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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보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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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보디나 주기

보이보디나(세르비아어: 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Војводина, 헝가리어: Vajdaság Autonóm Tartomány, 슬로바키아어: Autonómna Pokrajina Vojvodina, 루마니아어: Provincia Autonomă Voivodina, 크로아티아어: Autonomna Pokrajina Vojvodina, 루신어: Автономна Покраїна Войводина)는 중앙 유럽판노니아 평원에 자리잡은 세르비아의 자치주이다.

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자치주는 이곳과 코소보메토히야 두 곳이다. 그러나 '코소보 및 메토히야'는 명목상 세르비아의 자치주일 뿐 실제로는 코소보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보이보디나란 공국, 더 정확히 말하면 voivodeship을 의미한다. 명칭의 기원은 1848년 혁명 당시 이 일대에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선포한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안 보이보디나)에 기원한다. Voivode는 공작 또는 군사령관을 의미하는 슬라브어로 폴란드를 비롯한 서슬라브어 계통으로는 Wojewoda, 세르비아를 비롯한 남슬라브어 계통으로는 Vojvoda라 한다. 오늘날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보이보다(공작)의 통치를 받지 않음에도 여전히 기원적 명칭인 보이보디나를 사용한다. 즉 지명에 사용된 일반명사가 고유명사화되었다 할 수 있다.

개요[편집]

  • 국가: 세르비아
  • 주도: 노비사드
  • 면적: 21,500km²
  • 인구: 1,931,809(2011년)
  • 공용어: 세르비아어, 헝가리어, 슬로바키아어, 루마니아어, 크로아티아어, 판노니아 루신어
  • 행정수반: 보얀 파이티치

지도[편집]

틀:보이보디나 행정 지도

역사[편집]

본래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나 1389년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에 압박을 느낀 세르비아인들이 피난을 오게되면서부터 세르비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1459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르비아가 완전히 멸망하면서 피난 온 세르비아인들이 증가해 세르비아인이 다수인 지역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면서 오스만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는데, 도나우 강을 건너 국경 지역을 약탈하는 오스만 제국 정복 전쟁 특유의 비정규병이 매우 큰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의 지배를 피해 국경 너머 헝가리로 이주해온 세르비아 유민들을 환영했다. 세르비아 유민들은 헝가리 남부 국경 근처에 정착하여 헝가리 왕국의 대 투르크 전쟁의 선봉에 섰다. 중세 시기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 유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전에 맞서 헝가리의 국경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세르비아 기마 전사조직인 '구사르'(Gusar)가 훗날 경기병의 대명사가 되는 그 유명한 후사르의 기원이 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이 패배하고 헝가리 왕국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면서,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 유민들도 오스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근대[편집]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과 신성 동맹은 사투 끝에 2차 빈 포위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승리를 거두었다.(1683년) 수비에서 반격에 나선 합스부르크 제국은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헝가리 왕국 전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외젠 공은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 북부에 위치한 젠타에서 티서 강을 도하 중이던 오스만 군 5만을 포착하여 이를 격파하는 등(젠타전투,1697년) 헝가리와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지역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 왕국 전체를 획득했으나 특히 국경 지대인 남부 지역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전후복구를 위해 18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여러 민족이 이주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불가리아인도 흘러들어왔다. 특히, 독일인이 매우 많이 이주했는데, 이는 전후복구를 겸사하여 독립의식이 강한 헝가리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당시의 대규모 이주민 정착은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인종적 다양성의 기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및 전후[편집]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보이보디나 지역의 민족 구성은 세르비아계 33.8%(51만명), 헝가리계 28.1%(42만명), 그리고 독일계는 21.4%(32만명)으로 세르비아와 헝가리계에 이은 보이보디나 제 3의 민족이었다. 이외에 크로아티아계, 슬로바키아계, 루마니아계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보이보디나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르비아 왕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 되었지만, 다민족 국가이면서 세르비아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처음부터 불안정했다. 유고슬라비아 왕정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붕괴하기까지 보이보디나 지역이 민족자치를 고려한 행정구역으로 설립되는 일은 없었다.

1941년, 소련 침공을 눈앞에두고 히틀러의 변덕으로 인해 나치독일과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극심한 내부분열에 시달리던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만에 붕괴되고 추축군이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점령한다.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하여 괴뢰국을 세우거나 헝가리, 불가리아, 이탈리아 등에 영토를 넘겼다.

