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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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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창덕궁(昌德宮)은 조선 - 대한제국 시대의 궁궐이다.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에 있다. 지번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이다.

개요[편집]

창덕궁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창덕궁의 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원형이 비교적 충실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역사[편집]

1820년대 후반 창덕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 동아대학교 소장본.
1908년 즈음의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이 그려진 〈동궐도형〉

13세기~16세기[편집]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정종 1년)에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移宮)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그러나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머물기 싫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兩闕體制)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태종은 창덕궁을 완공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1405년(태종 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 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열었다.

1405년(태종 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춘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한 이후에도 창덕궁 증축 공사를 계속 했다. 1412년(태종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을 완공한 후 1406년(태종 6년)부터 태종은 창덕궁의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지은데다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外殿) 역시 매우 조촐했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고작 3칸 규모였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안고 해야겠다."면서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를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했는데, 이 때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졌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은 창덕궁을 애용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 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를 다시 한 번 증개축했다. 또한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벌이면서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세조 대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 규모는 태종 때보다 규모가 3배 더 커졌다.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壽康宮)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했다.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한 것은 경복궁보다 구조, 입지, 심미안적으로 거주지로서 더 걸맞아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두 궁을 다 가보면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느끼기에도 녹음이 있는 창덕궁이 거주에 더 좋아 보인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경복궁은 내부에 지금처럼 녹지와 나무가 있지 않았고, 거의 흰색 모래나 돌판이 깔려 있었으며 건물도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으니.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명·청대의 황제들은 예법을 철저히 준수해서 빡빡하게 지어진 자금성을 부담스러워해 많이 머물지 않았고 자금성 옆에 위치해 있고 넓은 호수와 정원이 갖추어져 있어 한결 여유로운 중난하이에 많이 머물렀다. 또한 경복궁에서 피비린내 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꺼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16세기~19세기)[편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선조한성을 떠나 파천하면서 궁을 버리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탔다. (주동자가 백성인지 왜군인지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1593년(선조 26년)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동 행궁에 기거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죽기 3년 전인 1605년(선조 38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즉위 후인 1609년(광해군 1년)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보수 공사를 명했으며, 1년 후인 1610년(광해군 2년)에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창덕궁을 법궁으로 선포했다. 이렇게 버려져있던 시기, 불 타 폐허가 된 창덕궁과 버려진 후원은 경희궁과 함께 범들이 낮 동안 몸을 은거하던 장소였다.

이에 창덕궁과 경희궁은 곧 재건되었으나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재건되지 못한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했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인조 치세의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1647년(인조 25년)에야 공사가 끝났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과 경희궁이 기존의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궁궐병이었지만, 재위 초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이들 궁전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점을 언급하며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재건까지는 왕실 이미지 복구를 위한 리모델링 사업 정도로 인정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쪽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인조가 인경궁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경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인조는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연루된 저주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든 인경궁을 써보자는 입장이었다.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정쟁이 있었지만,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엮인 저주사건이 터진 이후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지어놓은 궁전을 굳이 헐고 그 자재를 옮겨다 새로 짓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신들이 그냥 인경궁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렸다.

광해군 이후 창덕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 후기 대부분 정치적 사건의 배경이 창덕궁이었다. 한마디로 창덕궁은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이다. 그렇기에 조선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궁궐이기도 하다. 고증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던 과거에는 경복궁에게 그 입지를 많이 빼앗겼지만.

순조 시절 대화재로 창덕궁 상당 부분이 다시 한 번 전소되었다. 불타기 전 창덕궁 건물 대부분은 인조가 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섭정기) 이후[편집]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중건하면서 창덕궁은 정궁(법궁)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주하는 등 여전히 창덕궁을 중요한 궁으로 인식하고 활용했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당시에는 청군의 공격으로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1897년(건양 2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사용했으나,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39년 만에 도로 정궁이자 황궁이 되었다. 단순히 임금이 머문 것만을 기준으로 하면, 1894년(고종 31년) 이후 13년 만이다.

1910년(융희 4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했다. 전 황제였던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강등당했고, 창덕궁은 순종의 궁호로도 쓰였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에 공개했다.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다 재건하기도 했다.

