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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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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우물은 땅속의 물을 퍼서 쓰려고 마련한 시설이다. 우물의 본딧말은 '움물'이며, 이는 '움에서 솟아오르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 뒤 '움'의 'ㅁ'이 떨어져 나가서 오늘날의 우물이 되었다.

개요[편집]

  • 우물은 물을 얻기 위하여 땅을 파고 물이 괴게 만든 시설이다. 우물 속의 물은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든 뒤 지하수가 흙과 바위 사이에 고인 것이다. 우물은 토양으로 여과된 물이므로 수질이 좋은 편이나 깨끗한 곳에 자리 잡아야 하고, 땅 위에 있는 물이 우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1]
  • 우물은 음료수를 얻기 위하여 땅을 파서 지하수를 괴게 한 설비이다. 맨땅을 깊거나 얕게 파서 물이 괴게 하는 토정(土井)과 바위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괴게 하는 석정(石井)이 있다. 석정은 바위를 옴폭하게 파서 만든 것과 그 위에 다시 시설을 첨가하여 완성하는 것이 있다. 솟아서 괴는 물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물홈을 판 수통[椧]을 설치하는 상수도시설을 하여서 골짜기 아래의 절이나 정자, 살림집들에 급수할 수 있게 한다. 맨땅을 파서 깊이 만들었을 때에는 물기를 머금은 우물벽이 무너질 염려가 있으므로 통나무(椿木)를 둘레에 촘촘히 박아 방지한다. 우물은 물맛이 좋고, 시원하고 차며, 우물돌의 시설이나 주변 정리 등이 일품이다.[2]
  • 우물은 상수도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수맥을 찾아 땅을 파서 지하수를 지상에 노출시킨 시설이다. 우물 이전에는 흐르는 강의 물을 사용했지만 강물은 강수량에 영향을 받으며 상류에서 발생하는 오염에도 취약해서 안정적으로 식수를 얻기가 어려웠다. 우물을 얻는 궁극적인 목적이 식수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아주 중요한 시설이었다. 물 자체가 지하수다 보니 우물물은 상대적으로 미네랄 함량이 높은 센물인 경우가 많다. 우물을 뜻하는 한자 우물 정(井)은 귀틀을 두른 우물을 위에서 본 모습을 본뜬 한자다. 벽화에 그려져 있는 지레의 원리를 이용한 장치는 한자로는 길고(桔槹), 우리말로는 두레박틀, 방아두레라고 한다.[3]
  • 우물은 지하수를 퍼올리기 위하여 지면을 수직으로 파놓거나 관을 세로 방향으로 박아 넣은 설비를 말하는데 인구의 증대와 함께 자연수가 부족한 지방에서는 땅을 파 내려가서 지하수를 이용하는 우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음료수와 가정 잡용수는 거의 우물물을 사용하였으며, 전답관개에서도 주로 우물물에 의존하였다. 근대화와 함께 공업성장으로 각종 공업용수도 초기에는 거의 지하수에 의존하여 우물파기가 성행하였다. 근래에 와서 도시화에 따라 많은 고층건물이 건설되고 있는데, 그 잡용수 ·냉방용수도 지하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가지 및 공장지역에서는 지하수가 점차 고갈되고, 나아가서는 지반침하(地盤沈下)가 발생하여 교통이나 환경위생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외국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물에서 천연가스를 대량으로 채취하고 있는 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4]

우물의 종류[편집]

  • 우물은 지하수의 상태에 따라 보통우물과 자분정(自噴井:artesian well)으로 분류된다. 지표면 아래에 점토와 같은 불투수성(不透水性) 지층이 있으면 그 위에 지하수가 괴는데, 이것은 흙의 빈틈을 통해서 대기에 접하고 있으므로 자유수면을 가진 지하수라고 한다. 이 지하수를 퍼 올리는 우물이 보통우물이다. 보통우물은 다시 깊은우물과 얕은우물로 구별된다.
  • 지표면에서 지하의 자유수면까지 파내려가 우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물을 퍼올리는 우물이 얕은 우물(7m 이내)이고, 지하수층을 더욱 파내려가서 불투수층까지 도달하여 우물 주위에서 물을 집수(集水)하는 우물이 깊은 우물(7m 이상)이다.
  • 지하의 점토층 아래에는 다시 모래자갈층 등의 투수층(透水層)이 있는데, 이들의 지층이 몇 층으로 호층(互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많다. 이 불투수층 사이에 놓인 투수층에는 지하수가 괴고, 그 물이 유입하는 수원이 높은 곳에 있으면 그만큼의 수압을 받고 있으므로 피압지하수(被壓地下水)라고 한다. 피압지하수를 취수(取水)하기 위하여 불투수층을 꿰뚫어서 굴착한 우물이 자분정이다. 그 수압에 따라서는 지표면까지 물이 분출하는 자분정도 있다. 또 우물은 구조상 통우물과 관우물로 나누어진다. 대체로 보통우물은 통우물구조이고 자분정은 관우물구조이다. 통우물은 굴착정이라고도 한다.

