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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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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백두산

백두산한국에서 가장 높은 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중국어 간체자: 长白山, 정체자: 長白山, zhǎng bái shān)이라고 부른다. 백두산은 조중 국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 있는 화산이다. 백두산은 한민족에게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 왔으며,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제사를 열었다는 태백산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높이는 2,744m(9003ft)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이다. 산머리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는 데다가 흰색의 부석(浮石)들이 얹혀져 있어서 흰머리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1]

개요[편집]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將軍峰)이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인 천지(天池)가 있다. 백두산부터 지리산(智異山)까지 이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한반도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 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한민족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고, 환웅이 신시(神市)를 열고 단군이 태어난 성지(聖地) 또는 성소(聖所), 성역(聖域)등으로, 여겨서 신성시되고 있다. 또한, 백두산은 남만주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장백산맥의 주봉이기도 하다.[2]

명칭[편집]

백두산은 과거 백산, 태백산, 불함산, 개마대산, 장백산 등으로도 불렸는데, 1280년대에 쓰여진 《삼국유사》,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에 편찬된 《고려사》의 고려 성종 10년(991년)조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백두산이라고 칭하였는데,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이라는 명칭도 간간히 나타난다. 196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조중 변계 조약과 그 의정서에서도 이 산을 백두산(白头山)이라고 칭하였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중국어 간체자: 长白山, 정체자: 長白山, 병음: Chángbái shān, 장백산), 만주어로는 골민 샹얀 아린(果勒敏珊延阿林, Golmin Šanggiyan Alin)이다.

백두산의 높이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 북한, 중국 세 나라가 해발고도를 재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측정한 방식이 현대보다는 부정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 아는 2,744m는 일제강점기 때 측량한 값이다. 인공위성을 활용하기 전에는 높이가 알려진 곳에서 삼각 측량으로 높이를 쟀기 때문에 현대적 기준에 따른 측량한 결과와 비교하면 오차가 있을 수 있다. 해발고도와 구분되는 기복량(起伏量)이란 개념이 있는데, 일정한 범위 안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높이 차를 말한다. 범위를 1km2로 하여 한반도 전역의 기복량을 비교하여 백두산의 기복량은 2,505m라고 밝힌 논문이 있다. 세계에서는 37,473번째로 높은 산이다. 북한의 량강도에 속한 삼지연시와 중국의 지린성에 속한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사이에 있다. 대한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치며, 천지(용왕담) 전역은 혜산군 보천면 관할이다. 중화민국(대만)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는 안둥성(安東省) 창바이현(長白縣)과 쑹장성(松江省) 안투현(安圖縣)에 걸친다. 천지는 창바이현 관할이다.

한민족의 영산으로, 지금도 한국의 국가와 북한의 국가에 모두 등장한다. 백두산을 영산으로 중요시함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을 설명하며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에는 진신이 늘 있는 곳이다."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어 이미 신라 때부터 한반도 산줄기의 근본 기준이자 신앙대상으로서 백두산을 꽤나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왕조 당시에는 말갈/여진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산맥의 기원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다만 고려사 묘청열전 인종 9년(1131)조에 묘청이 건의하여 서경(평양)에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는데, 거기서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는 신격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 중엽 고려 의종 대에 쓰인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한동안 백두산이 자국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산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초에는 태종 14년(1414)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사 지낸 것을 이어받아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나(태종실록 14년 8월 신유), 세종 19년(1437) 자국 영토에 있지 않다고 하여 제사 대상에서 제외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계묘). 이후에도 조선은 '백두산 자체는 우리 땅이 아니긴 한데, 백두산 남쪽은 당연히 우리 땅이고 우리나라 산맥은 백두산에서 기원함!'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인식을 가장 잘 체계화한 책이 신경준의 산경표인데, 이 책에서부터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부터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검토 단계에서 숙종 때 청이 목극등을 보내 확정한 경계가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이라는 이유로 백두산 대신 백두산 맞은 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이후 1880년대부터 이른바 간도 지역을 두고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백두산 인근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고 칭제건원하면서 황제국의 전례에 따라 오악(五岳)을 설정할 때에 백두산을 북악으로 지정하여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영산으로 삼았다. 현재는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나눠서 관리한다. 중국에서는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하였다.