의외로 덕수궁(경운궁), 경복궁 못지 않게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이다. 궐 내부에 덕수궁 석조전 같은 양관이 세워지지 않았을 뿐 서양 문물의 영향이 물들어 있다. 주요 전각들의 내부는 서양식 형태이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 격인 선정전, 생활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 내부에는 전구가 달려 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7년에는 미군정에서 몰수하여 정부 소유가 되었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문화재청)의 소유가 되었지만, 정부의 배려로 1960년대 이후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 등 구 황실 일족이 일부 전각(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했다. 그러다 1989년 4월에 이방자의 별세를 끝으로 완전히 구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들이 거주했다. 즉,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구 황족들의 거처 역할을 했다.

특징[편집]

뛰어난 원형 보존성[편집]

한양 5대 궁궐 중 그나마 원형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창덕궁 후원(비원)에 예약 관람 신청을 하여 가봤다면, 가이드가 초반부터 입에 닳도록 하는 말일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꼽아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농담삼아 나오기도 한다.

경복궁 대부분의 전각들은 길어야 19세기에 새로 지은 것이며, 그나마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대다수를 허물었다가 광복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새로 복원한 것이라 깔끔하다 못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래선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없게 됐다.

반면에 창덕궁 전각들은 인정전을 포함한 대부분이 원형이라서 궁궐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기염을 토했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유네스코 기념비가 나오는데 '창덕궁Palace' 라고 적혀있다. 한국말로 창덕궁궁. 특히 돈화문(敦化門),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등 많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의 가치도 높다. 달리 말하면 다른 조선 궁궐들보다 상대적으로 창덕궁의 가치가 높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창덕궁 전각들은 무겁다 못해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복궁보다 유구한 전통성[편집]

경복궁이 한양 5대 고궁 중 대중성이 압도적인 나머지 그 역사성까지 압도할 것 같으나, 이러한 민간 통념과 달리 경복궁의 역사성은 창덕궁보다 훨씬 짧은 편이다.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갑절이나 넘는 시기 동안 왕의 주요 궁궐(편의상 '정궁') 지위를 유지한데다, 상기했 듯이 경복궁은 사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는) 275년 간은 복구하지도 않았던 궁궐이며, 조선왕조 500년간 경복궁에서 왕이 정사를 보던 시기는 150년 안팎이다. 즉 경복궁은 조선 초기와 고종 시기에만 궁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반면에 창덕궁은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계속 원형을 보존하며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다.

그런데도 대중들의 대우는 다소 박한 편이다.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접근성이 한참 뒤지는 것도 한몫한다. 실제로 경복궁 인근엔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광장 등 중요 시설과 인접해있는데다가,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되어있는데 반해서, 창덕궁은 주요시설과 인접해있지도 않고 안국역에서 좀 걸어가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궁궐 덕후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궁을 제대로 보려면 경복궁보단 창덕궁 / 창경궁에 가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경복궁은 대중성이 넘사벽인지라 인파가 인산인해하지만, 창덕궁이나 창경궁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산한 편이라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차라리 창덕궁에 가라는 나름 궁덕후들의 꿀팁이 있다.

특이한 건물 배치[편집]

1560년 ~ 1561년에 그린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에서 묘사한 창덕궁 인정전 권역. 현재 남아있는 자료 중 시기적으로 박자청이 설계했던 창건 당시의 모습과 가장 가깝게 묘사된 그림이다. 당시에는 인정문이 중층이었고 좌우 행랑에 현재는 없는 중층 십자각이 있었다.

경복궁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한 건물 배치를 중시하는 등 전례를 엄격하게 존중해서 지은 궁이다. 하지만 창덕궁은 건물들이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는 궁이다. 심지어 궁궐의 정문과 정전이 완전히 틀어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창덕궁의 지형이 주변 언덕과 어우러지고자 했으며, 특히 창덕궁 바로 남쪽에 위치한 종묘의 지맥을 훼손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다른 동양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며, 그래서 창덕궁은 한국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배치를 보여주는 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과감한 창덕궁의 배치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1419년(세종 1년)에 상왕 태종이 공사 책임자인 박자청을 하옥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인정문 밖의 마당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박자청을 측량을 게을리했다는 명목으로 하옥시켰고 상량까지 한 행각(복도로 쓰이는 건물)을 부숴버리라 명한 뒤 그곳에는 담만 쌓게 했다. 하지만 결국 한 달 후에 박자청은 풀려나 이후로도 계속 이런저런 공사들을 맡았고, 끝내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으로 행각을 지었다. 즉,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란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의 의도된 설계였다는 것이다.

