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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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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movie)는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촬영하여 영사기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이다.[1]

개요[편집]

영화는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와 기계 기술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는 재정을 책임지는 제작자스튜디오·카메라·녹음·현상 등의 시설이 있어야 하며, 작품을 감독하며 시나리오작가·배우·촬영기사·미술가·음악가·편집자가 공동으로 작업해서 이루어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관객이 볼 수 있게 되려면 배급업자 또는 흥행업자와 영화관이 있어야 하며, 광고가 따라야 하고 영화평론가들의 평가도 있어야 한다. 영화는 결국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나게 됨으로써 대중전달의 기능을 발휘하고 거기에서 상품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되며, 관객에게 심리적 영향을 줌으로써 예술적 또는 오락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영화는 오늘날 예술의 한 갈래이면서,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선 넓은 사회 문화적인 복잡한 현상이다. 영화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카메라·필름·영사기이다. 이것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과학과 공업이 만들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취급되고 하나의 테크놀로지로 논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새로운 사회적 언어로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영화는 오락으로서, 그리고 흥행으로서 그 양상은 대중을 상대로 한 매스미디어가 되었으며, 텔레비전 등장과 더불어 시각 정보의 전달 매체,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수단, 새로운 기호체계로서 연구, 인식되어가고 있다.[2]

역사[편집]

인간이 영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랜 옛날의 일로,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은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기는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암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s)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환등의 개념으로 나타나 17세기 이후에는 세계 각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757년에 I.B.베커리(I.B. Bakery)는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의 염화물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특히 1802년에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Wedgwood)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 지었고, 이어서 죠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1822년에 아스팔트 감광층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 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나게 되었고,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4년에 와서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젤라틴지의 박리 필름을 사용했고, 1887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 즉,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 필름 등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이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와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ere)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해 3월 22일 렌가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어 있다. 이전에도 비슷한 장치가 고안되어 있었다. 즉, 1889년에는 미국의 발명왕인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다. 원래 이것은 한 번에 한 사람씩밖에 볼 수 없도록 된, 들여다보는 식의 기계였는데, 이것을 스크린에 비추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려는 연구가 여기저기서 행해졌다. 미국에서는 토머스 아매트프랜시스 젠킨스가 바이타스코프(Vitascope)와 판타스코프(Phantascope)를 발명하였고, 독일에선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Bioskop)를, 오스카 메스커의 비오폰(Bio­phon)을 발명하였고, 영국에서는 윌리엄 폴이 애니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에디슨도 바이타스코프를 발표했고, 이탈리아러시아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소개되었다. 그중에는 색깔을 나타내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이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모두 공통적이었다. 더구나 이 장치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각자의 나라에서 고안되고 공개되었다는 것이 다른 발명과 다른 점일 것이다. 영화의 발명은 사진에 의한 화상의 기록이나 분해사진에 의한 움직임의 재현이며, 셀룰로이드 필름에 의한 장시간의 투영 등 필요한 원리와 재료가 이 무렵에 이미 고안되어 있어서, 이것들을 짜 맞추기만 하면 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 시대의 발명이라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로 영화를 대표케 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기술적으로 잘 되어 있었고,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보면 현대예술의 총아인 영화는 19세기의 한밤중에서 20세기의 첫새벽에 걸치는 사이 근대의 과학 속에서 잉태하여 태어났다. 동시에 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영화는 그 후 불과 4~5년 안에 전 세계의 각지로 퍼지게 되어 영화는 20세기의 예술로서 눈부신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뤼미에르 형제는 속성 카메라맨을 양성하여 세계 각국에 파견, 진기한 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그 필름을 시네마토그래프의 기계와 함께 팔았다. 그는 영화를 이처럼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프랑스의 멜리에스(Georges Melies)는 첫 공개된 시네마토그래프에 감동한 한 사람이었는데, 특허권을 사려고 협의했으나 뤼미에르에게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영국의 기계를 사서 제작에 착수했다. 그의 작품은 뤼미에르의 것과는 달라, 트릭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촬영을 중단하고 인물이나 무대의 모양 바꿈을 하는 빠른 변화를 비롯하여 많은 트릭을 시도했다. 원래 마술사이며 자동인형의 고안자이고 연출가이기도 했던 멜리에스는 전용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여러 가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중에서도 '월세계 여행'(1902)은 대표적인 대작이다. 줄 베르느(Jules Verne)와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의 소설에서 힌트를 얻은 이 영화는 다분히 공상적인 장면을 전개했다. 별의 관찰, 탐험대의 동굴 탐험 등으로 엮어진 이런 식의 영화는 수많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극 장면을 짧은 여러 토막으로 나눈 것 같은 것으로, 전체의 이야기도 공상적이고, 각각의 장면들도 자못 환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멜리에스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제재를 즐겨 다루었으며, 이것을 솜씨 있는 장치나 트릭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즉 뤼미에르는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 데 반하여, 멜리에스는 도리어 꿈을 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영화의 표현력을 살리는 방법으로서, 얼핏 보기에 정반대로 보이는 이 두 개의 방향을 향하여 영화의 표현은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멜리에스마저도 영화를 무대란 생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비록 장면을 짧게 세분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장면을 같은 위치에서 단숨에 촬영하는 것인데,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촬영법이다. 흔히 1장면에 1커트란 말이 있는데, 초기의 영화는 이러한 촬영법에 한정되어 있었다. 영화 보급은 의외로 빨라서 20세기에 접어 들자 세계 각국에서 영화를 상연하고 또한 제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대극과 같은 촬영방법은 어디서나 공통적이었고, 영화의 내용도 상당히 무대적이었다. 1910년경까지의 영화는 많아야 1에서 2롤짜리가 대다수였다. 무대극과 다른 것은 30분 미만의 짤막한 영화라는 점이며, 그 범위 안에서 무대극이나 유명한 실화를 영화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중의 관심은 대단히 높아서 순식간에 영화관이 급속히 늘었다. 이 시대의 특색은 희한한 구경거리로 등장한 영화가 흥행이라는 형식으로 성공을 거둠으로써 제작계가 이에 자극을 받고, 차차 기업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용은 빈약했지만 일반의 호기심을 끌었다.

초기의 영화가 활동사진(moving picture)이라 불리고, 과학적 완구라고 불리면서 전세계에 퍼지게 된 것은 그만큼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여러 발명국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시아 지역에 영화가 건너온 것만도 일본이 1896년이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기는 1903년, 만주에서는 1901년 등이었으니 그 전파의 속도를 알 수가 있다. 영화에 대한 전세계의 호기심은 재빨리 각국에 수많은 촬영소와 극장을 속출하게 했다. 미국에는 장차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영화의 메카가 건설되어 가고 있었으며, 프랑스에는 파테나 고몽이 창설되었고, 독일에는 비오그래프를 효시로 우파 등이 창설을 보았고, 영국에서도 파카를 필두로 수많은 제작회사가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발명과 함께 전세계에 엄청난 관객을 얻게 되었고, 여기에 발맞추어 세계 각국에는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영화제작회사와 배급회사가 출현해 활동사진의 정착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활동사진은 단순한 과학적인 완구로서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초기의 활동사진이라면 대개 단척물의 짤막한 필름이었다. 500피트에서 1,000피트 또는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들이다. 조르주 멜리에스(George Melies)의 대표적 작품인 '월세계 여행'이나 '잔 다르크', 미국에선 에드윈 S.포터(Edwin Stanton Porter)가 만든 '대열차강도' 같은 것도 고작해서 15분에서 20분 내외의 필름이었다. 한때 미국에서 '체이스 픽처'라든가 '헤일의 전망차'라고 불리었던 것이 유행한 것도 모두 활동사진의 초기였던 1910년 내외까지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필름 다르(film d'art)에는 당대의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참가했다. 1909년에 만들어진 '기즈공의 암살사건'을 필두로 해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 등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으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마담 레잔느(Rejane)·막스 디어리(Max Dearly) 등 무대인이 출연했고, 레지나 파테, 트레하노바 라벨 오텔로(Trehanova Label Otelo) 같은 무용가들이 발레 영화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대체로 로마네스크식의 멜로드라마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 필름 다른 운동은 영화에 풍부한 스토리를 도입했고, 본격적인 연기자를 출연하게 하는 등 공로도 많았으나 한편으론 영화를 무대의 종속물처럼 만들었다는 비판도 듣게 되었다. 무성영화의 중기라는 1910년대~1920년대 초에 걸쳐서는 세계 각국의 영화가 각자의 입장에서 영화 표현의 수법을 모색·연구하여 제재나 표현양식에서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사극영화가 가장 번성하여, '폼페이 최후의 날' '쿼바디스' '카비리아' 등에서 스펙터클이라는 영화 분야를 확립하고, 북유럽에서는 스웨덴의 '생련사련', '영혼 불멸' 등과 같은 신비주의적 드라마에 의한 수작을 낳았으며, 독일에서는 '이기주의자'(1919) 등으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영화가 주목을 끌었다. 프랑스는 아벨 강스의 '철로의 백장미'(1923)와 같이 영상인 아름다움을 구사한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이러한 영화 예술이 본격적으로 탐구되어 뛰어난 개성을 가진 작가가 계속 등장하며, 화려한 영화예술의 개화를 보게 되는 것은 사일런트 후기이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수많은 명작을 발표했다. 루이 델뤼크(Louis Delluc), 제르메느 뒬라크(Germaine Dulac), 장 르누아르(Jean Renoir), 장 에프스탕(Jean Epstein), 자크 페데(Jacques Feyder), 르네 클레르(Rene Clair) 같은 작가들 모두 빛나는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카를 테오도르드레위에르(Carl Theodor Dreyer)의 '심판받는 잔'(1927)은 클로즈업의 연속으로써 드라마틱하게 인간 심리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했고, 클레르는 '이탈리아제 맥고 모자'(1927)로 지적인 우화 영화를 시도했으며, 페데(Jacques Feyder)는 '눈사태'(1925)와 '님의 모습'(1926)으로 비극적인 인간세계를 풍부한 정서로 그렸고, 에프스탕은 '아서 가의 후예'(1928)로 신비한 분위기를 훌륭하게 빚어냈다. 독일에서는 G.W.팝스트(Georg Wilhelm Pabst)의 '마음의 신비', '판도라의 상자'(1929)와 프리츠 랭(Fritz Lang)의 '니벨룽겐 이야기'(1924), '메트로폴리스'(1927), 헤리크 갈렌(Henrik Galeen)의 '프라하의 대학생'(1926), F.W.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의 '최후의 사람'(1925), 요에 마이(Joe May)의 '귀향'(1928) 등에서 주로 사극이나 사회극을 취재하여 역작을 내놓았다. 미국에는 또 다른 커다란 업적이 영화예술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데이비드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는 작품 '국민의 창생'(1915)과 '인톨러런스'(1916)를 만들어 미국 영화 사상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상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장척의 필름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습관을 깨뜨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세웠다.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국민의 창생'은 영화사상 처음 보는 박진감이 넘치는 스펙터클한 것이었으며 '인톨러런스'는 파르타자르 왕조의 바빌론, 그리스도의 생애, 산 바르톨로메 학살, 현대의 계급적인 갈등 등 네 개의 에피소드를 엮은 20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만들었다. 한편 그리피스의 영화 속에서는 지금까지의 구경거리의 활동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기법이 생생하게 발견되었다. 클로즈업이라든가 몽타주 수법 같은 것이 풍부하게 사용되면서 영화표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그리피스의 뒤를 이어 세실 데밀(Cecil B. DeMille)이 '어리석은 자의 낙원', '십계', '왕중왕' 등 대작 주의로 나아갔으나, 유럽에서 건너온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과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가 날카로운 표현법을 들여와 할리우드 영화에 감각적인 풍요함을 가져왔다. 그중에서도 슈트로하임의 '어리석은 아내'(1922) '그리이드'(1924)의 진지한 주구와 루비치(Ernst Lubitsch)의 '결혼 철학', '금단의 낙원'(1924), '명랑한 파리장'(1926)의 경묘한 풍속 묘사는 뛰어났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미국 영화에서 또 한 사람의 주목할 만한 작가는 찰리 채플린(Sir Charlie Chaplin)이다. 사일런트영화 시대의 희극을 대표하는 채플린은, 영국 무대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희극 단편의 주연자였으나, 실크 햇과 소리가 나는 헐렁한 구두를 신은 독특한 차림으로 성공을 거두어 한 사람의 배우에서 감독으로까지 진출했고 '개의 생활', '키드', '거리의 등불', '황금광시대', '독재자' 등의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으며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겸했다. 그의 희극에는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이 깔려 있고 폭력·불의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으며 인간의 편에서 기계문명과 비뚤어진 사회제도에 대한 가차 없는 고발이 숨어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채플린의 희극에서 영화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채플린은 메리 빅포드(Mary Pickford), D.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등과 함께 미국 영화의 진원지인 할리우드를 만드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사일런트 말기의 미국영화는 기업과 작품의 양면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확립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대전으로 유럽의 영화계가 지친 틈을 타서 단숨에 시장을 넓혀 나갔으며, 이에 따라 상업주의가 번성해져서 스타 시스템을 내세워 오락 영화로 기울어 갔다. 루돌프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릴리언 기시(Lillian Diana Gish),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 등 많은 스타들을 낳았고 '포장마차', '철마' 같은 서부극에서 독자적인 장르를 만들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부터도 배우·감독을 널리 모아들여 국제적인 영화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앞서 말한 슈트로하임, 루비치를 비롯하여, 조지프 폰 스턴버그(Josef von Sternberg), 모리츠 스틸러(Mauritz Stiller), 로타르 멘데스(Lothar Mendes), 윌리엄 디털레(William Dieterle), 프리드리히 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 등 감독만도 유럽에서 모은 인재는 많고 다채롭다. 그 무렵 유럽 영화가 더욱 개성이 두드러지게 강화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미국 영화가 세계의 예술가를 모으고도 그들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감각적인 작품들, 이탈리아의 스펙터클 취미, 독일의 사회파 등과 같은 특성 중에서 각 작가들에 의하여 더욱 분화된 스타일을 보였다.

