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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엠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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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엠대우(GM Daewoo)
지엠대우(GGM Daewoo)
한국지엠㈜(GM KOREA)

지엠대우(GM Daewoo)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General Motors)가 한국 대우자동차를 인수하여 설립한 회사이다. 구 대우그룹 계열 자동차 회사로서, 1972년 6월 신진자동차와 제너럴모터스의 합작 형태로 설립되었다. 2002년 최종 부도처리 이후, 승용, 알브이(RV)는 한국지엠㈜이, 버스는 자일대우상용차㈜로, 트럭은 타타대우상용차㈜로 각각 분할 매각되었다. 주로 GM대우라고 쓴다. 이후 회사명을 한국지엠(GM Korea)으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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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편집]

  • 1972년 06월 : 신진자동차와 미국 제너럴모터스사의 공동출자(185억 원)로 종합자동차 제너럴 모터스 코리아 자동차 주식회사를 설립
  • 1972년 09월 : 소형승용차 시보레1700을 생산하고, 국내 최초로 신차발표회를 가졌으며, 중형승용차 레코드 1900을 생산
  • 1973년 03월 : 고속화물차 6.5 톤·8 톤 카고트럭, 대중 승합 자동차 대형버스, 소형화물 2.5 톤 카고트럭을 생산 개시한 후 대원 강철 공업 주식회사를 인수
  • 1974년 05월 : 가솔린엔진공장을 준공, 중장비차량을 생산 개시
  • 1975년 05월 : 자동차 종합전시장을 개장
  • 1975년 08월 : 레코드 로얄을 생산 개시
  • 1975년 12월 : 작업훈련소를 설립, 10.5 톤 덤프트럭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처음 수출
  • 1976년 11월 : 새한자동차 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
  • 1977년 09월 : 동양 최대규모의 서울정비센터를 준공, 10월 프레스 공장을 완공, 12월 소형승용차의 생산을 개시
  • 1978년 07월 : 대우실업이 경영에 참여
  • 1979년 05월 : 차체조립공장이 완공
  • 1980년 06월 : 국내 최초의 로얄 디젤 승용차와 픽업트럭 맥스 디젤의 생산을 개시
  • 1983년 01월 : 대우자동차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
  • 1984년 01월 : 트랙터(39 톤·53 톤)를 생산
  • 1991년 05월 : 아이알오십이(IR52) 장영실상을 수상(1.5DOHC 16V 엔진)
  • 1992년 10월 : 미국 지엠사와 합작 관계를 청산하여 100% 대우그룹 출자회사가 됨
  • 1998년 : ㈜쌍용자동차를 인수하여 경차부터 대형승용차, 사륜구동 지프형 차에 걸쳐 전 차종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춤
  • 1999년 08월 :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
  • 2004년 04월 : ㈜쌍용자동차가 분리, 그해 11월 회사정리가 결정
  • 2001년 09월 : 제너럴모터스와 매각 양해각서를 체결
  • 2002년 04월 : 신설법인 설립에 대한 최종계약을 체결
  • 2002년 10월 : ㈜지엠대우자동차기술, ㈜대우인천자동차, ㈜대우버스자동차로 회사를 분리 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로 새롭게 출범
  • 2003년 04월 : 지엠대우로 상호를 변경
  • 2004년 05월 : 보령공장을 인수
  • 2011년 03월 01일 : 지엠대우에서 한국지엠으로 사명을 변경

주요 인물[편집]

  • 김우중(1936년 12월 19일 ~ 2019년 12월 9일)
지엠대우의 전 회장이다. 1936년 12월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전쟁으로 부친이 납북된 이후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과 경기고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3~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다 만 30세인 1967년에 자본금 500만 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실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내쇼날의류 등 섬유회사,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 등을 인수하고 대우건설·대우중공업 등을 설립하며 금융·전자·중공업 등의 분야로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올랐고,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 확장을 진행했다. 특히 1990년대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면서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출범 30여 년 만인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로 성장했다. 특히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수출액(1,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하기도 했다. 여기에 1989년 내놓은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6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 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이에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그리고 그해 10월 중국으로 도피한 김 전 회장은 21조 원대 분식회계와 9조 9,800억 원대 사기대출 혐의가 드러나면서 귀국하지 못하고 5년 8개월간의 해외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2005년 귀국했다. 그리고 2006년 징역 8년 6월과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하지만 17조 원이 넘는 추징금은 아직 그대로 남은 상태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베트남 등에서 머물면서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17년 3월 서울에서 열린 ‘대우 창업 5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2018년 말 건강 악화로 귀국했으며, 2019년 12월 9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1]

역사[편집]

