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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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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秦始皇陵,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진시황릉(秦始皇陵,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병마용갱

진시황릉(秦始皇陵,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은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진시황의 구릉형 묘이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으며, 지금의 황릉은 야트막한 피라미드형으로, 시간이 지나며 그 높이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76m라는 높이를 자랑한다. 진시황릉은 당시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졌는데,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 있다. 외성의 둘레는 6.3km이고, 내성의 둘레는 2.5km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산은 당시 내성이었던 부분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관이 안치되어 있는 매장실과 기타 부장품들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기에, 현재 중국 고고학계가 주로 발굴, 조사하는 곳은 진시황릉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외성과 내성 부분이다. 또한 무덤 동쪽에 있는 병마용 또한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기에 이 유물들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개요[편집]

진시황릉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와 그가 거느린 무수한 토병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으로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거대한 능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70여 만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 발굴로 밝혀진 바는 없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이며, 현재는 지상에서는 능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74년에 병사와 말 등의 테라코타 모형(병마용)이 8천 점이나 발견되었다. 발견 이후 지금까지도 발굴이 진행 중인데, 진시황릉으로 추정되는 언덕(맨 위 사진)은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이유는 저우언라이가 지적했 듯, 후손들을 위해서 발굴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 무리하게 발굴하지 않는다고 계획을 중국 정부가 세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진시황릉 하면 떠올리는 병마용갱은 진시황릉 주변에 있는 구덩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진시황의 무덤은 문서 맨 위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언덕이며,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도 않았다. 병마용갱은, 무덤을 만든 다음 무덤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병마용을 넣은 후 다시 묻은 것. 현재 1호ㆍ2호ㆍ3호갱은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놓았고, 산산조각난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도 볼 수 있다. 1~3호 병마용갱의 병마용들을 복원하는 데만 수십 년 이상이 소요될 듯한데, 더 어마어마한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된 지 얼마 안 된 병마용갱이 아직 많다는 사실이다.

진시황본기의 기록[편집]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진시황릉 관련 서술이다.

9월, 시황제를 여산(酈山)에 매장했다.
九月,葬始皇酈山.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에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始皇初即位, 穿治酈山, 及并天下, 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 穿三泉, 下銅而致槨.
궁궐과 여러 관리,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하였다.
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하였다.
令匠作機弩矢, 有所穿近者輒射之.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였다.
以水銀為百川江河大海, 機相灌輸.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上具天文, 下具地理.
인어(人魚)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하였다.
以人魚膏為燭, 度不滅者久之.
이세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皆令從死, 死者甚眾.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葬既已下, 或言 "工匠為機, 臧皆知之, 臧重即泄."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大事畢, 已臧, 閉中羨, 下外羨門, 盡閉工匠臧者, 無復出者. 樹草木以象山.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 진시황릉의 위치
  • 진시황릉의 건설기간과 동원된 인부의 수
  • 진시황릉의 구조와 매장된 내용물
  • 후궁과 인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생매장을 당했다는 사실
  • 진시황릉의 규모

이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은 아래에 서술하였다.

사기의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인데,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를 직접 탐험하여 서술했을 리는 없겠고, 기존 기록을 참고해서 썼을 것이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자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들을 수집하고 보관했다는 서술이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있는데, 그때 수집된 문서들 중 진시황릉에 대한 것도 있어서 사마천이 참고했으리라 추정한다.

사마천이 묘사한 진시황릉의 모습 중에서도 '수은의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는 구절이 유명하다. 상술하듯이 사마천이 직접 무덤 내부를 봤을 리가 없으니 현대 학자들은 이 묘사를 허구적인 표현이나 전승 정도로 추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사회과학원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황릉 봉토의 수은 함유량이 인근 지역 흙보다 무려 7배 이상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흙을 파낼수록 수은 함유량이 더 가파르게 올랐기 때문에 다소 표현은 과장됐지만 무덤을 조성하며 수은을 다량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황릉 조성에 동원된 죄수나 노예들이 완공 후 몰살됐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황자나 후궁의 유골로 추정되는 게 발견된 것과 달리 몰살된 노역자들의 대규모 시체가 묘비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장한이 여릉의 노역 중인 죄수들을 징병하여 진승, 오광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면 위와 마찬가지로 과장, 와전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건설 과정[편집]

