 줄고 아파트도 낡고 슬럼화됐다. 이에 태백시와 정부가 2020년 12월 아파트를 모두 철거하고 주거 재생사업에 나섰다.

화광아파트가 철거된 자리에는 492억원을 들여 탄탄마을 도시재생사업이 본격화된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지상 9층, 3개동, 189가구 규모의 LH임대아파트가 들어선다. 임대아파트는 공공주택 건설사업계획 승인 등을 거쳐 2021년 5월 착공에 들어가 2023년 4월 준공 예정이다.

탄탄마을 주변에는 2022년 8월 조성을 목표로 문화플랫폼 조성사업과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복합화 사업이 펼쳐진다. 문화플랫폼에는 생활역사전시관과 게스트하우스, 탄탄문화마당 등이 들어선다. 생활 SOC 복합화사업은 1・2층에는 국민체육센터와 건강생활지원센터, 3층에는 작은 영화관이 조성된다. 류태호 태백시장은 '주거와 문화, 건강 등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원스톱 기반 마련으로 주민들 삶의 질 향상과 지역 균형발전이 기대 된다'며 '인구 감소 등으로 침체를 겪고 있는 장성지역이 다시 도약하는 기반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4]

삼척 새뜰마을사업 추진[편집]

삼척시 도계읍 도계4리 구공탄 마을 달전지구

강원 삼척시가 광산촌이었던 '구공탄마을'의 생활 여건 개선에 나선다.

삼척시는 도시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사업으로 선정된 도계4리 구공탄마을 달전지구를 대상으로 '새뜰마을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은 오는 2024년 완공을 목표로 사업비 40억 8천만 원을 투입한다.

구공탄마을 달전지구는 지난 1960~1970년대 형성된 광산촌이다. 당시 도시계획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무분별하게 지어진 주택이 아직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지역발전 기반산업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삼척시는 달전지구의 열악한 기초 생활 인프라를 정비하고 노후 불량한 주택환경을 개선하기로 했다. 지역주민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삶의 질 향상과 지속가능한 활력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는 2021년 마스터플랜용역과 우선승인 사업을 시행하고, 용역 결과에 따라 2022년부터 사업을 추진한다.

특히 달전지구의 안전 확보를 위해 산사태 낙석방지시설, 홍수예방 및 낙상・추락방지시설, 보안등 및 CCTV, 소화전 등을 설치할 계획이다. 슬레이트 지붕 개량과 집수리, 빈집철거, 충전식 가스보관함설치 등 주택정비도 진행한다.

이와 함께 주민들의 생활・위생 인프라구축을 위한 에코커뮤니티센터를 비롯해 순환형 공유주택 조성, 마을 공공미술 경관개선, 전기차량 충전소 및 주차장 설치 등도 추진한다.

삼척시 관계자는 '구공탄마을 달전지구 새뜰마을사업이 지역주민들의 안전한 주거환경 확보에 기여하고, 기본적인 삶의 질을 개선하는 등 지역사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5]

미국 광산촌에서 탄생한 청바지[편집]

청바지는 세계 유행의 최첨단 거리 미국 뉴욕에서부터 하루 2달러로 끼니를 이어가는 인도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즐겨 입는 바지이다. 그러나 색상은 단 한 가지 청색이다. 청바지는 부자와 빈자,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노인, 새 것과 헌 것 구분없이 모두 즐겨 입는다. 색상이 바래거나 너덜너덜 해질수록 더 멋지다.

다만 냉전시대 동구 공산국가들은 청바지와 함께 서구의 퇴폐적인 자유사조가 묻어 들어온다며 단속했다. 그러나 청바지 구입이 어려워질수록 동구권 젊은이들은 청바지에 더욱더 매력을 느꼈다. 청바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패션(의상유행) 혁명을 일으켰다.

청바지가 처음 태어난 해는 1873년이었다. 미국 네바다주 광산촌에서 광부를 상대로 옷 짓는 봉제가게를 운영하던 제이콥 데이비스 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데이비스에게 단골 주부가 찾아와 남편의 바지를 주문했다. 이 주부는 제이콥에게 남편이 새 바지를 오래 입을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달라고 당부했다. 제이콥은 실밥이 터지기 쉬운 바지 주머니 양 끝에 구리 대갈못(rivet)을 박았다. 그밖에 터지기 쉬운 곳에도 추가했다.

제이콥은 구리 못 청바지의 독점을 위해 특허권을 출원코자 했다. 그러나 특허료 68달러(한화 7만원)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의류와 잡화상으로 돈을 많이 번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씨가 나타나 특허료 68달러를 지불하고 동업에 들어갔다. 리바이는 청바지 상표를 '리바이 스트라우스'로 등록했고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1873년이었고 그는 청바지 재벌로 컸다. 청바지 리바이는 그 후 142년간 세계 청바지의 대명사로 군림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독일에서 미국에 이민 간 유태계 독일인이다. 그는 1829년 2월 26일 독일의 작은 농촌마을 부텐하임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가호호 방문하며 옷가지와 잡화를 팔며 연명해가는 가난한 행상이었다.

리바이가 출생한 무렵 독일 정부는 유태인에게 불리한 규제를 만들었고 유태인들의 미국 이민이 시작되었다. 리바이 가족도 아버지가 1846년 폐병으로 사망하자 미국 이민에 나섰다. 뉴욕에서 자란 리바이는 성년이 되어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나가 의류와 잡화상을 운영, 큰돈을 벌었고 그 재력으로 청바지 특허권에 투자,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리바이의 출생지 독일 부텐하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리바이 스트라우스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박물관에는 '청바지의 아버지' 리바이의 일대기와 140여 년간 생산된 리바이 청바지들이 전시되어있다.

돌이켜 보건대, 청바지는 질실강건한 독일인의 정신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주의 미국인의 생활이 융합해 창조해낸 불멸의 패션이다. 청바지 탄생을 되돌아보며 작은 구리 대가리못과 68달러 특허 출원의 위력을 통감한다. 인류의 새로운 패션 길은 작은 광산촌의 봉제사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잡화를 팔던 행상의 아들이 열었다. 청바지 패션의 혁명은 튼튼하게 지어달라는 광산촌 촌부(村婦)의 요청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성실히 받아 들인 데서 싹텄다. 청바지가 142년 전에 남긴 값진 교훈이다.[6]

각주[편집]

  1. 광산촌〉, 《네이버국어사전》
  2. 지홍구, 송광섭 기자, 〈화순·태백·삼척 폐광한다…120년 한국탄광 역사 속으로〉, 《매일경제》, 2022-03-03
  3. 두메산골, 〈광산촌 옛 모습·역사 주민 생생한 구술 기록 책자 발간〉, 《두메산골》, 2022-02-03
  4. 조한종 기자, 〈42년 된 국내 첫 광산촌 아파트, 태백 최첨단 ‘탄탄마을’ 탈바꿈〉, 《서울신문》, 2020-12-03
  5. 전영래 기자, 〈광산촌 삼척 '구공탄마을' 정비…새뜰마을사업 추진〉, 《노컷뉴스》, 2021-05-14
  6. 정용석 교수, 〈미국 광산촌에서 1873년 탄생한 ‘청바지’ 패션 혁명〉, 《일요서울i》, 2015-02-23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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