대우자동차는 1955년 설립된 ‘신진 자동차공업’을 모태로 한다. 미군에서 쓰던 차량을 인수, 개조해 판매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1963년에는 일본 닛산 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생산하던 새나라자동차를 인수,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업체인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바꿨다. 초기의 신진자동차는 일본 토요타와의 제휴를 통해 ‘코로나’, '크라운' 등의 인기 모델을 생산,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72년, 일본 정부가 중국과의 통상을 하기 위해 저우언라이 4원칙(한국, 대만과의 거래를 끊어야 중국과의 무역이 가능)을 받아들임에 따라 토요타는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끊었고, 신진자동차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토요타의 모델을 생산할 수 없게 된 신진자동차는 미국 지엠과 합작해 ‘지엠 코리아’를 설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시보레 1700’, ‘카미나’, ‘레코드’ 등의 지엠 기반 자동차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엠 계열 차량들은 토요타 계열 차량보다 한국 시장에서 인기가 없었다. 경영 위기에 처한 지엠 코리아는 1976년, 산업은행이 신진자동차 몫의 지분을 인수함에 따라 ‘새한자동차’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1978년에는 대우그룹이 이를 다시 인수하고 지엠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음에 따라 1983년에 ‘대우자동차’가 출범하게 된다.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은 넓은 인맥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춘 인물이었다.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급격히 사세를 넓혔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경영을 중시했다. 대우자동차 역시 무리해서 완전 신차를 개발하기보다는 기존 제품의 상품성을 개선한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을 다수 출시하는 마케팅에 주력했다. 새한자동차 시절의 ‘제미니’를 개량한 ‘맵시(1982년)’, ‘레코드 로얄’를 개량한 ‘로얄 XQ(1983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맵시는 최대의 경쟁사인 현대자동차에서 출시한 ‘포니’ 시리즈에 밀려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로얄 시리즈는 큰 차체와 품위 있는 디자인을 인정받아 고급 차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후 로얄 시리즈는 ‘로얄 프린스(1983년)’, ‘로얄 살롱 슈퍼(1986년)’ 등의 파생 모델을 다수 낳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고급 차 시장에서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 그동안 약세를 면치 못했던 소형차 시장에서 반격을 준비했다. 특히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맞물려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어 생애 첫차로 적합한 소형차의 선호도가 높았다. 당시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였던 현대자동차는 국내 소형차 시장의 최강자였던 포니 시리즈의 후속 모델, ‘포니 엑셀(1985년)’을 선보이며 기선 제압에 나섰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당시 제휴 관계에 있던 지엠 산하의 오펠에서 개발한 ‘카데트 E’를 기반으로 한 ‘르망’을 생산, 월드카를 기치로 1986년부터 판매에 나섰다. 르망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보기 힘들었던 날렵한 유선형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으며, 탄탄한 하체 및 고급스런 편의 기능도 겸비해 특히 젊은 운전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대우 르망은 현대 포니 엑셀의 판매량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대우자동차가 현대자동차와의 양강구도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다. 자동차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작고 저렴한 차량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는데, 이를 위한 경형 자동차(이하 경차) 생산 업체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대우국민차가 1991년에 내놓은 한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티코’다. 일본 스즈키의 경차인 ‘알토’를 기반으로 개발한 티코는 796cc의 저배기량 엔진에 전장 3,340mm 크기의 초소형 차량이었다. 300만 원대의 저렴한 가격에 우수한 연비가 장점이었지만, 빈약한 편의 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 때문에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카(기존 차량과 함께 운용하는 추가 차량)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아이엠에프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인기가 높아졌다. 티코로 시작된 대우 경차의 계보는 1998년 출시된 ‘마티즈’로 이어진다.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우자동차는 나름의 영역은 확보했지만, 여전히 현대자동차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독자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이미 검증된 외부 기술을 사 오는 것을 선호했던 대우그룹 전반의 성향과도 무방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역시 일부 기술을 외부(미쓰비시)에 의존한 것이 사실이지만, 1975년에 최초의 독자 모델인 ‘포니’를 개발하고, 1991년에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알파엔진’을 자사 차량에 탑재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반면,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여전히 대부분의 주력 제품이 지엠을 비롯한 해외 업체의 모델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신차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아닌 기존 차량을 일부 개선해 나온 것들이 많았다. 이런 차량의 경우, 연비나 주행 특성이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지 않거나 최신의 트랜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한때 고급 차 시장을 지배하던 로얄 시리즈 역시 현대 그랜저(1986년)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기술력 향상에도 힘썼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1990년 출시된 대우자동차의 첫 번째 고유 모델인 ‘에스페로’였다. 에스페로는 본래 로얄 프린스의 뒤를 잇는 2,000cc급 엔진의 중형 세단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엘란트라(1990년)’가 준중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높은 인기를 끌자 대우 자동차 역시 계획을 변경, 1991년부터 1,500cc급 엔진을 탑재해 준중형차 시장을 공략했다. 이러한 이유로 에스페로는 준중형급이면서도 중형급의 큰 차체를 가진 매력적인 상품성을 어필할 수 있게 되었고, 이탈리아 디자인 스튜디오의 손을 거친 미려한 외형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에스페로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술 개발 부서를 확장하고 본격적으로 플랫폼(뼈대) 및 파워트레인(엔진, 변속기)의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1997년은 대우자동차 최고의 해였다. 이 해에 대우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고유 모델 3종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시했다. 소형차인 ‘라노스’, 준중형차 ‘누비라’, 중형차 ‘레간자’가 그것이었는데, 이들 신제품이 인기를 끌며 1998년 상반기에 대우자동차는 사상 처음으로 현대자동차를 누르고 국내 자동차 판매량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진자동차 출범 43년, 대우자동차 출범 15년 만에 거둔 짜릿한 쾌거였다. 미국 수출도 본격화하고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등, 당시 대우그룹이 추진하는 ‘세계경영’도 본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우자동차의 위기는 최전성기와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1997년 말 한국경제 전체를 뒤흔든 아이엠에프 외환위기와 더불어 모 기업인 대우그룹이 경영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오히려 투자를 확대해 1998년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의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룹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상당수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의 조치를 했으나 대우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한 김우중 회장이 1999년 해외로 도피하는 등의 사태가 겹치면서 대우자동차를 포함한 대우그룹 전체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결국 2000년, 대우그룹은 해체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우자동차는 ‘마티즈(1998년)’, ‘매그너스(1999년)’, ‘레조(2000년)’ 등의 고유모델을 꾸준히 출시하는 등, 마지막 사력을 다했다. 특히 경차인 마티즈는 당시 아이엠에프 경제 위기 속에서 높은 경제성을 인정받아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중형차 매그너스는 국내 최초로 개발한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하기도 했다. 레조 역시 엘피지 연료를 이용하는 미니밴이라는 점을 무기로 시장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대우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던 소비자들은 대우차를 사는 것을 점차 꺼리게 되었고 판매량 역시 그에 비례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대는 물론, 기아자동차에도 밀려 업계 3위 이하로 자리하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2000년 11월, 대우자동차는 최종 부도 처리되었고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당초 미국 포드에서 대우자동차의 인수를 고려해 협상을 진행했으나 2001년, 포드는 대우자동차의 인수를 포기했다. 대신 미국 지엠이 대우자동차의 승용차 부문을 인수, 2002년 대우자동차는 ‘지엠대우(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외에 버스 부분은 영안모자에서 인수해 ‘자일대우버스’로, 트럭 부분은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해 ‘타타대우상용차’로 이름이 바뀐다. 지엠대우는 2011년에 ‘한국지엠’으로 회사명을 변경했으며, 그동안 판매하던 차들 역시 ‘쉐보레’로 브랜드를 바꾼다. 이로써 승용차 브랜드로서의 ‘대우’는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2]