1917년의 혁명 이래 영화는 국영이 되어, 체제가 갖추어지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했으며, 1925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의 '스트라이크'에 의해 비로소 러시아 영화는 개화기를 맞이했다. 이듬해의 '전함 포템킨', 푸도프킨(V. I. Pudovkin)의 '어머니', 그리고 1927년에는 에이젠슈테인의 '10월', 푸도프킨의 '성 페테르부르크의 최후' 등이 대표하는 것처럼 이 두 작가는 혁명과 대중을 제재로 하여 이 나라의 역사적인 의의를 테마로 빼어난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의 성과는 자기 나라의 역사에서 주제를 택했고, 외국 영화에서 표현 기법을 본받아 이것을 발전시켰다. 몽타주가 영화의 창조적인 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 영화들로 실험하면서, 이론적으로도 추구하여 이른바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을 이루었다. 몽타주 이론이란 영화예술의 특수성이 영화의 편집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란 단순한 필름에 절단과 연결의 작업으로서의 편집(editing)이 아니라 메트릭 몽타주, 리드믹 몽타주, 토널 몽타주, 오버 톤 몽타주, 지적 몽타주 등을 요약해 영화 속에 몽타주 적인 변증법적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동양의 문자가 갖춘 상형 성에서 몽타주의 원리를 찾기도 했다. 몽타주 이론은 그리피스에서 영향을 받아 이들에게 와서 독특한 영화 이론을 이루었으며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인 미학을 이루기도 했다. 사일런트 말기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영화가 몽타주 표현에 의해 어디까지 그 재래식 영화의 테두리를 타파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 같은 자유롭고 용감한 실험적 작품이 생겨, 아방가르드 영화라 불리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점이다. 물론 영화의 표현에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는 것은 일찍부터 실시되었으나, 그것이 질과 양이 함께 크게 발전하여 화려한 시기를 이룬것은 사일런트 말기의 수년 간에 불과하다.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은 중점적으로 말하면 영상적 표현의 본질을 찾아낸 전위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너무나도 많은 대중의 열광 때문에 전세계의 영화계는 영화의 상업성에 눈이 멀어버린 감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는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화 본류의 미학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순수영화·절대영화·인상주의·입체주의·초현실주의 등을 내걸면서 영상이 인간의 내부세계, 즉 의식의 세계를 그려내는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했다. 시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영상의 가능성은 다 실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은 1913년 이탈리아의 한 다락방에서 리치오니 카뉴도(Ricciotto Canudo), 다눈치오(Gabriele d'Annunzio), 상드랄, 아폴리네르, 피카소, 페르낭 레제,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16년에 '미래파 영화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운동은 2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작품 발표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독일의 발터루트만('대도회교향악') 등이 기계적인 몽타주에 의해 화면의 의미를 거부하고 시각음악적인 표현을 노린 데 반하여, 프랑스의 많은 작가가 주로 조형감각에서 사상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과 같은 차이를 볼 수 있다. 당연히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는 영화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프랑스에서도 처음에는 도형이나 추상적인 영상에 의한 작품이 시도되었지만, 뒤에는 의미를 가진 구상적인 영상을 통하여 날카롭고 깊은 의도를 내포시키는 작품이 주류를 차지했다. 그 중에도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제르메느 뒬라크의 '조개껍데기와 수도사', 장 비고의 '품행영점', 장 콕토의 '시인의 피', 만 레이의 '인산인해'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논의를 일으켰다. 그 외에도 루이 델뤼크, 제르메느 뒤락, 장 에프스탕, 르네 클레르, 한스 리히터, 비킹 에겔링, 아벨 강스 등이 속출하여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예술운동의 과도기였다는 점과 함께 문학·음악·미술·연극 부문의 전위예술가들이 참가했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영화예술은 영혼과 포에지와 아름다움을 찾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화는 20년대에서 30년대로 넘어가면서 전세계를 휩쓰는 대중적인 매체로서 또 한편으로는 영상 예술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화의 예술성과 기업성이라는 양면의 칼날은 기능이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해하는 모순도 지녔다. 전위영화는 너무나 예술지상주의적이거나 관념적·형식주의적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떠나, 토키 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그 유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토키 시대는 1926년의 비타폰(Vitaphone)의 발명으로, 영화는 사일런트 시대의 무성에서 토키(talkie) 시대의 발성영화 시대로 넘어가 시청각의 종합매체로 발전했다. 1927년에 뉴욕에서 공개됐던 '재즈 싱어'는 토키의 제1작으로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레코드를 동시에 돌리는 그때까지의 불완전한 방식과는 달리, 필름에 녹음된 소리는 화면과 완전히 일치하게 된 후부터 급속히 보급되어, 수년 동안에 영화는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토키 시대에 들어갔다. 그것은 영화에 있어서 단순한 기술혁명에 그치지 않고, 예술적으로나 기업적으로 새로운 체제를 필요로 했다. 마이크로폰은 카메라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몽타주 방법도 화면만의 사일런트 영화가 일단 확립된 데다 수정을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은 저절로 대규모화하여 영화 산업은 더욱더 대자본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변화는 음악이나 자연음은 물론 대사를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화 내용이 갑자기 연극과 문학의 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르네 클레르, 자크 페데, 장 르누아르, 줄리앙 뒤비비에 등 우수한 감독의 활약에 의해 또다시 예술의 난숙기를 맞이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싸구려 오페라', '회의는 춤춘다', '제복을 입은 처녀', 'M' 등으로 '미완성교향악', '황온의 빈'을 만들어 낸 오스트리아와 함께 충실한 제작 활동을 보였고, 영국에서는 히치콕 등의 극영화와 '유망어선', '야간우편열차', '아란' 등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에 빛나는 발전을 기록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스턴버그가 '모로코'를 발표했고, 마일스턴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루비치는 '러비 퍼레이드'를 만들어서 토키의 화려한 상업주의적 스타트를 장식했다. 연애 영화·전쟁 영화·뮤지컬은 서부극과 함께 그로부터 당분간 할리우드 영화의 주요 장르가 되었다. 게다가 사회악을 파헤친 '굶주린 아메리카', '암흑가의 탄흔' 등과 풍속희극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등이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특징지었다. 또 컬러 영화의 실용화와 함께 디즈니의 만화영화가 널리 대중의 지지를 얻은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1939년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할리우드 대작 주의의 승리를 보다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뒤의 영화예술은 가장 커다란 시련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1940년대에 이미 출연을 예고했던 텔레비전이 실용 단계에 이르러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후의 세계의 영화는 전쟁이라는 폐허 속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생생한 현실을 직시하는 네오리얼리즘이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나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등을 앞세우고 화려하게 등장했다.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등은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을 기조로 한 이 경향은 뒤에 가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상징성의 표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현대적인 추상, 그리고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새로운 사회적 감각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의 대담무쌍한 상징의 세계로 변모해 왔다. 프랑스 영화에서도 줄리앙 뒤비비에(Julien Duvivier), 크리스찬 자크(Christian Jacq), 크롤드 오탕 라라(Claude Autant-Lara), 르네 클레르를 비롯한 거장의 시대가 가고 '누벨 바그(새물결)'라 불리는 전후의 세대가 등장했다. 로마네스크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일상적인 사실성에서 인간의 진실을 찾으려는 이들 1960년대의 영화미학은 시네마 베리테라고도 불리었다.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장 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 루이 말(Louis Malle) 등 여기에 집결한 사람은 많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같은 사람도 뉘앙스는 약간 다르지만, 전후 프랑스 영화를 대표한다. 로베르 브레송은 '저항'에서,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은 '종형제'에서, 알랭 레네는 '히로시마, 나의 사랑' 등과 같은 걸작을 내놓고 있다. 장 콕토(Jean Maurice Eugene Clement Cocteau), 장 들라노아(Jean Delannoy), 르네 클레망(Rene Clement) 등 개성적인 작가가 르누아르·뒤비비에 등과 함께 전통적인 인간탐구의 드라마를 재연시켰다. 미국 영화도 전후에 들어와 할리우드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시네 도큐망 소시얼'이라고 불리는 TV 출신의 신인들이 괄목할 만한 활약을 시작했다. 특히 미국에서 유럽 아방가르드에 이어 그 전위적 정신이 언더그라운드 영화, 엑스퍼리멘탈 영화에 계승되었고, 그중에서도 극영화로 표출된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 불리는 경향으로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했었다. 그것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의 영화예술의 첨단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과 본능, 그리고 모순을 이들만큼 정직하고 대담하게 그리는 영화작가들은 없을 것이다. 근래의 작품으로는 아더 펜(Arthur Penn)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의 '졸업', 랄프 넬슨(Ralph Nelson)의 '솔저 블루',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의 '프렌치 커넥션' 등등이 이러한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다. 이 밖에도 영국에서는 여러 역작 감독들이 활약했고, 한때 '프리 시네마' 운동이 일어나 활력을 보이는가 했으나 리처드 크레이톤(Richard Clayton)이나 토니 리처드슨(Tony Richardson) 등이 몇 개의 작품을 냈고, 카렐 라이스(Karel Reisz)와 존 실레딩거(John Schlesinger) 등이 활약하고 있다. 또 유럽에서는 앞서 열거한 나라들 외에 폴란드, 스웨덴 등에서도 유망한 작품을 낳아, 각기 국민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작풍을 나타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각국의 영화조류나 경향을 따라서 본 것 이외에 세계적인 거장들이 활약한 점이다. 이러한 전후의 세계영화를 개관할 때 역시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에 본격화한 TV 시대에 마주 선 영화는 고된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련에 대항해서 영화는 컬러와 대형화면을 수없이 만들었다. 52년에 만든 시네마스코프 '성의'를 비롯해 '비스타비전 토드-AO', 70밀리 화면의 스크린, 이 밖에 입체영화도 시도했다. 그러나 일단 시련의 바람을 안은 영화는 앞에서 본 전후 각국의 전위적 움직임과 함께 격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즉 영화의 예술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시 구축해야 할 계제에 놓인 것이다. 안이한 기업성에 입각한 영화산업은 변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지금 360도 화면의 영화, 확대 영화, 멀티 화면, 환경 영화 등을 등장시키고 있다.[3]