문헌 기록[편집]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한 태백산은 대개 백두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태백산(太伯山)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제왕운기 ·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여지승람 · 동국사략 · 동사강목은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 "백산(白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 산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불렀으며 이 산 주변에 백산부(白山部)라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 세력이 존재했다.

고려 중기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평안도 지방)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태백산을 일연이 주장한 묘향산으로 보지 않고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으며, 부여, 옥저, 신라(원문: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 지방의 아사달에서 한반도 북부의 왕검성(지금의 평안도 일대)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지리[편집]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 이 화산분출로 인한 화산재는 멀리 일본의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된다. 천지는 둘레가 14km이고, 평균 깊이 213m, 최대 수심은 384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산의 정상은 매년 2cm씩 솟아오르는데, 이는 산의 중앙부 천지를 둘러싼 칼데라 환의 2500m 아래 마그마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최고봉인 장군봉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고, 경사는 1,800m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천지[편집]

천지  
겨울의 천지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산호로, 쑹화 강(松花江)의 발원지이다. 그 수면은 해발 2,257m,면적은 9.165km2,둘레 14.4 km,평균 깊이 213.43m,최대 수심은 384m로 에펠탑이나 도쿄 타워도 모두 잠겨 버릴 정도이며, 수량(水量)은 19억5,500만 m³로서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이다.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 km, 깊이 850 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 천지는 둘레가 14 km이고, 평균 깊이 213 m, 최대 수심은 384 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천지는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44 m)을 비롯해 망천후(2,712 m)·백운봉(2,691 m)·청석봉(2,662 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천지의 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해 흘러내려 간다. 이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 m의 장대한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진다.[3]

세 강의 발원지[편집]

천지의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쑹화 강의 발원이 된다. 백두산은 쑹화 강 외에도 백두산 산정(山頂) 남쪽에서 압록강이, 무두봉(無頭峰, 높이 1,930m)의 북쪽 기슭에서 두만강의 발원이 된다.

생태[편집]

생물학자 김리태에 따르면, 1960년 7월 3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자들이 천지에 산천어(표준어: 곤들매기)와 붕어를 천지에 풀어넣어 정착시켰다. 또한, 2014년부터 천지에 빙어를 서식시키는 사업을 하여 2018년 성공했다고 로동신문이 보도하였다. 천지에서 호수 괴물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으나 입증된 적은 없다.

국경[편집]

중국과 북한이 협약한 국경. 현재 국제법상 표준이다.

천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원래 백두산은 전부 중국의 영토였으나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은 1962년에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천지(天池)를 분할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 이에 따라 2,500m 이상 백두산 봉우리 16개 중 9개가 북한령, 7개가 중국령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지도들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쪽 산마루를 이은 선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天池)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 전체와 비룡폭포(장백폭포)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백두산 16봉[편집]

단위는 해발 고도(m)이다.

  • 백운봉(白云峰) 2691
  • 관일봉(觀日峰) 2670
  • 천문봉(天文峰: 응취봉,鷹嘴峰) 2670
  • 옥주봉(玉柱峰: 청석봉,青石峰) 2664
  • 화개봉(華蓋峰: 황암봉,黄岩峰) 2640
  • 천활봉(天豁峰) 2620
  • 자하봉(紫霞峰) 2618
  • 고준봉(孤隼峰) 2611
  • 녹명봉(鹿鳴峰: 지반봉,芝盤峰) 2603
  • 용문봉(龍門峰) 2595
  • 금병봉(錦屏峰) 2590
  • 직녀봉(織女峰) 2558
  • 제운봉(梯云峰) 2543
  • 철벽봉(鐵壁峰) 2560
  • 와호봉(卧虎峰) 2566
  • 관면봉(冠冕峰: 옥설봉,玉雪峰) 2525

