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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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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원(金濟源)

김제원(金濟源, 1913년 ~ 1987년 10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정치인이다. 1955년 부산에서 동생 김창원(金昌源)과 함께 신진공업사를 창립하였으며, 이것은 나중에 신진자동차를 거쳐 대우자동차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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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편집]

기업인 생활[편집]

김제원은 1913년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에서 태어났으며, 종교는 불교이다. 1955년 부산 전포동에서 미군 정비창을 불하받아 동생 김창원(金昌源)과 신진공업사를 창립하였으며, 이것은 나중에 자일대우버스㈜의 전신인 신진자동차로 발전하였으며, 대우자동차의 전신을 만든 창업주인 셈이다. 그의 동생 김창원은 신진자동차 대표 겸 신진그룹의 회장을 지낸 사람으로, 한국 자동차공업과 기계공업의 선구자이다.

1957년에는 신진자동차공업사의 김제원 형제가 새로 '신진 자동차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국산 자동차 제작에 부심하였다. 1960년 부산 진구에 공장을 준공했고, 1965년 새나리자동차의 부평공장을 인수하며 신진자동차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1971년 당시 실미도 부대원들이 탈취했던 버스가 바로 신진제 버스였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와 합작하여 버스와 트럭을 비롯해 퍼블리카, 코로나, 크라운 등의 승용차를 생산했으나, 1971년 도요타가 중국 진출을 계기로 한국에서 철수하자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1대 1로 출자하여 지엠코리아(GM Korea)를 설립했다. 그는 경향신문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이준구 사장으로부터 강탈되어 신진자동차로 인수되자 1960년대 중후반부터 경향신문 사장직을 겸하였다.[1][2]

정치인 생활[편집]

1969년 김용태가 3선 개헌에 반대하다 민주공화당 총재를 겸직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나서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이로 인하여 김제원은 김용태 대신 민주공화당 연기군-대덕군 지구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이 되어 1976년까지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대덕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1969년 10월 복당한 김용태는 해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대덕군-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유진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던 서영희와 결혼하였다. 1976년 세계 불교 신도대회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연령대가 65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이준섭에 밀려 탈락하였다. 그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1]

학력 및 경력 사항[편집]

  • 고려대학교 경영 대학원 수료
  • 신진 자동차 공업주식회사 이사회장
  • 전국 마을문고 이사장
  • 국민 독서 연맹 이사장
  • 경향신문사 사장
  •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 회장
  •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신도 회장
  • 충남향우 회장
  • 세계 불교신도 우조회(WFB) 부회장
  • 제8대 국회의원(대덕ㆍ연기) 민주공화당
  • 제9대 국회의원(금산ㆍ대덕ㆍ연기) 민주공화당[3]

각주[편집]

  1. 1.0 1.1 김제원〉, 《나무위키》
  2. 배터리 플러스, 〈김해 정수장배터리 버스밧데리 교환해보니 최고에〉, 《네이버 블로그》, 2020-04-15
  3. 회원프로필-대별 회원정보〉, 《대한민국헌정회》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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