굴착 방법에 따른 구분[편집]

  • 인력관정(dug well) : 사람의 힘이나 굴착 기계로 파여 있으며 보통 지름 60 센티미터가 넘는 우물이다.
  • 타설관정 (driven well) : 굴착기계, 오우거, 제트 기계를 쓰지 않고 아래가 날카롭게 되어 있는 관을 타설하여 만든 지하수 우물이다.
  • 천공정 (drilled water) : 구멍을 뚫는 데 이용하는 우물이다.

우물의 수질[편집]

  • 지하수가 투과하는 사력층(砂礫層)은 물을 여과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물물은 완속여과를 한 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질은 일반적으로 양호하고, 또한 다소의 무기질이 용해되어 있으므로 음료로서 맛이 있을 뿐 아니라, 지하 10 m를 초과하는 지하수의 수온은 연중(年中) 거의 일정하므로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 얕은 우물은 변소 또는 가축으로부터의 오물 등에 오염되는 위험성이 있고, 종종 전염병 집단발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음료수에는 염소살균을 실시한다. 또한 지층의 성질에 따라 철분을 용해하고 있는 우물물이 있는데, 포기(曝氣)로 제거하여야 한다. 또 칼슘 등의 염류가 많은 물을 경수(硬水)라고 하는데, 음료 등으로는 지장이 많다. 우물물의 수질을 검사하려면 그 지역의 보건복지부 당국의 연구소에 의뢰하면 되지만, 직접 검사하기 위한 검사용수의 채취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의 우물[편집]

종친부 터 우물(宗親府 터 우물)[편집]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기무사(機務司)에 있는 조선시대의 우물이다. 200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인 1900년대 초에 우물은 서울의 생활용수(生活用水)와 음수(飮水)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이 우물은 조선시대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보물)이 있던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우물의 크기는 높이 34㎝, 지름 182㎝, 두께 30㎝이다.
  • 우물은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圓形)으로 이어 붙이고, 내부는 자연석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들었다. 이 우물은 원래의 형태가 아니고 1984년에 기무사에서 뜰 공사 도중 땅속에서 우물돌을 발견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 새로 조성한 것이다. 우물 밖에 놓여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구조물 1점이 지금은 이 우물 내부에 놓여 있다. 이 우물과 같이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인 비슷한 형태의 우물은 창경궁(사적)과 운현궁(사적) 이로당(二老堂) 후원에도 있다.
  • 이 우물은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져 내부의 원형은 잃어버렸으나 표면 풍화상태로 보아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이 있는 곳이 경복궁(景福宮) 동편의 역대 관청 건물지인 것으로 보아 조선 관청의 우물 형태를 보여준다.

부여 용당리 우물[扶餘 龍塘里 우물][편집]

  •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용당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우물. 2004년 4월 1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백제왕실 부여씨의 후손인 부여서씨가 거주한 지역으로 알려진 구룡면 용당4리 속칭 부두마을에 있다.
  • 예로부터 일만호(一萬戶)의 인구가 사용했다 하여 일만호 혹은 만가대(萬家垈)라 불렸다고 한다. 매우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로 축조했으며, 지상부는 4개의 판석으로 만든 ‘정(井)’자형으로 한 변의 길이는 1.8m·높이는 45cm이고, 지하부는 팔각형으로 쌓았다.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에서 발견된 우물과 흡사한 구조로, 백제 시대 우물의 형식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증평 사곡리 우물[曾坪 射谷里 井][편집]