장르[편집]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 공상 과학, 멜로 드라마 및 기타와 같이 다양하며 각각 고유한 시청자가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다소 임의적이며, 각 영화의 걸작에는 드라마, 스릴러, 코미디 등의 다양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장르는 서로를 관통하는 몇 가지 독특한 하위 그룹으로 나눌 수도 있다. 영화 장르의 정의는 할리우드의 영화적 다양성의 형성과 함께 형성되었다. 장르별 분류는 시청자가 특정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를 간단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드라마[편집]

드라마는 영웅의 사생활, 사회적 관계, 모순, 정신적 고통에 대한 깊은 이야기이다. 현실과 많은 시청자에게 매일, 일상 상황에 가깝다. 이것이 영화의 장르를 구별하는 것으로 복잡한 갈등, 전기, 군사 사진 및 멜로 드라마에 관한 가족 영화는 드라마 장르에 기인 할 수 있다.[4] 다른 뜻으로는 정서적인 주제를 다루는 현실적인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장르라고 한다. 가장 범위가 넓은 영화 장르로 로맨스, 스포츠, 시대극, 범죄와 같은 하위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특별한 장르적 요소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면서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서술되는 내용을 포괄적으로 드라마라는 장르에 분류하는 것으로 '특정한 장르에 속하지 않는 이야기'가 드라마에 속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5]

멜로드라마[편집]

멜로드라마라는 말은 원래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로 관객의 값싼 감상에 호소하는 통속 영화 정도의 뜻으로 저널리즘에서 썼던 단어였다. 하지만 영화 비평에서 멜로드라마는 다양한 형태의 영화를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쓰이는데, 범죄 멜로드라마, 심리 멜로드라마, 가족 멜로드라마 등의 구분이 있는가 하면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애정 관계를 다룬 영화를 모두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포함시켜 언급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의 최초의 뿌리는 중세의 교훈극과 구전 민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전통은 18-9세기 프랑스 로맨틱 드라마와, 같은 시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감성 소설 등보다 세련된 양식으로 계승된다. 도덕과 양심에 바탕을 둔 이런 유형의 드라마와 소설들은 가족 관계, 좌절된 사랑, 강제 결혼을 다루었다. 19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과 함께 당시 소비문화의 주축이던 여성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멜로드라마는 영화의 주된 메뉴로 등장하게 된다. 화려한 세트와 분장, 미남과 미녀들, 성과 육체 그리고 자본주의와 외면적인 화장을 다 한 이 멜로드라마 영화들은 감상주의와 합하여 대중들의 동경과 갈채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멜로드라마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가열한 시대 상황의 처절함을 경험한 사람들의 황폐한 마음을 달래주는 현실 도피적인 감상에서 관객들을 탐닉하게 했다. 전후에 나타난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머빈 르로이(Mervyn LeRoy)의 '애수'는 2차 대전 당시 처절한 전쟁 상황에서 군인과 영국의 발레리나와의 비련을 엮은 스토리인데, 자주 멜로드라마의 정석 같은 것을 설명하는데 본보기로 설명하는 영화이다.[6]

스포츠[편집]

스포츠영화는 스포츠를 소재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 가는 영화들이다. 국내의 스포츠 역사가 짧아 스포츠 영화가 많지는 않지만 미국같은 경우 메이저 리그나 풋볼 등 스포츠 역사가 100년 이상 되다보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수 없이 많이 나왔다. 스포츠 영화도 기본적으로 재미와 감동을 통해 관객을 유치하는 것을 목표로 제작이 되지만, 영화가 주는 사회적 메시지가 없을 수가 없다. 다시말해 영화의 개봉으로 하나의 사회현상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영화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7]

공포[편집]

관객으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를 느끼도록 의도한 영화의 총칭으로, 관객의 전율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충격 요법이 테마가 되는 영화이다. 유령·요괴·괴물이 등장하는 괴기 영화, 초자연적·마술적·신비적인 영혼 재래 등을 제재로 한 오컬트 영화(occult film), 살인·범죄를 제재로 한 피가 튄다는 뜻의 스플래터 영화(splatter movie), 이상한 사태에 직면한 인간들의 혼란과 고통을 그린 SF 영화, 특수 효과로 연출한 SFX 영화, 충격적인 공포와 전율에 역점을 둔 호러 영화(horror picture)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공포(horror)의 의미는 충격에 의한 극도의 불쾌감이나 역겨움까지를 포함하는 극단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이 장르의 초창기 작품보다는 최근 영화들에 더 적합한 단어이다. 대부분 죽음, 영적인 세계, 과학, 우주, 정신 착란 등의 주제를 다루는 이런 영화들은 우리 마음속 어느 영역에서 인지하기 어려운 불안을 야기한다. 공포 영화는 우리가 지닌 동물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충족시키기보다는 그 존재를 깨닫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아울러 관객의 개인적 심리 차원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삶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 야기된 공포심을 실체화하기도 한다. 무성 영화 시대로부터 우리는 공포 영화의 전통을 뚜렷이 발견할 수가 있다.[8]

판타지[편집]

초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을 그리는 영화. 이런 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계, 물리학과 생물학의 일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해낸다. 이런 영화의 흥행은 비현실적인 것을 관객에게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영화 제작진의 실력 여부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된다. 판타지 영화들은 시간과 공간을 편집으로 변형, 조작하고 모든 종류의 특수 효과를 사용해 어떤 물질세계를 직접 창조하여, 영화사 초기 조르주 멜리에스가 시도한 이래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왔다. 산문으로 된 이야기는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겨 두지만, 영화는 우리의 상상력이 일으키는 환상을 우리 눈앞에서 만들어낸다. 판타지 영화는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투영시키고, 또한 관객의 의식적이고도 무의식적인 기대감이 해방되고 만족감을 느끼는 상황을 객관화시킨다. 판타지 영화는 일반적으로 SF, 공포, 모험 등으로 범주화 된다.[9]

액션[편집]

물리적 폭력성이 줄거리의 주요한 요소가 되는 영화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되며 갱스터 영화, 홍콩누아르, 서부극, SF영화 등이 이에 속한다. 인물의 동작선이 영상미를 좌우하기 때문에 액션영화의 감독들은 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만의 다양하고 독특한 카메라 앵글을 연구한다. 액션영화의 대표적 배우로 할리우드에는 아널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이 있으며 아시아 출신의 배우로는 액션영화의 종주국인 홍콩의 이소룡(李小龍)·성룡(成龍)·이연걸(李蓮杰) 등이 있다. 1990년대 들어 할리우드의 액션영화가 내리막길에 접어들면서 홍콩의 액션배우들이 대거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다.[10] 등장인물의 육체적인 움직임을 이용한 활약을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액션 영화는 종종 정의가 악을 무찔러 사건을 해결한다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다룬다.[11]

스릴러[편집]