태종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창덕궁 바로 동쪽에 수강궁(壽康宮, 현재의 창경궁)을 지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단 태종이 창덕궁 증축 공사를 벌였지만, 실질적인 공사 관리를 담당한 것은 새로 임금이 된 세종이었다. 다만, 박자청 하옥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배후에서 태종이 항상 매의 눈으로 공사 진행을 지켜보았다. 어쨌든 태종은 창덕궁 공사 관리 감독이라는 명분으로 세종을 가까운 창덕궁에 붙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세종은 창덕궁보다 경복궁을 훨씬 선호했다. 세종은 태종의 승하 직후 경복궁 개축 공사를 명했고, 집권 중기 이후 경복궁을 치세의 중심지로 삼았다. 특히 세종이 자신의 정치의 핵심으로 삼았던 집현전을 활용하기에 경복궁이 더더욱 적합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은 경복궁에다가 커다란 집현전 건물을 지었는데, 이는 비좁은 창덕궁의 집현전보다 훨씬 컸다.

건축과 구조[편집]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궁문[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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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증충의 우진각지붕집이다.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년(태종 13)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선조 40)에 복구를 시작해 1609년(광해군 원년)에 완공해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본래는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법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다. 1997년, 일제강점기에 파묻혔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돈화문 앞에 있던 월대를 복원했다.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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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문(金虎門)

창덕궁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인 돈화문이 주로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이용되었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궁내 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창덕궁으로 들어올 때 금호문을 이용했다. 건립 이후 성종 이전까지 명칭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에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각기 2개의 액호를 지었고 이때 성종이 금호라는 액호를 낙점해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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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봉문(丹鳳門)

창덕궁의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는 남장문이라고 불렸으나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성종 때 개명된 것이며 당나라 장안성 대명궁의 남문인 단봉문에서 따왔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돈화문을 사사로이 드나들 수 없는 왕족과 그 친인척 그리고 상궁들의 전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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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문(曜金門)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한 궁문. 내시와 궁녀들이 병들거나 늙어 내관, 궁녀 생활을 마감하고 퇴궐시킬 때 나간 문이다. 현재는 근처에 주택들이 들어서 폐쇄된 상태며 근처 담장까지 가옥이나 상가의 담벼락으로 활용되고 있거나 문 앞에 쓰레기가 쌓이는 등의 수난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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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추문(景秋門)

금호문과 함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나 출정 명령을 받은 무관이 나오는 데에 이용되었다.

외조[편집]

외전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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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문(進善門)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 지붕을 하고 있으며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서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 공사 때 헐렸다가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착수 1999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숙장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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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장문(肅章門)

진선문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내전으로 통하는 문이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1475년(성종 6)에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 중 하나를 성종이 낙점하면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 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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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문(仁政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다가 광해군 즉위초 증건시 재건되었으나 1744년(영조 20)에 인접한 승정원에서 화재로 또 소실, 복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정문을 포함한 20여 칸의 월랑이 행각으로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991년에 배수로 보수 도중 발견된 석조기단과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의 모습인 월랑으로 1995년까지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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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仁政殿) 대한민국의 국보

창덕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전각이며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다.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해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즉위하면서 1908년(융희 2년) 창호를 황색으로 칠하고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천과 커튼 등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앞마당의 박석이 걷어지고 화초가 심어지는 등 대대적으로 훼손되었다. 해방 후 1985년 국보 225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 앞의 잔디를 걷어내고 박석을 다시 설치했다.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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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宣政殿)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단층 양식의 다포계 팔각지붕을 한 전각으로 궁궐의 전각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하고 있다. (징광루도 청기와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1917년 소실) 건립 당시 조계청이었으나,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되었다. 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다가 1647년(인조 25), 광해군 때 청기와를 얹어 호화롭게 지은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헐어 재건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청기와를 얹고 있는 것. 이후 편전의 기능이 희정당과 중희당으로 넘어가자 빈전, 혼전 등 왕실장례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 변모되었고 복도각이 증설되었다. 근대화 시기에 인정전처럼 내부에 전기시설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에 복도각이 헐어지는 등의 훼손을 겪다가 해방 뒤인 1985년에 보물 제814호에 지정되었고 1997년에 복도각이 복원되었다.

