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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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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위치
마포구청

마포구(麻浦區)는 서울특별시의 서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으로 중구·용산구, 북쪽으로는 서대문구·은평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서구·영등포구, 서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와 경계를 이룬다.[1]

개요[편집]

마포구는 서울특별시의 중서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51´ 44˝~126˚ 57´ 47˝,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1´ 51˝~37˚ 35´ 17˝에 위치한다. 동서 간 거리는 9.8㎞, 남북 간 거리는 2.9㎞이고, 면적은 23.85㎢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3.9%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2번째로 크다. 행정구역은 16개 행정동(26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암동이 전체 면적의 약 35%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염리동이 전체 면적의 0.2%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38만 1858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0.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5번째에 해당한다.

구의 명칭은 예로부터 유명한 나루터이자 포구였던 마포에서 따왔다. 예로부터 한강의 나루터 역할을 하였으나(마포, 서강진, 양화진 등), 수운이 쇠퇴하면서 20세기 초반부터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마포구 동부(공덕·아현·용강·도화 등)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가지화되었으며, 마포구 중·서부 지역은 해방 이후 점차 개발되어 아파트 및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섰다. 구의 동서로 서울 지하철 6호선과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서쪽 남북으로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지나며, 동쪽 남북으로는 수도권 전철 5호선이 지난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목련, 나무는 단풍나무, 새는 청둥오리이다. 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마포구의 지도와 마포나루, 난지도 등을 모티브로 하여 마포구민의 꿈들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소망을 담아 늘 밝고 활기찬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마포동이'이다. 구청 소재지는 성산동이다.

마포구의 중심 지역은 4개 노선 환승역인 공덕역 주변과 홍대입구역-합정역 주변을 꼽을 수 있으며, 최근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는 방송 IT 산업 회사들이 밀집하면서 새로운 업무 지구가 형성되고 있다. 이 중 홍대입구역 주변지역을 흔히 홍대 거리라고 하며, 명동, 강남을 잇는 서울 제3의 번화가이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인디문화를 형성하고 공유하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는 시설로는 KT&G의 상상마당이 있다. 또한 공덕역 주변은 S-OIL, 효성그룹, 동서식품 그룹, HS애드 등 많은 회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비즈니스 중심지역이기도 하다.[2][3]

자연환경[편집]

마포구는 대체로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은 동고서저형(東高西低型)의 지형을 이룬다. 북쪽으로 북한산의 줄기인 안산에서 다시 다섯 갈래로 갈라진 산줄기가 마포구에 이르러 저 산성 구릉지를 형성한다. 전체 면적의 90% 이상이 해발고도 50m 이하의 낮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100m 이상의 산지는 노고산(106m)과 와우산(102m) 뿐이다. 남쪽에는 한강 본류가 구의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가고, 북한산에서 발원하는 홍제천이 마포구의 성산동·망원동을 거쳐 한강에 합류한다. 북한산 비봉에서 발원하는 불광천이 서대문구와 은평구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마포구에서 홍제천에 합류한다. 상암동의 난지도는 본래 한강의 범람원으로 형성된 하중도(河中島)였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지질은 대부분의 지역에 선캄브리아 시대의 변성암류에 속하는 호상 흑운모 편마암이 분포하고, 한강 본류와 지류 연안에 신생대 제4기에 퇴적된 충적층이 부정합으로 덮고 있다.

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2.5°C, 1월 평균기온은 -3.2°C, 8월 평균기온은 25°C이며, 연 강수량은 1200㎜ 내외이다. 식물의 성장 가능 기간은 271.1일로 서울시 평균(268.5일)보다 2.6일 짧다. 연평균 강수량은 1354.4㎜로 서울시 평균(1387.3㎜)보다 33㎜가량 적으며, 연평균 강수량의 60%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하는 하계 다우형이다.

역사[편집]

마포구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시대 유적은 없지만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 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구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온조(溫祚)가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마한을 병합하여 백제(百濟)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이로 인해 마포구 지역은 한산주의 한양군에 속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한산주 도독으로 있던 김대문(金大問)은 이 지역의 빼어난 경치와 풍요로운 물산에 감탄하여 『한산기(漢山記)』를 지어 기록으로 남겼다.

후삼국시대 마포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 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 금주 강 씨(衿州姜氏 혹은 衿川姜氏) 세력과 풍덕유씨(豊德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금주강씨는 금천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풍덕유씨 세력들은 한강 하류의 마포 서쪽지역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에는 양주(현재의 양주군이 아닌 고려 초 서울의 이름),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렸다. 983년(성종 2)에는 전국에 12목이 설치되어 지방통치체제가 정비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이 설치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이 설치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 설치와 함께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가 물색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숙종 9)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천되지 않았다.