국어사전에서 보면, 스릴러(Thriller)는 '관객이나 독자에게 공포감이나 흥취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만든 연극, 영화나 소설'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사전 정의와 같이 스릴러는 관객의 흥분과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최종적 해소를 지연함으로써 관객에게 공포와 전율을 주는 장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서의 스릴러 장르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객들에게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의 도피 불가능성은 스릴러 고유의 감성을 구축시킨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만약 영화를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면 스릴러, 공포를 느꼈다면 호러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영화적으로 스릴러 영화란 사전에는 '긴장감을 유발하고 지속시키는 내러티브 공식을 가진 영화를 총칭한다.'라고 정의가 내려져 있다. 스토리텔링적으로 스릴러 영화는 범죄 사건을 한 의혹과 반전의 중층적인 서사 구조를 의미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릴러는 독자적인 장르라기보다는 내러티브 진행을 위한 방법론의 일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릴러는 다양한 장르에서 차용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이것이 스릴러 장르라는 것을 헷갈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가 스릴러 영화를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캐릭터스토리이다. 스릴러 영화의 스토리는 관객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분위기를 서서히 스며들게 하는 정교한 플롯으로 구성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릴러는 불가해성, 신비한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미스터리와도 쉽게 결합한다. 본래 중세의 신비극을 의미했던 미스터리는 근대사회에서 추리소설로 정착되면서 지적 논리로 사건을 풀어가는 내용을 지닌 장르로 폭넓게 이해되고 있다. 스릴러는 이치를 따져가며 문제를 풀어가는 이성적 과정보다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가는 심리적 과정에 더욱 초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스릴러 영화가 단지 공포심만을 관객에게 유발한다면 순수한 공포영화와 스릴러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공포 영화에서 관객들은 두려움과 놀람에 수동적으로 노출되지만, 스릴러 영화에서 관객은 공포감을 느끼는 주체가 되어 점점 이야기에 잠겨 가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러한 기준 하에 스릴러 장르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스릴러란, 변별적인 장르적 약호(Code), 도상, 시각적 스타일을 지닌 장르라기보다 전율과 공포를 동원하는 심리적 효과에 기반을 두는 정서 기반의 장르이다. 스릴이란 두려움에 대한 호기심이 발현되는 과정이며, 낯선 상황으로 일탈한 결과이며 스릴의 근원은 현실의 불만족에 있다. 현실의 불만족한 기분을 이탈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관객, 즉 어떠한 범죄자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주인공과 나의 감정이 동일시가 되고자 하는 희망하는 관객이 스릴러 영화를 찾는 사람이다. 스릴러 영화의 기본 요소가 있는데 긴장을 야기하는 객관적인 위험, 이 위험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관객,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이다. 이러한 3가지의 요건은 무서운 범죄가 주 모티브인 스릴러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감을 느끼며 감정을 이입을 했다가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극장을 나오는 영화가 바로 스릴러 영화라는 것이다.[12][13]

애니메이션[편집]

그림이나 인형 등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조금씩 그 자세나 위치를 바꾸면서 한 장면씩 촬영하여 영사상의 동작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제작한 영화를 뜻하며 동화영화라고도 한다. 애니메이션의 어원은 라틴어 'animatus'에서 유래하였으며 '생명을 불어넣다. 활기를 띠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생명감 있는 동작뿐만 아니라 비·바람·불 같은 자연현상과 기계적인 움직임 따위의 표현을 모두 포함한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움직임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특수촬영 영화의 한 가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만화영화·인형영화·그림자영화 외에도 교육영화·학술영화가 포함되며, 커머셜 필름(CF, 광고영화)에서 실험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매우 넓다. 한편 인형극을 영화로 촬영한 것까지도 애니메이션 영화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용어의 남용이라 명시되어있으며, 어디까지나 인형의 동작을 한 장면씩 촬영해 나간 것만이 애니메이션이다.[14]

코미디[편집]

코미디 영화(comedy film)는 유머에 중점을 둔 영화 장르로, 관객들로부터 웃음을 끌어내려고 제작된다. 코미디 영화는 대부분 가볍게 즐길 수 있고,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코미디 장르는 상황, 말하는 방법, 행동, 성격을 재미있게 과장해 풀어낸다.[15] 현재 영화시장에는 코미디 영화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코미디 영화는 주력으로 생각되는 장르가 아니다. 보통 코미디는 다른 장르에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로맨스 코미디, 스릴러 코미디, 액션 코미디처럼 말이다. 필자는 이 상황이 너무 아쉽다. 코미디 영화는 다른 장르 영화들처럼 주력이 될 요소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보통 코미디 영화라고 하면 B급 영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B급 영화는 A급 영화와 견주어 질적으로 떨어지는 영화를 기술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단기간 촬영과 저예산으로 제작된 경우가 대다수이다. 코미디 영화는 저예산의 급하게 만든 저급 요소만 가득한 가벼운 영화가 아니다. 코미디 영화는 코미디 장르적 특성을 철저하게 따른 짜임새 있는 영화이다. 코미디 영화라고 해서 오직 웃음의 유발 자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가볍고 웃음을 준다고 해서 전부 코미디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코미디 영화는 장르의 5가지 특징이 잘 융합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영화의 경우 우스운 대사와 장면들이 등장해도 코미디 영화의 범주에 포함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코미디 영화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이다. 웃음은 관객의 기분, 유머 코드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웃음이란 예기치 못한 부분에서 터지기도 하고 철저히 짜인 각본 아래 웃음이 터질 수도 있다. 즉 사람의 웃음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부분에서 코미디 영화는 만들기 매우 까다로운 영화이다. 다른 타 장르의 영화보다 목적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미디 영화는 웃음을 주기 위해 그 형식이 엄청나게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폭이 매우 방대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코미디 형식에는 서사적인 연극, 장·단편 소설, 슬랩스틱, 촌극, 판토마임, 농담, 익살, 풍자, 해학 그리고 광대극 등이 포함된다. 코미디는 형식적 다양성이 타 장르보다 두드러진다. 그렇기에 코미디 영화가 포괄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어떤 장르보다도 방대하다. 코미디 영화의 특징 중 첫 번째는 패러디와 풍자의 사용이다. 패러디가 반드시 희극적일 필요는 없지만 만일 패러디가 희극적일 경우 그리고 패러디가 희극의 맥락 속에서 등장할 경우 웃음은 끊임없이 유발된다. 단순한 익살과 우스운 대사를 사용함으로써가 아니다. 패러디의 경우 관련 장르 관행들을 소재로 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활용한 익살과 우스운 대사 등을 도입함으로써 웃음의 유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슬랩스틱이다. 슬랩스틱은 본래 판토마임이나 서커스 그리고 조잡한 광대극에서 특히 자주 등장하는 격렬한 희극적 동작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표현이었다. 후에 몸싸움이 동원되거나 물리적인 힘이 오고 가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세 번째는 우연이다. 우연은 코미디의 결말뿐만 아니라 극 전반에 중요한 역할이다. 우연의 반복 속에서 긴장과 놀람은 등장인물과 관객들이 서로 내러티브에 대한 지식을 나눠 갖는 방식들의 결과물이다. 우연은 사건들이 예견하던 대로 혹은 예기치 않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극적인 흥미나 기대에서 오는 긴장을 말한다. 관객은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일어날지 또 어떻게 일어날지는 알지 못한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긴장감은 관객에게 어떠한 결과가 될지 예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우연의 결과로 벌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도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장치이다. 네 번째는 개그, 농담, 코믹이벤트이다. 이것은 우습게 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것인데, 코믹이벤트와 그 내부의 코믹한 개그는 그 상황과 너무나 잘 통합되어 있어서 많은 사건이 잇달아 등장할 수 있다. 영화 속 생뚱맞은 코믹이벤트와 개그는 웃음을 유발한다. 마지막으로 코미디 영화의 결말은 모로 가도 다들 웃으며 끝이 난다. 코미디에서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든 줄거리와 연관될 필요도 없다. 설령 필요하다고 해도 코미디는 비인과성 동기부여의 형식이나 산만한 내러티브 구조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할 적절한 공간만 있다면 코믹 효과를 위해 인과성 동기부여나 내러티브의 통합을 포기하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도 한다.[16]

SF[편집]

SF는 과학적 허구(Science Fiction)의 약칭이다. 허구란 말은 과학적 근거는 있되 현재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가상이라는 뜻이다. SF영화는 우리말로 하면 공상과학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과학적 기록영화의 단계에서 벗어나 극적 요소가 더해지기 시작한 때부터 극영화로 시작되었다. 과학적 소재와 공상적 줄거리를 가지며 대체로 선과 악의 대립에서 선이 이기는 것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SF영화의 특징은, 세련된 특수효과와 속임수 촬영을 통해서 환상적 색채와 분위기를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없고 영화 안에서만 체험 가능한 별다른 세계를 펼쳐 보이는 데 있다. 현실로는 불가능한 인간의 무한한 상상 세계를 그럴듯하게 직접 보여주는 것, 바로 여기에 SF의 매력이 있다. SF영화는 영화산업 내의 경제적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발전을 거듭해왔다. 고도의 특수효과(SFX)와 편집기술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미래사회를 주로 그리고 있다. 거대한 우주 전함,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로봇, 심지어는 인간처럼 영혼을 지닌 사이보그, 번개같이 날면서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는 우주 전투기의 치열한 공중전 등등, 갖가지 새롭고 신기한 볼거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시각 매체를 이용하는 영화는 처음에는 현실을 보여주는 수준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진짜처럼 보여주는 마술성도 갖게 되었다. SF영화는 오늘날에 와서는 막대한 물량과 최첨단 과학기술의 동원이 가능한 할리우드의 대표격인 상업장르이다. 하지만 원래는 영화의 발상지인 프랑스에서 이미 100년 전에 시도된 분야로서, 그 기원은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SF영화의 탄생 배경에는 19세기부터 널리 유행한 SF소설이 있다고 하겠다. 19세기 공상과학소설의 대가 H.G 웰즈(Herbert George Wells), 줄 베르느(Jules Verne)의 '달세계 탐험', '해저 2만리' 등을 따져보면, 후기 빅토리아 중산층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외계인이나 괴물의 침입을 저지한 것은 인간의 어두운 측면이 교육의 개선과 산업의 발달에 의해 제거될 수 있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SF영화의 가장 일반적인 방향은 자연과학에 대한 인간 이성에의 믿음을 늘려 가는 것이었다. 인간이 너무 많이 아는 데서 생기는 근본적인 공포 때문에 알려고 하지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도 한다. 초기 SF영화에서는 과학을 통해 권선징악이나 선과 악의 이중성을 묘사함으로써, 인간 내면에 숨겨진 공포를 반영하고 미래에 대한 상상을 늘려가게 하는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SF영화는 '스타워즈'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SF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그 이유는 SF가 다른 어떤 장르보다 특수효과, 다시 말해 과학기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SF영화에서 그럴듯한 눈속임을 원했고 특수효과는 SF장르와 더불어 성장하고 발전했다.[17]

형식[편집]

무성[편집]

사일런트영화라고도 한다.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네마토그래프가 공개된 것을 영화의 시발점이라 한다면, 본격적으로 유성화되는 1927년까지의 영화는 무성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창안 당시 카메라로 촬영되어 스크린에 투영되던 '움직이는 사진'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수록한 실사단편이나 짤막한 뉴스 종류였으나 이어 카메라의 성능을 이용한 트릭영화를 고안하게 되어 '달나라 여행'과 같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다음 인간을 주체로 한 극형식의 영화가 창안되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일어나는 장면만을 촬영한 것이었으나 차차 영화의 독자적인 표현을 구사하게 되고 내용도 다채로워져서 여러 나라에서 독특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각국의 작품 경향을 개괄적으로 보면 프랑스는 인정극·범죄극, 이탈리아는 사극·정서극, 독일은 괴기·환상, 영국은 기록영화, 북유럽은 신비영화, 러시아는 국책의 보급영화를 주로 만들었으며, 미국에서는 바이타스코프가 발명됨에 따라 프랑스와 같은 시기에 무성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밝은 오락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빛과 그늘, 형상을 율동미화하는 예술이라고 한 독일과 영화의 생명은 몽타주에 있다는 러시아 영화제작자들의 태도와 작품 경향은 무성영화의 성숙에 공헌하였다. 이것은 영화미학 확립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한국에서 '활동사진'이라 불린 초기의 무성영화는 이 땅에 전화·전기·전차·철도가 들어와 개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칠 무렵인 1903년 6월 23일 자 황성신문에 '활동사진광고'라는 제호의 광고가 실림으로써 도래하였다. 초기 무성영화를 한국에 들여온 것은 일본 요시자와상회의 순회영화반이다. 이것을 영미엽연초회사와 한성전기회사는 담배와 전차 유객을 위한 선전용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외국 무성영화에서는 보조수단으로 자막을 삽입하여 대화나 줄거리의 진행을 나타냈으나, 한국에서는 무성영화가 수입되고 스스로 제작하면서부터 변사라는 새로운 직업인이 등장하여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고 정황을 설명하였다. 이 변사의 감격조·비탄조·강조조 등의 어조는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최루탄적 구실을 하였으며, 변사의 효과를 돋우기 위해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였다.[18]

