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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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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
상원사 동종
용주사 동종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옛 보신각 동종

(鐘, bell)은 금속을 이용해 만들며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타악기이다.

종의 용도는 악종(樂鐘)·시종(時鐘)·경종(警鐘)·범종(梵鐘) 등으로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종의 형태는 중국의 종탁형(鐘檡型), 서양의 벨형(型), 사찰의 범종형(梵鐘型) 등이 있다. 또 항아리형, 판상(板狀)의 경쇠형(磬型), 징 모양의 동라형(銅鑼型), 동라보다 종구(鐘口)가 좁은 금고형(金鼓型) 등 다종다양하다. 타종하는 데는 서양의 종은 종신(鐘身) 내부에 추를 매달아 종 전체를 흔들어 소리를 내게 하는 내타식(內打式)이며, 동양의 종은 종신 표면에 당좌(撞座)가 만들어져 당목(撞木)으로 쳐서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은대(殷代) 말기부터 동종(銅鐘)이 제작되었으나 이것은 제사에 쓰이는 중요한 소리체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러다가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사찰에서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종교적 기능과 일정한 시각과 목적을 알리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범종은 종두(鐘頭)에 용(甬)이라는 꼭지가 붙었고 후에 이것이 고리[鐶]로 바뀌었다. 서양에서는 신앙의 주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종소리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교회 건물에 높은 종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반드시 종을 메달아 먼곳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악종은 그 후 다시 시각을 알리는 실용적인 시종으로 바뀌었으며 도시의 중심부에 설치하여 시각과 신호를 전달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종의 용도와 목적이 기능적인 요소를 넘어 뛰어난 공예로서 발전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유명한 종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종은 러시아 크렘린에 전시된 중량 201톤의 차르 종이 차지했다. 여담이지만, 영국 런던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빅벤은 본래 시계탑 내부에 붙은 커다란 종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편의점 등 가게의 문에도 대부분 달려있다. 문이 움직이면 종이 흔들려 울리게 되어 손님이 들어가거나 나간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철도 건널목에서도 종을 사용 중이다. 현재는 전자음으로 바뀌는 추세지만, 아직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골 등지 또는 일본의 지방사철의 건널목에서는 전자종이 널리 쓰이고 있다.

개요[편집]

종은 금속음을 이용한 소리체이다.

악종(樂鐘)·시종(時鐘)·경종(警鐘)·범종(梵鐘) 등 그 범위가 넓다. 그러나 한국 민족문화의 소산물로서 종이라 일컬을 때에는 범종을 말한다. 범종은 일반적으로 동종(銅鐘)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중국과 같은 나라는 철제종(鐵製鐘)이 많은 데 비하여 한국은 모두 청동(靑銅)으로 주조하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범종이 주종을 이루지만 종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고금악록 古今樂錄≫을 보면 여섯 가지로 나타난다. "무릇 쇠로 만든 악기가 여섯이 있는데 모두 종에 속한다. 종(鐘)·순(錞)·탁(鐲)·박(鎛)·요(鐃)·탁(鐸)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편종(編鐘)·특종(特鐘)·영(鈴) 등을 더 포함시킬 수 있다. 이것을 편의상 다음의 셋으로 나누어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살펴본다. ① 방울: 큰방울(鐸)·작은방울(鈴), ② 범종(梵鍾), ③ 악종(樂鐘):편종·특종·순·요·박·탁·탁·경(磬).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일찍 선을 보인 것은 큰 방울(鐸)이다. 1960년대 초에 대전 괴정동에서 동(銅)으로 만들어진 큰 방울이 거울·칼과 함께 발굴되었다. 그것의 제작연대는 서기전 4세기로 추정되어 청동기시대 이후에도 큰 방울이 줄곧 만들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방울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서(史書)인 ≪삼국지≫·≪후한서≫·≪진서≫ 등의 <마한전> 에 방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들 사서에는 다같이 "마한의 각 고을에는 소도(蘇塗)라는 것이 있는데, 그곳에는 큰 나무를 세워두고 그 위에다 작은 방울(鈴)과 북을 달아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지≫ 마한조에는 "마한 사람들은 5월에 파종을 마치고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으면서 춤을 춘다. 그런데 그 춤추는 모습이 흡사 큰 방울을 흔들면서 추는 탁무(鐸舞)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남의 역사책에 작은 방울과 큰 방울에 관한 기록이 약간 비치고 있다.