시대별 차종[편집]

신진자동차[편집]

신진자동차공업(Shinjin Motor)은 1955년 설립된 신진그룹의 자동차 회사로, 한국지엠의 전신이다. 외환 사정의 악화로 에스케이디(SKD)부품수입이 도입 금지된 1963년 5월 새나라자동차가 문을 닫고 인천시 부평(현재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던 새나라자동차의 현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은 1965년 김창원씨의 신진공업으로 소유주가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토요타 자동차와 제휴해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려고 했으나 토요타가 1972년 주4원칙 을 따라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계획은 공중분해 되고 지엠과 제휴하였다. 1965년에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한 신진공업은 1966년에 상호를 신진자동차로 바꾸고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국산화율 20% 수준의 코로나, 크라운, 에이스, 퍼블리카, 랜드크루저 픽업, 토요타 중형 트럭, 토요타 디브이백씨(DB100C) 중형 버스, 이스즈 비알이십(BR20) 대형 버스, 대형 히노 티씨 트럭, 히노 중형 트럭, 히노 알씨삼백이십티피(RC320TP) 고속버스를 생산하였다. 1972년에 토요타 자동차가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신진자동차와 제휴를 청산하자 신진자동차는 제너럴 모터스와 합작으로 지엠코리아를 설립했다. 지엠코리아는 1972년에 '시보레 1700', '카미나', '캬라반', '레코드 1900', 중형 지엠씨 씨 시리즈 트럭, 이스즈 티디엑스오십이(TDX50E) 트럭, 이스즈 티엑스 트럭, 새마을 픽업 등을 양산하였고, 한국측 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하여 1976년 11월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1978년에 산업은행의 보유지분을 대우그룹에 넘기고 제너럴 모터스와의 경영권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1983년 1월부터 대우자동차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신진자동차의 계열사였던 신진지프 자동차는 신진자동차로 개명하고 다시 1981년에 ㈜거화로 바꾸고 코란도를 1983년에 출시하였으나, 회사 내부 갈등으로 흑자도산을 일으켜 코란도를 동아자동차(현 쌍용자동차)에게 넘기는 계기를 맞았다.[3]

신진 코로나 1200[편집]

신진 자동차 코로나(Shinjin Corona)

신진 코로나 1200(Shinjin Corona 1200)은 최고 시속 145km로 도로 상황에 맞게 설계되어서 나온 차량이다. 그 당시에 코로나의 가격은 83만 원으로 다소 높게 측정되어진면이 있었지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국 도로 사정에 제일 알맞는 차량으로 인기가 많았다. 2세대에 나온 코로나 차량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내구성이 낮고 가는 필러와 차체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많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6세대에서는 각등식 헤드라이트를 적용하였고, 8세대부터는 후륜구동방식이 아닌 전륜구동방식으로 바뀌었다. 10세대 신진자동차 코로나는 지금 차량들과 많이 비슷한 형태로 변했으며 차체가 커지고 디자인이 각이 진 것이 아닌 곡선 형태로 변형되었다.[4]

신진 크라운[편집]

신진 크라운(Shinjin Crown)은 신진 자동차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차종이다. 신진 자동차에서 생산되었던 크라운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승용차로 통했다. 신진 크라운은 토요타 크라운의 2세대 모델부터 4세대 모델에 걸쳐 생산되었으며, 당대 국내에서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 통했다.[5]

신진퍼블리카[편집]

신진퍼블리카(Shinjin Publica)는 토요타 퍼블리카(Toyota Publica)를 라이센스 생산한 것으로, 20% 정도의 국산화율을 맞추며 생산을 개시했다. 원본에 해당하는 토요타 퍼블리카는 오늘날 일본 경차 산업의 시발점이 되는 1950년대 일본 통산성(일본 경제산업성)의 ‘국민차 구상’에 따라 개발된 차종 중 하나였다. 국민차 구상은 마치 독일의 국민차 계획에 가까운, ‘저렴한 가격과 높은 실용성을 양립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퍼블리카는 당시 토요타에서 생산하는 승용차 중 가장 작은 크기의 자동차였다. 차명인 퍼블리카는 ‘공공의, 대중의’를 의미하는 영단어 ‘Public’과 자동차를 의미하는 ‘Car’를 합쳐, ‘대중의 자동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토요타 퍼블리카는 이후 토요타 스탈렛(Starlet), 다이하츠 콘소르테(Consorte) 및 샤레이드(Charade), 그리고 오늘날의 토요타 비츠(Vitz, 수출명 야리스) 및 파소(Passo) 등으로 이어지는 토요타계 소형차 계보의 시조에 해당한다. 신진자동차의 이름을 달고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퍼블리카는 당시 대한민국의 자동차 보급에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 운전하기 쉬운 작은 차체와 4명을 태울 수 있는 실용성, 그리고 국민차 구상에서 비롯된 간소한 구조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갖췄다. 당시 신진 퍼블리카의 가격은 최고급 세단 크라운의 절반 가격에 불과했다. 신진 퍼블리카의 저렴한 가격은 대한민국의 ‘마이카 시대’를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신진에서 생산한 퍼블리카는 퍼블리카의 2세대 모델에 해당하는 섀시코드 P20 계열의 모델이었으며, 1967년 11월 생산 개시 이래 1971년까지 총 2,005대가 생산되었다. 상용차를 포함하여 연평균 생산량 2만 대를 약간 넘었던 이 시기, 퍼블리카의 판매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특유의 작은 차체와 그에 걸맞은 귀염성 있는 외형 덕분에 ‘꼬마 차’, ‘왕눈이 차’와 같은 친근한 애칭으로 불렸다.[6]