흑백[편집]

화면에 비치는 영상이 검은색의 짙고 옅음으로 나타나는 영화를 의미한다. 흑과 백으로 단순화된 화면은 관객들이 주위 사물이나 환경에 방해받지 않고 인물들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흑백영화는 색채에 압도되었을 때에 느끼지 못했던 각 사물의 미묘한 질감과 촉감의 차이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인물의 감정선을 단지 보는 것뿐만 아니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또한, 흑백영화는 우리눈으로 볼 수 없는 시선을 제공하기 때문에 몽롱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을 주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19] 컬러필름이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영화는 흑백이었다. 오늘날 흑백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을 흑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흑백의 장점을 잘 살려 이용한 걸작들은 재상영이 되기도 한다. 고전 영화는 그것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와 감성이 있기 때문에, 영화의 컬러 영상미나 배경보다는 인물들의 심리와 스토리 라인에 집중해서 보게 된다고 한다. 주제 의식도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나는 편이다.[20]

유성[편집]

사운드의 도입은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 혁신들 중 하나다. 1927년 워너브라더스의 '재즈싱어'는 유성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사운드의 도입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정착과 맞물린다. 사운드 기술에서 앞선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의 중심으로 확고히 떠오른다. 유성영화는 영화 리얼리즘의 미학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영화의 기술은 현실의 보다 완벽한 모방을 향해 나아가지만, 동시에 사운드의 기술은 이데올로기적이다. 사운드는 내러티브 관습을 통해 관객의 동일시를 유도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의 사운드는 대사, 음악, 음향으로 구성된다. 대사는 등장인물의 대화 등 사람의 목소리를 말한다. 음악은 주로 극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며 음향은 다양한 자연의 소리, 도시의 잡음, 인물의 동작이 일으키는 소리 등 대사와 음악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소리를 포함한다. 이미지와 더불어 사운드는 기술적 예술로서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사운드의 도입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확고히 뿌리내리는 데 이바지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성영화는 비용의 절감과 수익의 확대를 불러왔다. 영화에서 사운드의 도입은 촬영 장면과 배우의 수를 줄이고 대사의 길이는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영화 촬영의 일수를 줄이고 인건비를 감소시킴으로써 제작비의 절감과 영화사 수익의 증대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유성영화에 대한 대중의 호응은 영화사의 규모를 확대시켜 주었다. 또한, 사운드의 도입은 영화 예술의 미학적 전환을 유발했다. 무성영화에서 관객은 소리 없는 이미지, 배우의 움직임, 조명, 미장센에 주목한다. 그러나 유성영화의 관객들은 이미지 그 자체보다는 그에 연동된 소리에, 배우의 액션보다는 대사에, 조명과 미장센의 효과보다는 스토리와 인물의 캐릭터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또한 무성영화에서 자막이 배우와 관객의 완전한 정서적 일치를 가로막는 장치의 하나로 기능했다면, 유성영화에서 대사는 영화적 디제시스의 공간 속에 관객이 정서적으로 동일시되는 주요한 장치로 기능한다.[21]

특수촬영[편집]

특수효과는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영화에서 즐기는 대부분의 크고 작은 특수효과가 사용된다. 특수한 기술적 수단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로, 특수효과를 위해서는 특별한 촬영 기술을 사용하거나 특별히 제작한 피사체를 촬영해야 한다. 특수효과는 원하는 영상을 만드는 비용이 너무 비싸거나 혹은 촬영에 위험이 동반될 때 그리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영상을 얻을 수 없을 때 사용된다. 또한, 특수효과는 애니메트로닉스, 컴퓨터그래픽, 미니어처, 매트 페인팅 등이 있다. 애니메트로닉스란 물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계전자공학을 이용하는 것이다. 애니메트로닉스 기법을 이용하면 공룡을 포함한 각종 동물, 식물은 물론 신화 속 가상의 생물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애니메트로닉스 기술은 영화제작뿐 아니라 테마파크, 그 외에 여러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이용된다. 컴퓨터그래픽(CG)은 컴퓨터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분야이다. 키보드 및 입력 장치를 이용하고 도형을 형성하는 데이터를 기억시킨 다음 매개 변수를 바꾸어가며 도형을 임의로 그려낼 수 있다. 컴퓨터 그래픽은 3차원 물체를 표현하는 것은 물론 사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우주의 구조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형상 상상세계를 표현할 수 있어 영화 및 애니메이션 분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미니어처 기법은 영화 초창기부터 발달한 특수효과의 대표적인 기법 중 한 가지이다.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필두로 '메트로폴리스'나 '미래여행' 등에서 이미 미니어처를 활용한 촬영이 시작돼 그 후에 이러한 시도와 더불어 다양한 기법들이 추가되어 잠수함이나 항공기, 우주선 등 거대한 물체를 근접 촬영하거나 마을이나 도시의 원경이 필요할 때 등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는 기법이다. 현재에는 미니어처와 컴퓨터그래픽을 결합한 합성 방식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매트 페인팅은 실사 촬영이 어려운 영화 속의 특정 공간을 묘사하는 그림으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전성기를 이끈 특수 효과 시각효과이다. 매트 페인팅은 이야기 세상의 그럴듯함을 보장하는 배경 이미지를 재현하므로 고도의 사실적 표현이 요구된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매트 페인팅은 오즈의 나라의 환상성을 보여주는 미학적 기제로 작용하는 동시에 주요 사건의 배경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면서 이야기의 현실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컴퓨터그래픽(CG)의 발달은 2D가 주류이던 애니메이션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영화 전체가 3D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가 시발점으로, '토이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 전체가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이다. '토이스토리'는 이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입체감이 살아있는 등장인물과 배경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현재에는 3D로 이루어진 CG 애니메이션이 주류를 차지하고 2D 애니메이션은 비주류로 밀려났다고 한다. 특수효과의 발전은 기존의 표현 방법의 확대를 가져와 과거에는 상상만 했던 장면을 스크린에 옮겨놓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는 점에서 시각예술 역사의 큰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단순히 SF나 판타지 영화에 영향을 끼친 것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업부터 촬영, 연출, 편집과 같은 영화의 전반적인 영역에 걸쳐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할리우드 고전 스타일의 발전 영화가 제작된 후 특수효과는 사용되고 발달해 왔다. 1930년대 이후에 영화의 소리가 안정적으로 입혀졌고 1950년대 컬러 티브이의 보급과 함께 컬러영화가 무려 30년에 걸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흑백영화 시대에서도 특수효과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SF나 판타지 영화들이 개봉하여 많은 인기를 누렸다. 디지털 혁명과 함께 현대 영화에서 보는 모습의 특수효과는 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에서 별도로 촬영한 새의 모습을 합성시켜 인간을 습격하는 새의 모습을 훌륭히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68년에는 특수효과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불리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철저한 완벽주의자라고 잘 알려져 있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손에서 탄생하였다. 무슨 영화이든지 완벽함을 추구했던 그는 SF영화를 만들면서 이전까지의 유치함에서 벗어나 실제 하는 모습을 담고자 했으며 이를 통하여 영화적 과장이 들어간 효과가 아닌 실제와 같은 특수효과가 만들어졌다.[22]

3D[편집]

