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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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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청

노원구(蘆原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북동부에 위치한 자치구다. 1988년 도봉구에서 분리되였으며 서쪽으로는 도봉구, 남쪽으로는 중랑구성북구, 동쪽으로는 경기도 구리시남양주시, 북쪽으로는 경기도 의정부시와 접한다. 도봉구에서 분구될 때, 옛 행정구역 명칭인 양주 군 노원 면에서 구명을 따왔다.[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의 북동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7˚ 02′ 30″~127˚ 06′ 41″,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6′ 40″~37° 41′ 36″에 위치한다. 구의 동쪽 끝은 공릉동, 서쪽과 남쪽 끝은 월계동, 북쪽 끝은 상계동이며, 동서 간 거리는 6.17㎞, 남북 간 거리는 9.23㎞이다. 면적은 35.44㎦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5.9%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서초구·강서구·강남구 다음으로 크다. 행정구역은 19개 행정동(5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릉 2동이 전체 면적의 19.2%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상계 5동이 전체 면적의 1.2%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52만 7032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5.3%를 차지하여 송파구·강서구·강남구 다음으로 많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산철쭉,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산비둘기, 동물은 말, 풀(草)은 갈대이다. 구청 소재지는 상계동이다. 대규모 개발에 따른 아파트 숲을 이루며 동쪽에 불암산, 수락산 등의 산이 있어 동고서저 지형으로 서울 강북 14개 구 중 인구가 가장 많으며, 면적도 가장 넓다.[2][3]

자연환경[편집]

북쪽에 수락산(638m)과 도솔봉(540m)이 경기도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는 수락산과 능선으로 이어진 불암산(510m)이 경기도 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서울~원산을 잇는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중랑천이 노원구와 경계를 이루며 흐르고, 남서쪽으로는 우이천이 강북구와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북동쪽은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지만 남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져서 초안산(114m)·영축산(93m) 등이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전체적으로는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긴 네모꼴의 지형을 이룬다.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에 대보조산운동으로 형성된 대보 화강암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노원구를 대표하는 수락산·불암산도 북한산·도봉산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중랑천 유역에는 비옥한 마들 평야가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예로부터 농업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주거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연평균기온(2001~2010년)은 12.4℃로 서울특별시 평균(13.0℃)보다 0.6℃ 낮다. 연평균 일 최고기온은 17.6℃, 연평균 일 최저기온은 7.8℃로 연평균 일교차가 9.8℃로 나타나 서울시 평균(8.8℃)보다 1℃ 높다. 식물의 성장 가능 기간은 259.5일로 서울시 평균(268.5일)보다 9.0일 짧다. 연평균 강수량은 1457.4㎜로 서울시 평균(1387.3㎜)보다 70㎜가량 많으며, 연평균 강수량의 65%가량이 여름철에 집중하는 하계 다우형이다.

역사[편집]

노원구 지역은 고대부터 수락산·불암산 자락과 한강 연안 중랑천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일찍부터 인류가 살았던 곳이다. 이 일대에서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인근의 양주 일대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된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일대는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 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처음 한강 유역으로 내려왔을 때,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송파구 일대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 지대인 것으로 유추되며, 하북 위례성은 한강 북쪽으로 지금의 노원구 일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였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 이곳을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수락산 서남쪽의 상계동 보루(堡壘)나 불암산 성터 등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구려 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 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하면서, 결국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이 일대가 내소군(來所郡)의 관할 하에 속하였다.

후삼국시대 노원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에는 양주(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 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된 것은 주로 연기사상(延基思想)이라는 일종의 풍수지리적 쇠왕설(衰旺說) 때문이었다. 이때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 지금의 낙산), 서로 기봉(岐峰: 지금의 안산), 북으로 면악(面嶽: 지금의 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 지금의 용산)에 이르렀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때 노원역(蘆院驛) 일대가 해촌(海村: 현 도봉구 쌍문동 방학동 일대), 용산(龍山) 등지와 함께 남경의 후보지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1104년(숙종 9)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시되지 않았다.

그 뒤 무인정권과 몽고 침략 등의 정치적·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 천도론이 대두되었다.

이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 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이루어졌으며,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 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가 최종 결정되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 천도론은 조선이 개창 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여러 지역이 도읍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태조는 이 지역들을 직접 답사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보내 정밀 조사하도록 한 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하고 추진하기 위해 신도 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의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도시 계획안이 조선시대 500여 년간 수도 서울을 지탱하게 되었다.