궐내각사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궐내각사는 1990년대 말에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복원된 인정전 서편의 궐내각사 건물군들이다.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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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摛文院)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본래 오위도총부가 위치한 곳으로 규장각이란 편액 때문에 규장각으로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후원에 있는 주합루만으로는 많은 분량의 서책들을 감당할 수 없자 1781년(정조 5)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여 검서청, 책고, 봉모당과 함께 내각이라 불렸다. 정조 사후 기능이 도서관으로 영락하여 이름만 존재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라는 관청 자체가 혁파된 후 빈 전각으로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다른 궐내각사의 전각들과 헐렸으며 해방 후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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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서청(檢書廳)

규장각 오른쪽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각으로 규장각에 둔 관직인 검서관이 사관을 도와 서적의 교정과 서사일을 본 곳으로 역대 임금이 지은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면서 빈 전각이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다른 내각의 전각들과 함께 훼철되었다가 해방 후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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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모당(奉謨堂)

규장각과 검서청 뒤쪽에 자리잡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역대 임금들의 어진과 유품인 보책과 인장들을 보관했다. 궐내각사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원래 부용정 뒷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던 건물이다. 1781년(정조 5) 많은 분량의 서책들과 유품들을 감당할 수 없자 따로 어제, 어필, 어화, 고명, 유고, 밀교 및 선보, 세보, 보감, 지장 등을 열무정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정조 사후 규장각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덩달아 약화되었고 1857년(철종 8) 규장각 이문원의 부속 전각인 지금의 자리인 대유재로 옮겨졌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었다가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어 전모과에서 관할했고 일제강점기인 1911년 전각을 헐어낸 뒤 일본식 전각을 세워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가 보관되었다. 해방 후 1968년 일본식 전각을 철거하고 서적은 창경궁서각으로 옮겨졌고 1991년에 옛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봉모당의 앞마당에 커다란 향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수령이 700년 이상으로 창덕궁의 창건 전부터 있던 유서가 깊은 나무이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강풍으로 치솟은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정도 꺾여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700년 된 향나무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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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고(冊庫)

봉모당 뒤인 금천변에 위치한 전각으로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책을 보관하는 창고로 하나의 전각이 아닌 여러 전각으로 되어 있으며 봉모당 뒤쪽과 측면에 각각 한채 그리고 앞서 언급된 봉모당 뒤편의 책고 등 3개의 전각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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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藝文館)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제찬(制撰)과 사명(詞命 : 임금의 말이나 명령)에 관한 일을 관장했던 예문관(예조 산하)의 관사로, 국조오례에 의한 각종 궁중의식의 규율을 관장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도 있었다. 향실과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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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본래 액호대로 옥당(玉堂)이라 불려야 하지만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홍문관의 관사였기에 홍문관으로도 불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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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원(內醫院)

정면 8칸, 측면 5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액호는 약방이지만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내의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궁중의 진료를 담당했다. 허나 1920년 창덕궁의 대화재로 궁궐 내의 전각들이 불에 타 일제에 의해 변형되면서 동궁이었던 성정각에 내의원이 기능을 빼기고 헐렸으나 1991년에 옛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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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석루(憶昔樓)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를 한 전각으로 구 선원전 앞과 내의원 뒷행각에 속해 있으며 액호인 억석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하고 있지만, 다른 의미로는 최초로 약초를 발견한 고대 중국의 신농씨를 기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조[편집]

내전[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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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熙政堂)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11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전각이다. 본래 건립 당시에는 숭문당이라는 이름의 침전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 희정당으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등의 병화로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 재건을 거치면서 선정전의 편전 기능을 이어 받았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 그 자재로 재건되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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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大造殿)

왕비의 침전으로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을 포함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경의실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에 내부가 일부 서양식 실내로 바뀌어졌다. 그 결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경훈각을 비롯한 전각들이 행각으로 연결되었다. 1926년 순종황제가 대조전의 부속 전각인 흥복헌에서 붕어했으며, 해방 후인 1985년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한 침대를 비롯한 근대 시기의 고가구들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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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훈각(景薰閣)