신진뉴크라운[편집]

신진크라운(Shinjin New Crown)은 3세대 크라운으로 정숙하면서도 강력한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무기로 당시 고급 세단 시장에 혜성처럼 나타난 현대 자동차의 포드 20M을 밀어내는 실적을 올리며 인기를 누렸다. 뉴 크라운은 역대 신진 크라운 중 가장 많이 생산된 자동차로 신진자동차의 전성기와 함께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 통했다.

지엠코리아[편집]

시보레 1700[편집]

시보레 1700(Chevrolet)
새한 새마을 트럭(Saehan Saemaeul Truck)

시보레 1700(Chevrolet 1700)은 1972년 출시해 1975년까지 3년 동안 8105대가 생산됐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소품 차량 대여 업체 금호상사가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 시보레 1700은 독특한 이름처럼 복잡하고 오랜 역사를 담은 모델이다. 시보레는 쉐보레의 옛 표기다. 한국지엠의 전신 신진공업은 1971년 합작사 도요타가 발을 빼자 지엠과 손잡았다. 이 때문에 1971~1976년 잠시 지엠코리아로 이름을 바꿨다. 시보레 1700은 이때 지엠 산하 자회사 호주 홀덴의 엘제이(LJ) 토라나를 들여온 모델이다. 시보레 1700은 미국차답게 연비가 나빴다. 더욱이 출시 이듬해 1차 오일 쇼크로 기름값이 급등했다. 결국 현대 포니 등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7]

카미나[편집]

카미나(Kamina)는 기존에 판매되었던 시보레 1700의 저조한 판매량으로 인해 대체 투입이 이루어진 차량이며, 제너럴 모터스가 경영상의 이유로 철수하면서 새한자동차를 통해 판매되었다. 물론, 시보레 1700 역시 카미나가 단종될 때까지 병행 판매가 이루어졌다. 당시 파워트레인은 배기량 1,492cc의 가솔린 직렬 4기통 엔진을 탑재했는데 시보레 1700에 얹힌 엔진을 베이스로 실린더 내경을 5.5mm 줄이고 배기량을 206cc 줄인 엔진으로 4단 수동변속기를 장착해 최고 출력 66마력 / 5,000rpm, 최대 토크 11.2kg°m / 3,100rpm / 최고 시속 140km 의 성능을 냈으며, 앞, 뒤 외관에 크롬 범퍼 장착 등 변화를 주고 실내 콘솔 박스와 헤드 레스트도 적용하는 등 차별화에 나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엔진 및 차체의 부조화와 낮은 지상고 등 기존 시보레 1700이 갖고 있던 단점을 그대로 안고 출시되어 판매 성적은 더 형편없었는데, 총 판매 대수가 992대로 포니와 브리사의 벽을 넘지 못한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단종되었다. 중간에 헤드램프가 4등식으로 변경되는 페이스리프트가 있었고, 새한 카라반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8]

새마을트럭[편집]

새마을트럭(Saehan Saemaeul Truck)은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새한 자동차는 인기가 없어 판매에 실패한 시보레 1700 승용차의 섀시를 이용해 차체를 순 국산 디자인으로 개발한 픽업트럭이다. 튼튼하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고 험로 주파능력이 우수해 새마을 운동 작업장 운반용과 용달용으로 꽤 많이 팔린 트럭이다. 4기통 1700cc 79마력의 시보레 1700 가솔린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25km로 1톤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이 새마을 트럭은 현재 국내 박물관에 두 대가 남아 있다.[9]

새한자동차[편집]

로얄[편집]

로얄(Royal)

1983년 옛 대우그룹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출범한 대우자동차는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냈다. 그 배후에는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이 있었는데, 효율적인 경영을 중시하는 김우중 회장은 페이스리프트를 대우자동차의 초기 전략으로 세웠다. 최소 6~7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신차 세대교체보다는 추가적인 상품성 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신선함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결국 대우자동차는 성공적인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제품 이미지를 개선하고 판매량을 크게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대우자동차로 하여금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첫 번째 차량은 GM 산하의 오펠 차량을 베이스로 개발된 대우 로얄(Royale)이다. 로얄 시리즈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 고급차로 인식되어 당시 경쟁 차종이었던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그나라다 등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후 로얄 시리즈는 파생 모델을 다수 낳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으로 불리며 중형 시장을 평정했다. 고급차 시장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 비교적 약세를 보였던 소형차 시장에서 도약을 준비했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자동차 산업이 성숙되던 시기였고, 자연스럽게 마이카 열풍이 불었다. 생애 첫 차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동력 성능, 그리고 실용성을 갖춘 소형차의 선호도가 높아 말 그대로 소형차의 전성시대가 찾아왔다. 파생 모델 중 레코드로얄(Record royal)은 80년대 고급 중형차 시장을 장악한 로얄 시리즈의 시조이다. 레코드의 이름이 남아있었지만 새한은 로얄을 더 크게 강조했다. 당시 출시 가격은 535만 원이었으며, 1.9리터 4기통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102마력, 최대토크 16.2kg.m, 최소시속 160km를 발휘했다. 이듬해에는 3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한 '로얄 오토매틱' 출시를 시작으로 다양한 로얄 시리즈가 라인업에 더해진다. 특히 1980년에는 한국 최초의 디젤 승용차 '로얄 디젤'이 출시됐다. 최고출력 65마력, 최대 토크 12.3kg.m의 2.0리터 디젤 엔진을 탑재한 로얄 디젤은 15.4km/L의 고속도로 연비를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5천 원에 불과한 주유비로 갈 수 있는 연료 효율성이었다. 1981년에는 상위 모델인 '로얄 살롱'이 추가된다. 로얄 살롱은 레코드의 상위 모델인 '세나토'의 외관 디자인을 적용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강화했고, 2.0리터 4기통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119마력, 최고시속 178km를 기록했다.[10][11]