그런데 큰 방울이 출토된 대전 땅은 후에 마한의 한 지역이 되었다. 바로 그 땅에서 제사가 행하여지고 방울을 흔들면서 춤추는 잔치와 굿이 벌어졌던 것이다. 중국 역사책에는 북쪽 땅인 예(濊)·부여·고구려 등 여러 부족들의 제사에 관한 기록도 있지만 아쉽게도 방울에 대한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소도는 물론 신이 내리고 오르는 신역(神域)이요 제단이며, 거기에 세워진 나무는 신간(神杆 또는 神竿)의 성격을 가진 성물(聖物)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르내리는 신은 그 땅의 부족들의 생명과 재산과 풍요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다.

그러므로 파종을 마친 5월이나 가을 추수기에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잔치도 있게 되고, 사람과 귀신 사이에 굿판도 벌어졌다. 그런데 사람과 귀신 사이에 벌어진 굿판에는 귀신을 즐겁게 만들고 달래는 일이 큰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노래와 춤이 동원되고 그 굿판을 흥분과 황홀경에 젖어들게 함으로써 귀신을 움직이기 위하여서는 악기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방울과 북이었다. 악기가 사람과 귀신을 흥분시키고 움직이게 하며, 나아가서는 자연현상까지 변화하게 하는 성구(聖具)라는 믿음은 우리 민족에게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적을 물리치고 병을 낫게 하고 비를 오게도 하고 개게도 하며, 파도를 잠재우기도 하였던 <만파식적설화 萬波息笛說話>는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무교(巫敎)를 절대시하고 그 밑에서 집단을 영위하였던 원시인들로서는 굿이 최대의 행사였다. 그러기에 동(銅)을 다룰 수 있는 문화가 열리게 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신과 관련된 방울·칼·거울 등의 성구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대전 괴정동에서 방울·칼·거울 등이 함께 출토된 것도 흥미롭지만 오늘날까지도 무당의 춤에 방울·칼·거울이 가장 귀중한 무구로 사용되고 있음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무당춤에 사용되는 방울은 대개 일곱 개를 짧은 막대기에다 매달아 흔드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칠금령(七金鈴)이라 한다. 그리고 방울은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박수의 경우 방울을 쳐서 소리를 내면서 독경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불교의 독경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방울은 서기전 4세기부터 출현하여 무교에서 성구로 여겨져 왔다. 그것이 또 오늘날의 무당굿에 이어진 것이다. 결국 방울은 무교문화(巫敎文化)의 상징물이다. 그 방울소리는 신의 음성이기도 하고 신을 즐겁게 만드는 악기이기도 하며, 악신(惡神)을 몰아내고 선신(善神)을 맞아들이는 성구였던 것이다.

범종은 방울보다 늦게 등장하였다. 최초의 범종은 상원사동종으로 보고되었는데, 이것은 725년(성덕왕 24)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46년 뒤인 771년(혜공왕 7)에는 사상 최대의 걸작인 성덕대왕신종이 탄생하였다.

방울이 무교의 상징물이라면 범종은 불교의 상징물이다. 그리고 방울이 씨족이나 부족집단의 산물이라면 범종은 강력한 왕권전제국가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그 크기에 있어서도 종은 방울과는 비교도 안되게 우람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상징적 의미도 훨씬 심원하고 철학적이다.

그렇다면 종과 종소리가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서는 성덕대왕신종명의 머리글이 좋은 시사를 주고 있다.