그 뒤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게 되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325년 8월 충숙왕이 왕비인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와 함께 한양에 행차하여 용산 언덕에 장막을 치고 행궁(行宮)으로 삼아 머물기도 하였으며, 공민왕과 우왕 때에는 계속해서 한양천도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는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 천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고,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 궁궐 공사가 시작된 한달 후인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12월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태조는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되었다.

마포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의 지역으로 후기에는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에 속하였다. 특히 마포구는 한강을 접하고 있어 일찍부터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조선시대 마포구와 관련된 용산강·마포강·양화도는 한강의 5강이 모두 포함된 곳이었다. 용산강은 경상·강원·충청·경기도 상류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을 따라 조운되어 온 종착점으로 세곡운송선이 몰려들었던 곳이다. 마포강은 삼남 지방의 곡식 운수는 물론 해로를 통해 들어온 각종 어물류가 집산되는 곳이었다. 양화도는 바다를 거쳐 들어오는 물자를 서울로 반입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인천 강화와 통하는 길목으로 그 북쪽이 마포와 연결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는 마포구와 가까운 행주산성에서 권율(權慄)장군의 행주대첩이 있었고, 전쟁 막바지에 일본이 퇴로를 열기 위해 용산강에서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과 조선을 배제한 채 강화회담을 열기도 했던 곳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서부 일부와 고양군의 연희면(延禧面)과 용강면(龍江面)에 속했으며, 1914년에는 용산출장소(龍山出張所) 관할 하에 있기도 하였다. 1936년 고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용산출장소와 서부출장소 일부 지역이었던 이곳은 용산구역소(龍山區役所)와 서대문구역소(西大門區役所) 일부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1944년 서대문구 일부와 용산구의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역소가 신설되면서 이 일대를 관활하게 되었다. 당시 마포구역소에는 23개 정(町)이 있었다.

1925년 대홍수로 대부분의 가옥이 유실되었고, 더욱이 광복 후 한강의 하항(河港) 기능이 쇠퇴하자 이 지역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주로 영세민의 주거지로 퇴락하였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16일 기존의 구역소를 구청이 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되면서 마포구역소도 마포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전쟁 후 급격한 인구팽창에 따라 공덕·아현·도화·염리동 일대에는 불량주택들이 무질서하게 난립해 갖가지 도시문제가 발생했으며, 강화만이 막히면서 한강에 배의 출입이 어렵게 되자 전통적인 마포의 포구문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도심재개발사업의 확장으로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도시경관도 크게 변모하였다.

1955년에는 종래의 동회(洞會)가 동(洞)으로 개칭되었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마포구는 19개의 행정동을 두게 되었다. 1964년에는 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으며, 노고산동이 신설되었다. 1970년에는 아현 1·2·3·4동이 아현 1·2·3동으로, 공덕 1·2·3·4동이 공덕 1·2동으로, 신공덕 1·2동이 신공덕동으로, 관란동이 용강동으로, 신석동이 신수동으로, 서강동이 창전동과 상수동으로, 세교동이 서교동과 합정동으로 각각 분리·통합, 또는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로써 전체의 행정동이 20개에서 18개로 축소되었다.