기후[편집]

냉대 기후의 백두산 지역은 산지 기후의 특징을 지녀 월평균 기온이 연간 34℃ 사이의 편차로 크게 변한다. 강수량은 연 1,400mm에 이르는데,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울은 춥고 매우 길며,여름은 온난 습윤하다. 백두산의 기후변화는 매우 고질적이다. 산 정상의 연평균 기온은 -8.3℃이다. 여름은 18℃ 정도이지만, 엄동기는 -47.5℃까지 내려갈 때가 있다. 백두산 정상부 일원 비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저기온은 -54.7℃이며, 앞으로 공식적 관측기록이 있다면 이보다는 기온이 더 낮은 날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1월의 평균기온은 -24℃, 7월의 평균기온은 10℃이며, 9월 하순부터 이듬해 6월 초순까지 연중 8개월은 영하까지 내려가서 입산이 통제된다. 산 정상의 평균풍속은 초속 11.7m, 12월에는 평균 초속 17.6m의 강풍이 분다. 평균 습도는 74%, 연강수량은 1,400mm 정도로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해양하고의 거리가 가깝고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형이 높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리며, 쌓인 눈은 이듬해 6~7월 달이나 되어야 녹기 시작한다.

동식물[편집]

시베리아 호랑이

동물[편집]

백두산에는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포유류로는 검은담비, 곰, 백두산 사슴, 사향노루, 사슴, 산양, 수달, 표범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류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과 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멧닭, 올빼미, 원앙, 청둥오리 등이 있다. 어류로는 천지에 방류한 천지산천어가 있으며, 그 외에 북살무사·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 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다.

식물 분포[편집]

백두산은 식물이 복잡 다양하게 분포한다. 과거 제3기(第三纪)의 식물에서부터 한국은 물론 시베리아, 일본, 유럽의 식물종도 있으며, 심지어 중국 남방의 아열대 식물종까지 발견된다. 해발 고도가 높고 지리적 위치가 독특하여 하곡(河谷)에서부터 주봉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온대, 냉대, 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식물이 집합해 있으며,지리학적으로 고산 수직 자연대(高山垂直自然帶)의 분포에 속한다.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 구름꽃다지, 백리향, 만삼, 왜당귀 등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입기 전의 식물종들이 자란다.[4]

지질 환경 변천사[편집]

백두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약 200 ~ 300만년 전 제4기 분출로 백두산의 천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300여 년 동안 3차례의 분출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화산암-현무암 대지, 경사진 현무암 고원 등이 형성되었다. 목탄(木炭) 등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는 화산 분출 전후의 백두산이 빽빽한 삼림이었음을 증명한다. 여러 광물질이 함유된 화산재는 비옥한 토양을 형성하여 동식물 번식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에 현존하는 사서(史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세기와 10세기에 백두산의 분화가 있었다. 이 가운데 946년 백두산 분화는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발해 멸망은 926년으로 20년이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백두산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10세기 중반에 폭발하여 그 화산재가 멀리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까지 날아갔다. 당시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분출한 화산재의 양은 100 ~ 150 km3로 추정되는데, 이는 2010년 유럽의 항공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분출량(0.11 km3)의 1천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사서(史書)의 기록 등에 따르면 1413년, 1420년, 1597년, 1668년, 1702년 등에 백두산이 화산재나 화산가스를 내뿜었거나 이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세종 2년(1420년) 5월, 천지의 물이 끓더니 붉게 변했다. 소떼가 크게 울부짖었고 이러한 현상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 검은 공기는 인근지역으로 가득 퍼졌다."
  • "현종 9년(1668년) 4월, 한양과 함경도 등 일대에 동시에 검은 먼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 "숙종 28년(1702년) 6월, 한낮에 함경도 지역 일대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린내가 나는 황적색 불꽃이 날아왔다. … 같은날 인근 지역 현성에서는 연기가 가득한 안개가 갑자기 북서쪽 지역에서 몰려들어 … 사방에 생선 썩는 냄새가 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눈송이 같이 날라 다니던 재는 1촌(약 3cm) 두께로 쌓였고, 재는 마치 나뭇조각 같았다."