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하루라도 빨리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로 옮기고자 해 궁궐 공사가 시작된 한 달 후인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입궁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하였다.

노원구 일대는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상 양주부(楊州府)에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466년(세조 12) 양주목이 되었다. 이후 연산군에 의해 한때 혁파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복치(復置)되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를 보면 양주목에 34개 면이 있는데, 그 중 노원면(蘆原面)과 해등촌면(海等村面)이 노원구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1895년(고종 32) 양주는 한성부 소속으로 바뀌었다가, 이듬해 다시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이 일대는 일찍이 누원점(樓院店)이라는 장시(場市) 가 있어 서울 동북방 지역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던 곳이다. 누원점은 포천에 있었던 송우점(松隅店)과 연계되어 함경도로부터 들어오는 북어 같은 건어물 등 많은 물류가 집하되던 곳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함경도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노원역이 있었는데, 이곳은 교통로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이 장소는 임진왜란 때 고언백(高彦柏)장군이 불암 산성을 축성하고 네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노원평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전투는 중랑천을 낀 마들평야, 우이동과 도봉동 일대, 중랑천 상류지역 주변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가 왜군을 소탕한 전투이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 일부에 속하였다. 양주군 노원면에는 온수동·납대동·가좌동·공덕리·장기리·월계리·간촌리·은행리·양재리·용동리·묘동리·불암리·금주리·광석리·오목리·무수동·갈해동·녹천리가 있었고, 해등촌면에는 상누원리와 무수동이 있었다. 1914년에는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한 글자씩을 따 노해면(蘆海面)으로 개편하였다.

이 지역은 광복 이후 1963년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으로 있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도·군·구의 관할구역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이때 변화된 내용을 보면 양주군 해등촌면 상누원리·영국리·무수동·도당리 일부가 서울 도봉리로, 양주군 해등촌면 암회리·도당리·원당리 일부는 방학리, 해등촌면 소망리·우이리·계성리·원당리 일부를 합쳐 쌍문리, 해등촌면 유만리·마산리·도당리·창동리와 호원면 녹천리 각 일부를 합쳐 창동리가 되었다. 양주군 노원면 월계리·양주군 노원면 용동리·상곡리·가좌동·공덕리와 망우면 묵동리 양재동 각 일부를 합쳐 하계리, 양주군 노원면 광석리·은행리·납대동·전주리·오목리·양재동 각각 일부를 합쳐 중계리, 노원면 간촌리·온수동·녹천리와 별비면 덕동리 각 일부 및 둔야면 조암동을 합쳐 상계리로 하여 서울 성북구로 편입하고 노해출장소를 새로 설치 이를 관할토록 하였다. 이때 편입된 지금의 노원 지역은 7개 동리에 20개 자연부락이었다.

1973년에는 성북구에 새로 도봉구가 신설되면서 이 지역은 도봉구로 편입되고, 노해 출장소는 폐지되었다. 1975년에는 상계3동에서 상계 3동과 4동이, 창동에서 창동과 월계동이 분동되었고, 1980년에는 공릉동에서 공릉 1동·공릉 제 2동·하계동이, 월계동에서 월계 1동·월계 2동이 각각 분동되었으며, 1985년에는 상계 5동이 신설되었다.

1988년 도봉구에서 도봉 1·2동, 창 1·2·3동, 월계 1·2동, 공릉 1·2동, 하계동, 중계동, 상계 1·2·3·4·5동을 분리하여 새롭게 노원구를 신설하였다. 1989년에는 도봉 1·2동과 창 1·2·3동을 도봉구로 편입하였고, 상계 8·9·10동, 중계2동, 하계2동이 증설되어 19개 동이 되었다. 1991년에는 중계 3동이 증설, 1992년에는 중계1동이 중계본동과 중계 1·4동으로 분동, 1994년에는 월계 2동이 월계 2·4동으로 분동, 1996년에는 공릉 1동이 공릉 1·3 동으로 분동 되는 등의 변화를 거쳐 현재 노원구의 행정동은 24개 동이 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동의 증가는 아파트 건설을 통한 유입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다.