1973년에는 서대문구의 성산동과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었고, 마포구의 동교동과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에는 마포구 동교동 일부를 서대문구로, 서대문구 상암동·성산동 전부와 수색동·중동·남가좌동·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편입된 상암동과 수색동 일부에 상암동이, 성산동 전부와 남가좌동 및 중동 일부에 성산동이, 연희동 일부로 연남동이 각각 신설되어 18개 동에서 21개 동으로 확대되었다. 1980년에는 서교동이 분리되어 동교동이 신설되었고, 망원동이 망원 1·2동으로 증설되었다. 1985년에는 용강동 일부가 염리동에 편입되는 한편 하수동 전역이 상수동으로, 망원동 28번지가 서교동으로, 망원동 중 망원 1·2동 관할구역을 제외한 지역이 합정동으로 각각 명칭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2007년 아현 2~3동이 아현 3동으로, 도화 1~2동이 도화동으로, 대흥동과 노고산동이 대흥동으로, 창전동과 상수동이 서강동으로 합동된 데 이어 2008년에는 아현 2동과 공덕 2동이 아현동으로, 아현 1동·공덕 1동·신공덕동이 공덕동으로, 서교동과 동교동이 서교동으로 각각 합동되어 16개 행정동으로 정비되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6개 행정동(공덕동·대흥동·도화동·망원 1~2동·상암동·서강동·서교동·성산 1~2동·신수동·아현동·연남동·염리동·용강동·합정동) 26개 법정동(공덕동·구수동·노고산동·당인동·대흥동·도화동·동교동·마포둥·망원동·상수동·상암동·서교동·성산동·신공덕동·신수동·신정동·아현동·연남동·염리동·용강동·중동·창전동·토정동·하중동·합정동·현석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정보통신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19조 4747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4.6%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7번째로 비중이 크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정보통신업(5조 5746억 원)이 30.9%로 가장 크고, 이 밖에 사업서비스업(18.3%), 도소매업(13.6%), 부동산업(8.4%), 교육서비스업(4.7%) 등의 순이다. 정보통신업은 상암동에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집적 단지인 디지털미디어시티(DMC)가 조성되어 MBC·SBS·KBS 미디어·YTN·JTBC·CJ E&M 등의 방송사와 삼성SDS·LG CNS 등의 IT 관련 기업 등이 입주하였다. 정보통신업의 부가가치는 서울시 정보통신업 총 부가가치의 11.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강남구·송파구·중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3만 7232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4.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많다. 사업체별로는 숙박·음식점 업체(8429개)가 22.6%로 가장 많고, 이 밖에 도소매업체(20.6%),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8.4%), 운수·창고업체(8.4%), 전문·과학 및 기술 서비스 업체(7.1%), 정보통신업체(6.7%) 등의 순이다. 개인 사업체가 전체 사업체의 70%를 웃돌고,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약 74%를 차지하며, 홍대 앞으로 알려진 서교동에 전체 사업체의 약 27%가 분포한다. 사업체 종사자는 25만 5152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4.9%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7번째로 많으며, 정보통신업 종사자(3만 7909명)가 약 15%로 가장 많다. 제조업은 의류봉제와 식료품, 인쇄·기록매체 봉제업이 주류를 이루며, 2018년 제조업의 부가가치(2835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 부가가치의 1.7%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5번째에 해당한다.

상업은 조선시대에 한강변의 마포나루가 전국 각지에서 한양으로 운송되는 물화의 집산지가 되어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후 철도가 주요 유통 수단이 될 때까지 수운(水運)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전통시장은 공덕동의 공덕시장·마포시장을 비롯하여 망원동의 망월 월드컵 시장·망원시장, 서교동의 영진시장·서교시장, 성산동의 마포농수산물시장, 연남동의 동진 시장, 합정동의 합정시장, 신수동의 신수시장, 아현동의 아현시장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이 밖에 유통 업체로는 동교동의 홍대 걷고 싶은 거리상점가와 용강동 상점가·도화동 상점가·상암동 상점가 등의 상점가 4개소, 백화점 1개소, 대형 할인점 3개소, 쇼핑센터 1개소, 기타 대규모 점포 11개소 등이 있다. 2018년 도소매업의 부가가치(2조 4563억 원)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 부가가치의 약 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7번째로 비중이 크다.

교통[편집]

가양대교·성산대교·양화대교·서강대교·마포대교·당산 철교와 2021년에 개통한 월드컵 대교 등이 한강을 가로질러 마포구와 강서구·양천구·영등포구를 연결한다. 도로 교통은 도시고속화도로인 강변북로가 가양대교 북단을 기점으로 하여 상암동~도화동을 거쳐 경기도 남양주시까지 이어지고, 성산대교 북단을 기점으로 하는 내부순환로가 망원동~성산동을 거쳐 성동구의 성동 분기점까지 이어진다. 이 밖에 상암동을 기점으로 경기도 고양시를 거쳐 은평구 수색동까지 이어지는 가양 대로를 비롯하여 국회 대로(양천구 신월동~신정동)·마포 대로(마포동~아현동)·만리재로(공덕동~중구 만리동 1가)·백범로(노고산동~용산구 한강로1 가)·월드컵로(합정동~고양시 덕은동)·성산로(망원동~서대문구 현저동)·증산로(은평구 응암동~성산동)·연희로(동교동~서대문구 홍은동)와 대흥로·독막로·매봉산로·서강로·손기정로·신수로·양화로·하늘공원로 등이 마포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서울 주요 지역을 순환하는 수도권 전철 2호선이 마포구의 합정역~홍대입구역~신촌역~이대역~아현역을 경유하고, 강서구의 방화역을 기점으로 하는 5호선이 마포구의 마포역~공덕역~애오개역을 거쳐 하남 검단산역·마천역까지 두 갈래로 운행한다. 은평구의 응암역을 기점으로 하는 6호선이 마포구의 월드컵 경기장역~마포구청 역~망원역~합정역~상수역~광흥창역~대흥역~공덕역을 거쳐 중랑구의 신내역까지 운행하고, 서울역·김포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인천국제공항 철도가 마포구의 공덕역~홍대입구역을 거쳐 간다. 이 밖에 경기도 파주시의 문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은 마포구와 서대문구 경계의 가좌역과 홍대입구역~서강대역~공덕역을 거쳐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역·지평역까지 운행하는 노선과 가좌역에서 분기하여 서울역까지 운행하는 노선이 있다. 합정역에서 2호선·6호선이, 홍대입구역에서 2호선·경의중앙선·인천국제공항철도가, 공덕역에서 5호선·6호선·경의중앙선·인천국제공항 철도가 각각 접속한다.