당연히 규모에 걸맞게 거대공사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황제 즉위 직후부터 작업에 착수하여 통일 이후부터는 총인원 70만 명(추정)을 동원해서 지었지만. 즉위 35년이 넘어서도 완성하지 못하고 진시황이 먼저 죽었다. 이후 2세 황제 호해는 여러 동물과 진시황의 후궁과 그 자녀들, 그리고 인부들을 순장하여 무덤 공사를 끝냈다. 호해가 자기 일가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공자 고(高)는 가족들이 연좌될까 두려워 호해에게 먼저 죽음을 청한 덕분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으나, 나머지 공자들은 시장에서 참수당하고 공녀들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실제 진시황릉의 배장품(陪葬品) 구덩이에서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다. 그중 남자 5명과 여자 2명이 묻힌 무덤에서는 도장이 포함된 금, 은 비단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부장품이나 관이 발굴되었지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혔거나 특히 여성들의 시신은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2세황제 호해가 죽인 형제자매들, 진시황의 후궁들 등 순장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한다.

부장품[편집]

병마용 제1호갱의 중무장 보병대.(저작자- Maros M r a z)

진시황릉의 부장품은 아직 제대로 까보지도 않았음에도 정말 세계적인 수준이다. 전세계에서 부장품이 가장 많은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토용(土俑, 사람 모양 흙인형)을 많이 만들었는데, 후술할 병용(병사 인형)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신하들이나 궁중 광대 등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 사람 크기로, 사람과 흡사하게 잘 만들어 묻었다. 병마용으로 추정컨대 실제 진나라 궁정에 일하던 사람 수만큼 넣었다고 추정한다. 따지고 보면 진시황릉의 주변부에 불과한 병마용갱만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판이니 묘 내부의 부장품들은 대체 어떨지 상상조차 안 된다. 언제가 될진 몰라도 전체를 발굴하면 투탕카멘의 무덤 발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그 세기의 최고•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 될 것이 틀림없다.

병마용은 레고처럼 여러 부분을 만들어 구운 뒤 조립하여 완성하였다는 설과 도자기와 같이 긴 흙막대를 둥글게 쌓아 올리고 같이 만들기엔 크고 무겁고 복잡한 머리나 다리 부분 등만을 따로 붙였다는 설이 있다. 후자의 방식이 더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병마용의 크기나 무게를 지탱하고 서있기 위한 사정상 이쪽이 정설로 통한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품질관리를 위해서 제작소들은 모든 제작된 물건에 그 이름을 새겨야 했는데, 이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어느 작업소가 병마용의 인형들을 제작하는 데 동원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완성된 토용은 계급과 역할에 맞춰서 당시 진나라 군사 진형(陣形)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구덩이 속에 배치되었다.

병용은 키가 184 cm에서 197 cm로 큰 편인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경무장 보병ㆍ중무장 보병ㆍ궁병ㆍ전차병ㆍ기병ㆍ말ㆍ장교 등 다양한 병과 군인들을 표현하였다. 얼굴은 약 8가지 복제 틀을 사용해 제작하였는데, 기본형에 수염 등 세부적인 변형을 가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발굴된 갱도 4곳 중 3곳에 모두 병용 8천여 점, 전차 130기, 말 520점이 있다고 하는데, 이미 발굴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아직 흙 속에 묻혀있다고 추정한다.

원래는 실제 사람과 말을 모델로 채색되었으나 수천 년이 지나 발굴될 때 외부 공기와 접촉하자 순식간에 옻칠 코팅층이 바스라지거나 탈색되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 채색하고 옻칠로 마감했는데, 오랜 세월 습기를 머금은 토양 속에 보관되다가 발굴 후 건조한 공기와 접촉하자, 옻칠 코팅층이 건조되어 채색층과 함께 작은 알갱이로 수축했고, 이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색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학자들도 퇴색을 막기 위해 병마용갱 발굴을 미뤄두었다가, 요근래 기술이 개발되어 다시 발굴을 재개하였다. 그 외에도 병마용들은 원래 모두 실물 크기 청동제 무기로 무장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많이 파손되어 무기는 병마용보다는 적게 발굴되었다. 그래도 진시황릉의 알칼리성 토양과 유기물 입자가 적은 환경 덕에 꽤 잘 보존되었다.[18]

