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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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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폭스바겐(Volkswagen)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이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인하여 독일이 서약한 베르사유 체제, 대공황 이후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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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독일오스트리아 사이를 흐르는 인(Inn) 강변의 오스트리아 쪽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6남매 중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렸으며 '볼프'라는 별명도 있었다. 세무 공무원이었으나 학력이 낮았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의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폭력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진학문제로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고, 상급학교 진학 이후의 학업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했다.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매우 엄했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하는 일은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1903년 1월에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가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5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밑돌았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청년 시절[편집]

1903년부터 고아연금자로서 살다가, 어머니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1907년 9월부터는 비엔나에서 살았는데 1910년에 히틀러는 징병 신체검사를 받고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야 했으나 히틀러는 징병신체검사를 기피하고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고, 1911년에도 징병 신체검사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1913년 5월에 독일 뮌헨으로 갔다. 1907년 비엔나로 여행을 떠나, 비엔나 예술대의 일반 미술학교에서 112명의 후보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되었으며, 준비해 간 미술화보집으로 79명의 응모자와 함께 2차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28명 만이 최종시험을 합격하게 되고 히틀러는 여기에 들지 못하게 되었으며, 아돌프는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했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주며,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하였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 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으며,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의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비엔나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겼다. 현재 히틀러의 작품 중 한 점이 한화로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기도 했다.[1]

제1차 세계대전[편집]

제1차 세계대전 참전기의 히틀러(1914년)
아돌프 히틀러가 받은 당원증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참전
히틀러가 캠페인 기간 동안 연설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의 히틀러(1933년)
히틀러가 1938년 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
1942년 전투 계획을 히틀러가 지휘

독일 제국[편집]

아돌프 히틀러는 1913년에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가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았다. 이유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으며,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7월 말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시절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받은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정치 데뷔[편집]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하였으며, 당원증 제55번을 받았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스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이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도 히틀러는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 정치 강행, 베르사유 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다국적 기업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으로 된 나치당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으며,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비록 수감 생활은 6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재건은 쉽지 않았으며,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좌파와 우파 정당중에서 극단적인 정당들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으며,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 표(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 후보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집권[편집]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 세력,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인사 등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고, 기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강조하여 인기를 모은 뒤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 체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퓌러 겸 국가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퓌러(Führer)라 칭하였으며 보통 총통으로 불린다. 전권 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으며,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전 세계를 정복하면 전 세계의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를 계획했다.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 계획은 도중 중단되었으나 굉장히 치밀하고 크게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를 고용하여 1938년에 인구 1억명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게르마니아를 조성하기 위해 슈페어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고 18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세웠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공사가 중단됨은 물론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1]

