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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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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
시인 윤동주
윤동주 생가 입구
윤동주 생가 비석
윤동주 생가 내부
윤동주 년보
명동학교
윤동주 생평전시관

윤동주 생가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로 유명한 우리민족의 시인 윤동주의 생가이다. 중국 지린성 옌벤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있다. 윤동주 생가에서 100여미터 거리에 있는 민족정신을 구현하던 명동학교 옛터가 있다.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불과하고, 공부나 시도 생활이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한 바가 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서시>의 구절처럼, 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윤동주생가는 1981년 무렵 허물어지게 된 것을 1993년 용정시에서 관광지역으로 지정하여 복원해 놓았다.

명동촌[편집]

명동촌 마을은 앞이 훤히 트인 곳으로 끝없는 논밭이 이어져 있었고 더 멀리는 약간 경사진 구릉지였다. 이 마을은 조선 회룡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과 지신진 두 개의 지역의 경계지역으로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명동(明東)이란 이름은 "조선을 밝게 하자"는 뜻으로 1881년 청나라 정부에서 연변에 대한 통금령을 해제한 뒤 조선이주민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전주 김씨 31명, 김하규를 중심으로 한 김해김씨 63명, 문병규를 중심으로 한 문씨 가문 40명, 남종구씨 외 7명과 토지 구입 등으로 먼저 와 있던 김항덕 씨 등 모두 142명이 초기에 정착하여 조선족 마을로 형성된 곳이다. 이곳에 윤동주의 할아버지인 윤하연 일가 18명이 정착하게 되어 윤동주는 이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게 된다.

윤동주 시인[편집]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명동학교[편집]

명동학교는 1911년 여학부를 설치하고 연변에서 처음으로 근대여자교육을 했다. 당시 명동촌을 일군 사람들은 구한말 조선의 실학파들로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글을 모르면 남에게 천시당한다"는 생각으로 자녀들 교육에 힘썼다. 그래서 초기에 이들은 집단으로 구입한 토지 가운데 양지바르고 좋은 땅의 10분의 1을 학교부지로 내놓아 이곳에 명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명동학교는 1906년 용정에 설립되었던 서전서숙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1908년 4월 27일 명동촌 일대 여러 서당들을 통합하여 세운 근대 민족적 교육기관이다. 명동학교는 조선족 청소년들에게 근대지식의 전수와 더불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교육시켜 그들로 하여금 문무를 겸비한 우수한 민족의 인재로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 된 학교다. 이 무렵 연변 각지에는 연변을 항일기지로 삼고자 각 곳에 사립학교를 세우게 되는데 창동학원, 정동중학, 길동학교 등이 당시 연변지역의 명망 높은 항일학교였다. 그러나 1907년 일제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두어 당시 용정 일대에 많은 조선인 학교들을 감시하고 폐교 시키는 일을 자행했다. 서전서숙 등 당시 민족교육에 힘쓰던 학교들이 속속들이 폐교하는 운명을 맞이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후 명동촌은 간도국민회건립 이후 남부총회의 본부가 되었으며 명동학교는 총회본부사무실로 활용하였다. 총회에서는 <독립신문>. <우리들의 편지>를 발간하였고 <청년>, <자유의 종>등의 신문도 만들어 민중들에게 항일 민족 사상을 드높이게 하였다.

명동교회[편집]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산파 역할을 한 명동교회는 '명동역사전시관'으로 바뀌어 선조들이 남긴 자취를 더듬고 있다. 1909년 명동교회가 설립되자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교회의 장로가 됐다. 집 바로 옆에 있는 명동교회는 소년 윤동주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교회를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윤동주는 신앙의 힘을 체득했다. 신앙을 통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너머를 바라보는 초월적 시선을 갖지 못했다면 윤동주의 시가 그토록 영롱하고 아름답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재 윤동주 생가를 관리하 고 있는 송길연(63) 전 명동촌장은 "일본군은 독립의지를 고취하는 명동학교에 세 차례나 불을 지를 정도로 이곳을 눈엣가시로 여겼다"며 "명동학교 졸업생의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시중학교에 편입한 윤동주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것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6개월 뒤 교토 도시샤대문학부로 전학했다.

물론 그가 일본으로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의 넉넉한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지주 자식들이 일반적으로 택했던 일본과의 '타협의 길' 대신 민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고난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투쟁의 전면에서 일제에 맞선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도덕적 양심을 행동의 첫 번째 준거로 삼고 암흑의 시대를 헤쳐가고자 했다. 윤동주가 사상범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 역시 일제가 윤동주의 시에서 불온한 희망과 상상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관람[편집]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은 용정시에서 차로 10여 분가량 이동해야 한다. 마을 초입에는 '윤동주 생가'라고 써 있는 큰 비석과 '시인의 고향(詩人的故鄕)'이라 적힌 팻말이 있다. 바로 이 곳에서부터 윤동주가 나고 자란 명동촌이 시작된다. 마을 안쪽으로는 예스러운 풍경을 간직한 기와집들이 곳곳에 보였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이곳은 조선인들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한족들도 많이 섞여 들어온 상태다. 일부 집에는 농사를 짓다가 방치한 옥수숫대들이 우거지게 자라 있었다.

윤동주 생가는 마을 어귀를 따라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입구에는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 적혀 있다. 윤동주의 집은 명동촌으로 이주 온 조선인 중에서도 부유한 편에 속했다. 윤동주의 친동생인 고 윤일주 성균관대 교수는 윤동주 생가에 대해 그의 저서 《윤동주의 생애》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 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株)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윤동주의 생가 안쪽은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와 윤동주 전시관, 실제 복원한 생가, 예배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지나가는 길 곳곳에 그의 시를 새긴 돌비석들이 있다. 각각의 시는 중국어로 번역돼 있어, 중국인 관광객들이 올 때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예배당 안쪽에는 가곡 《선구자》의 노랫말이 적힌 액자가 보였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해란강'은 바로 룽징에 흐르는 강이다.

윤동주의 실제 생가는 전시관 가장 안쪽에 있다. 생가 안에는 윤동주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방명록에는 다녀간 이들이 남겨 놓은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다.

  • 입장료 : 30위안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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