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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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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

궁전(宮殿, palace)은 왕후(王侯)들이 사는 대규모의 호화로운 주택을 말한다.[1]

개요[편집]

궁전(宮殿) 또는 팔라스(영어: palace)는 왕이나 왕족이 일을 보고 생활하던 건축물을 말한다. 궁궐(宮闕), 궁실(宮室), 대궐(大闕), 어궐(御闕), 왕궁(王宮)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2]

현대에는 궁전과 궁궐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궁과 전, 궐은 조금 분리되는 개념이다.

궁은 군주와 군주의 가족들의 관저로 쓰인 생활공간이고 전은 군주가 대신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의논하고 회의하는 업무공간이며 궐은 궁의 입구 주위의 망루, 즉 궁성과 비슷한 개념이다.[3]

상세[편집]

궁전은 국가의 수장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하지만 군주가 성에 살았던 경우에는 성 자체를 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서양에서도 왕과 같은 군주들 대부분이 궁전(palace)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로 바로크 양식이 보편화되면서였고, 그 이전에는 성(castle)에서 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군주(영주)들이 요새화된 거주지를 많이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건 전란이 잦았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많은 나라가 군주제가 폐지되거나, 군주가 남아있어도 현대식 건물에 옮겨가 사는 경우가 많아서 옛날 궁전이 지금도 본래 역할을 하는 것은 소수이고, 역사시대에 최고로 공을 들인 전통건축물이란 특성상 보통 박물관이나 호텔 등의 관광자원으로 더 많이 이용된다. 유럽에서는 귀족적 상징으로서 현재까지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으며 아시아 건축에서도 궁궐은 빼놓을 수 없는 전통 건축의 정수이다.

그 외에도 유럽의 국가들 중에는 궁궐을 그대로 국가기관의 관청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국의 의회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이나 프랑스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엘리제 궁전 등이 그 예이다. 여기서 파생되어 아예 처음부터 군주가 아닌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기 위해 지어진 건물도 대통령궁(大統領宮, Presidential Palac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청와대와 대통령실도 궁의 범위에 포함된다. 직접적으로는 필리핀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자국 대통령의 관저를 궁전이라고 부른다. 또, 식민지나 영연방 입헌군주제 국가의 경우는 종주국의 군주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독이 있는데 이들의 관저도 종종 궁전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중국이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한 왕조가 다른 왕조에게 멸망하면 그 왕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종묘는 불태우고 궁전은 파괴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로 한 왕조를 다른 왕조가 침공해서 멸망시킨 사례가 적다보니 이런 사례가 많지는 않은 편이다. 후백제와 발해가 전쟁 패배로 멸망한 것이 마지막이고, 신라는 고려에 평화적으로 귀부해 멸망했는데 얼마 안 남은 기록을 종합해보면 고려시대에 원 역할을 잃은 신라 궁전은 강제로 파괴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해체, 축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역시 조선에 양위하면서 멸망했는데 고려 멸망 시점에 만월대는 몽골의 침입과 홍건적의 난으로 이미 파괴된 상태였고, 수창궁도 일방적으로 허물어졌다기보다는 관리소흘로 점차적으로 무너진것이다. 조선도 일제에 의해 멸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직접적 전쟁은 없었고 조약을 통하는 방식이었으며, 이후 일제에 의한 조선 궁전 훼손이 있긴 있었지만 왕궁으로서의 본래 역할을 잃어버린 궁들을 축소, 용도변경하는 것이라 과거에 의도적으로 다 부숴버리는 것과는 맥락이 달랐다.

이런 전 왕조의 궁궐들은 사용처 소실로 관리가 소홀해져 오랜 세월 동안 삭아 없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결정적인 파괴 요인은 대체로 외침이었다. 심지어 만월대나 연경궁은 후임 조선왕조에서 뭘 파괴하고 자시고도 없이 이미 고려왕조 때 몽골군과 홍건적이 다 때려부숴버렸다. 수창궁은 사용처가 없어지면서 개성부 창고로나 쓰이다가 하나씩 무너진 케이스고. 그 반면 신라의 삼국통일 당시 이전까지 유명한 국가들은 가야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전부 외침으로 멸망해서 궁전이 남은 게 없다. 대표적으로 고조선, 백제, 고구려가 있다.

중국의 자금성은 청나라에서도 쓰였지만, 새로 만들어진 궁전이 아니라 명나라 당시에 만들어진 궁전이며, 이자성의 난 때 일부 소실되긴 했으나 청조에 들어와서도 수리, 보수만 거치며 계속 써 온 궁전이다.

국가의 대표인 왕의 처소이자 나름 권위를 보이기 위해 화려하게 지은 게 대다수지만 역사상 재정이 안 되는데 궁전을 너무 화려하게 짓거나 무리하게 증축하여 국가 재정이 파탄나거나 아예 나라가 망해버리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 사례로 광해군과 흥선대원군, 진시황 그리고 독일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 등이 있다.

문화어에서는 뜻이 다른데, 여기에선 '여러 교양 수단들과 체육 문화시설을 갖추고 정치 문화 교양 사업을 하는 크고 훌륭한 건물'을 뜻한다. 평양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이 그 예이다. 마찬가지로 냉전 당시 동구권 국가들도 궁전을 이 의미로 쓰였는데 대표적으로 동독의 공화국 궁전과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인민궁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문화과학궁전, 중국의 노동인민문화궁 등이 있다.

분류[편집]

법궁, 중궁(中宮), 동궁, 비궁(妃宮), 비궁(妃宮), 후궁, 별궁, 행궁, 냉궁 등이 있다.