창덕궁의 전각으로 대조전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조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지만 본래 중층 전각으로 대조전과 이어져 있었다. 1461년(세조 7)에 2층을 징광루(澄光樓), 1층은 광세전(廣世殿)이라 불렀던 기록이 있었다. 후에 광세전은 지금의 명칭인 경훈각으로 개명되었다. 역시 1917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만경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 지금과 같은 모습의 단층 전각으로 재건되었다. 지금은 선정전만이 청기와를 쓴 유일한 건물이지만, 동궐도를 보면 징광루 역시 청기와를 사용한 건축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궁[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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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각(誠正閣)

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ㅓ"자 형태의 단층 전각이다. 액호인 성정은 유교 경전인 대학에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정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의 남쪽에는 희우루, 동쪽에는 보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으나, 1917년 창덕궁 대화재 당시 순종이 이곳으로 일시 피난처로 쓰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정각을 빙 돌아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 자시문(資始門)이란 문 앞에 오래된 홍매화 나무가 있는데, 명나라 사신이 선물로 준 매화나무에서 접쳐온 후 자랐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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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헌(觀物軒)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각 뒤쪽에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여기에 걸린 '집희/즙희 (緝熙)'라는 편액은 고종이 12-3세 때 쓴 것이다. 왕의 편전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와 거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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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희당 터

성정각을 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이 터가 정조 8년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동궁 중희당重熙堂이다. 정면 7칸 내지는 9칸, 측면 3칸 내지 4칸으로 추정되는 규모이며 문효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 동궁으로 쓰이기보다는 왕의 정무를 보는 편전이나 별당 용도로 많이 쓰였다. 중희당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당시 으뜸되는 정당正堂으로 사용했으며, 후일 헌종, 철종, 고종까지도 활발히 사용했다. 특히 고종 때는 명성황후와의 궁중가례절차를 중희당에서 치렀고, 기타의 궁중행사도 중희당에서 많이 개최했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80년경 경복궁 화재로 중건공사를 다시 벌이는 과정에 중희당을 경복궁으로 옮겨 지으라는 지시가 있었다라는 기록 이후에는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터로만 남아있다. 다만 중희당의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다. 무려 정조의 친필이고, 2018년 기준으로 전시 중이니 중희당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찾고자하는 사람들은 찾아가 보자.

승화루(承華樓)&삼삼와(三三窩), 칠분서(七分序).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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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화루(承華樓)&삼삼와(三三窩), 칠분서(七分序)

앞서 설명한 중희당의 부속건물들로 중희당의 본채는 없어졌으나 이 부속건물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동궐도에서 중희당 그림의 오른쪽 부분에 있는 건물들이다. 칠분서는 중희당에서 삼삼와/승화루로 넘어가는 연결복도였고 삼삼와는 육각정 형태의 건물이며, 승화루는 주로 도서를 소장하고 독서처로 쓰였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엔 순종의 경호라고 쓰고 요주인물 감시라고 읽자를 명목으로 이곳 승화루에 '창덕궁경찰서'를 설치하고 일제의 경찰이 상주하기도 했다. 삼삼와 앞 화단에 심겨있는 홍매화 나무가 일품이다.

창덕궁 후원[편집]

창덕궁의 아름다운 풍경 중 하이라이트는 궁 북쪽의 정원인 창덕궁 후원(後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이 정원의 명칭은 '후원'이 가장 많고 이외에도 '금원(禁苑)', '북원(北苑)' 등이 있다. '금원'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정원'이라는 의미이고 '북원'은 '궁궐 북쪽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원의 이름을 두고 갑론을박이 꽤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한동안 이 정원을 칭했던 이름은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秘苑)'이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정원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창덕궁 관련 문건에도 후원을 칭하는 명칭은 비원(Piwon, the Secret garden)이라고 표기돼 있다. 일각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궁궐의 격을 낮추고 특히 창덕궁 후원을 낮춰부르기 위해 비원이라고 명명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일제가 비원이라는 이름을 부르도록 강요했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다. 그래도 오래 전부터 정사에 등장하는 명칭이 후원인 만큼 비원보다는 창덕궁 후원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비원이라는 명칭은 대한제국 때 붙여진 이름이다. 그 근거로는 대한제국기의 법령을 모아 발간한 "법규유편" 제1권 관직항목에 창덕궁후원을 "비원"이라고 칭하고, 비원을 관리할 관리의 직책과 인원을 규정하였었다. 해당 법규유편은 대법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대법원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국역하여 무료제공하고 있다

