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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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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
민스크 위치

민스크(벨라루스어: Мінск, 러시아어: Минск, 폴란드어: Mińsk, 영어: Minsk)는 벨라루스수도이자 민스크주주도이다.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벨라루스의 최대 도시이자 유럽에서 11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민스크는 수도로서 벨라루스에서 특별한 행정 지위를 갖고 있다. 기계제조(트랙터·모터·트럭·공작기·라디오·텔레비전), 모직물 등의 공업도시로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1]

개요[편집]

  • 행정 단위: 벨라루스 수도
  • 면적: 409.5 km2
  • 지역번호: +375 17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minsk.gov.by/ru/

민스크는 스비슬라치(Svislač)강과 냐미하(Nyamiha)강 주변에 위치한다. 민스크는 수도로서 벨라루스에서 특별한 행정 지위를 갖고 있으며 민스크주와 민스크구의 행정 중심이다. 민스크는 11세기부터 기록에 나타나 있는 오래된 도시로 여러 나라의 분쟁지로서 대단히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12세기에는 민스크 공국의 중심지로 무역에 의하여 번영했다. 도시 설립 초기에는 동 슬라브인들이 유입했으며 폴란드, 리투아니아 공화국 시대에는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이 이주해 왔다.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 시절 민스크는 다수의 고관들이 이주하는 폴란드인 중심 사회로 형성되었으며, 16세기에 들어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이후 1700년대 대북방전쟁 시기에는 스웨덴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1812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일시 민스크를 점령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 시대로 오면서 러시아인들이 정착하여 슬라브 문화가 부흥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민스크를 경유하는 모스크바-민스크-바르샤바간의 철도가 개통되면서 중대한 철도 분기점으로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민스크는 독일과 소련의 격렬한 전투가 이뤄졌던 장소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민스크 시가지가 러시아 군대의 전선기지가 되자 큰 피해를 입고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스탈린 양식의 도시계획을 바탕으로 재건이 진행되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하여 벨라루스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벨라루스의 주요 문화 중심지로 국립 아카데미 볼쇼이 오페라 벨라루스 발레 극장이 있다. 유명한 종교 건축물로는 1847년에 지어진 막달라 마리아 러시아 정교회(Царква Сьвятой Марыі Магдалены), 붉은 교회로 불리는 성 시몬 알레나(Касьцёл Сьвятых Сымона і Алены) 성당, 성령 대러시아 정교회(катэдральны сабор), 성모 마리아 로마 카톨릭 성당(Архікатэдральны касьцёл імя Панны Марыі)등 다수가 있다. 또한, 벨라루스 국립대학, 민스크 국립언어대학, 벨라루스 주립 농업기술대학, 벨라루스 국립 의과대학 등 벨라루스 유수의 교육기관도 밀집해있다. 2019년 6월 민스크는 2019년 유럽경기대회를 개최했다. 민스크는 독립국가연합(CIS)의 행정 수도로, 사무총장의 집무실이 있다.[2]

명칭[편집]

도시의 옛 동슬라브(러시아) 이름은 민스크(Мѣньскъ)로 강 이름 멘(Měn)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을 벨라루스어로 직접 바꾸면 미엔스크(Miensk)가 된다. 그 결과로 생겨난 이름이 민스크(Minsk, 철자는 Минскъ 또는 Мѣнскъ로도 씀)다. 이는 러시아어(현대 철자는 Минск)와 폴란드어(Mińsk)로도 이어졌고 러시아어 표기는 벨라루스에서도 공식으로 쓰인다. 일부 벨라루스어 사용자들은 미엔스크(Miensk, 철자는 Менск)를 쓴다.

지리 및 기후[편집]

민스크는 민스크 힐스(Minsk Hills)의 남동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니오만(Nioman)강 상류인 서남쪽에서 동북쪽, 즉 벨라루스의 루콤스카예(Lukomskaye) 호수까지 이어지는 구릉지이다. 평균 해발고도는 220m이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스비슬라치(Svislach)강은 지난 빙하시대 말기의 녹은 얼음판에서 흐르는 물에 의해 형성된 고대 강 계곡인 우르스트롬탈(urstromtal)에 있다. 시 경계 내에 있는 작은 강 6개는 모두 흑해 유역에 속한다. 민스크는 벨라루스의 전형적인 혼성림 지역에 있다. 소나무와 잡목림은 특히 북쪽과 동쪽의 도시 가장자리에 있다. 몇몇 숲은 도시가 커지면서 공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 도시는 초기에 방어 요새가 될 수 있는 언덕 위에 세워졌는데, 서쪽은 대부분 언덕 지대이다.