"지도(至道)는 형상 밖에 포함되어 있어 그것을 보려 하여도 그 대원(大原)은 볼 수 없고, 대음(大音)은 천지에 진동하나 그것을 들으려 하여도 들을 수가 없다. 그러한 까닭에 가설(假說)을 의지하여 삼진(三眞)의 오(奧)를 보고, 신종(神鐘)을 걸어서 일승(一乘)의 원음을 깨닫는다." 실로 범종은 지도와 대음을 깨닫게 하는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종명(鐘銘)은 지도나 대음은 지극히 높고 깊어서 깨달을 수도 들을 수도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그것은 가설이나 종소리를 통하면 깨달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종소리를 통하여 어떻게 그것을 깨달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종소리와 대음을 상대적이거나 직선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포괄적이요 둥근 고리(環) 관계에서 파악하면 가능하여지는 것이다.

종소리와 대음을 직선적인 관계에서 보면 서로가 연관이 없는 별개의 것으로 느껴지지만, 양자를 둥근 고리 관계로 묶어서 생각하게 되면 그 양자는 둘인 듯하면서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인 듯하면서도 둘로 모습을 드러낸다. 곧, 대음 없이는 종소리도 있을 수 없지만 종소리가 없다면 대음도 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리 관계에서는 한 쪽만 잘 파악하면 다른 한 쪽은 저절로 파악된다. 곧, 종소리만 잘 들을 줄 알면 대음은 저절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종명의 논리요, 종을 만들어서 걸게 된 이유이다.

범종은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종을 만들어서 부처님의 진리나 자비를 담아서 온 누리에 퍼지게도 하고,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왕(大王)의 공덕과 위업을 종에다 담아 그것을 국토에 퍼지게 하여 호국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중생들은 부처에게 종을 만들어 시주함으로써 소원을 빌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종소리야말로 높은 세계의 뜻을 아래로 하달할 수도 있고, 아래 세계의 뜻을 높은 세계로 상달할 수도 있는 신구(神具)였던 것이다.

그러면 종명을 통하여 그러한 모습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부처님의 진리와 자비를 담아서 호국사상을 고취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연복사종명(演福寺鐘銘)이 좋은 예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말씀은 심히 깊도다. 지하에는 지옥이 있어 침침하여 만생만사(萬生萬死)의 고난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취한 듯 꿈꾸는 듯 귀가 먹은 듯 벙어리가 된 듯하네. 한 번 종소리를 들으니 모두가 마음을 깨고 왕성(王城)이 연복(演福)으로 가득하네. 한 번 종이 울리니 남염(南閻)에 진동하고 하늘에 솟구치고 유음(幽陰)에 스미니 모두가 복을 받아 천자는 만년토록 다수남(多壽男)하고 나라는 국위를 펼치도다."

둘째는 대왕의 공덕을 종에다 담아서 호국을 꾀하려는 경우이다. 이것은 앞에 선보인 성덕대왕신종명을 들 수 있다. "이 종소리로 인하여 나라에는 충신이나 어진 이가 등용되고, 예(禮)와 악(樂)을 숭상하여 농사에 힘쓰고, 사치가 없으며 태평성대하고 평화로운 정치가 행하여질 것이다." 성덕왕은 실제로 치적이 탁월한 대왕이었다. 그러므로 대왕의 공덕과 위업을 종에 담아서 영원히 그것이 나라와 민족에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셋째는 일반 중생들이 종을 만들어서 발원한 것이 있다. 여기에는 특별히 종명은 없으나 종을 주조한 날짜와 근량(斤量), 그리고 발원자(發願者)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이것도 종에다 발원을 담아서 종을 치게 되면 그 발원이 부처에게 상달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범종의 수는 고려 말기까지의 것으로 대략 40여 개가 있는데, 대개 이러한 발원을 담은 것이 많다. 물론 종의 기능이 시보(時報)의 역할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몇몇 종명에 나타난 내용을 분석하여 보면 위에 설명한 상징적 의미가 본령이었던 것이다.