연경당 일대

연경당(演慶堂) 안채 선향재(善香齋) 농수정(濃繡亭) 장락문(長樂門) 장양문(長陽門) 수인문(修仁門) 통벽문(通碧門)

주합루 일대

주합루(宙合樓) 규장각(奎章閣) 서향각(書香閣) 어수문(魚水門) 희우정(喜雨亭)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부용정(芙蓉亭) 부용지(芙蓉池) 영화당(映花堂) 춘당대(春塘臺) 천석정(千石亭)[제월광풍관]

애련지 일대

이안재(易安齋) 기오헌(의두합倚斗閤) 운경거(雲磬居) 애련정(愛蓮亭) 애련지(愛蓮池) 불로문(不老門) 금마문(金馬門)

옥류천 일대

후원의 깊은 곳에서 발원한 옥류천(玉流川)은 소요암(逍遙巖)에서 옥류천(玉流泉)을 이루며, 소요암이 보이는 곳에 소요정(逍遙亭)이 세워져 있다. 초가지붕을 인 청의정(淸漪亭)과 소요정 사이에 인조가 팠다고 전해지는 어정(御井)이 있으며, 어정의 샘물을 마시고 돌아가는 왕이 쉬도록 취한정(翠寒亭)을 세웠다. 옥류천 주위에는 후원 내에서 유일하게 높은 기단 위에 지어진 태극정(太極亭)이 있는데, 소요정·청의정·태극정을 한데 묶어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칭한다. 행랑채와 같이 건립된 농산정(籠山亭), 존덕지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길에 지어진 취규정(聚奎亭)이 있다.

존덕정 일대

육각형의 이중 지붕이 특징인 존덕정(尊德亭)은 존덕지(尊德池)에 있는 정자로, 인조 때 만들어질 당시에는 육각정이라고 불렀다. 지붕이 부채꼴 모양인 관람정(觀纜亭)이 구조가 간결한 승재정(勝在亭)과 함께 반도지(半島池)에 건립되어 있다. 이 권역에는 왕세자가 독서하던 건물인 폄우사(砭愚榭) 또한 존재한다.

신선원전 일대

신선원전(新璿源殿) 일대는 신선원전과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 현재 개방사업구간이 아니라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신선원전의 위치는 대보단의 위치라기보다 대보단보다 동쪽이라고 볼 수 있다.

대보단 일대

숙종 30년인 1704년에 준공되었다. 제를 지내기 위한 제단으로, 각 면의 길이가 약 12미터 남짓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 대보단(大報壇)의 부속 건물은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으며, 일제가 중국에게 제를 지내는 단을 허용할 리 없었다. 그래서 대보단을 없애고 덕수궁의 선원전을 옮겨다가 신선원전을 만들었다. 이미 그 이전 창덕궁에는 선원전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 선원전을 구선원전이라 한다.

기타 건물

빙천(氷川) 청심정(淸心亭) 빙옥지(氷玉池) 능허정(凌虛亭)

연경당  
주합루·규장각  
옥류천·소요암  
부용정  
영화당  
애련지·애련정  

천연기념물[편집]

궁궐 내에는 수명이 오래된 나무들이 많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 돈화문 주변 회화나무 - 천연기념물 472호
  • 구선원전 부근 향나무 - 천연기념물 194호
  • 후원 뒷편 다래나무 - 천연기념물 251호
  • 관람지 입구 뽕나무 - 천연기념물 471호

관람[편집]

궁궐관람제도가 개편됨에 따라 2010년 5월 1일부로 전각구역은 자유관람이며, 후원은 별도 요금으로 시간이 제한된 관람이 실시되고 있다.

종묘 및 4대 궁궐(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창덕궁)를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으로도 입장이 가능하다. 또한, 함양문을 통해 창경궁과 연계관람이 가능하다.