보이보디나 지역은 역사적으로 세 개 지역(버치카, 바나트, 시르미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치 점령 기간 동안 이 강역을 따라 삼분할 되었다. 서부의 버치카 지역은 헝가리 왕국에 합병되었고, 역사적으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강역이었던 시르미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편입되었다. 동부의 세르비아령 바나트는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 군정 지역의 자치주인 바나트 자치주가 되었다.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보이보디나 지방의 독일인들은 악마와 손을 잡고 말았다. 전쟁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외국인과 재외 독일인을 대상으로 무장친위대를 창설하고 있던 나치독일은 근 30만에 달하는 보이보디나 독일인을 대상으로 무장친위대 가입을 독려 또는 징집했다. 1941년 말, 보이보디나 독일인을 근간으로, 제7 SS 의용 산악사단이 창설 되었다. 사단의 명칭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웅인 사부아 공자 외젠의 이름을 따 프린츠 오이겐이라 명명 되었다. 무장친위대 사단 중 기병, 산악 사단은 주로 대파르티잔 전선에 투입 되었는데, 프린츠 오이겐 사단은 크로아티아 및 독일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에서 활동 중인 티토의 빨치산 토벌임무를 맡게 되었다. 프린츠 오이겐 사단 장병들은 빨치산 토벌작전과정에서 보이보디나 지역의 빨치산 전투원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유고슬라비아 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리고 곧, 존경하는 영웅의 이름 아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대가를 치르게 된다.

결과적으로보면 보이보디나 독일인은 나치에 단순히 부역한 정도가 아니라 지역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직접 입힌 가해자이기도 했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티토가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연방으로 재건했을 때 독일계 주민이 받게된 분노와 적대감은 어마어마했다. 보이보디나 독일인들은 종전 직후 즉각적으로 추방당했고, 대부분이 독일 본국이나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이로써 한때, 보이보디나 제3의 민족이었던 보이보디나 독일인 공동체는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이 살다 떠난 이 지역에는 주로 세르비아인 또는 몬테네그로인 등 남슬라브계 민족들이 정착하였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독일어식 지명들도 이때를 전후로하여 슬라브어식으로 개명 됨으로써 보이보디나에는 한때 수많은 독일인이 거주했다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는 종전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고, 이탈리아로부터 남슬라브계가 주류인 몇몇 영토를 할양받았다. 추축국에 삼분할 되었던 보이보디나 지역 또한 유고슬라비아에 반환 되었다. 국토를 수복한 티토는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정체에 각 민족을 대표하는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로 재건했다. 헝가리계를 비롯한 여러 민족이 살아가는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는 비록 별개의 공화국을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소속된 자치주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냉전의 끝무렵, 유고 내전을 거치고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한 지금까지도,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세르비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경제[편집]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판노니아 분지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있다. 비옥한 평야지대에 더하여 다뉴브 강 및 다뉴브 강의 주요지류인 티서 강, 사바 강 등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수자원도 풍부하여 농업에 유리한 환경이다. 유고슬라비아 건국 이전 헝가리 왕국 시절에서부터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보이보디나를 점령한 유고슬라비아가 헝가리로 곡물유출을 차단하면서 헝가리가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보이보디나 지역은 여전히 세르비아의 곡창지대이다.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코소보를 제외한 세르비아 전체와 대비하여 인구와 면적에서 약 27% 정도를 차지한다. 하지만 농업생산량에서의 비중은 세르비아 전체 대비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수도인 베오그라드와도 인접하여 있으며, 무엇보다도 세르비아의 주요교역대상인 EU 및 서방국가들로 향하는 관문이어서 입지적인 조건이 우수한 편이다. 이밖에도 교육이나 교통 등의 인프라도 잘 갖춰진 편이다. 수도 베오그라드 정도를 제외한 다뉴브강 이남의 세르비아 중남부 지역에서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발달하는데 비하여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는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부품, 섬유 및 석유화학, 정유, 금융, ICT 산업에 외국인투자가 활발하다. 주요 외국인투자는 인접한 서방국가들이나 미국 등이 있다. 특히 2010년에는 보이보디나 ICT 클러스터가 조성되어 세르비아의 첨단 및 통신 기술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이 밖에도 건설, 제약, 금속가공 등의 산업이 발달해있다.

주민[편집]

보이보디나에서 비중이 큰 민족은 세르비아인(65%)과 헝가리인(14%)이다. 그 밖에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불가리아인, 몬테네그로인, 루마니아인, 롬족 등 여러 민족이 거주한다.

공용어는 세르비아어, 헝가리어, 슬로바키아어, 루마니아어, 크로아티아어, 판노니아 루신어 등 6개이다. 이 중 세르비아어 사용 인구가 76.6%로 가장 많고, 헝가리어 사용 인구가 14%로 두 번째로 많다. 그 밖에 슬로바키아어(2.7%), 루마니아어(1.45%), 롬어(1.08%), 크로아티아어(1.04%) 등도 쓰인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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