2008년 월계 4동이 폐지되고 중계 2~3동이 중계2·3동으로 통합되어 지금의 19개 행정동 체제가 갖추어졌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9개 행정동(공릉 1·3동, 공릉 2동, 상계 1~2동, 상계 3·4동, 상계 5동, 상계 6·7동, 상계 8~10동, 월계 1~3동, 중계본동, 중계 1동, 중계 2·3동, 중계 4동, 하계 1~2동) 5개 법정동(공릉동·상계동·월계동·중계동·하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부동산업과 교육서비스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6조 3877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1.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7번째에 해당한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부동산업(1조 2837억)이 21.5%로 가장 크고, 이 밖에 교육서비스업(19.9%),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13.6%), 도소매업(9.3%), 사업서비스업(5.7%), 금융·보험업(4.9%) 등의 순이다. 교육서비스업의 부가가치(1조 1839억 원)는 서울시 교육서비스업 총 부가가치의 6.2%를 차지하여 강남구·서대문구·성북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2만 6616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3.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5번째에 해당한다. 사업체별로는 운수·창고업체(24.8%)와 도소매업체(18.9%), 숙박·음식점 업체(15.7%)가 전체의 60% 가까이 차지하고, 이 밖에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업체(9.8%), 교육서비스업체(7.3%) 등의 순이다. 전체 사업체의 절반 가량이 상계동에 분포하고, 개인 사업체가 약 86%,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약 83%를 차지한다. 사업체 종사자는 11만 8713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2.3%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7번째에 해당하며, 업종별로는 교육서비스업 종사자(17.8%)가 가장 많다. 제조업은 의류봉제·섬유 및 식료품 업종의 비중이 크고, 제조업 부가가치(1410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부가가치의 0.9%에 그쳐 25개 구 가운데 19번째에 해당한다.

전통시장은 상계동의 상계중앙시장과 공릉동의 공릉동 도깨비시장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이 밖에 유통 업체로는 백화점 2개소와 대형 할인점 2개소, 쇼핑센터 1개소, 대규모 점포 9개소 등이 있다. 2018년 도소매업의 부가가치(5554억 원)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 부가가치의 0.9%로 25개 구 가운데 19번째에 해당한다.

교통[편집]

도로 교통은 경기도 성남시의 판교 분기점을 기점과 종점으로 하여 수도권 지역을 순환하는 수도권 제1순환 고속도로(고속국도 100호선, 구 서울 외곽 순환도로)가 상계동을 경유하고,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서울시 송파구까지 이어지는 동부 간선도로가 중랑천을 따라 상계동·월계동·하계동·공릉동을 거쳐 간다. 이 밖에 상계동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까지 이어지는 덕내로(덕송 내각 고속화도로), 성동구에서 노원구를 거쳐 경기도 양주시까지 이어지는 동일로, 노원로(공릉동~상계동), 마들로(월계동~도봉구 도봉동), 노해로(강북구 수유동~상계동), 우이천로(월계동~도봉구 쌍문동), 월계로(성북구 하월곡동~월계동), 한글 비석로(하계동~상계동), 화랑로(성북구 종암동~공릉동) 등의 간선도로가 노원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1939년 성북역(지금의 광운대 역)이 영업을 개시하여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이 운행하였다. 이후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하여 노원구의 월계역~광운대역~석계역을 경유하고, 1994년에 개통한 수도권 전철 4호선이 노원구의 당고개역을 기점으로 상계역~노원역을 거쳐 오이도역까지 운행한다. 응암역~신내역 간을 운행하는 수도권 전철 6호선이 노원구의 석계역~태릉입구역~화랑대역을 경유하고, 장암역~석남역 간을 운행하는 수도권 전철 7호선이 노원구의 남북을 종단하여 수락산역~마들역~노원역~중계역~하계역~공릉역~태릉입구역을 거쳐 간다. 이 밖에 수도권 전철 경춘선이 상봉역에서 광운대 역까지 하루 2회 운행한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광운대 역에서 수도권 전철 경춘선과, 석계역에서 수도권 전철 6호선과 각각 접속하고, 수도권 전철 7호선이 노원역에서 4호선과, 태릉입구역에서 6호선과 각각 접속한다.

