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선 편집하기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아이디(ID)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편집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저장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34번째 줄: 34번째 줄:
  
 
배를 만들 수 있는 소나무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리도 없을 것이란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면 소나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된다.  
 
배를 만들 수 있는 소나무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리도 없을 것이란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면 소나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된다.  
 
== 판옥선 ==
 
판옥선(板屋船)은 조선시대 명종 때 개발한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투선으로 노를 젓는 노꾼은 1층 전투원은 2층에 배치하였다. 조선시대 당시는 판옥선보다는 전선(戰船)이라 불렀다.
 
 
판옥선의 체제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이는 "李恒福曰 我國戰船 上設板屋 周以防牌 用夫一百餘名儼然 爲一少城堡"라는 기록에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10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연구 및 복원 작업이 완료됨에 따라, 판옥선의 제원은 길이 32.16m, 너비 5.56m, 선체 중량 140.3톤이며 내부에는 화장실과 부엌과 같은 시설도 구비되었음이 밝혀졌다.
 
 
== 거북선 ==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조선 수군의 거북 모양의 군함이다. 귀선(龜船)이라고 한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기본으로 하여 판옥선의 갑판 위 외형 전체에 뚜껑을 씌운 뒤 나무판으로 덮은 배다. 주로 나무판이 아니라 철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비용적인 문제나 바닷물에 녹슬기 쉬운 것을 감안 할 경우 나무판이라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배는 매우 얇아 삼나무 목재선을 사용하여도 전투에 문제가 없었다. 또한 이 나무판에는 적병이 못 뛰어오르도록 무수한 송곳과 칼을 꽂았었다. 선수부에는 거북머리를 구조하여 그 곳에서 전면부로 화포를 쏘게 했고 선미부에는 거북이 꼬리를 세우고 역시 화포를 쏘았다. 결국 거북선은 완전 무장으로 승조원을 보호한 채 안전한 곳에서 앞뒤와 선체 측면의 포문으로 전후좌우 각각 6개씩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이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하여 임진왜란 중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일본 수군과의 16전에서 16승을 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일본 수군의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거북선을 한자로 귀선(龜船)으로 표기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에게는 샤치호코(鯱, 상상의 동물)와 닮은 보쿠카이센 혹은 깃카이센, 기카이센(亀甲船)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새벽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모두 침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당시와 비교해서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변형되었다.
 
 
1973년 9월 대한민국에서는 500원권 지폐의 앞면에 이순신과 거북선을, 뒷면에는 현충사를 도안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1966년 이후로 발행된 5원 동전 앞면에도 거북선이 도안되었다. 옥포대첩에는 나가지 않았다.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해시넷에서의 모든 기여는 다른 기여자가 편집, 수정, 삭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해시넷:저작권 문서를 보세요).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