민스크는 따뜻한 여름과 습한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강한 영향력을 가진 대서양의 습한 공기와 유라시아 대륙의 건조한 공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탓에 날씨는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편이다. 1월 평균 기온은 -4.5°C이고, 7월 평균 기온은 18.5°C이다. 가장 낮은 온도는 1940년 1월 17일 -40°C, 가장 높은 온도는 2015년 8월 8일 35.8°C로 기록되었다. 가을과 봄에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 연간 강수량은 690mm로 3분의 1은 추운 시기(눈과 비)에, 3분의 2는 따뜻한 시기에 내린다. 일 년 내내, 대부분의 바람은 서풍과 북서풍으로 대서양에서 서늘하고 습한 공기를 가져온다.[3]

역사[편집]

초창기[편집]

오늘날의 민스크 지역은 서기 9세기까지 초기 동슬라브족들의 정착지였다. 스비슬라치(Svislach)강 계곡은 두 개의 초기 동슬라브 부족, 즉 키리비치(Krivichs)와 드레고비치(Dregoviches) 부족 사이의 정착 경계선이었다. 980년에 이르러 이 지역은 올드 러스(Kievan Rus') 주에 있던 중세 초기 동슬라브 공국 중 하나인 폴로츠크 공국(Principality of Polotsk)에 편입되었다.

민스크는 네미가(Nemiga)강의 전투와 관련하여 1067년 ‘주요 연대기(Primary Chronicle)’에 메네스키(Měneskъ, Мѣнескъ)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1067년은 현재 민스크의 건립 연도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 당국은 1067년 3월 3일을 도시의 정확한 창건일로 간주하고 있다.

12세기 초에 폴로츠크 공국은 작은 영지들로 분할되었다. 민스크 공국은 폴로츠크 왕조의 한 왕자에 의해 세워졌다. 1129년 민스크 공국은 키예프 공국(Kievan Rus')의 지배적 독립국인 키예프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1146년 폴로츠크 왕조는 지배권을 되찾았다. 1150년까지 민스크는 이전 폴로츠크 공국의 주요 도시로서 폴로츠크 왕조에 맞섰다. 민스크와 폴로츠크의 왕자들은 이전에 폴로츠크가 통치하던 모든 땅을 통합하기 위해 수년간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중세 후[편집]

민스크는 1237~1239년 몽골의 러시아 침공에서 벗어났다. 1242년 민스크는 팽창하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민스크는 평화롭게 대공국에 합류했고 지역 엘리트들은 높은 지위를 유지했다.

1413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은 동맹을 맺었다. 민스크는 민스크주의 중심지가 되었다. 1441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자이자 미래의 왕 카시미르(Casimir) 4세는 민스크를 일정한 특권을 누리는 도시에 포함했고, 1499년 그의 아들 알렉산더 1세 야기엘론(Jagiellon) 재위 기간 중 민스크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법에 따라 마을 특권을 받았다.

1569년 루블린 연합(Union of Lublin)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은 하나의 국가로 합쳐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n Commonwealth)이 되었다. 그 뒤 민스크에 정부 관리들, 장교, 장인들이 함께 사는 폴란드인 공동체가 생겼다. 16세기 중반까지 민스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중요한 경제 문화 중심지였다. 또한 동방 정교회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다. 브레스트 연합에 이어 동방 가톨릭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모두 영향력이 커졌다.

1655년 민스크는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Alexei)의 군대에 의해 정복되었다. 1660년 폴란드의 왕 얀 2세 카지미에슈 바자(John II Casimir)가 되찾을 때까지 러시아인들이 이 도시를 통치했다. 폴란드-러시아 전쟁이 끝날 무렵 민스크는 주민 2,000여 명, 주택은 300여 채에 불과했다.

제2차 참화는 북방전쟁 때 겪게 되는데, 1708년과 1709년 민스크는 스웨덴의 칼(Carl) 12세 군대에 의해, 그 뒤에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폴란드 통치의 마지막 수십 년간 민스크는 경제적, 군사적 의미를 잃은 채 작은 지방 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쇠락하는 가운데 발전도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통치[편집]

민스크는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Second Partition of Poland)의 결과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796년 민스크주(州)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록 도시 이름은 철자가 바뀌지 않았지만, 초기 거리 이름은 모두 러시아 단어로 대체되었다.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때 나폴레옹 군대가 잠시 도시를 점령했다. 19세기 내내 도시는 계속 성장하고 상당한 발전도 이룩했다. 1830년대에 주요 거리와 광장들은 자갈을 깔고 포장도 했다. 1836년에 첫 공립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1837년부터 소방대가 운영되었다.