이후 백두산은 1925년 마지막으로 분화한 후 90여 년 넘게 화산 활동을 멈추었다.

백두산 부근의 국경과 영토 분쟁[편집]

1712년(숙종 38년)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경계비인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졌다. 정계비가 세워진 곳은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4 km 떨어진 해발 2,150m 지점이었다. 백두산은 현재 천지를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두 나라는 1962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김일성(金日成)이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천지(天池)를 분할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백두산의 북서부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남동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하며,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지도들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쪽 산마루를 이은 선'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天池)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 전체와 비룡폭포(장백폭포)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반면, 중화민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간도협약 당시 국경으로 삼은 석을수보다 남쪽에 있는 홍단수를 두만강 상류의 국경으로 보았으나, 현재는 간도 협약에 따른 석을수를 국경으로 보아 천지와 장군봉(將軍峰) 등을 전부 중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관광[편집]

백두산관광 지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거의 중화인민공화국 영역을 통해 백두산을 오른다. 백두산에는 많은 자연 온천이 있고, 두갈래의 형제폭포와 중국 쪽의 비룡폭포 등 여러 개의 폭포가 있다.

국가보안법에는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지만, 북한 실효지배 지역을 거쳐서 등산을 하더라도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기소한 적은 없다.

천지 구역은 북한과 국경으로 정확히 절반으로 갈리기 때문에, 정상 및 천지 부분에서 지정된 경로 및 구역 외에 함부로 이탈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정상 부근에 파견 나간 중국 공안들의 통제도 꽤 심하다. 한국인이 백두산 정상 및 천지에서 태극기를 펼치거나 애국가나 아리랑 등의 민족적 색채가 짙은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사진 촬영조차 상당한 통제를 받는데, 중국 당국으로부터 사전에 정식으로 촬영허가를 받은 특수한 경우 말고는 일반적으로 백두산 천지 및 정상의 풍경을 담는 사진 촬영은 인물을 포함하는 기념사진 촬영의 범주에서만 허락되고 있다.

중국 땅을 거쳐 가는 경우 이런 불편함과 눈칫밥을 감수해야 하다보니, 2000년대 초중반 북한과의 교류가 많았을 때는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가보자는 목소리들도 많이 나왔다. 실제로도 당시 한국 정부에서 북한과 함께 금강산 관광에 이어서 북한 삼지연공항행 항공편을 통한 백두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실무적인 문제 및 수익성 검토 등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금강산 관광을 갔던 관광객을 북한군 초병이 사살하는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논의가 무산됨은 물론 금강산 관광조차 중단되어 버려 결국 북한을 통한 백두산 관광은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못했다.

북파 코스(北坡)[편집]

중국 쪽에서 자동차를 타고 올라가는 코스다. 가장 먼저 개발된 관광 코스다. 때문에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코스. 정상 부근 기상대까지 자동차로 오른 후 5분이면 천문봉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보는 관광 코스로서, 비룡폭포 좌우로 한정된 부분만 오르는 산행 코스다.

서파 코스(西坡)[편집]

중국 쪽에서 걸어서 올라가는 코스다. 산행을 하려면 이 코스가 좋다. 백두산 서파 시작지점에서 표를 산 후 지프차 또는 버스를 통해 오를 수 있다. 중국에서도 생태여행 코스로 개발하여, 보존된 원시림(금강대협곡)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서파 코스는 대체로 완만하여 지프차 또는 버스에서 내려 청석봉 아래 37호 경계비가 있는 천지에 40여분이면 오를 수 있으며 천지에서 청석봉까지 오르는 코스와 북파까지 종주하는 코스가 있다.