관광[편집]

마포구 상암동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 자리에 평화의공원·하늘공원·노을공원·난지천공원·난지한강공원의 5개 테마공원으로 이루어진 월드컵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월드컵공원 내에는 자연학습장과 여가시설, 하늘공원의 메타세콰이아숲길과 난지천공원을 따라 펼쳐지는 가을단풍길, 파크골프장과 캠핑장, 서울에너지드림센터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체육 시설 등이 조성되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홍익대학교 주변의 홍대 거리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카페·클럽과 인디 밴드 공연 등 인디문화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으면서 쇼핑·맛집과 문화예술를 아우르는 젊음의 명소가 되었다. 홍대 거리 인근에 경의선 옛 철도 부지를 공원화한 경의선숲길과 경의선 책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경의선숲길과 연계되는 연남동 끝자락길은 가지처럼 뻗은 골목에 이색적 카페와 젊은 공예가들의 수공예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공방거리로 유명하다. 망원동에는 개성 있는 공방·음식점·카페 등이 들어서서 제2의 경리단길이라는 뜻의 망리단길이 형성되었으며, 상수도 카페거리도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합정동의 잠두봉 유람선 선착장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한강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역사 명소로는 합정동에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절두산 성지가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한말 이후 한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선교사들이 묻힌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건립된 망원정(望遠亭) 등이 있다. 먹거리 명소로는 도화동의 마포갈매기골목, 공덕동 족발골목, 아현동 전골목 등이 유명하다. 걷기 명소로는 8개 코스로 이루어진 서울 둘레길의 제2코스인 봉산·앵봉산 코스가 마포구와 은평구에 걸쳐 16.8㎞ 구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밖에 아현동 고갯길·마포나루길·성미산 동네길 등이 있다.

교육[편집]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 시대에 한성부에 속하여 성균관과 4부학당이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1911년 지금의 도화동에서 마포 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뒤 경성 마포 공립심상소학교·경성 마포 공립 국민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마포초등학교로 이어지고, 1916년 지금의 대흥동에서 아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뒤 용강 공립 보통학교·경성 용강 공립 심상소학교·경성 용강 공립 국민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용강초등학교로 이어진다. 이밖에 1925년 경기도 공립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지금의 서울 아현초등학교), 1933년 경성 남자 공립 고등소학교(지금의 서울소의초등학교), 1938년 경성 서강 공립 심상소학교(지금의 서울 서강 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은 1894년 평양에서 설립한 사숙(私塾)을 모태로 하는 광성중학교·광성고등학교가 8·15광복 이후 서울 종로구·용산구를 거쳐 1961년 신수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1906년 지금의 중구 필동에서 개교한 경성야학교가 경성 중등 야학학교·서울 중등 공민학교·숭문 상업 중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1947년 대흥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의 숭문중학교·숭문고등학교로 이어진다. 이밖에 1955년 동도중학교·동도 공업 고등학교(지금의 서울디자인고등학교)·마포여자중학교(지금의 서울여자중학교), 1958년 마포여자고등학교(지금의 서울여자고등학교), 1967년 경성중학교·경성고등학교와 성산여자중학교(지금의 성산중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1948년 용산구에서 개교한 홍문 대학관이 1949년 홍익대학으로 개편된 뒤 1955년 신수동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의 홍익대학교로 이어지고, 1960년 신수동에 서강대학교가 설립되었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2개교(서강대학교·홍익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9개교, 중학교 14개교, 초등학교 22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6만 8170명으로 서울시 전체 학생의 3.5%를 차지한다.

문화재[편집]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3점(안중근 의사 유묵 – 오노봉 위필삼상작연지청천일장지사아복중시, 월인석보 권 1~2, 양사언 초서)과 사적 1개소(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등이 있다. 이밖에 고려 공민왕을 기리는 창전동 공민왕 사당을 비롯한 4점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는 서울유형문화재 1점(의령남씨가전화첩)과 서울무형문화재 1점(행당동 아기씨 당굿), 서울 민속문화재 2점(용강동 정구중 가옥·당인동 부군당 무신동) 등이 있다. 이밖에 3·1운동이 거행된 1919년에 평양에서 제작된 독립신문 유인물이 서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마포구〉, 《위키백과》
  2. 마포구〉, 《네이버 지식백과》
  3. 마포구〉, 《나무위키》
  4. 마포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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