제미니[편집]

제미니(Saehan Gemini)

제미니(Saehan Gemini)는 1977년 12월에 새한자동차에서 출시된 소형차이다. 기존의 카미나를 대체하는 후속 차종으로, 현대 포니와 기아 브리사가 속한 소형차 시장에 새한자동차는 오펠 카데트 C를 이스즈 자동차에서 개량한 제미니를 내놓았다. 르망의 시초이기도 한 오펠 카데트는 GM의 월드 카 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소형차였으며, 새한자동차가 대한민국 여건에 맞게 개량하였다. 이 차는 해외에서 쉐보레 쉬베트로도 판매되었고, 새한 버드라는 차명으로도 수출되었다. 새한자동차는 두꺼운 차체와 충격 흡수식 스티어링 휠 등 제미니의 안전성을 알리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당시 소형차 시장에서 포니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고, 개발 시기가 너무 늦었으며, 무엇보다 연비가 좋지 않아 판매 대수가 경쟁 차종에 비해 적었다. 특히 1.5ℓ 가솔린 엔진은 엔진과 보디의 조화가 맞지 않아 실패했었던 전작인 카미나의 엔진(시보레 1700에 장착되었던 1.7ℓ 가솔린 엔진 기반의 1.5ℓ 가솔린 엔진)이었다. 1979년 8월에는 제미니를 기반으로 만든 0.85톤 픽업트럭인 맥스가 출시되었으며, 오펠제 디젤 엔진을 장착했다. 제미니는 1982년 2월에 페이스 리프트 차종인 맵시가 출시되기 전까지 18,900여 대를 생산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아 있는 차량이 약 13대 정도이며, 그중 1~2대를 올드 카 대여 업체인 금호상사에서 보유 중이다.[12]

대우자동차[편집]

맵시나[편집]

맵시나(MAEPSY-NA)

맵시나(MAEPSY-NA)의 어원인 맵시는 우리말로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를 의미한다. 맵시는 기존에 새한 자동차에서 생산하고 있었던 일본 이스즈(Isuzu)사의 제미니(Gemini)를 부분 변경한 모델이었다. 이스즈 제미니는 지엠의 월드카 개념 하에 만들어진 후륜 구동 소형 승용차로, 과거 제너럴 모터스 코리아 시절 생산했던 카미나의 후속 모델로서 도입된 차종이었다. 맵시는 기본적으로 이스즈 제미니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차종이었다. 차체 및 섀시 설계는 기존에 생산했던 제미니와 동일했다. 변경 점이라면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 그리고 범퍼 등을 늘려서 차체 전장을 늘린 정도였다. 이미 유럽풍의 깔끔한 스타일이 호평을 얻고 있었던 제미니의 스타일링을 유지하면서도 전면 디자인을 수정하여 충돌 안전성을 조금이나마 더 확보했다. 맵시의 심장은 카미나와 제미니에 사용했던 1.5리터 직렬 4기통 씨아이에이치(CIH) 가솔린 엔진이었다. 최고 출력은 73마력, 최대토크는 12.0kg.m였다. 또한 1983년에는 엉뚱하게도, 당시 기아산업이 브리사에 사용했던 마쯔다제 1.3리터 직렬 4기통 TC 엔진도 추가되었다. 이는 1982년부터 시행된 한국 자동차 산업계 최대의 악재이자, 전두환 정권의 실책 중 하나인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기아산업이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1983년 1월, 모기업인 대우 그룹이 새한 자동차의 사명을 대우 자동차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맵시도 변화를 맞게 된다. 1983년 4월 대우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4기통 1.5리터 엑스큐(XQ)엔진을 발표, 5개월 뒤인 9월에 이 엔진을 적용한 '맵시-나'를 출시했다.