입체 영화라고도 하는 3D 영화는 의외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사진이나 그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으며 1922년에 최초의 상업용 3D 영화로 알려진 the power of love가 상영되기에 이르렀다. 1950-60년대 매우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3D 영화는 침체기를 지나 2000년대 컴퓨터 기술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3D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좌우 차이가 있는 영상을 만들어야 하고, 두 눈이 이 영상을 각각 받아들여야 한다. 차이가 있는 영상 신호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가 애너그리프(anaglyph)이미지 인데, 두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좌우의 차이가 있는 영상을 각각 붉은색 필터와 푸른색 필터를 이용해 촬영을 한다. 이 영상을 겹쳐놓고 특수 안경으로 관찰하면 영상은 입체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특수 안경을 한쪽에는 붉은 필터, 다른 쪽에는 푸른 필터가 끼워 있으므로 붉은 필터로는 붉은 영상을 볼 수 없고, 푸른 필터로는 푸른 영상을 볼 수 없다. 두 눈에 각각 다른 영상이 들어오고 뇌에서 합쳐져 검은색의 3차원 영상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애너그리프 방식은 구현 원리가 간단하기 때문에 복잡한 기술이나 고가의 장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으나 색감을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1980년대 이전까지 놀이공원이나 극소구의 영화 상영관 등에서 제한적으로 쓰이는 정도였고 TV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최근의 3D 영화는 편광필터를 이용하는데,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진동을 하면서 전파되는 횡파의 일종인 전자기파이다. 이때 전기장과 자기장의 진동 방향은 항상 수직을 이루며 그 크기는 같다. 전기장이 진동하는 방향을 편광 방향이라고 하는데 우리 주위의 자연광은 제멋대로의 편광이 어우러져 있는 편광 되지 않은 빛이다. 편광 필터는 편광되지 않은 빛을 특정한 방향의 빛으로 선택적으로 통과시켜 한 방향으로 편광된 빛을 만들 수 있다. 편광 필터를 이용한 3D 영화는 서로 다른 방향의 편광필터를 통과한 두 개의 영상을 화면에 영사한다. 관객 역시 편광 필터 안경을 쓰고 영화를 관람해야 입체 영상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안경 오른쪽 렌즈와 왼쪽 렌즈에 사용되는 편광 필터는 편광 방향이 서로 90도 어긋나 있다. 편광필터는 다른 방향으로 편광된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므로 관객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으로 차이가 있는 영상을 보게 되어 뇌는 영상을 입체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현대 개발된 무안경 3D 디스플레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패럴랙스 배리어(Parallax barrier) 방식이다. 디스플레이 앞에 방벽을 두어 좌안 우안의 시차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라 시차방벽이라고도 부른다. 화면에는 수직 1라인씩 좌우 영상은 교대로 배치하고 그 전면에 영상과 같은 주기로 배리어를 설치한다. 배리어 사이로 열린 부분을 슬릿(slit)이라 부르는데, 이 부분은 영상의 수직 1라인과 같은 시야각으로 설정한다. 이것을 일정한 거리의 정면에서 보게 되면, 좌안에는 좌측 영상이 우안에는 우측 영상이 들어가게 되며 다른 눈의 영상은 차단되는 방벽의 형태가 된다. 또한 이 배리어는 액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2D/3D 모드 변환은 배리어의 On/Off로 쉽게 변환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액정을 사용한 베리어 방식은 스위쳐블 페럴렉스 베리어(Switchable parallax barrier)로 불리우기도 한다. 또 다른 무안경 3D의 방식으로는 렌티큘러 렌즈(Lenticular Lens)가 있다. 사실, 패러랠렉스 배리어(parallax barrier)방식과는 달리 렌티큘러 렌즈 방식은 어릴적부터 항상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어릴적 자주 보던 책받침이나 캐릭터 운동화에 박혀있던 입체 영상 그림이 바로 렌티큘러 렌즈 방식이다. 디스플레이에는 좌-우 영상을 번갈아 배치하는 것은 앞서 설명드린 패러랠렉스 배리어 방식과 다름이 없다. 대신 시차방벽 대신에 디스플레이의 좌우 영상 셋트의 배치 주기로 되어있는 반 원통형 렌즈의 배열 시트를 입힌다. 수직으로 시트가 구성 되기 때문에 수직 렌트큘라 시트(Vertical lenticular sheet)라고도 부른다. 렌즈의 굴절을 이용해서 좌측과 우측으로 각각 영상을 보내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디스플레이 앞에 항상 물리적인 시트를 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2D로의 변환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은 가정용 디스플레이 장치 보다는 광고 전광판이나 이미지 판촉물에 쓰인다. 3D를 구현하는 방법 외 시각에 따라 그림이 바뀌는 효과로 쓰이기도 한다. 집적 영상 시스템(integral imaging system)라는 렌즈를 이용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렌티큘러 시트 방식과 비슷한 컨셉인데, 렌티큘라 시트 방식은 반 실린더를 세로로 나열 한 반면, 인테그랄 이미지 방식은 작은 반구 렌즈들을 가로 세로 나란히 배열한다. 이 모양이 파리의 눈과 비슷한 방식이여서 파리 눈 렌즈(fly's eye lens)라 불리기도 한다. 작은 볼록 렌즈의 집합을 정면으로 보게 되면 머리의 기울기에 상관 없이 입체 영상을 볼 수 있다. 렌티큘라 시트는 빛이 좌우 수평으로 퍼지는 반면 인테그랄 이미지는 수평만이 아닌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즉 누워서도 시청이 가능하지만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간단하지도 않고 아직까지 연구가 진행중인 방식이다. 무안경 3D 입체 영상 기술은 홀로그래피(Holography)이다. 홀로그램(hologram)이라고도 불리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기술 자체의 명칭은 홀로그래피이고 홀로그램은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컨텐츠를 가리킨다. 하지만 현재 어느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고 지속적으로 연구가 되고 있다. 방식 또한 몇가지가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로 360 라이트 필드 디스플레이(Light Field Display)란 방식이 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거울판에 빛을 투영시켜 거울의 회전 각에 맞는 영상을 내 보내서 마치 입체적으로 영상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이다. [23]

4D[편집]

4D 영화는 영화를 관람할 때 필요한 감각인 시청각 외에 다른 감각을 추가하여 관객에게 몰입 효과를 증대하는 기술이다. 의자의 움직임, 물 분사, 바람, 레이저, 조명, 향기 등을 구현하는 특수 효과를 이용하여 오감을 자극한다. 4D 영화는 필름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주로 테마파크의 어트랙션으로 활용되었다. 이 기술이 영화 형식으로 자리매김하려면 단순히 엔터테인먼트의 경험이 아닌 이야기의 표현 수단으로 진화해야 한다. 4D는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영화를 관람할 때 필요한 감각인 시청각 외에 다른 감각을 추가해 몰입감을 강화하기 위한 기술이자 수법이라 할 수 있다. 4D는 4차원을 뜻하는 것으로 3차원으로 구현되는 이미지에 1차원의 특별한 효과를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4D 영화는 의자 움직임과 물 분사뿐만 아니라 바람, 안개, 비눗방울, 레이저, 조명, 향기 등과 같은 특수 효과를 이용하여 오감을 자극한다. 4D 영화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0년대부터 미국에선 무비기믹이라는 변종 형태가 유행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야기하는 4D 영화의 시초다. 무비기믹은 기술을 이용하여 영화를 관람하는 데 다양한 방법을 도입한 영화를 말한다. 서윈베가라는 회사는 유니버설스튜디오와 협력하여 필름 기반의 기술인 센서라운드를 개발했다. 감각과 서라운드를 결합한 단어에서 보듯이 4채널이 일반적이었던 사운드에 일종의 우퍼를 이용하여 진동음을 구현하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다. 오늘날 극장에서 멀티채널을 통해 입체음향을 구현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다.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 주연의 '대지진'의 상영에 이 기술이 도입돼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드웨이', '롤러코스터' 등의 영화 상영에도 이 기술이 도입되었다. 엔지니어였던 한스 라웁(Hans Laube)은 냄새를 추가한 스멜 오 비전(Smell-O-Vison)이라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30개 정도의 냄새를 분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며 영화가 상영될 때 필름에 부착되어 있는 사운드트랙으로 냄새를 분사할 수 있도록 싱크를 맞추었다. 유사 기술로 찰스 와이스(Charles Weiss)가 개발한 아로마라마(AromaRama)가 있다. 역시 냄새를 도입한 기술로 1959년 '만리장성 너머'라는 다큐멘터리에 처음 도입, 사용되었다. 공포영화 감독인 윌리엄 캐슬(William Castle)은 무비기믹을 활용한 영화제작의 대표 인물로 1950∼1960년대에 걸쳐 다양한 내용의 B급 영화를 양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인 공포영화 등 주로 B급 영화에 도입되었으며 아카데미영화제를 호령하던 일급의 영화제작자들은 이 기술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보수적이었다. 이러한 기술들이 영화가 구현하는 본연의 미학과 표현력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한계가 이러한 기술들의 수명을 단축시켜 버렸다. MIT 미디어랩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olas Negroponte)는 인간 몸의 동작 반응 체계가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가상현실을 추구하는 기술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작과 위치 감각에 정확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기술적인 오류들은 관객이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하였고 오히려 기술에 대한 혐오감만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의 영화제작과 영사 과정은 필름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는데 정교하게 싱크를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영상이 나오는 도중에 효과가 정확히 구현되어야 할 타이밍이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3D 영화가 입체감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외면받았던 상황과 동일하다. 또한 전국의 극장 업자들은 극장에 이러한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설비를 구축하는 데에도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기술들은 빠르게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무비기믹은 영화에 디지털이 전면적으로 도입되어 가면서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인 4D 영화 형태로 탈바꿈되었다. 현재 4D 영화는 테마파크의 어트랙션 형태로 활성화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이 점차 일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 확산해 가는 추세를 띠고 있다. 테마파크용으로 개발된 라이드필름은 관객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내용이 고안된 영화다. 최초의 4D 영화는 1984년 미국 볼티모어시에 위치한 식스플래그 테마파크에서 상영된 '센소리엄'으로 알려진다. 이 영화는 다채널의 음향 시스템과 이러한 음향을 받아들이는 의자, 냄새를 발산하는 시스템, 3D 입체영상 기술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현재는 라이드필름류의 영화를 전문으로 만들어 내는 제작사들이 4D 영화 제작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이끌고 있다. 캐나다의 쇼스캔사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명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특수효과감독인 더글러스 트럼불(Douglas Trumbull)이 설립한 회사로 처음엔 65mm 필름 같은 고해상도 영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했다. 현재는 미국 안에 있는 테마파크 위주로 다양한 4D 영화를 공급하고 있다. 4D 영화는 테마파크에서 그치지 않고 일반 극장에서도 시도되고 있는 추세다.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는 현대의 4D 영화는 전담 프로그래머가 영상의 내용을 꼼꼼히 분석하여 진동, 물, 안개 등 오감을 구현할 수 있는 효과들을 추출하고 이를 프로그램에 입력한다. 시뮬레이터는 프로그램에 입력한 이 효과들을 영화가 진행되면서 내용에 맞게끔 정교하게 발생시킨다. 내용과 정교하게 맞아떨어진 효과들을 느낀 관객은 임장감을 느끼면서 훨씬 더 실감 나게 영화를 즐기게 된다. 4D 영화는 공간감을 구현하는 3D 입체영화 기술과 결합하면 훨씬 더 많은 감흥을 받게 된다.[24]

단편[편집]

단편영화는 일반적으로 30분 이하의 짧은 영화를 뜻하며, 영어로는 쇼트(short), 쇼티(shorty)로 부르기도 한다. 기록 영화는 물론 과학이나 산업의 기록, 사회 교육을 위한 영화, 학교 교육을 위한 교재 영화, 그 외에 각종 선전·계몽·보도 등 모든 장르에 걸친다. 특히 높은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나 예술적인 실험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단편이 많으며 상영 시간이 불과 몇 분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종래에는 영사를 목적으로 필름으로 제작되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비디오를 이용한 단편영화도 함께 제작되고 있다. 오늘날 극장용 영화는 장편이 표준이지만 재료나 테마, 또 표현상의 제약에 따라 단편 형식을 취하는 것이 타당한 영화도 있어 상업성과는 동떨어진 순수 실험 영화나 예술 영화 작가들에 의한 단편 영화는 극장용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와 같이 단편영화는 장편이나 다른 양식과 비교해 효용을 가지며 독자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각국의 영화제에서도 단편영화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전문적으로 단편 영화만을 대상으로 한 국제 영화제도 있다. 단편영화는 영화사 초기의 지배적인 형태였으며 1950년대까지는 산업적으로 제작되었다. 초기 무성 영화는 길이가 몇 분에 불과했고, 때때로 2개의 릴로 된 것도 있었지만 영화의 러닝 타임은 대략 15분 이내였다. 1905년에 시작된 미국의 초기 니켈로디언(nickelodeon)은 대략 15분에서 1시간 동안 단편 영화를 상영했다. 그러나 이후 10년 안에 장편 영화들이 영화 산업의 주류가 되었고, 단편 영화를 상영한 다음에 장편 영화를 상영하는 관습이 제도화되었는데, 미국에서는 대공황 시기와 1940년대에 동시 상영이 일반화됐다. 1950년대에 동시 상영이 사실상 사라지자 한때 2시간 분량의 장편 영화 한 편과 만화와 같은 단편 영화를 함께 상영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상업 극장에서 단편 영화를 볼 수 없다.[25] 기록영화는 물론, 과학이나 산업의 기록, 사회교육을 위한 영화, 학교 교육을 위한 교재영화, 그 외에 각종 선전 ·계몽 ·보도 등 모든 장르에 걸친다. 또한, 아동극영화와 같이 드라마에 단편형식이 요구되는 일도 있고, 높은 예술성을 지닌 영화시적 작품이나 예술적인 실험영화, 그리고 갖가지 애니메이션영화에도 단편이 많으며, 상영 시간이 불과 몇 분밖에 안 되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이 단편영화는 장편과 다른 양식과 효용을 가지며 독자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각국의 영화제에서도 특히 단편영화상을 설정하였으며, 코크(아일랜드) ·만하임(독일) ·크라쿠프(폴란드) 등과 같이 단편영화제만을 개최하는 나라도 있다.[26]

