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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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제국]]이 [[영국]]에게 독립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잠무카슈미르 지방은 [[마하라자 하리 싱]]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는데, [[힌두교]]를 믿었던 하리 싱은 카슈미르 지방이 파키스탄, 혹은 인도 둘 중 한 국가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힌두교 세력인 인도에 가기를 원했으나, 카슈미르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기에 이에 대한 급격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하리 싱은 인도에 도움을 요청하고, 인도에 대한 잠정 편입을 승인한 뒤에 [[도주]]하였고, 인도 군대가 카슈미르로 진입하는 것에 반발한 파키스탄이 자국 군대를 파병하면서 대대적인 갈등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인도는 잠무 카슈미르 지방의 마지막 토후였던 하리 싱이 인도와 체결한 협약에서 캬슈미르 지방 전체를 인도에게 넘겨주기를 약속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으나, 파키스탄 측에서는 카슈미르 지방은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인도는 1948년 1월 1일에 이 안건을 [[유엔]](UN)에 상정하였고, UN 총회에서는 파키스탄에게 [[병력]]을 일단 물리고 [[주민투표]]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이를 물리지 않았고, 대신 1949년에 이르러 일단 [[교전]]을 중지하고 잠정적 국경선을 그어 카슈미르 지역을 2개의 국가에 나뉘어 편입하는 것으로 잠정적 결론이 났다. 인도는 [[무슬림]]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카슈미르 지방이 파키스탄에 통째로 넘어가는 것에 두려워하였고, UN이 제안한 [[국민투표]]를 거부하였다.
 
카슈미르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제국]]이 [[영국]]에게 독립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잠무카슈미르 지방은 [[마하라자 하리 싱]]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는데, [[힌두교]]를 믿었던 하리 싱은 카슈미르 지방이 파키스탄, 혹은 인도 둘 중 한 국가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힌두교 세력인 인도에 가기를 원했으나, 카슈미르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기에 이에 대한 급격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하리 싱은 인도에 도움을 요청하고, 인도에 대한 잠정 편입을 승인한 뒤에 [[도주]]하였고, 인도 군대가 카슈미르로 진입하는 것에 반발한 파키스탄이 자국 군대를 파병하면서 대대적인 갈등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인도는 잠무 카슈미르 지방의 마지막 토후였던 하리 싱이 인도와 체결한 협약에서 캬슈미르 지방 전체를 인도에게 넘겨주기를 약속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으나, 파키스탄 측에서는 카슈미르 지방은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인도는 1948년 1월 1일에 이 안건을 [[유엔]](UN)에 상정하였고, UN 총회에서는 파키스탄에게 [[병력]]을 일단 물리고 [[주민투표]]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이를 물리지 않았고, 대신 1949년에 이르러 일단 [[교전]]을 중지하고 잠정적 국경선을 그어 카슈미르 지역을 2개의 국가에 나뉘어 편입하는 것으로 잠정적 결론이 났다. 인도는 [[무슬림]]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카슈미르 지방이 파키스탄에 통째로 넘어가는 것에 두려워하였고, UN이 제안한 [[국민투표]]를 거부하였다.
 
== 이슬람 ==
 
[[파일: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에서 열린 금요일 대예배.jpg|썸네일|300픽셀|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에서 열린 금요일 대예배]]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 자체를 국가의 주 설립 목적으로 삼고 건국된 국가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무슬림들이 모여 만든 나라라고 할 수 있기에, 이슬람교가 국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타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며 이슬람 율법과 샤리아가 헌법이나 민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 또한 이슬람 율법학자들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으며, 파키스탄의 건국 세력 역시 압도적 다수가 절대적인 무슬림들이었다.
 
 
1949년 3월에 발표된 헌법 내용에는 유일신이 만물의 주권자이며, 파키스탄은 무조건적으로 이슬람 국가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파키스탄은 단순히 자국을 확고히 이슬람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인근의 국가들까지 이슬람화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전세계의 이슬람화와 세계적인 이슬람 조직체를 창설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는 1970년대에 이슬람 협력기구(OIC)가 출범하면서 일부 이루어졌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는 건국 직후부터 사회 전반에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강요했는데, 서파키스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반발이 적었던 반면, 벵골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파키스탄 지역에는 속세주의를 추구하고 민족을 종교보다 우선시했던 벵골의 전통적 엘리트층들이 다수 모여 살고 있었기에 지나친 생활의 종교화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슬람 정당이었던 자마트-에-이슬라미는 파키스탄이 완전한 이슬람 국가라고 선포한 마당에, 벵골의 지역적인 민족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1971년에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자마트-에-이슬라미는 파키스탄 군대 편에 서서 벵골의 민족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첫 총선 직후, 제헌 의회에 의하여 1973년에 첫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는 파키스탄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내용과, 그리고 이슬람교가 파키스탄의 국교라는 내용이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모든 민법과 형법이 이슬람 율법에 맞추어져야만 하며 이슬람 경전인 쿠란과 수나를 능가하는 그 어떠한 법적 권위도 없다고 못박아놓았다. 이 헌법에는 샤리아 법원과 이슬람이념위원회 등 이슬람 경전이나 율법 등을 해석하는 자체적인 종교기관의 창설도 의무토록 해놓았다.
 
 
한편 좌파 성향을 띠고 상대적으로 속세주의를 추구했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당시 보수적인 이슬람 세력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니잠-에-무스타파' 등 샤리아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완전한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는 극단주의 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부토 총리도 어쩔 수 없이 일부 요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부토 총리를 죽이고 권좌에 오른 지아 대통령은 아무래도 종교적인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을 탈취했기에, 이슬람교에 친화적일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요구를 맞추어주기 위하여 이슬람 율법을 강화하고 샤리아법을 전면 시행하였다. 지아 대통령은 독립적인 샤리아 법원을 창설하였고, 이슬람 율법에 통달한 배심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울라마'라고 부르는 이슬람 법학자들과 이슬람 정당들의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특히 이슬람 부흥주의의 한 교파인 데오반드파와의 협력을 굳게 하였다. 이 때문에 데오반드파, 즉 후의 살라피즘의 세력이 굉장히 강해졌고, 지아 대통령이 수니파를 가까이 하고 시아파를 배척하자 점차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심해졌다.
 
 
퓨리서치센터에 의하면 파키스탄의 국민의 대다수가 샤리아법을 파키스탄의 공식 법으로 제정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전했다. 또한 파키스탄이 이집트, 인도네시아, 요르단 등 타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도 종교색이 강하여 심지어 국적보다도 종교를 우선시한다고 전했다.
 
  
 
== 경제 ==
 
==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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