차명인 맵시-나의 '나'는 한글의 가나다순에 따른 것으로 '두 번째 맵시'라는 의미가 있다. 맵시-나는 디자인을 보다 대대적으로 손 보고 파워트레인을 변경하는 등, 제미니에서 일부만 고친 정도인 맵시에 비해 한층 굵직한 변화를 겪었다. 디자인의 경우, 전면부를 레코드 로얄과 유사한 스타일로 뜯어고쳤다. 후면부 역시 레코드 로얄과 유사한 대형의 테일 램프 채용과 더불어, 트렁크 부위를 더 늘려서 기존 맵시보다 한층 더 긴 길이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맵시-나는 성능은 물론, 신뢰성, 연비 등이 불만 사항으로 지적되어 왔었던 기존 씨아이에이치 엔진을 신개발 1.5리터 엑스큐엔진으로 대체했다. 이는 기존 맵시에서 가장 유의미한 변화 내용 중 하나로 꼽힌다. 엑스큐엔진은 기존 씨아이에이피 엔진에 비해 신뢰성과 성능의 향상을 일궈냈다. 최고 출력은 85마력, 최대 토크는 12.5kg.m였다. 맵시-나는 기존 제미니의 전면부를 약간만 손 본 정도의 변화에 그쳤던 맵시와 다르게, 신차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었다. 새로운 인상을 보여준 대대적인 디자인 변화와 새로운 엔진의 채용은 맵시-나의 경쟁력을 크게 끌어 올려 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이 시기부터 맵시의 판매량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맵시-나는 1985년 3월 더한 고급 모델, '하이 디럭스'를 라인업에 추가했다. 맵시-나 하이디럭스 모델은 맵시-나의 스타일링이 레코드 로얄과 유사한 점에 착안, 동사의 고급 승용차인 로얄 살롱의 화려함을 살린 전용 외장 사양과 로얄의 왕관 엠블럼 등으로 치장한 고급 소형 승용차로 어필했다. 이후 맵시와 맵시-나는 출시 이후 1986년 7월까지 총 42,729대가 생산 되었다. 그리고 1986년 7월 후속 차종인 '르망'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단종된다. 그러나 영업용 택시로는 한동안 병행 생산이 이루어졌다.[13]

르망[편집]

르망(Lemans)

당시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였던 현대자동차는 국내 소형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포니 시리즈의 후속 모델을 선보이며 선두에 서있었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상품으로서 자동차를 개발함에 있어 발생하는 비용과 단가를 낮춰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월드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르망’(Lemans)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르망의 생산은 인건비 측면에서 유리했던 대한민국의 대우자동차에서, 디자인과 설계는 소형차 관련 고급인력이 밀집한 독일 오펠에서, 그리고 판매는 당시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던 GM에서 각각 담당했다. 서로가 특출한 분야를 전담함으로써 그 시너지는 배가되었다. 세 회사의 시너지는 말 그대로 엄청났다. 르망은 출시와 동시에 시장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르망은 당시 경쟁 자동차에서 보기 힘들었던 날렵한 유선형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으며, 우수한 달리기 성능과 승차감도 겸비해 특히 젊은 운전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르망은 현대 포니, 엑셀의 판매량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대우자동차가 현대자동차와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데 일조했다.[11]

티코[편집]

티코(Tico)

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작지만 실용적이면서도 저렴하게 보급할 수 있는” 국민차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를 위한 사업자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국민차 티코(Tico)다. 티코는 일본 스즈키(Suzuki)와 기술 제휴를 통해 개발된 경차였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민차 계획을 바탕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장 민감하게 다뤄진 부분은 바로 가격이었다. 당시 상공부에서 요구하는 가격대는 200만 원대였는데, 이는 당시 소형 승용차인 현대 엑셀 5도어의 400~500만원 보다 한참 낮은 가격이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대우국민차는 편의사양을 덜어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티코는 빈약한 편의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을 갖춘 차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290만원으로 출시 가격을 맞출 수 있었다. 티코의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 카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IMF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인기가 서서히 높아졌고, 1995년에는 승용차 판매의 4%를 티코가 홀로 점유하기도 했다.[11]

에스페로[편집]

에스페로(Espero)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우자동차는 나름의 영역은 확보했지만, 여전히 업계 1위의 현대자동차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에 독자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이미 검증된 외부 기술을 사오는 것을 선호했던 대우그룹의 전반적인 성향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대부분의 주력 제품이 GM을 비롯한 해외 업체의 모델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신차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아닌 기존 차량을 일부 개선한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많았다. 이 경우 연비나 주행 특성이 한국 소비자 혹은 도로 사정에 맞지 않거나 최신의 트렌드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결국 고급차 시장을 지배하던 로얄 시리즈 역시 현대 그랜저(1986년)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재도약을 위해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기술력 향상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과물이 1990년 최초의 고유모델로 내놓은 ‘에스페로’였다. 에스페로(Espero)는 프린스와 르망 사이의 포지션을 담당한 신차였다. 에스페로는 스페인어로 '희망하다, 기대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에스페로는 신차 발표회 이후 10월 23일 첫 출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했다. 가격은 수동 변속기 모델 960만 원, 자동 변속기 모델 1,055만 원이었다. 에스페로의 차체 디자인은 이탈리아 베르토네 디자인 센터의 도움을 받아 완성됐다. 차체 라인을 매끈하게 처리하고 앞부분보다 뒷부분을 들어 올린,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형태로 날렵한 세단 이미지를 구축했다. 특히 라디에이터 그릴을 제거한 전면부와 유리판으로 제작된 씨필러는 인상적인 부분, 그러나 디자인을 따라잡지 못한 기술력의 부재로 씨필러에 센터바를 추가했는데, 이는 최초의 디자인 컨셉을 해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초기 에스페로는 르망 임펙트에 적용됐던 2.0리터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 4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해 각각 13.5km/L, 12.2km/L의 연비를 기록했다. 또한 전륜 맥퍼슨 스트럿, 후륜 컴파운드 링크 서스펜션을 적용해 승차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에스페로의 스펙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시대를 초월한 공기역학적 설계다. 0.29Cd의 공기저항계수는 2008년 현대 제네시스가 0.27Cd를 기록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국산 차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에스페로의 스타일링은 당대에는 실로 혁신적이었으나, 출시 초기부터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현대의 ‘엘란트라(1990년)’가 준중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높은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대우 에스페로는 중형세단으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차의 크기를 그 차의 위신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차체 크기에 민감한 시절이었다. 이에 대우차동차는 계획을 변경하여 1991년부터 1500cc급 엔진을 탑재해 준중형차 시장을 공략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스페로는 준중형급이면서도 중형급의 큰 차체를 강점으로 할 수 있었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렵하고 스포티한 스타일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에스페로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에스페로는 애매한 포지션으로 기존의 중형차 시장과 새로 확장된 준중형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자사의 다른 차종과 배기량이 겹치는 딜레마와 마주했다. 잠깐 강세를 보였던 중형차 라인업에서는 편안함을 강조한 현대 쏘나타(Sonata)에게 밀렸으며, 대형차 라인업에서도 그랜저를 앞세운 현대자동차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우그룹의 부채가 대우자동차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92년도 GM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모두 사들이면서 자동차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이를 성공시켰지만, 아무래도 이전부터 기술개발을 해오던 현대자동차 등 다른 한국 기업에게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우자동차 = 잔고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기도 했다. 또한, 최초의 독자 개발이라는 과정 속에 겪은 각종 시행착오로 인해 완성도 부족 현상까지 겹치면서 결국 판매 부진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 따라 에스페로는 상품성 증대와 위기 탈출을 위해 계기판을 디지털로 교체하고 컵홀더를 추가하는 등 편의 장비를 개선했으며, 안테나를 앞 펜더에서 뒤 펜더로 옮기고 분리된 형태의 리어램프를 길게 이어 컴비네이션 형식으로 교체하는 등의 부분 변경을 감행했다. 가장 문제였던 파워트레인은 영국 로터스사의 자문을 구해 1.5리터 디오에이치씨 엔진을 개발해 적용했다. 새로운 엔진은 저속구간과 저회전 영역에서 국내지형에 가장 적합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고속 주행 능력이 경쟁 차종에 비해 부족하다는 단점에 따라 몇 번의 파워트레인 교체 끝에 1994년에는 2.0리터 엔진을 제외하고 1.8리터 엔진을 추가 적용하기도 했다. 에스페로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를 끌었다. 수출 기간 3년 동안 전체 생산량의 43%인 23만 6,882대를 판매했는데, 가격 대비 세련된 디자인과 다양한 장비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현대 엘란트라와 기아 세피아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997년, 후속 차종인 누비라가 출시되면서 단종을 맞이했다.[14]