국가[편집]

미국[편집]

미국 영화는 블록버스터, 영웅주의, 상업주의, 권선징악 총 4가지의 특징이 존재한다.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는 할리우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여름방학 등의 특정한 시즌을 겨냥하여 대규모 흥행을 목적으로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제작한 영화를 뜻하며, 원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쓰인 폭탄의 이름이다. 영국 공군이 사용한 4, 5톤짜리 폭탄으로, 한 구역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위력을 지녔다고 해서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고 하였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SF 영화나 특수효과가 뛰어난 액션 영화 등으로 장르가 한정되고, 여름방학 등의 흥행 시즌에 개봉하며, 성공작일 경우 속편이 뒤따르는 공통점을 지닌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걸친 급속한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궁지에 몰린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대규모 자본 투자와 신속한 회수를 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도입한다. 이것은 소수의 영화에 집중 투자하여 세계 주요 도시에 동시 배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의상·장난감·책등을 통한 새로운 시장 개척이 수반되었다.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의 시작을 알린 영화는 1975년 제작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조스'이다. 이 작품은 미국 영화 사상 최초로 흥행 수입 1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뒤를 이어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스타워즈'가 1억 8천만 달러라는 당시로는 기록적인 흥행 수입을 올리며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제작비만 많이 들인 영화라고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는 없다. 제작비의 액수와 상관없이 매표 수입이 큰 영화를 블록버스터라고 한다. 매표소에서 팔린 매표 매출이 미국에서는 2억 불 이상 정도가 되면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제작비를 적게 들이는 것보다는 많이 들이면 매출을 많이 올릴 수 있는 좋은 영화를 만들기가 더욱 용이할 수도 있겠지만 제작비를 많이 들였다고 해서 모두 블록버스터인 것은 아니다. 수입을 많이 올려야 블록버스터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우리 미국은 참전합니다.' 혹은 '우리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갑니다.' 등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족은 미국인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미국의 우월성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미국 영화의 특징 중 두 번째인 영웅주의로 지구의 존폐가 걸려있는 일들은 모두 미국인들이 해결하려 하고 영화 내에서 다른 인종이나 나라가 개입되는 재난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있다. 스파이더맨,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인디펜던스데이 같은 영화들이 주로 영웅주의의 특징이 부각된다. 영화는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고, 영화의 발달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에 의해 커다란 지배를 받아왔다. 즉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에 투표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제작자들은 고객을 의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목표로 한 이윤의 극대화를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영화의 상업 전략은 언제나 최상의 흥행을 보장하는 방편으로 고안된다. 시대에 따라서는 생존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스튜디오 시스템, 스타 시스템, 장르 시스템, 기술적 발전, 블록버스터, 복합기업 등이 이러한 전략 아니 상업주의의 구체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상업 영화는 철저하게 오락을 위한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들이 뭔가 덜떨어졌다거나 완성도가 없지는 않다. 이처럼 학교에도 여러 모임과 그룹이 있듯 영화라는 큰 몸체에서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업 영화는 장점이 많다. 무엇보다 상업 영화의 큰 장점은 그때그때 사회의 분위기와 흐름을 담아낸다는 점이다. 예컨대 국내 영화 중에서 '극한직업'과 '범죄도시' 같은 예가 그렇다. 마약 범죄, 중국 등 주변 국가와의 대치 상황에 관한 현실적인 사례가 영화에 스며들어 있다. 상업 영화는 무엇보다, 관객을 위한 영화이며 서비스하는 영화다. 미국 영화를 보면 사회적 비판이나 풍자의 의미보다는 권선징악의 결론들이 많다. 아동물에서 권선징악의 구도는 더욱 견고하다. 해리 포터(Harry Potter) 시리즈는 쉬운 내용 전개와 권선징악 구도를 마법이라는 판타지에 옮겨 심어 성공한 대표적 작품이다. 동화책은 항상 착한 주인공이 시련을 겪지만 결국에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고,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던 악당은 어김없이 초라한 결말을 맞는다.

영화의 발명도 유럽에서였고, 초기 영화의 성장도 유럽에서 두드러졌지만, 영화라는 예술이 돈이 되는 것인지는 할리우드(미국)에서 먼저 인식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부터 영화를 거대 산업으로 키우기 시작한 할리우드는 1920년대부터 메이저급 거대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고, 장르 영화를 대량 생산 하면서 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영화 제작에 대해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래픽 기술의 발달로 기존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실사화하는 경지까지 이르고 있어 비할리우드 영화권과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1920년대부터 유럽에서 인정받은 감독들을 데려와 할리우드에서 직접 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유럽에서 활동한 많은 감독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작사가 제작비를 많이 투자하는 만큼 영화감독은 제작사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찍게 되는 한계도 있게 된다. 그래서 초기에는 제작사와 감독과의 불화도 많고 실패한 영화도 많았다. 하지만 서로서로 양보하면서 예술성과 상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들이 많아지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아직까지 이어져 있으며,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해외파 감독으로 유명한 연출가는 너무나도 많게 되었다.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Russell DePalma), 스티븐 스필버그, 오우삼(John Woo) 등. 또한 중요한 사실은 연출가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배우, 촬영 감독 등 많은 스텝과 관련 인물들이 함께 할리우드로 와서 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만의 특성 및 법칙을 갖고 있다. 서부 영화와 갱스터 영화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019년도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대성공으로 슈퍼히어로물이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할리우드가 장르 영화 생산에 주력하면서 사람들이 장르 영화에 익숙해지도록 만듦으로써,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를 보기보다는 익숙한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즐긴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제작만큼 중요한 것이 배급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워너브라더스, 21세기폭스 등 탄탄한 배급망을 갖추고 있다. 국내의 경우도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하려면 그 배급사의 영화를 일정 정도는 상영을 해줘야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처럼 월등한 시장과 망을 갖고 배급을 할 경우 기본적으로 거둬들이는 수입이 있을 수밖에 없고, 국내와 같이 작은 나라의 영화들이 제대로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산업 내부의 또 다른 문제는 아이디어 고갈로 인한 영화의 질이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졸렬한 시나리오의 속편들, 심지어는 상대적으로 저예산과 비스타를 내세운 B급 영화가 성공하면 A급 제작 규모로 둔갑해 어설픈 시나리오를 얼기설기 엮어 특수 효과로만 승부를 보려는 뻔뻔한 작태, 상큼한 아이디어의 프랑스 로맨틱 코미디가 성공하면 즉시 아이디어값을 치르고 미국판으로 리메이크하는 전략들을 보고 있으면 아이디어 부재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다. 이런 현상은 할리우드의 신기한 볼거리에만 초점을 맞춘 전략이, 허구로서의 이야기 창조성 측면에서 빈틈을 보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이것이야말로 물량과 시장 테크놀로지 면에서 할리우드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세에 몰린 비할리우드권 영화산업이 세계 영화 시장에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핵심이다.[27]

중국[편집]

중국 영화의 탄생 초기에는 경극 영화처럼 전통예술을 담고 기록하는 부수적인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19년 5·4 운동 이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영화를 통한 선전기능과 대중교육의 효과에 주목하게 되면서 영화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20, 30년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할리우드를 모방한 오락적 상업영화가 다양한 장르에 걸쳐 제작되고 상영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좌익영화 또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공산당의 입지는 더욱 높아졌고, 중국 영화는 혁명을 선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영화계의 상황은 대체로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국 영화는 전반적으로 사회적 기능과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효능적 측면에 기여해 왔다. 특히 이러한 점은 중국 영화를 규정하는 뚜렷한 특징이 되기도 하는데, 중국 영화에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 영화를 통해 중국의 역사와 현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중국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특정한 시대의 역사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어 중국의 근현대사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영화감독들의 작품 경향도 시대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특징은 중국 영화의 시대를 분류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특히 1919년 5·4 운동,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4·12 반공 쿠데타와 1966년 문화대혁명 및 1989년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는 영화감독들의 의식과 표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중국 영화사를 구분 짓는 세대 구분의 기준으로도 응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 영화 역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영화산업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개혁개방 이후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영화의 흐름이 서서히 변모하고 있다. 특히 지금의 중국 영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어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는 대중예술의 상징이 되고 있다. 최근의 중국 영화는 지역적으로 대륙의 공간을 넘어 중화권을 묶는 인프라를 구축하여 세계 영화 시장에 대항하는 한편, 한국 및 일본과의 합작을 통해 영상산업의 활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28] 오늘날 중국 영화 제작은 블록버스터 붐을 이루고 있다.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기 위한 포석으로 세계적인 중화권 감독과 유명 배우 및 영화 분야의 최고 실력자들이 대거 참여해 중국 영화산업의 부흥에 매진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영화로는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황후화(滿城盡帶黃金甲)'를 필두로 펑샤오강(馮小剛) 감독의 '집결호(集結號)', '대지진(唐山大地震)' 및 우위선(吳宇森) 감독의 '적벽대전(赤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대규모 영화의 제작 배경에는 중국 영화의 기술적 성장과 자본력 그리고 거대한 영화 시장의 규모 등을 들 수 있다. 중국도 영화에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정부와의 충돌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사회문제를 영상을 통해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화 본연의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감독과 제작자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영화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노력하고 있죠. 특히 상업 영화를 거부하고 영화 본연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감독들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6세대(1989년 6·4 톈안먼 사건 이후)의 여러 대표 감독들은 어려운 제작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영상을 추구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선정적 표현과 베이징의 어두운 현실을 카메라에 담아 문제가 된 리위(李玉) 감독의 '핑궈果(사과)', 톈안먼 사건을 배경으로 한 러우예(Lou Ye) 감독의 '여름궁전(和園)' 등의 상영불가 및 리안(李安) 감독의 '색,계(色戒)'에 출연한 여주인공 탕웨이에 대한 활동제재는 검열 제도에 따른 중국 정부와 영화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29]

일본[편집]