관광[편집]

대표적 관광 명소로는 산세가 웅장하고 활엽수 종이 많아 가을이면 온 산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장관을 연출하는 '수락산의 단풍', 눈 덮인 겨울산의 풍경이 빼어난 '불암산의 설경', 강릉(康陵)과 함께 조선 왕릉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태릉'(사적), 봄이면 상계동과 중계동의 경계를 흐르는 당현 천변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당현천 벚꽃길', 경춘선의 옛 철로와 폐역된 화랑대역 주변에 조성한 '경춘선 숲길과 화랑대역', 중랑천을 따라 1㎞에 걸쳐 펼쳐지며 노원구의 유래를 일깨우는 '중랑천의 노원 갈대숲', 조선시대의 내관을 비롯하여 상궁·사대부·중인·서민 등 다양한 계층의 무덤과 상석·문인석·비석·동자상 등이 분포하여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초안산 분묘 군',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古刹)로 유명한 '수락산 학림사의 일출', 수락산·불암산 등의 명산을 배경으로 자연경관과 인공 건축물 등이 조화를 이루는 '노원 전경' 등이 '노원 9경'으로 꼽힌다.

경춘선의 옛 화랑대역에 조성된 화랑대 철도공원은 실물 기차 전시 및 객차를 활용한 타임뮤지엄, 기차 카페 등을 운영하며, 다양한 조명 조형물로 장식된 노원 불빛 정원이 더해져 야경 명소로 알려져 있다. 상계동 노원역 주변의 노원 문화의 거리는 대표적 번화가로서 상설 야외무대가 설치되어 각종 공연과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젊음의 거리로 손꼽힌다. 일 년 내내 살아 있는 나비를 관찰할 수 있는 불암산 나비공원과 생태학습관·철쭉동산·유아숲 체험장·산림치유센터·온실카페 등이 순환산책로로 연계되는 불암산 힐링타운을 비롯하여 영축산·경춘선·수락산 등의 힐링타운 4개소가 시민들의 휴식처로 조성되어 있다. 이 밖에 중계동에 로보 카폴리 어린이교통공원과 노원 천문우주과학관·서울시민천문대, 월계동에 초안산 캠핑장과 도자기체험장, 공릉동에 목공예체험장·나무상상놀이터를 운영하는 목예원이 조성되어 있다. 걷기 명소로는 8개 코스로 이루어진 서울 둘레길의 제1코스인 수락·불암산 코스가 도봉구의 도봉산역에서 노원구의 화랑대역에 이르는 18.6㎞ 구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교육[편집]

근대 교육기관은 1945년 사립 연촌국민학교가 노원 지역의 첫 근대식 초등학교로 개교한 뒤 1947년 공립으로 전환되어 지금의 서울 연촌초등학교로 이어지며, 이 학교를 모태로 하여 지금의 서울 공릉초등학교·서울 태릉초등학교·서울 중평초등학교·서울 중현초등학교·서울 불암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이 밖에 1946년 창동 국민학교 상계분교장(지금의 서울 상계초등학교), 1949년 삼육 신학원 부속국민학교(지금의 태강삼육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으며, 1895년 지금의 중구에서 설립된 수하동 소학교(서울 청계국민학교의 전신)를 계승한 서울 청계초등학교가 1992년 중계동에서 재개교하였다.

중등교육기관은 1934년에 설립된 조선 무선 강습소가 조선 무선중학교(6년제)를 거쳐 1952년 지금의 도봉구 남대문중학교와 동국 무선 고등학교(지금의 노원구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며, 1964년에 같은 학교법인의 광운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37년 종로구에서 개교한 상명 여자고등 기예학원은 상명 고등여학교·상명 여자중학교를 거쳐 1951년 상명여자중·고등학교로 분리된 뒤 1994년 중계동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의 상명중·고등학교로 이어진다. 이밖에 1955년 고흥중학교(지금의 청원중학교), 1964년 인덕 실업고등학교(지금의 인덕 과학기술 고등학교), 1966년 염광중학교, 1968년 염광여자 상업고등학교(지금의 염광여자 메디텍 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6개교(서울과학기술대학교·육군사관학교·광운대학교·삼육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한국성서대학교)와 전문대학 1개교(인덕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25개교, 중학교 26개교, 초등학교 42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12만 7600여 명으로 서울시 전체 학생 수의 약 7%를 차지하여 종로구·성북구·동대문구·서대문구 다음으로 많다.

문화재[편집]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노원구〉, 《위키백과》
  2. 노원구〉, 《네이버 지식백과》
  3. 노원구〉, 《나무위키》
  4. 노원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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