  •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사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마을 공동우물이다. 2008년 8월 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456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마을 공동우물로, 일명 '말세우물'이라고 한다.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사곡리 사청마을에 있다. 버드나무로 6각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위에 석축을 쌓아 올린 형태로 조선시대 우물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직경 1.4m, 깊이 5.4m, 수심 2.8m 규모인데 일반 우물보다 1.5배 정도 크다. 1947년 우물 하부의 석축 일부를 보수하였으며 1996년 목재 귀틀난간을 대리석으로 교체하고 우물 옆에 유래비를 세웠다.
  • 우물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노승이 마을을 지나다 한 집에 들러 물을 청했는데 그 집 아낙이 20리가 넘는 길을 오가며 물을 떠다 주었다. 이에 노승이 아낙의 노고에 보답하여 우물터를 찾아주면서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닥쳐도 물이 늘지 않지만 꼭 세 번 넘칠 것이오. 우물이 넘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나는데 세 번째 넘치는 날에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니 그때는 마을을 떠나시오.'라고 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한다. 이 전설로 인해 '말세우물'로 불리는 이 우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와 1910년 경술국치, 1950년 6·25전쟁 때 나라의 위기를 알렸다 한다.

용동 큰우물[龍洞 큰우물][편집]

  •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조선 후기 우물. 1996년 6월 12일 인천광역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자연 연못으로 수량이 많고 물 맛도 좋아 식수로 이용되어왔다. 그후 1883년 제물포구를 기점으로 한 인천의 개항과 함께 현재와 같은 우물로 만들어졌다.
  • 내부는 자연석과 가공된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들었고 지상에 드러난 부분은 원형의 콘크리트 관으로 마감하였다. 1967년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한식 기와 지붕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하였고 현판은 인천 출신의 서예가 박세림(朴世霖)이 썼다. 이 주변을 큰 우물 거리라고 부르며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용동 일대의 상수원이었다.

관련 기사[편집]

  • 예로부터 마을은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사람들은 맑은 물이 샘솟는 곳을 찾아 삼삼오오 정착한다(往來井井). 그 로직은 현대서도 통한다. 도시는 을 끼고 발전한다. 윤여정 조연의 영화 미나리를 기억하시는가. 불타 없어진 집, 그런데도 떠나려던 가족을 다시 부른 건 역시 물이었다. 우물이 마르면 사람은 떠난다. 버려진 우물에는 날짐승도 모여들지 않는다(舊井无禽). 우물은 그런 존재다. 모두 협심해 잘 지켜야 한다. 그렇게 우물 공동체가 형성된다. 우물을 보면 동네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잘 되는 마을의 우물 주변은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런 동네 주민은 자신이 쓴 뒤 깨끗하게 정리하고 우물을 떠난다. 혹 물이 부족하면 혼자 먹겠다고 다 퍼가지도 않는다. 나누고, 배려해야 항상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걸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孔子)는 그래서 '우물은 덕을 쌓는 곳(井, 德之地也)'이라고 했다. 주역의 '우물 철학'을 그대로 가져와 도덕으로 발전시켰다.[5]
  • 우리고장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 송정마을에 매우 의미있는 우물이 전해온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송정마을에 세웠던 동명학교터 우물이다. 송정마을 우물이 위치한 곳은 '들밑'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산 아래 골짜기다. 우물 뒤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넘어가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가 있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각자들은 전국 곳곳에 많은 학교를 설립했다. 이 시기에 우리 홍성에도 지역유지들의 노력으로 크고 작은 학교가 여러 곳에 세워졌다. 홍성지역에는 개화기를 전후하여 팔명학교(八明學校)가 있었다고 한다. '명(明)'자 돌림의 이름을 붙인 학교가 여덟 곳에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옛날 모습이 남아있는 것은 우물뿐이다. 옛 시절 송정마을 우물은 마을사람들이 모두 사용하던 공동우물이었다. 동명학교 학생들도 이 우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쉬는 시간이나 청소시간이면 쪼르르 달려 나와 우물물을 퍼 올리던 학생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주변을 뒤덮었을 것이다. 지금은 산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2017년에는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방치되다시피 하던 우물을 복원했다. 우물에 지붕도 해놓았고 두레박도 만들어놓았다. 등산로를 오가는 길손들이 마음 놓고 사용하며 갈증을 해소하라는 배려이다.[6]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우물〉, 《위키백과》
  2. 우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우물〉, 《나무위키》
  4. 우물(well)〉, 《두산백과》
  5. 한우덕 기자, 〈'수풍정(水風井)'-우물을 지켜라!〉, 《중앙일보》, 2021-10-20
  6. 민족혼 일깨워 주던 동명학교터 우물〉, 《홍성신문》, 2021-07-2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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