한나라 시대의 몇몇 묘들에서도 토용들이 발견되었으나 규모도 작고 인형의 완성도도 진시황릉의 토용보다 훨씬 떨어진다. 크기도 진시황릉과는 달리 사람이 한 손으로 집어서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발굴된 한나라 시대 묘들이 전부 황릉이 아니긴 하지만, 진시황의 병마용과 비견되는 병마용을 만들려면 국고에서 재물을 퍼부어야 하고, 세밀하게 만드려면 시간까지 많이 들여야 함을 감안한다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한나라 시대에 이런 토용을 못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무덤 짓다가 국고를 탕진하게 만든 전례에서 교훈을 얻은 한나라 사람들이 대리만족하는 선에서 끝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용 말고도 마차의 1/2 크기 청동제 모형(동마차갱), 진시황이 기르던 말(기마갱), 학, 자이언트 판다 등 진기한 동물 수십 마리(동물갱), 부식되지 않도록 돌조각을 엮어 만든 실물 크기 갑옷과 투구(개갑갱) 등이 현재까지 발굴되었다. 기마갱과 동물갱에는 동물들을 돌보던 하인의 실물 크기 모형까지 함께 묻혀 있었다.

재발견[편집]

진시황이 죽고 불과 4년 만에 진나라가 멸망해버렸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함양(咸陽)에 입성하자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도굴했다. 당연히 가장 크고 6국의 원성도 가장 많이 들은 진시황의 무덤이 도굴 1순위였다. 비록 항우가 도굴했어도 항우조차 진시황릉의 엄청난 규모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상당히 많은 묘실이 도굴되지 않고 남았다.

다만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 등에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고, 한고제본기(漢高帝本紀)에 광무 대치 중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고 항우의 죄 10가지를 나열하면서 진시황릉 도굴을 간접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진시황 본기에서도 자영 살해, 함양 학살, 방화, 약탈 등 항우가 함양에서 저지른 오만 범죄를 다 나열했지만 진시황릉 도굴은 일언반구도 없다. 진시황릉을 발굴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항우가 진시황의 무덤을 도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여산 인근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만 구전되었을 뿐, 진시황릉은 그 후 2천 년 가까이 잊혀졌다. 항우가 진시황릉을 이미 도굴하고 파괴했다는 소문이 진시황릉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청대 이후 고증학의 시대로 접어 들어서 사기를 비롯한 대부분 중국 고전들의 신빙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조가 생겨났기 때문에, 사마천이 사기에서 진시황릉을 설명한 구절이 과연 진실인지 의구심이 있었다. 사마천의 엄청난 기술이 고대인의 과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던 중 1974년 3월 29일, 양신만(楊新滿)ㆍ양췐위ㆍ양츠파 등 리산(여산) 인근 시양 마을 청년 6명이 우물을 만들고자 땅을 파던 중 도기 조각을 발견했다. 인형 모양 도기 조각과 쇠뇌 청동 화살 등을 더 캐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린퉁현의 옌자이공사에서 수도시설을 담당하던 팡수민이 우물 작업에 진척이 없자 확인하려고 리산 우물 공사장을 찾아왔다가 흙 속에서 나온 도기인형들을 보았다. 팡수민은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진나라 시대 도기라고 알아보고는 박물관에 알린 덕에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얼마 뒤 도기제 병사 인형 수천 점이 묻힌 거대한 공간(병마용)이 발견되었다. 이후 동마차갱ㆍ기마갱ㆍ동물갱ㆍ개갑갱 등 부장품 구덩이 수십여 곳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대혁명이 슬슬 잠잠해지던 시기라 홍위병이 황릉을 파괴하는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최초 발견자 중 양신만은 인기스타가 됐다. 한국 모 프로에도 양신만의 당시 근황이 나왔는데, 나름 유명인사로 관련 책자도 팔고 기념 사인회까지 열 정도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며 현지 기념품 판매소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발견 당시엔 중국 정부에서 보상으로 겨우? 경운기 1대를 지급했다고... 진시황릉 발견 전만 해도 그 땅은 작황이 안 좋아 귀신 붙은 땅이라고 불리며 현지 주민들이 기피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자기 무덤에 수은을 들이부은 탓에 무덤 부근 토양의 수은 함유량이 일반적인 토지의 20배에 달한다고 하니 작황이 좋을 리가 없다.

