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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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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옥

한옥(韓屋)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은 이다.[1]

개요[편집]

남산 한옥마을

한옥(韓屋)은 전통적 한국 건축 양식을 사용한 재래식 집이다. 반면에 현대식으로 지은 집은 '양옥'이라고 한다.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짓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는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한, 조선 시대의 전통가옥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산의 모양이나 물의 모양에 따라 세부적으로 조율하는데, 이는 건축주의 사주팔자나 직업, 지병 등에 따라 건축가가 임의로 조정하기도 한다. 한옥은 바람의 통로와 물의 위치, 산과 평야와의 거리와 방향, 즉 풍수지리 이론에 근거하며 집의 목적과 거주자의 성향에 따라 매우 다르게 짓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온돌로 방바닥을 데워 추운 겨울을 따뜻하고, 마루가 있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은 다양한 왕조를 거치며 변모해 왔는데 현재 가장 많이 선호되는 양식은 조선왕조의 양식을 주로 따르며, 부분적으로 남북국 시대의 양식이라 보이는 구조와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2]

역사[편집]

귀족저택 전경

한옥은 석기 시대 막집, 움집같은 수혈식 구조에서 시작됐으며 역사 시대까지도 마한(馬韓)은 비슷한 형태의 주거가 이뤄졌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야의 고상 가옥, 만주같은 북부에서는 구들이 사용된 원초적 한옥 구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삼국 시대의 가옥은 경주 북군동 기와집모양 토기 같은 여러 유물이나 벽화 등 당시 가옥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평민들이 살던 곳은 단칸집이긴 하지만 여러 기둥을 세워 지은 비교적 넓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가옥이라 부를만한 수준으로 발전하게 됐다.고구려같이 추운 북부는 상술한 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열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과 문을 좁게 튼 반면 남쪽에서는 보다 개방적인 형태를 띄었다. 한편 이 시기 중국에서 기와와 단청이 전래되어 왕궁같은 상류층의 가옥들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기와로 된 화려한 가옥 형태에서 주거 생활을 누렸다.

신라고려 시대에는 귀족 문화의 융성과 함께 매우 사치스러운 주택을 짓고 살았다. 신라 말에는 황동 등 금속 부착물로 집을 장식하기도 했고 심지어 금입택이라 하여 황금으로 집을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화려한 귀족문화가 극에 달해서 고려 청자로 청와(청자 지붕)를 올리는 것이 유행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경복궁 복원 사업을 위해 궁터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다량의 청와가 발견되어 실록의 내용대로 경복궁의 건물 다수가 청와 건물이었음을 입증하였다. 참고로 궁궐들 중에 현대에 남아있는 청와 건물은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다.

특히 이 시대에는 입식 생활을 하여 타일을 깔기도 했고, 단청을 칠하거나 복층 구조, 누각에 기단을 쌓고 난간을 설치하는 등 조선 시대와는 매우 다른 형태의 한옥 양상이 나타났다. 또한 풍수지리 사상의 전래와 함께 배산임수와 같은 건축 법칙들을 따르기도 했으며 이 시기 마을 유적에 따르면 온돌이 보편화되기도 했다. 물론 이 시기 하층민은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 초가집에서 생활했다.

조선시대에는 사치를 자제하는 유교 문화의 전래와 함께 보다 검소한 주택 형태를 추구하게 되었지만 전기까지는 궁궐에서 청기와를 사용한다든지, 복층 구조를 지닌 집 등 마냥 수수했을거라는 조선 시대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기록들도 상당수 있다. 지방에서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옥 고택들처럼 공간을 넓직하게 사용한 건물군으로 이뤄진 주택, 초가집 등이 있었으며 한양같은 도시에는 북촌 한옥들처럼 단일 건물이 ㅁ 자나 ㄹ 자로 꺾이고 꺾여서 공간 활용도를 높인 구조가 구한말 사진에서 확인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경성 사진을 보면 이런 도시형 한옥들이 빼곡하게 가득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옥이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때는 1910년 한일합방조약 이후이다. 일본과 합병뒤에는 일본식 건축물과 근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부산,목포,서울,인천,평양 등지에서는 한옥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한국 전쟁 동안 서울 및 전국이 파괴되고, 또 새마을 운동과 같은 한국인의 주거 형태에 대한 큰 변화를 거치며 재래식 가옥들이 신식 가옥들로 대체되면서 한옥은 과거의 주거 형태로 남게 되었다.[3]