서파 코스에는 서파 37호 조중 경계비와 그 주변 경치, 경계선 등 볼 거리가 많다. 이 코스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통일부의 허락 없이 한국인들이 북한이 실효 지배하는 이북 땅을 밟을 수 있게끔 하는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라고 하는데, 등산객들이 조중 경계비인 서파 37호 근방의 몇백 미터 북한 량강도 삼지연 땅을(이북5도에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 밟을 수 있다. 즉, 한국 국민으로서 위험하지 않고, 합법적으로 북한 땅을 밟을 수 있는 방도다 하지만 2018년 6월 기준 경계비를 넘어갈 수 없도록 철제 울타리를 설치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대개 백두산 여행 상품들은 북한 접경 지대 관광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백두산 관광은 북한을 상당히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남파 코스(南坡)[편집]

중국에서 오를 수 있는 코스다. 비교적 근래에 홍보되고 있는 코스로, 개마고원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과 가장 근접한 코스라서 안전 문제로 개방과 폐쇄가 반복되고 있다. 관광 시설이 부족하지만 북파와 서파에 비해 천지에 가깝게 접하다 보니, 인근 주민들이 선호한다고. 입장료도 북파나 서파에 비해 비싸다.

동파 코스(東坡)[편집]

북한에서만 오를 수 있는 코스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은 2018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방북한 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이 코스를 가지 못하고 있다.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을 넘어가는 코스로, 북한에서 관광용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차량으로 이동 가능한 산 중턱부터 정상쪽인 향도봉(망천후)까지는 지상궤도열차 향도봉호가 있고 이후 향도봉에서 천지까지는 케이블카 천지삭도가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오를 수 있다. 지상궤도열차 향도봉호는 1989년에 설치되어 2km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케이블카 천지삭도는 오스트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1995년에 설치되어 1.3km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케이블카 하나에 4명이 탑승할 수 있고, 왕복에 7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5]

분화 가능성과 위험성[편집]

2005년 이후 천지의 지하 2~5 km 하부에 화산지진이 증가하고 있는데, 2003년 이후 활발한 지진현상과 함께 천지 주변의 외륜산 일부 암벽에서 균열과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지 주변 온천수의 수온이 최대 83도까지 높아졌고 화산활동 직전에 나타나는 헬륨과 수소 등 마그마성 가스성분이 증가하였으며, 백두산 천지 칼데라 주변의 암석 틈새를 따라 화산가스가 새어나와 주변 일부 초목이 고사되기도 했다. 천지의 10~12 km 지하에 규장질(알칼리유문암-조면암) 마그마의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규장질 마그마는 상대적으로 높은 점성으로 인하여 엄청난 양의 용존 고압가스를 붙잡아 둘 수 있다. 이 마그마가 지표로 상승하여 임계조건을 넘으면, 일시에 고압의 화산가스가 팽창해 강렬한 화산 쇄설물(화산재 및 부석)의 대폭발을 수반하여 분화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천지 지하에서 발생하는 잦은 화산성 지진으로 천지에 담겨 있는 20억t의 물이 지하 암반 틈새를 따라 지하 마그마하고 만나는 경우 더 큰 화산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폭발의 규모는 10세기의 대폭발보다는 훨씬 작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두산 대폭발 정도 규모의 분화는 지구 전체 규모에서도 수천 년에 한 번쯤 일어나는 매우 드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규모 7.5 이상의 강진하고 함께 천지에서 지진해일이 일어나면, 천지의 물이 한꺼번에 쑹화강,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 흘러가 대규모 홍수 피해가 예상됨과 동시에, 북한하고 중국 일대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분출되는 화산재는 대한민국과 일본, 러시아, 대만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백두산은 사화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지막 분화이후로 폭발이 없었던 사실과 7차례에 걸쳐서 분화를 했고 마지막 분화 때 대폭발의 영향으로 화산 정상이 사라지고, 대신에 칼데라가 형성되었으므로, 이미 화산 활동을 종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백두산이 분화한다면 그것은 자연적인 영향이 아니라 북한의 핵실험에 의한 인공적인 영향이며, 영향을 받아도 칼데라 밑에 잔존하는 마그마를 어느 정도 활성시키는 데 그치므로 대규모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예측이 있다. 물론 백두산이 일정규모로 폭발하면 당연히 칼데라의 천지가 범람하여 그 인접지역은 홍수를 겪을 확률이 높다.