2008년에는 600개에 달하는 구덩이들이 발견되었고, 몇몇 구덩이들은 진시황릉에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2016년, 진시황릉 주변에서 부장갱 4백여 곳에서 실제 동물의 유골과 도기, 청동기로 제작된 동물 등 유물 수천 점이 출토되었다.

고고학적 연구[편집]

진시황릉은 당시 진시황의 궁전을 그대로 축소, 복제한 모형이다. 거대한 봉우리가 중앙에 있고, 내성과 외성이 이를 차례대로 둘러싸며 보호하고 있다. 또한 내성과 외성 안팎에 군데군데 점토로 구워 만든 병마용과 유물들이 묻혀있다. 내성벽 내부의 서쪽 부근에서는 청동 마차와 말들이 발견되었다. 내성벽 안에서는 황제들을 모시던 관리들과 행정 각료들의 모습을 본딴 인형들이 발굴되었다. 외성과 내성 안 사이의 공간에서는 무희들과 광대들의 인형들이 출토되었다. 외성벽 북쪽에서는 황실 정원이 있었는데, 이 정원에서 청동으로 만든 학과 거위, 오리, 그리고 악사들의 모형이 발굴되었다. 외성 바깥쪽에서는, 말들이 산 채로 묻혀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진시황릉 서쪽에서는 이 능을 짓기 위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유해가 묻혀있었다. 병마용갱은 여산에서 약 1.5km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묻혀 있다.

아직까지 진시황릉의 봉우리는 본격적으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를 발굴하기 위해 수많은 기술들이 연구되고 있다. 진시황의 지하 궁전이 봉우리 바로 아래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이 금속 탐지기를 통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봉우리 아래에서 약 4m 정도의 높이의 벽이 발견되었는데, 가로로 390m이고 세로로 460m였다고 한다. 이는 지하 궁전을 지탱하는 벽으로 추정되며, 벽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벽들의 사면에는 완만한 경사로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중 서쪽에 연결되어 있는 경사로에서는 청동 말들과 마차가 발견되었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 자체는, 동서로 80m이며, 남북으로 50m이다. 또한 그 높이는 약 15m정도이다. 다만 지하궁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약 20m에서부터 최대 50m까지 그 학설이 분분하다.

과학자들이 실시한 연구에 의하면, 진시황릉 속에 묻혀 있던 대부분의 금속 구조물들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는 진시황릉에 설치된 안정적인 배수 시스템 덕분으로 여겨진다. 사마천의 기록에도 따르면, 진시황릉을 팔 때 지하수를 세 번이나 만났기 때문에 능을 잘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배수 설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0년에는 지하 댐과 배수 수로가 발견되었고, 지하궁전은 침수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진시황릉 주변의 토양에서 극도로 높은 수치의 수은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사기에 기록된 내용 중 '수은으로 하천과 강, 바다를 가득 채웠다'라는 부분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만약 지하궁전이 발굴되어 외부 공기에 수은이 직접적으로 노출되게 되면, 이 수은이 휘발하여 공기로 퍼져나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토양 검사를 할 때, 총 54곳에서 수은 검출 검사를 실시하였는데, 한 군데에서만 유독 1440ppm에 달하는 수은이 검출되었고, 나머지 53곳에서는 보통과 비슷한 205ppm에 근접한 수치가 나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은의 검출량이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산업 오염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는 학설까지도 나왔다.

2012년, 중국 고고학계는 진시황릉에서 거대한 '옛 황궁'의 터가 보존되어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 가설에 의하면, 이 사각형 모양의 궁전은 길이가 690m, 너비가 250m로, 17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거의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크기와 비슷할 정도이다. 궁정에는 18개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고, 1개의 거대한 건물들이 이 18개의 건물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2010년부터 이 터를 조사하여 벽돌, 벽, 성문, 도자기 파편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람[편집]

  • 영업시간 : 08:30~17:30
  • 추천소요시간 : 1시간
  • 가는 법 : 병마용 박물관 앞에서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버스 이용
  • 입장료 : 150 (CNY)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포함
  • 입장 관람 팁 : 진시황릉은 내부가 공개되지 않으며, 산처럼 보이는 봉분 위로만 올라갈 수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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