1838년 최초의 지방 신문인 민스키예 구베른스키예 베도모스티(Minskiye gubernskiye vedomosti, ‘민스크 지방 뉴스’)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극장은 1844년에 설립되었다. 1860년까지 민스크는 인구 2만 7,000명을 가진 중요한 무역 도시였다. 도시 외곽에 벽돌과 돌로 2층, 3층의 주택을 짓는 건설 붐이 일어났다.

교통 시설이 개선되면서 민스크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1846년 모스크바-바르샤바 도로가 닦였다. 1871년 민스크를 거치는 모스크바와 바르샤바 사이의 철도 노선이 운행되었고, 1873년 우크라이나의 롬니(Romny)에서 발트해 항구 리바바(Libava)까지 새로운 철도가 부설되었다. 그 결과 민스크는 중요한 철도 분기점이자 제조업 중심지가 되었다.

1872년에 시영 수도, 1890년에는 전화, 1892년에는 말로 가는 전차, 1894년에는 최초의 발전소가 도입되었다. 1900년까지 민스크는 58개 공장에서 노동자 3,000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또한 극장, 영화관, 신문, 학교, 대학뿐만 아니라 수많은 수도원, 교회, 회당(시나고그), 모스크를 자랑했다.

1897년 러시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9만1494명이 살고 있었는데, 유대인이 4만7561명으로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20세기[편집]

20세기 초, 민스크는 벨라루스 노동자 운동의 주요 중심지였다. 볼셰비키와 소련공산당(CPSU)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제1차 총회가 1898년에 이곳에서 열렸다. 민스크는 또한 빌니아(Vilnia)와 함께 벨라루스 국가 부흥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민스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15년까지 민스크는 전선(戰線)의 도시였다. 일부 공장은 폐쇄되었고, 주민들은 동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민스크는 러시아군 서부전선의 본부가 되었고 군사병원과 군수물자 기지도 수용했다.

민스크는 러시아 혁명의 파장을 즉각 받았다. 1917년 10월 민스크에 노동자 소비에트가 설립되어 불만을 품은 군인과 노동자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Treaty of Brest-Litovsk) 이후 1918년 2월 독일군이 민스크를 점령하였다.

1918년 3월 민스크는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1918년 12월, 민스크를 적군(赤軍)이 탈취함으로써 공화국은 단명했다. 1919년 1월 민스크는 벨로루시 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 선언되었으나 1919년 후반, 그리고 다시 1920년에 제2차 폴란드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는 1919년 8월에서 1920년 7월까지, 또 1920년 10월에서 1921년 3월까지로 폴란드-볼셰비키 전쟁 기간이었다.

리가 평화조약(Peace of Riga)의 조건에 따라 민스크는 러시아 SFSR에 다시 넘겨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건국 공화국 중 하나인 벨로루시 SSR의 수도가 되었다. 도시 재건과 개발 프로그램은 1922년에 시작되었다. 1924년까지 29개의 공장이 운영되었다. 학교, 박물관, 극장, 도서관도 설립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수십 개의 새로운 공장이 건설되고 새로운 학교, 대학, 고등 교육 기관, 병원, 극장, 영화관이 문을 열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기간 동안 민스크는 벨라루스 언어와 문화 발전의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인구가 30만 명이었으나 1944년에는 5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의 일환으로 민스크는 즉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도시는 침략 첫날 폭격을 당해 4일 후 베르마흐트(Wehrmacht, 나치 독일 군대)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공장과 박물관, 민간인 수만 명은 동쪽으로 대피했다.

독일인들은 민스크를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Reichskommissariat Ostland, 동부 국가관할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지정했다. 공산주의자들과 동조자들은 현지에서 또는 독일로 이송된 후에 살해되거나 투옥되었다. 침공한 독일군의 거주지로 집들이 징발되었다. 독일군에게 식량을 빼앗기고 일자리가 없어 수천 명이 굶주렸다. 민스크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운영한 대규모 게토 중 한 곳이 있었는데,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그곳에서 임시로 거주했다.

벨라루스가 독립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민스크의 일부 반(反)소련 주민은 점령 초기에는 독일군을 지지했지만, 1942년에 이르러 민스크는 독일-소련 전쟁으로 알려진 침략에 대항하는 소비에트 게릴라 저항 운동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이 역할로 민스크는 1974년에 ‘영웅 도시(Hero City)’라는 칭호를 얻었다.