지엠대우[편집]

아카디아[편집]

아카디아(Acadia)

아카디아(Acadia)는 대우 자동차가 일본 혼다의 플래그십 세단, 레전드를 라이센스 생산한 모델이다. 혼다 레전드는 운전자 지향의 고급 준대형 세단으로 통하는 차종이며, 현대 자동차의 그랜저 또한 같은 성향의 차종에 속했기에 직접적인 대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우 자동차가 라이센스한 혼다 레전드는 1990년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2세대 모델로, 당대 기준에서 상당히 실험적인 설계들이 많았다. 차명인 아카디아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지명, 아르카디아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낙원 전승'이 전해지는 곳이다. 자동차를 '낙원'까지 비유했던 당시의 거창한 작명법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우 아카디아는 출시 초기에는 혼다에서 레전드의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 조립 생산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초도 생산분의 경우에는 스티어링 휠의 경적 패드가 혼다의 수출용 브랜드인 아큐라의 로고가 새겨진 채로 출고되기도 하는 등 국산 차가 아니라 사실상 수입차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물론 그 뒤로는 부품이 본격적으로 국산화되기 시작하면서 대우 자동차의 로고가 새겨지게 되었고 그나마 '국산 차'로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대우 아카디아는 등장 당시에 국내에서 가장 큰 세단은 아니었다. 아카디아의 길이는 4,950mm, 높이는 1,405mm로 당대에 경쟁하고 있었던 2세대 그랜저에 비해 폭은 동일하지만 길이가 30mm 짧고, 높이는 40mm 낮았다. 하지만 외관 디자인만큼은 그랜저와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포인트들이 존재했다.

