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기와집

해시넷
이동: 둘러보기, 검색
기와집

기와집(瓦家, roof tiled house)은 기와로 지붕을 만든 이다.

개요[편집]

기존의 주거 형태였던 초가집이 몇 년이면 지붕 소재가 썩어버려 자주 갈아줘야 하던 것을 반영구적인 기와로 대체한 것이다.

한국 대부분의 기와집은 찰흙으로 만든 검은색 기와를 많이 사용하였다.[1]

보통 찰흙으로 만든 검은색 기와를 많이 썼으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푸른색)기와로 지붕을 이기도 하였다. 기와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기와집을 짓고 살거나 사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기와집은 신분에 따라 색(푸른색,검은색등)과 종류(청기와등)가 달랐다. 기와집은 조선시대의 유교의 영향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철저히 구분되어있다. 남자는 사랑채에서, 여자는 안채로 구분되어있다.[2]

기와집의 구조[편집]

기와집의 구조

구조는 크게 행랑채, 사랑채, 안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분되었다.

행랑채는 집안에 하인이 머물던 곳으로 광, 방으로 구분되었고 사랑채는 집안에 남자들이 지내는 곳으로 사랑방, 대청과 누마루, 침방, 서고등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여자들이 쓰는 방으로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안채 옆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하면 별당이 나오는데 별당은 나이 많은 딸이나 며느리, 노부부가 살도록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사당은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시대에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추가로 만들어 조상을 모시며 숭배하였다고 한다.[3]

기와집의 특징[편집]

양반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할 경우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를 사용해 지붕을 만들기도 하였다. 전통적으로 부유층이나 양반들만이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일반 농민이 기와집을 짓는다 해도 특별한 제재하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기와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지붕을 기와로 얹으려면 품이 많이 들어서 일반 농민들이 짓고 살기에는 도저히 무리였다. 기와 굽는 가마 자체가 손꼽히던 시절이었으니. 그래서 당시에는 기와집이 호화사치주택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양반들이라고 해서 기와집을 막 짓고 살 수 있었던 건 아니고 크기 제한이 있어서 99칸을 넘는 집을 짓고 살 수는 없었다. 99칸이 넘는 기와집은 무조건 궁궐이나 관아, 성균관 같은 대형교육시설이다. 물론 99칸이라고 해도 180평에 해당되는 크기이기 때문에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널찍했던 건 마찬가지이며 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세도가나 전국을 휘어잡는 거상급은 되어야 99칸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기와집이라고 해서 죄다 넓은 것도 아니라서 한양 도성 내부 같은 도심지 기와집의 경우에는 집이 좁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시대 기와집은 전근대시대 세계 모든 문명과 같이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일제시기 때 개량형 기와집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경성부의 인구가 지방에서 올라오는 인부들로 인해 날이 갈수록 증가하게 되자 새로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해져서 땅값이 오르게 되면서 궁여지책격으로 기존의 기와집보다 훨씬 좁게 만들면서 2층까지도 만든 개량형 기와집이 등장하게 되었고 현재 서울에 남은 기와집 가운데서 상당수가 이런 개량형 기와집이다.[1]

역사[편집]

신라[편집]

벽돌에 새겨진 신라 기와집

신라시기 건물들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었다. 입식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귀족들은 바닥에 타일을 깔기도 했었고 황금으로 기와를 만들어 올린 금입택을 지었다. 또한 경주 월성/동궁과 월지 유적 발굴 결과 처마 끝부분을 하나씩 하나씩 황금장식을 붙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청기와를 올린 집도 있었고 수키와 끝 수막새 위에 황금장식을 올리기도 했으며 나무 골조 부분을 빨갛게 칠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1]

경주~동해까지 기와지붕으로 이어진 신라, 기와는 눈비를 막아주는 기능은 기본이고, 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었다. 옛 사람들은 건축물의 위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인간의 세계를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분이 높은 이들은 하늘과 맞닿은 건축물의 경계선을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로 장식하여 건축물의 위엄을 높였다. 또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기도 했다.[4]

고려[편집]

고려시대의 궁궐

고려청자의 영향으로 청자로 기와를 굽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황금 기와는 있었고 신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1]

당(唐)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에는 고구려 사회를 묘사한 대목이 있다. ‘주거는 산골짜기에 있는데, 모두 짚과 풀로 지붕을 덮었다.