한국의 궁궐[편집]

경복궁[편집]

경복궁

경복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받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간 방치되다가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에는 7천여 칸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등 궐내가 크게 훼손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았고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사라진 전각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최근 복원한 전각들도 원형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후일에도 완전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4]

창덕궁[편집]

창덕궁 전경

창덕궁은 조선 - 대한제국시대의 궁궐.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에 있다. 지번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이다.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정종 1년)에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移宮)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그러나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머물기 싫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兩闕體制)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태종은 창덕궁을 완공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1405년(태종 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열었다.[5]

창경궁[편집]

창경궁 전경

창경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40여 년 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6년 궁궐 복원에 따라 창경궁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로 불리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궁궐 역할을 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거처한 궁)이 있던 곳이다. 이후 단종도 즉위 1년차에는 누이의 사저에 살다가 이듬해에 수강궁으로 옮겼는데, 여기서 계유정난을 당했다. 성종 15년(1484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세 사람을 위하여 따로 지은 대비궁,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구별지으려고 동향으로 배치하였다.[6]

세계의 유명한 궁전[편집]

포탈라궁[편집]

포탈라궁

중국 티베트 자치구 라싸에 있는 궁전으로, 달라이 라마의 거주지였으며, 티베트의 중심 종교인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이었다.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국가공인 중국5A급여유경구에 등록되어있다. 엄청난 고지대에 있는 것이 특징으로 '포탈라'라는 이름은 관세음보살이 사는 산인 포탈라카 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布达拉라는 표기는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단순한 음차표기로 중국어로 읽으면 부달라가 된다.

중국 인민폐 5차 시리즈(1999~ ) 현행권인 50위안 지폐 뒷면을 장식하고 있다.

전통적인 단일 건축물로서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며, 동아시아에 있는 어떠한 단일 전통 건축물보다 크다. 포탈라궁의 총 건축면적은 13만m2으로, 전체 부지는 36만m2이며, 동서의 길이는 360m에 이르고 남북은 270m, 높이는 13층으로 117m에 달한다. 독립 국가로서의 티베트가 경제적인 능력에서는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단일 건축물을 지어올린 것이다.[7]

알함브라 궁전[편집]

알함브라 궁전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던 무어인들이 그라나다에 지은 궁전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극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어 높이 평가받는 건물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건축이 절충된 예이기도 하다. 지금은 전형적인 기독교 문화권이 된 도시에서 이슬람의 흔적이 듬뿍 담긴 궁궐을 보는 기분이 묘하다. 정반대 사례가 바로 과거에는 동방 정교 예술의 정수이자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이슬람 문화권의 도시가 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게 4개 공간으로 구성된다. 처음 지어진 건축물이자 가장 전망 좋은 요새인 알 카사바, 아라베스크 양식의 꽃인 나사리 궁전,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의 헤네랄리페, 스페인 르네상스 시기의 건물인 카를로스 5세 궁전과 산타 마리아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다.

세계의 건축 장식을 연구했던 <Grammer of Ornament>의 저자 오웬 존스는 알함브라, 무어인의 장식을 최상으로 꼽기도 했다. 아라베스크 무늬와 종유석 모양의 세밀하고 방대한 장식을 가진 아치와 기둥, 돔, 각종 수로와 수변, 담담한 벽의 대비 등을 볼 수 있다.[8]

버킹엄 궁전[편집]

버킹엄 궁전

영국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영국 왕실의 관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지냈었다. 그외에도 국빈을 맞이하는 공식적인 장소로 영국의 명물이자 중요한 관광 이벤트인 근위병 교대식이 버킹엄 궁전 앞에서 개최되고 있다. 규모는 넓이가 20,000㎡인 호수를 포함한 174,000㎡짜리 대정원과 다수의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도서관 등을 포함한다.

건물 분류 상 성(城)에 해당된다.

본래 버킹엄 공작의 거처로 이름 또한 원 소유주 버킹엄 공작가에서 따온 것으로 1703년 버킹엄 공작인 존 셰필드가 뽕나무 밭을 구입하여 버킹엄 하우스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761년 국왕인 조지 3세에게 매각되었고 1774년 조지 3세의 왕비 샬럿이 거주하면서 Queen's House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후 1825년에 조지 4세의 명으로 당시 건축가 존 내시가 1836년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는 궁전으로 2배 크기로 개축했지만, 왕실의 거주지는 여전히 세인트 제임스 궁전이었다. 그러다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을 포함한 역대 국왕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 나치군의 공습으로 폭격을 당했지만 종전 후에 복구되었고 영국 국왕 일가의 거처들 중 가장 대표적인 궁으로, 궁전에 근무하는 사람의 수는 약 450명, 연간 초대객은 40,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왕족들을 보필하는 시종 50명은 같은 궁에 머물며, 기타 다른 시종들은 왕실 마구간인 로열 뮤스에 거주한다.

평소에는 물론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지만, 국왕을 비롯한 왕실이 휴가를 떠나는 기간 동안에는 일반인들의 관람을 허용한다. 보통 7~9월 여름 휴가 때 개방하는 경우가 많다.[9]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궁전〉, 《네이버지식백과》
  2. 궁전〉, 《위키백과》
  3. 궁전〉, 《나무위키》
  4. 경복궁〉, 《나무위키》
  5. 창덕궁〉, 《나무위키》
  6. 창경궁〉, 《나무위키》
  7. 포탈라궁〉, 《나무위키》
  8. 알함브라 궁전〉, 《나무위키》
  9. 버킹엄 궁전〉,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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