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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회루 야경.png|썸네일|300픽셀|경회루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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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회루 설경.jpg|썸네일|300픽셀|경회루 설경]]
'''경회루'''(慶會樓, Gyeonghoeru Pavilion)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에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이다.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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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慶會樓, Gyeonghoeru Pavilion)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에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를 뜻한다.  
  
 
== 개요 ==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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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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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 및 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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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공계(翼工系) 양식이며 전후 툇간11량 구조의 이 건물은 방형의 연못 안에 동쪽으로 치우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았으며, 둘레에는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廻欄石]를 두어 돌난간을 만들었고, 난간의 엄지기둥에는 [[12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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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건물과 육지를 연결하기 위해 세 개의 [[돌다리]]를 설치하였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것은 다른 두 개의 돌다리보다 폭을 넓게 하고 어도(御道)를 두어 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의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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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외부 바닥은 잔디로 처리하였고, 건물 하층의 바닥은 방전(方塼)을, 상층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다. 건물 안 바닥은 외진(外陣)보다 내진(內陣)을 한 단 높게 하여 배석자의 품계에 따라 그 자리를 달리하게 하였으며 외진 기둥은 네모기둥을, 내진 기둥은 원기둥을 배열하였는데, 하층은 돌기둥으로, 상층은 나무기둥으로 하되 모두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민흘림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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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때에는 이 석주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여 물가에 선 집의 기둥에 용이 서리고 용상에 앉은 임금이 거기에 임함을 상징하였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방대한 작업과 과다한 경비를 우려하여 현재와 같이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하층 천장, 즉 상층 마루의 밑부분은 마루 귀틀을 숨기기 위해 우물천장(格字天障)을 가설하였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게 계단을 두었다. 상층 마루, 끝, 기둥 밖으로는 계자각(鷄子脚)에 하엽을 놓고 원죽(圓竹)을 두른 난간이 시설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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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기둥인 평주(平柱)와 고주(高柱) 사이는 툇간으로 되었고, 그 고주 내부에 다시 여섯 개의 내진 고주를 배열하여 속간(奧間)을 만들었는데, 이들 기둥 사이 칸마다 각각 마루 높이에 차이를 두어 하층에서와 같이 배석자의 품계에 따라 앉게 하였다. 이에 따라 축부(軸部)도 짜임이 달라지게 되어 고주간과 내고주간에는 각기 하방(下枋)을 두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는데 이 문은 필요할 때 들어올리고 내리게 하였으며, 상부는 문인방(門引枋)을 끼운 뒤에 빗살완자교창을 두었다.상층 평주 둘레와 창방(昌枋) 아래에는 낙양각을 돌리고 기둥머리의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이며 주간창방(柱間昌枋) 위로는 긴 화반(花盤)주 04)을 놓아 도리 밑에 장여를 받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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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기둥인 평주 위에 얹힌 퇴보[退樑]는 고주 윗몸에 짜이고 퇴보 위 구조는 따로 뜬창방을 놓고 중도리를 얹어 서까래 윗몸을 받치게 하였으며, 뜬창방에 얹힌 중도리가 뜬창방과 더불어 각 귀에서 왕지가 짜여지게 되므로 그것을 노출시켜 가구(架構)를 볼 수 있도록 귓보를 생략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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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간은 연등천장이 되어 가구물이 드러나게 하였으나 고주간과 내고주간은 모두 우물천장을 하고 내고주간에는 당초문처럼 변형된 쌍봉(雙鳳)과 여의주를 중앙에 두어 아름답게 단청하였고 고주간은 그보다 조금 간소하게 처리하였다.팔작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용마루는 모두 양성(陽城)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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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물매곡선을 지나치게 날카롭게 잡고 용마루를 번쩍 높여 위관(偉觀)을 갖추려 하였기 때문에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합각머리가 생겨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 부분의 비중이 굉장하게 보이나 평면이 워낙 넓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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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수법에서는 근정전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장식하려 하여 조선 말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방형의 넓은 연못은 장대석으로 호안을 쌓고 서쪽으로 치우쳐 두 개의 섬인 당주(當洲)를 두어 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으며, 누각 동북쪽 호안에는 석루조(石漏槽)를 두어 연못으로 물이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것 역시 고종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역사 ==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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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mvwNgUOV4b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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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DBQJYLpEm_Y</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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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
 
{{지도|Gyeonghoeru}}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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