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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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조 ===
 
=== 내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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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 style="background-color:#ffeecc"|사진
 
!align=center style="background-color:#ffeecc"|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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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준명당.png|3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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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준명당]]'''(浚眀堂)
 
고종이 함녕전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에 한동안 머물며 외국 사절을 접견하던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이다.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즉조당과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고종은 늘그막에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를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다. 딸바보 편액으로 걸린 '명'이 일반 적인 '밝을 명(明)'이 아니라 '眀'인 점이 특이한데 둘은 모양만 다르고 같은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를 두고 대한제국 측에서 일본의 '일(日)'이 들어간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라는 한자를 대체해서 썼다는 설이 있으나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구한말 전부터 써오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덕수궁 내 가이드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자 이런 거짓 정보를 퍼뜨린다고 하니 주의할 것. '眀'이 들어가는 건 '중명전(重眀殿)'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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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즉조당.png|3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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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즉조당]]'''(即阼堂)
 
정면 7칸, 측면 4칸의 침전 건물로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한성으로 환어한 이래 이곳을 시어소로 사용했으며,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장소였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광무 원년) 환궁한 고종이 1902년(광무 6) 중화전 창건 전까지 경운궁의 정전으로 삼았으며[1],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부터는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1년 7월 20일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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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석어당.png|3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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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석어당]]'''(昔御堂)
 
누각을 제외한 궁궐 내의 전각 중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전각으로,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며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원래의 석어당은 1593년(선조 26)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승하하고, 1618년(광해군 10) 인목왕후가 폐위되어 유폐되었던 장소였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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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덕홍전.png|3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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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덕홍전]]'''(德弘殿)
 
1911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덕수궁 내의 전각 중 가장 나중에 영건되었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서쪽에 있으며, 고종이 내외 귀빈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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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함녕전.jpg|3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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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함녕전]]'''(咸寧殿)
 
정면 9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고종의 침전이었다. 1897년(건양 2)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온돌 교체공사 도중 발생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모두 전소되었다가 곧바로 중건 공사에 착수해 1906년(광무 10) 복구했다.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 후에도 줄곧 이곳에서 거처했으며, 1919년 1월 21일 승하한 장소도 여기였다. 함녕전의 정문인 광명문은 일제강점기 덕수궁 유원지화 계획에 따라 중화문의 서남 측으로 이전되었다가, 2018년 6월에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마무리함으로써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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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광헌.jpg|30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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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정관헌]]'''(靜觀軒)
 
1900년(광무 4) 고종이 다과회, 연회장, 음악당 등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전통 건축 양식이 가미되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특징이다. 완공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커피를 즐겼으며, 현재도 매년 봄과 가을에 명사를 초청한 강연회를 여기서 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강연을 청취할 수 있다. 다만 고종실록 등에 의하면 1912년까지 이곳을 어진을 봉안한 장소로 이용한 것으로 보여 단순히 다과회, 연회장 등의 용도로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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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식 건물 ===
 
=== 서양식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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