민스크는 1944년 7월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 중 소련군이 탈환하였다. 앞서 1944년 상반기에 소련군 진격에 맞선 독일의 저항 중심지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공장, 관공서, 발전소, 다리, 대부분의 도로, 그리고 집의 80%가 잔해로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스크는 재건에 나섰지만 복원은 더뎠다. 역사적 건물이 있었던 중심가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웅장한 건물, 넓은 도로, 광활한 광장을 선호하는 스탈린주의 건축물로 대체되었다. 그 후 도시는 대규모 산업화와 함께 급속도로 성장했다. 1960년대 이후 민스크의 인구도 급격히 증가해 1972년 100만 명, 1986년 150만 명에 이르렀다.

민스크 메트로는 1977년 6월 16일에 건설을 시작해 1984년 6월 30일 개통했는데, 소비에트 연방에서 9번째 지하철 시스템이 되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의 젊은 비숙련 노동자 집단 이주뿐 아니라 구소련 다른 지역에서 숙련 노동자들이 이주해 왔기 때문이었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민스크는 역사적 경계를 넘어 확대되었다. 주변 마을들을 흡수해 고밀도 아파트 구역인 미크로라이온(mikroraions)으로 조성하였다.

독립 후[편집]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1990년대 내내 도시는 변화를 계속하였다. 새로 독립한 벨라루스의 수도로서 재빨리 주요 도시의 속성을 획득했다. 대사관들이 문을 열었고, 많은 소련 행정 건물들이 정부 청사가 되었다. 1990년대 초중반 민스크는 경제위기를 맞아 개발사업이 중단됨으로써 높은 실업률과 고용 불안을 초래하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교통, 인프라가 개선되었고, 2002년부터 주택 붐이 일었다. 민스크 교외에는 주택 개발에 따라 새로운 미크로라이온이 조성되었다. 지하철 노선이 연장되었고, 도로 시스템(민스크 벨트웨이 포함)이 개선되었다. 최근 몇 년간 민스크는 지속적으로 도시가 분산되고 있는데, 지하철 제3노선이 개통되면 도시는 더욱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도심 외곽 여러 지역에서는 더 많은 개발 계획이 시행될 예정이지만 오래된 지역은 별다른 미래 계획이 없다.[4]

교통[편집]

민스크는 광범위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전차 노선 8개, 트롤리버스 노선 70개 이상, 지하철 노선 2개, 버스 노선 100개 이상을 운행한다. 1929년 전차는 민스크에서 사용된 최초의 현대식 대중교통이었다. 1924년부터 대중버스, 1952년부터는 트롤리버스가 이용되고 있다. 모든 대중교통은 정부 소유의 비영리 운송 회사인 민스크트랜스(Minsktrans)가 운영하고 있다. 민스크는 벨라루스에서 유일하게 지하철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지하철 건설은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한 직후인 1977년에 시작되었으며, 1984년에 8개 역을 가진 첫 노선이 개통되었고, 그 뒤 두 개 노선으로 확장되었다.

민스크는 벨라루스에서 가장 큰 교통 중심지다. 도시는 서남쪽에서 북동쪽으로 운행하는 바르샤바-모스크바 철도와 북서쪽에서 남쪽으로 운행하는 리예파야(Liepāja)-롬니(Romny) 철도의 분기점에 위치한다. 앞의 철도는 러시아폴란드, 독일을 연결하며, 뒤의 철도는 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연결한다. 노선은 민스크의 중앙역인 민스크-파사지르스키(Minsk-Pasažyrski) 역에서 만난다.

민스크 국제공항은 시에서 동쪽으로 42km 떨어진 곳에 있다. 1982년부터 운영되었고, 공항 철도역은 1987년에 건설되었다. 유럽과 중동으로 가는 항공편이 있는 국제공항이다.[5]

인구[편집]

2020년 까지 민스크 인구는 2,028,104명이다. 민스크는 역사적으로 주민 구성 변화가 크다.

1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민스크는 동슬라브족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1569년 이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었을 때,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폴란드 분할 뒤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곳에 러시아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인구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이 51.2%, 러시아인 25.5%, 폴란드인 11.4%, 벨라루스인 9%로 구성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도시 인구가 변동이 심했다. 1959년의 조사에는 벨라루스인이 63.3%, 러시아인 22.8%, 유대인 7.8%, 우크라이나인 3.6%, 폴란드인 1.1%, 타타르족 0.4%으로 구성되었다. 그후 거의 대부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미국, 독일로 이주 하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들도 1980년대 말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 조사에 따르면 벨라루스인들은 79.3%, 러시아인 15.7%, 우크라이나인 2.4%, 폴란드인 1.1%, 유대인 0.6%으로 구성되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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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민스크〉, 《위키백과》
  2. 민스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민스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4. 민스크〉, 《요다위키》
  5. 민스크〉,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동유럽 도시
동유럽 지리
동유럽 문화
동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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