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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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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東九陵)

동구릉(東九陵)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 시대왕릉군이다.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무덤(陵, 릉)"이라는 뜻이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1만 5891m²에 달하는 구역에는 9개의 능에 17위의 유택이 있고, 2009년 2월 27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동구능'이 아니라 '동구릉'이 올바른 표기법이다.

개요[편집]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다.

동구릉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齋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역사[편집]

9개의 능(陵), 정확히는 7명의 왕(추존 왕 포함)과 10명의 왕후(추존 왕후 포함)가 안장되어 있으며, 봉분(능침)은 총 16기에 달한다. 그렇게 많은 능으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인 만큼, 조성 역사도 굉장히 길다. 1408년부터 시작되어 1904년까지 무려 496년동안 지속된 대역사인데, 조선왕조가 1392년에 창건되어 1910년에 멸망한 것을 생각해 보면 조선 왕조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대략적인 동구릉 조성역사는 아래와 같다.

  • 1408년(태종 8년) 태조 안장, 건원릉(建元陵) 조성. 단릉(單陵)의 형태
  • 1452년(단종 즉위년) 문종 안장, 현릉(顯陵) 조성
  • 1513년(중종 8년) 현덕왕후의 능을 천장(이장)해와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성
  • 1600년(선조 33년) 의인왕후 안장, 유릉(裕陵) 조성
  • 1630년(인조 8년) 건원릉 서쪽 산줄기(지금 헌종의 경릉 자리)에 있던 선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천장(이장)하고, 유릉(裕陵)과 합하여 목릉(穆陵)이라고 함
  • 1632년(인조 10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를 지금의 자리에 안장하고 혜릉(惠陵)이라고 칭하였으나, 목릉과 합하여 능호를 붙이고, 지금과 같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가 됨
  • 1674년(숙종 즉위년) 현종 안장, 숭릉(崇陵) 조성
  • 1684년(숙종 10년) 명성왕후 안장, 쌍릉으로 조성
  • 1688년(숙종 14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안장, 휘릉(徽陵)을 조성. 단릉(單陵)의 형태
  • 1718년(숙종 44년) 경종의 세자빈 심씨를 안장
  • 1720년(경종 즉위년) 경종이 즉위후 단의왕후로 추숭하고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함. 단릉(單陵)의 형태.
  •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 안장, 원릉(元陵) 조성
  • 1805년(순조 5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를 안장, 쌍릉(雙陵)으로 조성
  • 1843년(헌종 9년) 헌종의 정비인 효현성황후 안장하고 경릉(景陵)으로 조성
  • 1849년(철종 즉위년) 헌종을 안장하고 조성
  • 1855년(철종 6년) 용마산 아래에 있던 익종(효명세자, 문조)의 수릉(綏陵)을 지금의 자리로 천장(이장)
  • 1890년(고종 27년) 신정익황후를 안장하고 합장릉(合葬陵)으로 조성
  • 1904년(광무 8년) 헌종의 계비인 효정성황후를 안장하고 삼연릉(三延陵)으로 조성

왕릉[편집]

건원릉(健元陵)/단릉[편집]

조선 초대 임금인 태조 이성계가 안장되어 있는 왕릉. 이성계의 인지도와 인기에 힘입어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 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영의정 하륜 등이 태조 사후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1408년[1] 6월 28일 지금의 위치로 결정하였고, 같은해 7월 5일 충청도·황해도·강원도에서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공사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9월 7일 태종이 빈전(장례 전까지 왕과 왕비의 관을 두던 전각)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공식적으로 발인하였다.

건원릉(健元陵)

현릉(顯陵)/동원이강릉[편집]

조선 왕조 5대 임금인 문종과 현덕왕후가 안장되어 있는 능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이 폐위되고 추폐되었다가, 중종 때에 복위되었는데 이때 문종의 옆으로 이장되었다. 이 때 이장되면서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을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다른 언덕에 각각 자리잡게 하는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현릉(顯陵)

목릉(穆陵)/동원이강릉[편집]

조선 왕조 14대 임금인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의 능이다. 동구릉에서 가장 동북쪽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동구릉의 다른 능과 달리 언덕을 올라가 고분 가까이 접근 할 수 있다.

목릉을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에서는 왼쪽(위)이 의인왕후릉, 왼쪽(아래)가 선조릉, 오른쪽 위가 인목왕후릉이다.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각각 다른 언덕에 능이 자리하고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휘릉(徽陵)/단릉[편집]

조선 왕조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능침이 있는 언덕의 면적이 상당히 좁은 편이며 경사까지 있기 때문에 석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휘릉 정자각, 능침

숭릉(崇陵)/쌍릉[편집]

조선 왕조 18대 현종과 정비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정자각이 특이하게도 맞배지붕이 아닌 팔작지붕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숭릉 능침

혜릉(惠陵)/단릉[편집]

조선 왕조 20대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무인석의 코가 유난히 크고, 움푹 들어간 눈에 이를 드러내고 웃는 등 다른 왕릉의 무인석에 비해 유달리 이국적인 모습이 특징적이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 다른 조선 왕릉들의 침향이 대부분 북쪽에 머리를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북침(北枕)의 형태를 취하는 데 비해 혜릉의 단의왕후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다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혜릉 능침