오직 사찰이나 신묘(神廟), 왕궁, 관청에만 기와를 썼다’는 것이다. 1123년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은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기와를 인 가옥은 부잣집 열에 한둘 정도일 뿐 민가 대부분은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허름할 띳집에 불과하다’며 고려의 마을 풍경을 묘사하였다.[5]

조선/대한제국[편집]

조선시대의 기와집

유교의 영향으로 기와집들이 많이 검소해 졌다. 검은 기와를 올렸고 "사치스럽지는 않되 초라하지 않다." 라는 정신으로 서까래와 공포를 알록달록하게 칠했다. 이를 상록하단 단청이라고 부른다.[1]

조선 초 한양 도성은 잦은 화재로 몸살을 앓았다. 지붕이 잇닿아 있어 한 집에 불이 나면 삽시간에 온 도성으로 번졌다. 급기야 조정에서는 도성의 모든 가옥 지붕을 기와로 대체하는 계획을 세우고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여 평민들에게만 싼 값에 기와를 공급하였다. 그런데 이 정책에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바로 도성의 미관 정비였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도성이 남루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면 나라의 체신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평성대라 평가되는 태종과 세종의 치세에도 도성의 전면적 ‘지붕 개량 사업’은 결국 달성되지 못하였다.[5]

현재[편집]

경주 주유소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낙후의 상징이라며 대대적으로 없앴던 초가집과는 다르게 기와집에 대해서는 별로 터치를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수량도 많지 않았던 데다가 아무래도 공간의 한계와 소음 문제가 있고, 특수한 경우엔 기와 사이의 틈이 벌어져 물이 새는 경우도 있다 보니 아예 현대식 주택으로 개보수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부동산 투기와 재개발로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고, 잘 지어지지는 않다 보니 전통 기와집이나 개량형 기와집은 현재는 도심지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청와대처럼 지붕만 기와인 서양식 주택은 꽤나 널려 있는 편이다. 1960~80년대에 흔히 지어졌던 양옥 단독주택들도 집 자체는 서양식 벽돌을 이용해 짓되, 지붕은 기와로 장식하고, 온돌도 깐, 일종의 퓨전식 집이 많았다. 하지만 골목골목 다니다 보면 아주 가끔 개발되지 않고 오래된 기와집들이 자주 보이곤 한다. 경주시에는 일부면을 제외한 지역에서 다량의 원조 검은 기와를 볼 수 있다. 경주가 워낙 역사도시인 만큼 경주IC는 고사하고 주유소에도 기와를 얹어놓은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현대에도 기와집을 새로 짓는 경우가 많고 검정색 기와를 올린 집, 파란색 기와를 올린 집, 빨간색 기와를 올린 집들이 많은데 검정색 기와를 올린 집 중에서 아주 가끔씩 기와집 느낌나도록 흉내만 내려고 하얀 찰흙 위에 기와 얹어놓고 암막새와 수막새로 막아놓지도 않은 집이 있다.[1]

해외에서[편집]

가나자와 성의 나가야

나가야 같은 일본식 전통 가옥이나 중국의 사합원, 토루 베트남식 전통 가옥도 기와를 얹기 때문에 의미 그대로의 기와+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글에 나라 이름+기와집으로 검색하면 많은 이미지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기와집 자체가 한자문화권에서 흔한 집이다. 전통적으로 서민들은 초가집에서 살았던 한국, 일본, 베트남과 달리 중국에서는 서민층들도 기와집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화북지역에서 석재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벽돌과 기와제조업이 성행한 영향이었다. 물론 중국이라고 해서 죄다 기와집을 짓고살았던것은 아니었고, 지역에 따라 토굴에 살거나 수상가옥에서 사는식으로 주거형태가 달랐던 면이 강했다.

동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권에서도 흔하게 쓰였다.[1]

기타[편집]

한국의 대통령 관저였던 청와대도 기와집이다. 청와대(靑瓦臺)라는 명칭 자체가 푸른 기와를 덮은 집이라는 뜻. 물론 전통양식의 기와집은 아니고 지붕만 전통 양식으로 꾸민 서양식 건물이다.

북한의 지상과제인 지상락원의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김일성이 제시한 지상락원의 기준이 이팝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이기 때문.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기는 하고, 북한의 경제개발기에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도심지에는 아파트를 대량건축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경춘선 김유정역의 신역사가 기와집 형태로 지어졌다. 이외에 남원역, 구례구역, 곡성역 등 기와 지붕을 얹은 역들이 꽤 있다.[1]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1.0 1.1 1.2 1.3 1.4 1.5 1.6 1.7 기와집〉, 《나무위키》
  2. 기와집〉, 《위키백과》
  3. 한국의 전통가옥 초가집 기와집〉, 《네이버 블로그》, 2023-01-26
  4. 신라전성기의 기와집〉, 《네이버 블로그》, 2021-04-20
  5. 5.0 5.1 백제학연구소 발굴조사 팀장 정치영의 '역사 속의 기와집 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2022-10-23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기와집 문서는 건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