관람코스[편집]

궁궐전각관람
  • 관람동선 경로( 약 60분 / 약 1km )
  1. 돈화문
  2. 금천교
  3. 궐내각사
  4. 인정전
  5. 선정전
  6. 희정당
  7. 대조전
  8. 낙선재
후원관람
  • 아래의 관람 코스를 문화재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관람하는 제한관람이다.
  1. 후원입구
  2. 부용지
  3. 애련지
  4. 연경당
  5. 관람지
  6. 옥류천
  • 혹한기, 혹서기 관람동선 안내
혹한기, 혹서기에는 관람객 안전 및 자연 생태보존을 검토하여 관람동선의 일부를 축소운영하고 있다.
  • 운영기간 : 혹서기(7~8월) 및 혹한기(12~2월)
  • 변경내용 : 관람시간 90분→ 70분(20분 단축운영)
  • 관람동선 : 후원입구① - 부용지② - 애련지③ -관람지⑤ - 연경당④ - 향나무길 - 퇴장
  • 날씨 등의 상황에 따라 코스는 약간 조정될 수 있다.
궁궐전각관람 코스  
후원관람 코스  
달빛기행

창덕궁 달빛기행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창덕궁에서 매월 음력 보름을 전후해 은은한 달빛 속의 정취와 함께 진행된다. 아름다운 야간조명과 함께 국가의 중심공간으로서 위엄과 다채롭고 소소한 일상공간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느끼며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청사초롱으로 길을 밝히고 전문해설사의 안내로 창덕궁의 밤풍경을 거닐며 후원을 포함하여 각 전각을 돌아본다. 전각과 후원을 돌아본 후 연경당에서는 차 한 잔의 여유와 다과를 즐기며 전통공연을 관람하는 시간을 가지며 만들어낸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보아오던 창덕궁의 고즈넉한 야경과 그때와 변함없는 보름달의 아름다움이 되살아나는 시간이 된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매년 봄 가을에 열리고 있다.〈창덕궁 달빛기행 바로가기 클릭

관람시간 및 요금[편집]

궁궐전각
  • 관람 시간
  •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 휴궁일이 공휴일(대체공휴일 포함)과 겹칠 경우 개방하며, 이 경우 개방한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을 휴궁일로 한다.
  • 2-5월 : 09:00-18:00(입장마감은 17:00)
  • 6-8월 : 09:00-18:30(입장마감은 17:30)
  • 9-10월 : 09:00-18:00(입장마감은 17:00)
  • 11-1월 : 09:00-17:30(입장마감은 16:30)
  • 관람요금
  • 내국인 : 대인(만25세~만64세) 3,000원 (유료 10인이상 2,400원)
  • 외국인 : 소인(만 7세~만18세) 1,500원(유료 10인이상 1,200원). 대인(만19세~만64세) 3,000원(유료 10인이상 2,400원). 무료(만6세이하, 만65세이상, 한복착용자,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
  • 특별권
  • 궁궐 통합관람권 : 3개월, 10,000원. 구매일로부터 3개월간 사용가능 (각궁별 1회 한정). 4대궁 및 종묘 매표소에서 구입가능. 환불 : 구입한 궁에서만 환불가능. (단, 한군데라도 절취시 환불 불가능). 단, 창덕궁 후원 특별관람의 경우,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통합관람권을 구매하였어도 관람 당일 매표소에서 현장 구매표로 선착순 교환
  • 상시관람권 : 1개월, 30,000원. 구매일로부터 1개월간 사용가능. 창덕궁 궁궐전각지역만 가능. 사진 1매 제출(2.5 X 3.0). 구입한 고궁만 입장가능
  • 점심시간 관람권 : 12:00~14:00, 5,000원. 구매일로부터 3개월간 사용가능(10회한정), 구입한 고궁만 입장가능, 인근 직장인 대상(사원증 지참)
후원관람
  • 관람 시간
  •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 휴궁일이 공휴일(대체공휴일 포함)과 겹칠 경우 개방하며, 이 경우 개방한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을 휴궁일로 한다.
  • 후원관람은 제한관람지역으로 해설사와 함께하는 시간제관람이다. 관람시간은 관람안내해설시간을 참조.
  • 2월 : 10:00-17:00(입장마감은 15:30)
  • 3-5월 : 10:00-17:30(입장마감은 16:00)
  • 6-8월 : 10:00-17:10(입장마감은 16:00)
  • 9-10월 : 10:00-17:30(입장마감은 16:00)
  • 11월 : 10:00-17:00(입장마감은 15:30)
  • 12-1월 : 10:00-16:30(입장마감은 15:00)
  • 관람요금

후원은 궁궐전각 관람권을 추가적으로 예매 또는 당일 현장구매해야 한다.