일본은 오랜 전체주의 정신이 내재되었던 민족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발생한 전체주의는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는 개인을 철저히 묵살하고 '공동체'의 이름을 내세웠다. 그러한 정신은 비교적 약해졌으나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이는 일본만의 특유의 왕따 문화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일본은 젊은 층을 비롯한 노인자살률이 굉장히 높으며, 사회적 우울도도 강한 나라이다. 그래서 일본 영화 중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따스함을 표현하거나, 사회에서 '정상'으로 취급되지 못하는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에 스며들고 치유하는 내용이 꽤 있다. 반대로 끝까지 우리라는 공동체에 흡수되지 못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며 희생하고 배제당하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 또한 존재한다.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 일본 영화의 특징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의문을 던지고 해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고 개인의 희생만으로 미화하고 끝내거나, 사회에서의 특정 역할에 인물을 단순히 부착시킴으로써 상쇄시키고자 한다. 개인의 의사와 개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여전히 억압받는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은 상실의 나라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일본 문학에서도 상실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하는 위대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상실, 전쟁으로 인한 영토와 민족의 상실 등에서 비롯된다. 전쟁과 관련하여 전범국으로서의 반성보다 '피해국'으로서 호소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영화들도 꽤 있다. 일본이 전쟁 가해국이지만 일반 대중이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전체주의적 사상에 젖어있던 일반 대중들이 일본의 민낯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실감과 그로 인해 비롯되는 불안은 일상적 가치에도 포함되어, 일본 영화의 큰 특징이 되었다. 앞서 말한 상실감과 일상적 불안을 일본 영화는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허무주의의 풍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상실의 맥락과 접하기도 하고, 사무라이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도망칠 수도 없는 섬 지형에서 삶은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닌 덧없는 것이었다. 또한, 잃어버린 30년을 비롯한 장기 불황을 겪으며 일본인의 관심은 주택 구입, 취업, 결혼 등의 크지만 성취가 불확실한 장기적인 계획이나 목표가 아닌 작지만 성취하기 쉬운 일상적 가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본 영화는 특유의 아름다운 향수적 분위기와 풍경을 잘 담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유난히 아날로그 정신을 강조하는 편이다.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항하여 기존의 소중한 전통을 지켜내는 것과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주로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현대사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아날로그 시대가 인간적 정을 훨씬 잘 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종종 일본 영화에서 현대사회에서 문제로 삼을만한 사제 관계의 로맨스, 미성년자와 성인의 로맨스를 공공연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성년과 미성년의 역할이 제대로 구분되지 못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성년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30]

한국[편집]

한국 영화는 아시아 영화계에서 유독 근현대사를 소재로 다루는 사례가 많은 편이고, 또한 근현대사라는 소재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다른 주변국들과 비교하면 근현대의 사회 정치적 사건을 영화화해서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면서 정치와 사회를 다루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한국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이러한 제약이 느슨한 편이기 때문에,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문제나 논란거리에 대해 다루는 영화도 주변국들에 비해서 좀 더 많이 제작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소재에 대한 검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문제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이 보장되지만, 물론 이렇게 근현대사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는 한국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군사정부 시절인 경우가 다수이며, 이를 무조건적인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일부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의 여러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풍자의 문제점 중 하나인 선택적 풍자의 한계 역시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나 국내 영화는 1998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전대미문의 흥행을 보이자 영화계 내에서 '2음절 제목 영화는 흥행한다'는 속설이 퍼져있어 2음절 제목을 선호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유행처럼 번진 것이지만, 마케팅적으로는 짧은 제목이 관객의 뇌리에 쉽게 박혀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국내에 존재하는 3대 멀티플렉스 업체인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영화관 시장의 96.9%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씨네Q와 기타 독립영화관을 다 합쳐도 고작 3.1%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 멀티플렉스 개념이 들어온 것은 CGV가 1998년 강변점을 오픈하면서다. 멀티플렉스 태동기 이전에는 각 지역별로 따로 영화를 운영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영화관 체인을 독점하는 문제점은 없었다. 그러나 CGV 강변점 오픈 이후,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멀티플렉스 3사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영화관을 잇달아 오픈했다. 이로 인해 기존 단관 극장들은 멀티플렉스 체인에 편입되거나 폐업하는 식으로 줄기 시작했다. 그나마 2000년대까지는 멀티플렉스 3사의 점유율이 50%에 못 미쳤다. 그러나 대침체로 단관극장들은 줄줄이 파산하게 된다. 이후 멀티플렉스 3사는 금융위기 여파로 파산한 단관극장들을 흡수하며, 점점 더 커지는 멀티플렉스 3사에 완전히 경쟁력을 상실한 2010년대 이후의 단관극장들은 경영을 포기하고 멀티플렉스에 매각시켜버렸다. 그래서 2012년 이후 3대 멀티플렉스 체인의 점유율이 90%를 넘게 된 것이다. 3대 멀티플렉스 업체들이 영화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거부하는 영화들은 국내 영화 시장에서 영화관 상영이 불가능해져 버렸고, 2011년도에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분쟁을 일으켜 일부 디즈니 영화들이 서울특별시에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도에 제작된 '옥자' 때부터는 3대 영화관 회사 모두가 넷플릭스 영화의 영화관 개봉을 전면 거부하여 넷플릭스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31]

제작과정[편집]

기획에서 상영까지는 6단계를 거치게 된다. 기획,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후반작업, 마스터링, 상영을 하게 되는데, 이를 줄여 3단계로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기획을 하게 되는데 제작할 소재, 주제를 결정한다. 상영, 출품 등의 기한, 장소 등을 미리 계획하고, 이를 고려한 기획을 한다. 소재, 주제에 따라 장르와 형식을 결정한다. 이때 하이 콘셉트(High-Concept)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하이 콘셉트란 영화가 추구하는 메시지를 짧은 말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말한다. 다음 단계인 프리프로덕션 단계는 전·제작 단계로,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촬영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 영화를 기획하는 시나리오를 구성하기 위해 촬영을 위한 각종 문서를 작성하고 로케이션 헌팅, 캐스팅, 스태프를 구성하거나 촬영 보조 장비를 구성하고 테스트 촬영을 한다. 시나리오를 작성할 때 하이 콘셉트를 토대로 다양한 상상력을 더해준다. 스토리보다 중요한 것이 인물의 캐릭터이며, 결말을 먼저 확정 짓고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좋다. 스토리 중 인물의 목표와 장애물, 갈등은 필수 배치 요소이며, 이는 극적 긴장감과 스토리의 기승전결을 만들어준다. 결말로부터 거슬러서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좋은데 그 이유는 스토리의 일관성을 유지시킬 수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촬영 전 문서 작업으로 스크립트 브레이크다운(Script Break down)을 한다. 각각의 장면(Scene)을 해부하여 촬영을 위한 세부 요소들을 기록하고 각 플롯을 해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 번 더 시나리오를 체크한다. 그다음 촬영대본(콘티)작업을 하는데 시나리오를 토대로 카메라 앵글과 사이즈, 움직임 등을 기록한다. 촬영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며, 콘티는 촬영의 장소, 방향, 카메라의 앵글 등의 기본 지침이 된다. 일일 촬영 계획표도 세우게 되는데 스크립트 브레이크 다운을 토대로 날짜별로 촬영할 장면과 세부 사항을 기록한다. 장소, 일정, 예상 시간 등을 고려하여 예산과 가장 밀접한 부분이다. 로케이션 헌팅 작업은 정면 촬영 후 분류를 해 촬영하고자 하는 장소를 정사진으로 촬영한 후, 리스트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보관한다. 지도로 함께 표시를 하며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map을 저장해 장소별로 촬영 순서를 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캐스팅 작업은 오디션을 해 화상으로 진행하거나 포트폴리오로 지원을 받는다.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전에는 촬영보조 장비 준비와 테스트 촬영을 하여 실제 촬영 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게 대비한다. 영상 확보를 통해 짐벌, 트라이포트 등을 이용하여 흔들림 없는 영상을 확보할 수 있도록 장비를 정비한다. 그다음 프로덕션은 제작을 하는 단계로 계획된 일정에 따라 촬영을 진행한다. 포스트프로덕션은 후·제작 단계로 편집 과정에 상영, 출품 등 광범위한 촬영 후의 작업을 얘기한다. CG를 제작하고 편집과 오디오 믹싱을 거친 후 색보정(DI)을 하고 상영용 포맷으로 마스터 파일을 추출하는 작업을 한 뒤에 배급 과정을 거쳐 극장 등에서 관객을 만난다.[32]

각주[편집]

  1. 영화〉, 《네이버 사전》
  2.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3. 영화의 역사〉, 《팬덤 위키》
  4. 영화 장르와 그 특징〉, 《컬트렐》
  5. 망고맛 치약, 〈영화 장르의 ‘드라마’는 무슨 뜻일까?〉, 《티스토리》, 2020-02-20
  6. 김홍식, 〈멜로영화〉, 《블로그스팟》,2009-12-21
  7. 김주호, 〈스포츠영화 10선 그리고 홍보적 의미〉, 《네이버 블로그》,2009-08-29
  8. 공포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9. 판타지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10. 액션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11. 액션영화〉, 《위키백과》
  12. filmmakerjin, 〈Ep.01-01 스릴러 영화 이야기〉, 《브런치》, 2018-10-19
  13. filmmakerjin, 〈Ep.01-02 스릴러 영화 이야기〉, 《브런치》, 2018-10-22
  14. 애니메이션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15. 코미디 영화〉, 《위키백과》
  16. 아트인사이트, 〈코미디 영화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줌 허브》, 2020-12-12
  17. 정재모, 〈SF 영화란 ?〉, 《다음 블로그》, 2008-12-23
  18. 무성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19. 블리노, 〈흑백영화의 장점〉, 《다음 카페》, 2007-09-04
  20. 성지윤, 〈매력적인 흑백 영화의 세계〉, 《아트인사이트》, 2017-03-26
  21. 유성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22. DM군, 〈영화속 특수효과기법〉, 《네이버 블로그》, 2016-08-31
  23. 대대홍, 〈육감도 자극하는 푸르지오 4D CF/3D영화의 원리/무안경 3D의 원리/무안경 3D의 종류/4D영화/4D광고/4DCF/프로메테우스〉, 《네이버 블로그》, 2012-06-18
  24. 4D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25. 단편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26. 단편영화〉, 《두피디아》
  27. 수빈, 〈할리우드 영화의 발전과 특징〉, 《네이버 블로그》, 2019-11-13
  28. 다락원, 〈중국 영화의 역사〉, 《네이버 포스트》, 2017-03-06
  29. 다락원, 〈중국 영화의 오늘〉, 《네이버 포스트》,2017-03-13
  30. 예지, 〈내가 본 일본 영화 특징〉, 《네이버 블로그》, 2021-07-06
  31. 한국 영화/특징 및 문제점〉, 《나무위키》
  32. 해만달만, 〈영화제작 과정〉, 《네이버 블로그》, 2021-03-10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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