악종은 이름 그대로 음악에 소요되는 악기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방울과 범종을 무교나 불교 같은 종교와 관련짓는다면, 악종은 유교의 예악사상(禮樂思想)과 관련지을 수 있다. 특히, 조선 전기는 불교가 배척되고 유교의 예악사상이 고취되던 때였다. 그래서 음악이론도 정비되고 악기도 정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예악사상에서는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신을 즐겁게 만든다거나 종교적 발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사람들의 성정을 순수하게 하고, 성정이 순수하게 되면 도덕이 순화되고, 도덕이 순화되면 정치가 잘될 수 있다는 지극히 효용적인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권근(權近)은 여러 가지 국기(國基)를 바로잡는 일 가운데에서도 음악을 바로잡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악기편 樂器篇>을 중심으로 ≪천견록 淺見錄≫을 쓸 정도였다. 다음의 언급도 퍽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음악은 천지의 화(和)요, 예(禮)는 천지의 본(本)이라 함은 예악이 천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천지는 곧 하나의 예악이고 예악은 곧 하나의 천지이다." 이렇게 예악을 천지와 같은 것으로 보고 또, 천지 차원에서 인륜을 수립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은 또 "음악이란 성정(性情)의 바름에서 근본한다. "고 하였다. 음악은 성정을 바르게 할뿐만 아니라 바른 성정이라야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논리이다. 또, ≪악학궤범≫ 서(序)에서는 "음악은 정치와 큰 관계를 가진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음악을 인성과 도덕과 정치 순화와 같은 효용성에 두었던 것이 예악사상의 근본이었다.

특히, 세종은 악기 전반을 정비하게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종류(鐘類)인 편종·특종·순·요·탁·탁·경 등을 정비하였다. 악기만 정비한 것이 아니라 격법(擊法)이나 협연(協演)하는 법도 명시하였다.

≪증보문헌비고≫의 악고(樂考)에 보면 악종을 연구한 법이 나온다. “문무(文舞)가 물러나고 무무(武舞)가 등장하면 악생(樂生)은 두 손으로 철영(鐵纓)을 잡아 순을 흔들면서 들어와 무인(舞人)의 오른편에 선다. 그러다가 아악(雅樂)이 세 번 울리고 무인이 몸을 돌리면 또 순을 울리는데, 아악이 네 번째 울리면 그친다. 탁(鐲)이나 요(鐃)도 쓰임새가 이러하다. 탁과 요는 왼손으로 그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추를 들어 이것을 치며, 탁(鐸)의 경우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들어서 흔든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예악사상에서는 이들 악기를 어떻게 만들면 좋은 음이 날 수 있고, 어떻게 협연을 하면 조화를 이루며, 이것이 마침내는 천지와 조화를 이루어서 인간의 성정을 도야하고 도덕적으로 순화되며 바른 정치에 이바지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악종의 상징적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동양의 종[편집]

대체로 불교 유물로 많이 만들어졌다. 불교에서 종은 땅속의 영혼을 대표하여 명부(冥府)의 모든 귀신을 부를 때 친다.

범종이라고도 불리는 동양권의 종은 한중일 3국 기준으로 종 바깥쪽에서 커다란 나무 기둥(당목/撞木)을 부딪혀서 울리는 방식(외타식)인데, 한국과 중국에서는 종이 나지막하게 위치해있고 손으로 당목을 직접 움직이지만, 일본은 종과 당목이 높이 떠있고 서양 종처럼 밧줄을 이용해 당목을 움직이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일본 범종은 대개 가사문이라 하여 역십자 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구 조계사종도 왜색 및 국보 해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동양의 종은 한국종, 일본종, 중국종, 동남아종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한국 종이라 카더라. 소리의 울림 때문이라는데, 동서양 종 거의 대부분이 종의 울림은 일정하게 내려가서 끝나는 반면, 한국 종은 가장 길고 오랫동안 높고 낮은 울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유의 맥놀이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명동(鳴洞)이라는 오목한 홈이 타종시 종소리의 공명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한국 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현대에는 각 지자체마다 지역을 대표하는 대종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경주시 신라대종, 양산시 양산대종, 서산시 서산시민대종, 청주시 충북천년대종 등.