원릉(元陵)/쌍릉[편집]

조선 왕조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참고로 이 곳은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파묘 자리를 다시 쓴 왕릉이다. 본래는 효종의 영릉이 이 곳에 있었는데 왕릉 석물에 금이 가고 파손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자 현종 14년인 1673년에 지금의 자리(경기도 여주시 능서면)로 천장했는데, 손자인 정조가 이 곳에 자신의 할아버지(영조)를 안장한 것이다. 참고로 일반 백성들조차도 자신의 조상들은 파묘(破墓) 자리에 모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정조의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정조실록 즉위년 4월 11일자의 기사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정존겸이 원릉의 자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정조도 대략 마음에 헤아려지는 바가 있었다며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원릉의 자리에 대해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에게도 두루 물어 이의가 없자 능을 결정하였다는 언급이 있는 등 정조의 복수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듯하다.

원릉 자리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숨어있는데, 영조를 모신 이 자리에 원래 조성되어 있던 능은 효종의 영릉이었다. 현종 때에 효종의 영릉 병풍석이 갈라져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인하여 무덤 안쪽에 물이 찼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무덤을 팠으나 예상과는 달리 물이 전혀 없었고, 괜히 무덤을 파버렸기 때문에 관계자 몇명에게 처벌을 내리고 효종의 능을 옮기게 되고 이 자리는 버려졌다가 그래도 나름 명당이라 하여 영조의 능으로 재활용된 것이다. 능자리는 나름 좋았으나 허위신고로 파묘당한 것. 때문에 마냥 정조의 복수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정순왕후 김씨의 눈치가 보이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결국 이 때문에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는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심지어 영조가 그 옆에 묻히기 위해 직접 자리까지 비워두었으나, 묻히지 못하여 홍릉은 옆자리는 있으나 능침이 없는 조선왕릉 전부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형태가 되어버렸다.

고양시의 지명 원릉(元陵, 고양시청 일대)과는 상관없다. 이쪽은 원당동과 능곡동의 사이에 있어 붙여졌다.

원릉 전경

경릉(景陵)/삼연릉[편집]

사진은 봉문 뒷편에서 바라본 모습이므로 제일 오른쪽이 헌종릉, 가운데가 효현왕후릉, 제일 왼쪽이 효정왕후릉이다.

경릉은 조선시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삼연릉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운데가 왕의 봉분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정자각에서 바라볼 때 제일 왼쪽부터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능이다. 이는 유교식 장례 예법에서 서쪽을 높게 치기 때문이다. 무덤이 남향하므로, 아래에서 바라보기에 제일 왼쪽이 제일 서쪽이 되어 가장 높은 자리가 된다. 왕의 무덤이 가운데 있다면, 왕릉의 서쪽에 있는 왕비릉이 왕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비슷하게 종묘에서도 왕의 위패는 위계 순으로 서쪽부터 동쪽으로 배열한다.

현재는 접근을 통제하는 울타리가 상당히 아래쪽에 쳐져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삼연릉을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조선 왕조 24대 헌종성황제와 정비 효현성황후 김씨, 계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

수릉(綏陵)/합장릉[편집]

조선 왕조 23대 순조의 세자 추존 왕 문조익황제[A]와 비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동구릉 중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능이기도 하다.

수릉 전경

관람안내[편집]

관람시간
  • 2월 ~ 5월, 9월 ~ 10월 : 06:00~18:00
  • 6월 ~ 8월 : 06:00~18:30
  • 11월 ~ 1월 : 06:30~17:30
  • 매표시간 : 마감시간 1시간전까지
※ 관람소요시간 : 1시간 내외
※ 휴일 : 매주 월요일
관람요금
  • 내국인(만25세 ~ 만64세) : 1000원. 단체 800원(10인이상)
  • 외국인(만19세 ~ 만64세) : 1,000원. 단체 800원(10인이상)
  • 외국인(만7세 ~ 만18세) : 500원. 단체 400원(10인이상)

교통편[편집]

대중교통[편집]

  • 청량리 현대코아, 중랑역, 상봉역, 망우역 : 구리 방향 경기88, 경기202번 버스 이용
  • 2호선 강변역 4번출구 강변역A버스정류장 : 구리 방향 1번 버스 이용
  • 2호선 강변역 4번출구 강변역B버스정류장 : 구리 방향 1-1, 9-2번 버스 이용
  • 경의중앙선 구리역 3번출구 : 6-1번 버스, 2, 6번 마을버스 이용
  • 버스정류장 명칭 : '우리나라최대왕릉군인 동구릉'
  • 2023년 하반기에 서울 지하철 8호선이 동구릉역으로 개통한다.

승용차[편집]

서울 → 동서울 → 구리시 → 동구릉
서울 → 의정부 → 퇴계원 → 동구릉
서울 → 화랑대사거리 → 구리시 → 동구릉
서울 → 망우리 → 교문사거리 → 동구릉
  • 구리시내에서 퇴계원 방향(43번국도)으로 약 2㎞

동구릉 안내도[편집]

설명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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