이는 2세대 레전드의 실험적인 설계들이 그대로 적용된 것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아카디아는 그랜저보다 훨씬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랜저는 당시 국내 대형 세단 소비층의 취향을 반영해, 차체 곳곳을 크롬 장식으로 두르고 투톤 컬러까지 입혀가며 화려하게 꾸민 데 반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스타일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디아는 그랜저에 비해 장식적인 요소들을 절제한 편이었지만 한층 낮게 깔린 차체와 더불어 후륜구동 세단에 가까운 차체 프로포션을 구현하여 상당히 스포티한 분위기를 냈다. 특히 2,910mm에 이르는 휠베이스가 압권이었는데, 이는 그랜저에 비해 165mm나 긴 것이었다. 심지어 후륜구동 차종이었던 포텐샤보다도 200mm나 차이났다. 이 때문에 아카디아를 처음 마주하게 되면 전륜 구동임에도 후륜구동 세단에 근접한 비례미를 자랑했다. 아카디아는 당대 출시된 고급 세단 중 상당히 큰 배기량과 그에 걸맞은 고성능의 엔진을 가졌다. 아카디아의 엔진은 혼다의 3.2리터 에스오에이치씨 엔진으로, 200마력/5500알피엠의 최고 출력과 29.2kg.m/4,500알피엠의 성능을 냈다. 이 엔진은 혼다의 슈퍼카 NSX와 실린더 블록을 공유하는 엔진이기도 하며, 에스오에이치씨 방식을 채용한 덕에 헤드의 크기 및 중량이 작아져, 엔진의 무게 중심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전륜구동이면서 엔진을 세로로 배치한 것이 특징인데, 심지어 이를 프론트 미드십에 가깝게 배치함으로써 전후 중량 배분까지 신경 썼다. 이 독특한 설계는 후륜 구동 세단과 유사한 차체 비례의 비밀이기도 하다. 변속기는 자동 4단 변속기와 수동 5단 변속기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차급의 성격상, 수동변속기로 출고되는 차량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카디아의 엔진은 나중에 등장한 현대자동차 뉴 그랜저(2세대)의 3.5리터 싸이클론 엔진에 비해 근소하게 낮은 수치였고, 3.0리터 엔진에 비하면 월등히 강력한 성능이었다. 여기에 아카디아는 경쟁 차종 대비 가장 가벼운 몸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1,580kg에 불과한 공차중량은 한 체급 아래의 중형 세단과 비견될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충분히 강력한 엔진과 긴 휠베이스에서 오는 탁월한 주행 안정성, 그리고 경쟁 차종 대비 월등히 가벼운 무게까지 갖춘 아카디아는 주행 성능 면에서 당대의 국산 대형 세단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아카디아는 대우 자동차가 그랜저 타도를 위해 절치부심으로 준비했던 모델인 만큼 당대 최신의 사양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에이비에스와 운전석/ 조수석 듀얼 에어백, 시트 벨트 프리텐셔너 등의 안전 사양은 물론, 운전석 시트 포지션 메모리 기능과 앞 좌석 열선 시트, 버튼식 도어 개폐 장치, 자동 에어컨 등의 편의 장비를 갖췄다. 특히 조수석 에어백의 경우,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카디아에는 뼈 아픈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가격'이었다. 물론, 이 급에서는 가격에 대한 저항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편이지만 국산 차종임에도 불구하고 수입차를 넘보는 가격을 자랑했다. 아카디아의 가격은 1994년 디럭스와 슈퍼의 두 가지 트림으로 출시되었는데 디럭스 트림은 4,075만 원, 슈퍼 모델은 4,330만 원에 이르렀다. 여기에 슈퍼 트림 한정으로 적용 가능한 로얄 패키지(앞 좌석 열선시트, 씨디체인저, 운전석 메모리 기능이 포함된 파워시트)를 더하면 자그마치 4,440만 원에 달했다. 아카디아의 가격은 국산차로서 당대 최고점을 찍은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1994년 당시 뉴 그랜저 3.0모델의 가격이 2,590~3,490만 원이었고, 1992년 기준 기아 포텐샤 3.0 모델의 가격이 3,130만 원이었다. 당시 중현 세단 프린스의 최하위 트림 가격이 965만 원 이었고 최상급 사양으로 구성해도 1,500만 원 정도였다는 것을 보면, 이 차의 가격이 얼마나 높은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아카디아는 후일 추가된 현대 뉴 그랜저 3.5 모델보다도 적은 숫자가 판매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대우 자동차는 아카디아를 출시하면서 연 6천대의 판매계획을 수립했으나 지나치게 비싼 가격으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대우 아카디아의 생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여기에 1997년 상반기, 기아 자동차가 작정하고 내놓은 최고급 대형 세단 엔터프라이즈가 나타났고 그해 하반기에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기반 기술을 앞세워서 국내 최고급 세단 시장의 슈퍼스타로 떠오른 쌍용 체어맨까지 등장하면서 아카디아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졌다. 1997년 외환위기의 도래에 따라 국내의 수많은 대기업이 구조조정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쌍용 자동차가 대우 그룹의 산하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우 자동차는 쌍용 자동차를 인수하게 되면서 당대 최고로 잘 나가던 최고급 세단, '체어맨'을 손에 넣게 되었다. 대우 자동차는 아카디아의 생산을 중지하고 1998년도부터 1천만 원이 넘는 폭의 '재고 떨이'를 통해 아카디아를 손에서 털어 내버리고 만다. 그리고 1999년 12월, 마침내 대우자동차의 차종 리스트에서 완전히 지워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15]

각주[편집]

  1. 대우자동차 네이버 지식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7225&cid=43667&categoryId=43667
  2. 김영우 기자, 〈(브랜드 흥망사) 영광과 좌절의 그 이름, 대우자동차〉, 《아이티 동아》, 2018-07-30
  3. 박카수와빵, 〈GM대우와 쌍용자동차의 전신인 신진 자동차〉, 《네이버 블로그》, 2020-05-06
  4. JNBusiness, 〈신진자동차 코로나〉, 《네이버 블로그》, 2016-03-23
  5. 모토야, 〈(특별했던 차)신진자동차 크라운〉, 《네이버 포스트》, 2018-02-16
  6. 박병하 기자, 〈(특별했던 차)신진 퍼블리카〉, 《다음 자동차》, 2018-06-18
  7. 김형욱 기자, 〈(그때 그 차들③)시발·시보레 영화소품된 희귀 국산차 10選〉, 《이데일리》, 2015-04-10
  8. 세한 카미나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83%88%ED%95%9C%20%EC%B9%B4%EB%AF%B8%EB%82%98
  9. 채영석 기자, 〈GM코리아의 새마을 픽업트럭〉, 《글로벌 오토 뉴스》, 2006-03-05
  10. 카이즈유, 〈추억의 올드카, 1978 대우 로얄〉, 《네이버 포스트》, 2017-10-21
  11. 11.0 11.1 11.2 이지아, 〈한국GM의 전신, 대우자동차〉, 《타고》, 2020-12-01
  12. 제미니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C%83%88%ED%95%9C_%EC%A0%9C%EB%AF%B8%EB%8B%88
  13. 박병하 기자, 〈(특별했던차)새한자동차 맵시〉, 《네이버 포스트》, 2018-05-11
  14. 김정균 기자, 〈추억의 올드카, 1990 대우 에스페로〉, 《네이버 포스트》, 2017-12-26
  15. 박병하 기자, 〈(특별했던차)대우 아카디아〉, 《네이버 포스트》, 2020-03-03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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