종근당 광고에 나오는 특유의 종소리는 모양은 서양의 종인데 울리는 소리는 범종의 것이다. 김벌래의 작품이다.

서양의 종[편집]

서양에서는 대체로 종 안쪽에 클래퍼라 불리우는 작은 방울이 달려있고 안쪽에서 치는 방식(내타식)을 띄고 있다.

손으로 울리는 방식이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옛날 학교종처럼)클래퍼 자체에 줄을 달아서 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종 자체를 프레임에다 고정시키고 흔들어서 울리는 방식이다.

한국의 종[편집]

구 조계사종[편집]

일제강점기 현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 사찰인 대화정 조계사에 걸려 있던 범종.

참고로 대화정 조계사는 현재의 조계사와는 다른 사찰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중에 대화정 조계사가 폐찰되고 종을 옮겨놓은 태고사가 현재의 조계사가 되면서 근 칠십여 년을 '조계사 종'이라고 불리게 됐다.

현재까지도 진품인가 위조품인가를 놓고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는 뜨거운 감자 같은 유물이다. 만약 진품이라면 통일신라 시대에 만든 1200여 년이나 된 국보급 종이고, 위조품이라면 과거에 존재했던 진짜 범종을 공출하고 일제가 대신 만들어 걸어둔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화정 조계사가 폐사한 이후 종로 조계사로 옮겨졌고, 1998년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옮겨졌다가 2010년 원래 있던 경기도 양평 상원사로 옮겨졌다.

낙산사 동종[편집]

선 세조 때 왕명을 내려 예종 1년(1469)에 낙산사에 조성된 종. 대한민국 보물 제 479호였다. 낙산사 동종은 높이 158 cm인 대형 범종이었다. 종의 몸통에 양각된 명문에 따르면 세조 때에 중수하여 성화 5년(1469) 을축일에 조성하였다. 그 어떤 종보다도 화려하다. 종에는 보살상 네 좌와 고사리 모양 물결 무늬, 연꽃 36송이와 삼각형으로 큰 꽃 세 송이를 양각했고 종의 정상에는 쌍룡을 장식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종신의 끝부분에 조선 태조의 권운문(卷雲文)과 조선 세조의 파상문(波狀文)을 새겼다는 것이다. 낙산사 동종이 왕실 발원, 특히 세조의 각별한 지원으로 만든 웅대하고 예술적인 작품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양각된 보살입상은 우리나라 조각물 중 최우수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무엇보다 수백여 년의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현대에도 아침 저녁으로 예불 때에 타종되고 있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편집]

남양주 봉선사 동종(楊州 奉先寺 銅鍾)은 조선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다시 지을 때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한반도에 많이 남아있지 않은 조선 초기의 동종으로, 1963년 9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왕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전기 대형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예종원년(1469)년에 제작되었다.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로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고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모습이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연곽과 보살입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가로 줄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글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국가적인 감독으로 이루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또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파도치는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보살입상 그리고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이라는 조선시대 종의 새로운 요소가 등장한 점에서 조선시대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상원사 동종[편집]

상원사 동종은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한국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로,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했다.

용주사 동종[편집]

용주사 동종(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으며,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편집]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종 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 신라 종의 용보다 고개를 쳐 들어 올리고 있다. 소리 울림을 도와 준다는 용통은 대나무 모양이며, 편평한 부분인 천판 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몸체의 아래와 위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한 너비 10㎝ 정도의 띠를 두르고, 꽃과 덩굴로 안을 채워 넣었다.