관련 뉴스[편집]

  • 북한의 미래 엘리트 간부가 될 학생들이 눈보라를 헤치고 백두산에 등정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조선중앙TV는 2022년 11월 14일 밤 “죽어도 혁명신념 버리지 말라는 철석의 신념을 심장마다에 쪼아박았다“며 조선노동당 중앙간부학교 답사대원들이 백두산에 올랐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학생들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눈 덮인 백두산에 올랐으며, 정상에 올라 다 함께 만세를 위치기도 했다. 노동당 중앙간부학교는 1946년 6월 설립된 중앙당학교가 전신으로, 평양에 있는 당 간부를 양성하고 재교육하는 최고 교육기관이다. 해당 학생들이 추운 날씨 속 백두산에 오른 것은 ‘군기’를 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이 학교를 방문해 강연하며 “당의 사상과 영도 중심을 확고히 다지는 사업을 강력히 진행하지 않으면 종당에는 사멸되고 만다”고 언급했다. 노동신문도 최근 “아무리 출신성분과 가정 주위 환경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부단히 교양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변질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청년들의 기강 단속에 나섰다. 한편 백두산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 상징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백두산밀영’이 있는 곳이다. 북한은 지난 2019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른바 ‘백두산 군마 등정’ 이후 각계각층의 백두산 혁명전적지 답사를 독려해왔다.[6]
  • 2022년 9월 26일 백두산에 첫 적설(積雪)이 관측됐다. 예년보다 나흘 가량 빠른 기록이다. 고려대기환경연구소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11분 백두산 적설이 관측됐다. 백두산 적설은 최소 20cm 이상 눈이 쌓여야만 인공위성 관측이 가능하다. 통상 해마다 9월 말부터 10월 초 사이 첫 모습을 드러냈지만 올해는 평년보다 빠르게 관측됐다. 연구소 측은 “백두산은 해발 2000~2744m 구간이 평지(해발고도 0m) 보다 약 15도가량 기온이 낮다”며 “적설이 발견된 것은 백두산 정상 부근 기온이 이미 영하 6도 안팎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두산 정상 부근은 해발고도가 낮은 주변보다 계절 변화가 2달 가량 빠르게 찾아온다. 현재 우리나라는 완연한 가을 날씨를 지나고 있지만, 백두산에는 이미 겨울이 찾아왔다는 뜻이다. 백두(白頭)란 이름도 백두산의 적설 때문에 붙여졌다. 눈 때문에 산의 머리가 하얗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난화 등의 여파로 천지에 쌓인 눈의 양이 줄어드는 등 백두산도 기후변화를 겪고 있다. 고려대기환경연구소는 1997년 10월부터 매년 인공위성을 이용해 백두산의 첫 적설을 관측, 보고하고 있다.[7]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백두산〉, 《위키백과》
  2. 백두산〉, 《네이버 지식백과》
  3. 천지〉, 《위키백과》
  4. 백두산(白頭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백두산〉, 《나무위키》
  6. 최아영 기자, 〈눈보라 헤치며 백두산 오르는 北학생들...군기잡기?〉, 《매일경제》, 2022-11-05
  7. 박상현 기자, 〈백두산 올해 첫 적설 관측…예년보다 나흘 빨라〉, 《조선일보》, 2022-09-2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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