- 전각 및 후원관람 무료,할인대상자는 해당 증빙 자료를 매표소에 제시하여 무료권를 발권 받아야 한다.
소인 만7세-만18세 2,500원(+전각요금 무료)
성인 대인(만19세~만24세) 5,000원(+전각요금 무료)
대인(만25세~만64세) 5,000원(+전각요금 3,000원)
경로(만65세이상) 5,000원 (+전각요금 무료)
단체 성인 유료 10인 이상 5,000원(+전각요금 2,400원)
외국인 소인(만7세~만18세) 2,500원(+전각요금 1,500원)
대인(만19세~만64세) 5,000원(+전각요금 3,000원)
경로(만65세 이상) 5,000원(+전각요금 무료)
외국인 단체

(유료관람객 10인이상)

소인(만7세~만18세) 2,500원(+전각요금 1,200원)
대인(만19세~만64세) 5,000원(+전각요금 2,400원)
무료대상 만6세이하(내·외국인), 장애인(내국인), 국가유공자(내국인)
할인대상(내국인) 종로구민 50% 후원특별관람료 할인(‘15.1.29.부터 시행)

※ 감면 대상자는 주민등록증, 청소년증, 주민등록등본 및 신분증 등 증빙 제시

※ 후원관람권 취소 환불규정 및 주의사항

  • 입장시간 미준수시 입장 및 관람권 교환/환불이 불가.
  • 궁궐입구에서 후원입구까지 15분이상 소요되오니, 예매자는 관람시작시간 최소 20분 전에는 입장(돈화문 정문)하여 주기 바란다.

장애인 및 국가보훈대상자 무료관람 〈장애인 및 국가보훈대상자 무료관람 안내 바로가기 클릭

교통 및 지리·행정[편집]

대중교통으로는 정문인 돈화문 인근에 109, 151, 162, 171, 172, 272, 601, 710, 7025, 종로12가 정차한다. 도시철도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가장 가깝다. 3번 출구에서 돈화문까지는 4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보 5분 거리이다. 자가용으로 올 경우 종로소방서 임시청사 뒤편 등 주변의 민간 주차장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 다만 입지가 서울의 한복판 1급지인 만큼 비싼 주차요금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카카오 T 주차 서비스를 잘 이용하면 1일 종일권을 6000원에 구매할 수 있다. 돈화문 주변 주차장의 요금이 5분당 500원, 10분에 1000원, 1시간에 6000원임을 감안한다면 엄청나게 싼 금액이다. 이 점을 활용하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후원을 따라 쭉 올라가면 북악산과 성균관대학교가 나온다. 물론 일반 관람객은 갈 수 없다.

지금은 입장 통제 등의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 권역상으로도, 행정관리 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저 3곳을 하나의 큰 권역으로 인식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맞대고 선 하나의 궁궐처럼 인식하여 두 궁을 합쳐 "동궐 東闕"(경복궁의 동쪽 궁궐)이라 불렀다. 종묘의 경우 제례공간으로써 일상생활과 정치를 펼치는 궁궐과 성격상은 판이하게 다르나,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뻗어나와있는 야트막한 같은 봉우리에 함께 위치하여 지맥地脈을 공유하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했다. 담장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담장은 있었다. 공간 인식을 현재처럼 아예 분리해서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현재 창덕궁에서 관리하는 낙선재도 본래는 창경궁의 부속으로 출발했고, 후원의 경우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도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담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지금도 통하는 문이 있다. 춘당지 뒷쪽으로 있는데 단, 후원과 연결되는 문들이 관리차원에서 굳게 닫혀있는 상황이다.

같은 지맥을 공유한 한 권역으로 인식했던 종묘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율곡로를 뚫으면서 지맥을 훼손하고 길을 뚫어 강제로 분리됐다. 이 일화가 눈물나는데, 순종 생전에 도시계획에 율곡로 개통을 포함하여 보고했더니 순종이 그것만큼은 정말 절대로 안 된다며 기를 쓰고 매우 격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망국(亡國)의 상황이더라도 명목상 이왕으로 있던 순종을 의식하여 반대를 무릅쓰고까지 강행하지 못했고, 순종이 붕어하자 즉시 공사를 시작해서 도로를 뚫어버렸다. 그리고 두 권역은 콘크리트 다리로 연결했다. 그래서 몇십년간 분리되었지만 최근들어 율곡로를 지하도로화해서 끊어져 있는 종묘와 창덕궁 권역을 서로 잇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22년 7월 완공되어 다시 이어졌다.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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