위에 두른 띠 바로 아래로는 4곳에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도드라진 9개의 연꽃을 새겼다. 유곽 아래에는 종치는 부분인 당좌를 원형으로 2곳에 두었고, 구슬로 테두리하고 연꽃으로 장식했다. 당좌 사이에는 2구의 비천상을 두었는데, 1구씩 대각선상에 배치, 신라종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 다음으로 큰 종으로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종이라 할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편집]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 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 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됐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으로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수종사 종[편집]

조선 예종 1년(1469)에 전대왕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아내 인수대비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대형 범종.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높이 48.8㎝, 구경 37.3㎝이다. 성화(成化) 5년(1469) 7월에 남양주시 수종사(水鐘寺)에서 수빈한씨(粹嬪韓氏)와 정업원(淨業院) 주지(住持) 이씨(李氏)의 시주로 주성된 한국의 범종으로, 수빈한씨는 인수대비가 대비로 책봉되기 전 수빈 지위를 유지하고 있을 때의 이름이다. 또한 정업원 주지 이씨는 정업원이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내불당 형식의 비구니 전용 사찰인 점에서 왕실 관계의 여성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낙산사 동종과 봉선사 동종에 비하여 크기는 작지만 완전히 다른 양식을 갖추고 있다. 전대의 전통형 종 모습을 많이 계승하였고 문양도 자유분방한 느낌이다.

550년 전 만들어진 한국의 종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사실상 왕실 발원 범종의 마지막 세대로, 이후에는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 아래 범종이 만들어진 사례가 거의 없기에 아주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연복사 종[편집]

경기도 개성시 북안동 남대문루에 있는 고려시대의 범종. 크기는 높이 3.24m, 지름 1.88m, 두께 23㎝.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30호. 1346년(충목왕 2)에 주조하여 연복사에 달았던 것으로서 평양종, 강원도 평창의 상원사동종(국보, 1962년 지정), 경주의 성덕대왕신종(국보, 1962년 지정), 천안의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국보, 1993년 지정)과 함께 우리나라 5대명종의 하나이다.

옛 보신각 동종[편집]

옛 보신각 동종(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됐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으며,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황룡사 대종[편집]

신라시대의 종. 『삼국유사』 권3의 기록에 전한다. 황룡사대종이라고도 하는 이 종은 현존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일 뿐 아니라 조형미(造形美)에 있어서도 세계제일이라 할 만하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황룡사종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新羅第三十五 景德大王 以天寶十三甲午 鑄皇龍寺鐘 長一丈三寸 厚九寸 入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施主孝貞伊王三毛夫人 匠人里上宅下典…… ."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만들었으며 49만 7581근이나 되는 실로 거대한 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 했고, 장인은 이상댁(里上宅)의 하인이다.

흥천사명 동종[편집]

경복궁에 있는 조선시대의 범종. 2006년 1월 1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2.82m, 지름 7m, 두께 3㎝이다. ‘흥천사명 동종(興天寺銘 銅鐘)’이라고도 한다. 1462년(세조 8)에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녕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등 왕실의 발원(發願)으로 각 분야의 관장(官匠)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처음에는 태조(太組)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원찰(願刹)로 세워진 흥천사(興天寺)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1504년(연산군 10)과 1510년(중종 5)에 화재로 완전히 소실된 후 1747년(영조 23)에 경복궁의 남문(南門)인 광화문(光化門)의 누상(樓上)으로 옮겨졌다. 1907년(순종 1)에는 일제가 창경궁(昌慶宮)의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政殿)으로 옮겼다. 그리고 1938년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 창경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사했을 때 덕수궁 광명문(光明門)으로 옮겨졌다. 이후 2019년 광명문이 원 위치로 이전됨에 따라 경복궁 궐내각사지로 다시 옮겨왔다.

이 종은 규모와 문양, 주조기술이 탁월하며, 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주성(鑄成) 당시의 조직 체계가 나타나 역사적 가치도 높다. 또한 한국 전통의 범종(梵鐘) 양식에 고려 말기 이후 새롭게 들어온 중국 범종의 양식들이 첨가되어 조선 전기의 범종 양식이 정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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