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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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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지방

삼남지방(三南地方)은 대한민국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함께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1]

개요[편집]

삼남지방은 전통적인 한국 남부의 범위와 거의 겹친다. 옛날에는 많이 사용되던 말이었지만, 남북 분단 이후에는 삼남 지방이 실질적 국토의 70%을 차지하게 돼버리다 보니 너무 비중이 커져서 현재는 잘 쓰이지 않고, 대신 각 도를 따로따로 부르는 경향이 강해졌다. 또는 수도권 집중화 때문에 그냥 강원도와 제주도까지 포함해서 지방이라 부른다. 비슷한 개념으로 조선시대에도 이 세 개 도를 싸잡아 '하삼도(下三道)'라고 불렀다. 한편 그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묶어 "양남(兩南)[2]"이라 부르거나, 충청도와 전라도를 함께 묶어 "양호(兩湖)"라 부르기도 한다. 반대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를 묶어 '북삼도(北三道)'라고 불렀다. 하지만 왠지 남삼도(南三道), 상삼도(上三道), 삼북(三北)이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시대, 한국전쟁기까지 유구한 세월 동안 한국사 정부에 인력을 공급한 지역이기도 하다. 아래의 예시처럼 농사가 잘 되고 인구 부양력이 타 지역에 비해서 높았기 때문이다. 생산력 기준으로 북부와 중부에서 하삼도에 견줄만한 지역은 단언컨대 없다. 특히 북삼도의 경우 하삼도 못지않게 평야도 넓고 땅이 비옥하지만 기후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농업 생산력이 하삼도보다 부족했기에 무역과 수렵을 병행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삼도는 전쟁이 발발하면 최우선적인 병력동원처였다. 임진왜란이 7년 동안이나 질질 끌었던 이유는 주요 병력동원처인 하삼도가 전장이 되면서 조선 정부의 주요 병력 동원 능력이 박살 나다시피 해서 그렇다. 점차 복구하여 17만 병력을 뽑아내지만, 확실히 고려 때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수십만씩 동원하던 고려 정부와 비교하면 맥이 빠지는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삼도가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어떻게든 병력을 동원하고 향토방위와 행정 복구에 성공했던 것도 조선 정부의 능력이기도 하다.[1]

역사[편집]

삼남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종 때부터 하삼도에 대한 논의가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방행정구역이 체계를 잡은 조선 초기 태종 때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삼남지방을 동북 면(東北面)이나 서북면(西北面)과 같이 하나의 지역 단위로 보는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방위상의 개념에서 나왔다. 조선시대 삼남지방은 농업ㆍ조운(漕運)ㆍ군사적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가졌다. 삼남지방에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조정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자주 논의하였던 기록이 많이 나온다. 17세기 후반의 조운에 있어서 삼남지방이 전국의 87%를 차지하였는데, 마산창(馬山倉)ㆍ법성창(法聖倉)ㆍ공진창(貢進倉) 등 이름 있는 해창(海倉)을 통하여 이들 세곡을 운반하였으므로 세곡 운반에 대한 규정이 엄하였다. 대원군 때 양요(洋擾)로 인하여 한강의 뱃길이 막혔을 때 서울에서 쌀값 폭동과 주민들의 미전(米廛) 습격 사건이 일어난 예로 미루어, 삼남지방이 차지하는 조운의 비중을 알 수 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삼남지방은 일찍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아, 특히 수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방비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후 삼도수군 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을 설치하여 지휘 계통을 원활히 하였으며, 고종 때는 삼도 육군 통제사영이 설치되었으나 뒤에 폐쇄되었다. 고려 말기 왜구의 준동을 제압한 뒤 조선 초기에는 북방 개척에 힘썼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삼남지방에 대한 국방을 강화하였다. 이는 봉수망(烽燧網) 설치에 있어 조선 초기 북쪽의 국경 지대에 설치하였던 봉수대의 수가 17세기 이후 감소된 반면 삼남지방에는 늘어났다는 것과, 17세기 이후 삼남지방의 수군만호(水軍萬戶)나 독진(獨鎭)의 수가 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2]

정치[편집]

삼남지방은 현대 정치적으로는 가끔 언급되기도 하는데, 한국이 서울을 비롯한 중앙 집권이라고는 하지만 그 권력자와 정치 세력들이 대부분 삼남 출신이어서 그렇다. 당장 대통령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실제로 권력도 없었던 윤보선, 최규하, 20대 대통령 윤석열을 제외하면 대통령들이 전부 경상도 전라도 출신이고, 그 외의 정치 세력으로도 김종필이 이끈 충청도 역시 영남 호남에 비하면 약하다 해도 정치적 파워는 강했다. 이를 두고 권력의 장소는 한가운데 세워놓고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정치 세력은 거의 삼남 지역이었다. 과거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전두환, 노태우)의 경상북도, 김영삼경상남도, 김대중전라남도, 이철승전라북도, 김종필충청도는 정치계에서 가장 유명한 5세력이었다. 후에 경북이 김영삼, 이회창 세력으로 들어가고 충청이 김대중 세력으로 들어가며 예전보단 덜해졌지만, 여전히 영남(경상도)과 호남(전라도)은 선거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도 사실 삼남에 양반이 많았고 지금의 이남 지역이 정치의 중심이였다. 역사학계에서 유교 철학에 따라 영남학파와 기호(경기, 충청권) 학파로 나누기도 하고 붕당정치의 시작인 동인 서인에도 영남학파, 기호학파가 관련 있다. 호남과 강원 남부 또한 기호나 영남만큼 두드러진 카르텔을 형성하진 못했지만 꾸준히 정승을 비롯한 당상관급 관료를 배출하며 조정의 한자리는 차지했다. 반면 이북 지역은 조선 내내 정계에서 철저히 소외받았다. 실제로 이성계가 동북 출신이라 서북 출신은 등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적도 있고 이성계의 고향 동북 역시도 15세기 연이은 반란으로 풍패지향임에도 반역향으로 차별받게 된다. 이북 지역에 대한 차별이 조선 후기까지 계속 이어져 홍경래의 난까지 일어난다. 다만 구한말에 들어서면 이북에서도 인사 등용이 활발히 이루어지긴 한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삼남 지방 양반들의 농민 학대가 매우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

관련 기사[편집]

조선 시대에는 한양에서 전국으로 향하던 간선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6개 방향으로 뻗었던 대로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이 가운데 한양에서 남부 지방으로 향하던 대로는 삼남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3개 지방을 향하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삼남 대로라 불리기도 했던 삼남로는 조선 시대 6대대로 중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 지방이었던 1,000리에 달하는 긴 길을 '삼남 대로'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이었으며, 과거를 보러 가던 젊은 선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삼남 지방의 풍부한 물산도 이 길을 오갔다. 또한 이 길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현륭원으로 행차하던 길이며, 이순신 장군이 전라 좌수영으로 부임하던 길이고, 삼봉 정도전,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떠났던 길이며,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던 길이기도 하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이 길이 경기 옛길 삼남길로 근래에 다시 조명되고 있다. 삼남대로의 옛 노선을 연구 고증하고, 그 원형을 최대한 따르면서 고속도로 등으로 단절된 구간, 도보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간 등에 대해 대체로를 개척하여 조성한 역사문화 탐방로이다. 평택에서 시작하여 오산, 화성, 수원, 의왕, 안양을 거쳐 과천으로 이어지는 약 100km의 구간이 조성되어 있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1.0 1.1 1.2 삼남〉, 《나무위키》
  2. 삼남지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유시문 기자,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20〉, 《한국역사문화신문》, 2022-07-08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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