자동차 산업[편집]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공학 박사는 1931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에 스포츠카와 경주용 자동차를 전문 제작하는 포르쉐 엔지니어링 오피스(Porsche Engineering Office)를 설립했다. 아들인 페리 포르쉐와 사위, 옛 동료들과 힘을 합쳐 회사를 설립한 포르쉐는 초기에는 중형차 위주로 제작을 하다 사세를 확장하면서 다른 자동차 메이커의 콘셉트카를 외주 받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경주차에도 관심이 많았던 포르쉐는 1934년 실버 애로우(Silver Arrow)로 불렸던 P-바겐(P-Wagen)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 일생일대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전쟁광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의 인연이다. 1933년 독일의 수상이 된 그는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우선 경제부흥을 위해 자동차 산업의 성장이 우선돼야 했고 같은 맥락에서 고속도로의 건설도 필요했다. 히틀러가 생각한 경제부흥책은 국민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해 산업 경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소형차에 관심이 많았던 포르쉐에 주목했고 이듬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히틀러는 포르쉐와 마주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다. 어른 2명과 아이 2~3명이 충분히 탈 수 있어야 하며 7L의 연료로 100㎞를 갈 수 있을 것, 또 값은 1,000마르크 이하일 것 등이다. 그러면서 이 차의 개발에 필요한 공학 연구소를 만들어주고 연구비 등도 전부 지원해 주기로 했다. 포르쉐가 우려했던 가격 문제는 국민들이 우표 900마르크 어치를 구입하면 차 한 대를 준다는 방식으로 국민차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공개된 프로토타입은 수평대향 4기통 1.1L 엔진에 최고 속도 98㎞/h, 최대출력 26.5마력의 성능을 지녔다. 간단한 구조와 우수한 내구성이 장점이었다. 특히 후면에 위치한 엔진과 후륜구동의 RR방식은 나중에 포르쉐가 설계한 차들의 시초가 됐다. 디자인에 불만을 가졌던 히틀러는 70일간의 성능 테스트 결과를 보고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이 차의 이름을 KdF(Kraft durch Freude)라고 불렀는데 기쁨의 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포르쉐는 히틀러와 달리 이 차의 이름을 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DLS 폭스바겐(Volkswagen)으로 불렀다. 독일의 소형차 생산을 예의주시하던 미국에서는 이때부터 이 차의 외관에서 모티브를 얻어 비틀(Beetle, 딱정벌레)로 부르기 시작했다. 천재적인 디자이너에 의해 탄생한 소형차 비틀은 뛰어난 성능과 내구성, 앙증맞은 디자인,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국민차 비틀의 판매로 거둬들인 돈은 고스란히 전쟁 준비에 쓰였다. 전쟁 중에 폭스바겐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바뀌었고 비틀은 생산이 중단됐으며 그동안 만들어 두었던 KdF는 전쟁에 이용됐다. 히틀러는 비틀의 주문과 함께 포르쉐에 군용 탱크의 개발도 주문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포르쉐의 공장은 군용차 생산공장으로 변했다. 포르쉐 박사는 1934년 히틀러와 괴벨스의 주도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고 1937년에는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통칭 나치당과 히틀러 친위대인 SS에 가입하였다. 1942년에는 SS 상급 지도자 직위를 수여받아 독일군의 군사 차량 개발 및 생산을 책임지게 된다. 포르쉐 박사는 설계 노하우를 활용해 차량 외에도 전차 개발에 참여했는데 2차대전 독일군을 상징하는 티거 전차와 티거II 전차의 개발에 참여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려던 나치 독일의 야망은 2차대전의 패배와 함께 무너졌고 독일은 소련과 연합군에 의해 동서로 분단되는 최후를 맞이했다.[2] [3]

제2차 세계대전[편집]

전쟁 패전[편집]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 맺은 군사 동맹 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이라고 불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 개입을 삼가고 있었다.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 유럽과 스웨덴을 제외한 북부 유럽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영국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배틀 오브 브리튼이 실패했음에도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흘 후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나 허스키 작전에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고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반격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게 패하고 치타델 작전의 대표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죽음[편집]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발터 P38 권총으로 자살하게 되며, 그의 향년이 57세였다.[1]

논난[편집]

평가와 비판[편집]

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독일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경제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나, 그러나 그가 내놓은 실업 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지도자들이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단지 그 기획안을 일부 수정하여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사망 원인과 두개골[편집]

2009년 9월 27일,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의 주말판 옵서버에서 미국 코네티컷 대학 고고학자이자 뼈 전문가인 닉 벨란토니 교수가 분석한 결과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두개골은 40대 미만의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벨란토니 교수가 이 두개골이 40대 미만의 여성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를린 점령 직후인 1945년, 소련은 벙커 주변 구덩이에서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고, 이듬해인 1946년 추가발굴을 통해 히틀러의 두개골 조각을 찾아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2000년, 러시아는 국가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을 공개하였다. 이 때부터 벨란토니 교수는 러시아 측이 '히틀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개골의 DNA를 분석하였는데, 분석 결과 이 두개골은 20대에서 40대 사이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어서 벨란토니 교수는 "두개골 두께가 남성의 것과 달리 너무 얇았으며 두개골의 봉합선도 1945년 57세였던 히틀러의 나이와 달리 40세 이하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많은 외신들은 히틀러가 진짜 권총 자살했는지 의문시 되는 검사결과라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지 않았거나, 두 번째는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하고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이 히틀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현재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생존설[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금까지도 히틀러가 당시 자살하지 않고 생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면 히틀러는 피신하여 빨라도 1960년대까지는 생존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존설 주장은 여러 가지로 주장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남극에 있는 비밀 기지로 도망갔다거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거주하다 1971년 사망했다거나, 아르헨티나로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지구를 떠나 달로 도주했다는 등의 설들이 있으며, 그의 여러가지 생존설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1]

각주[편집]

  1. 1.0 1.1 1.2 1.3 아돌프 히틀러〉, 《위키백과》
  2. 페르디난트 포르셰〉, 《나무위키》
  3. 안광호, 〈(세기의 車 디자이너)8. 포르쉐 왕가의 전설, 페르디난트 포르쉐〉, 《경향비즈》, 2013-04-1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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