한옥마을[편집]

전주한옥마을[편집]

전주한옥마을

1977년 한옥마을 보존지구로 지정된 뒤 전통한옥지구·전통문화지역·전통문화구역·전통문화특구 등으로 불리다가, 2002년 10월 '전주시 공공시설 등의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校洞)·풍남동(豊南洞) 일대 7만 6,320평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성곽을 헐고 도로를 뚫은 뒤 일본 상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현재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판소리·춤·타악 등 전통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 막걸리·청주의 제조과정 관람과 시음까지 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 숙박을 하면서 온돌과 대청 마루 등 한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전통 공예품을 전시하는 전주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 등이 있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연회를 열었던 오목대와 이목대,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인 전주 전동성당, 전주향교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4]

북촌한옥마을[편집]

북촌한옥마을

북촌은 서울의 대표적 한옥밀집지역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종로구 삼청동·팔판동·사간동·가회동·계동·재동·안국동·송현동·소격동·원서동 일대에 기와집 형태의 한옥이 밀집·보존되고 있는 지역이다.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명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 지역은 백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를 따라 북쪽에 비해 남쪽이 완만한 지형을 이뤄 배수가 잘돼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지역으로, 조선시대 때는 사대부를 비롯해 권문세가와 왕족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집중화현상이 나타나자 주택난 해소를 위해 이곳에 대규모 한옥이 지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한옥들 중에는 이때 지어진 것들이 많다. 이 시기에 지어진 한옥들은 중대형 필지를 분할해 구획형 개발이 이뤄져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한옥를 띠었다.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던 유리와 타일 등의 재료가 사용되었고 일정 부분 표준화된 도시주택형태를 띠었으며, 전통한옥에 비해 적은 규모에 칸수를 많이 나눈 형태로 건설되었지만 응축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지속적인 개발로 많은 한옥들이 지어졌으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에 1980년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하는 등 한옥보존정책이 시행되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 고도제한이 완화되면서 북촌 전역에서 많은 한옥이 철거되고 현대식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섰다. 이처럼 급속한 한옥멸실과 주변경관 훼손이 이어지자, 2000년대에 다시 한옥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북촌마을 가꾸기 정책이 수립되고 환경개선운동과 한옥보존운동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미로 같이 이어진 길을 따라 다양한 역사문화자원, 박물관, 전통 공방, 한옥체험관 등이 들어서 있고, 전통문화축제 등이 열리는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5]

개평한옥마을[편집]

개평한옥마을

개평한옥마을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에서 8km 거리에 있는 지곡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은지 100여 년이 넘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가 전통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비록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때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고난을 겪은 인물이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이곳 개평한옥마을에 일두 정여창'의 생가인 '정여창 고택' 또는 '일두 고택'이라 부르는 정여창 생가가 있다. '정여창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번 중건 되었다. 현재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적으로서의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으로 되어 있다.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은 모두 같은 곳이다. 개평한옥마을이 있는 지곡면에 들어서면 '함양일두고택'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로 '오담고택', '하동정씨고가', '노참판댁고가' 등 의 표시가 보인다. 고풍스러운 고택도 여러채 있어 비교적 마을규모가 큰 개평한옥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배형상을 띄고 있는 마을 형태 때문에 우물을 만들지 않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울길을 따라 마을길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마을의 전설을 확인하게 해주는 종바위가 우물과 우울자리의 위치를 표시해주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다섯개의 우물외에는 일절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강점기때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새로 우물을 판 이후로 마을이 기울었다고 한다. 일만제곱미터의 넓다란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는 '일두고택'은 명당지로 소문나 있으며, 전형적인 경상도의 양반집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솟을대문을 비롯하여,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 별당,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 '일두고택'은 TV드라마인 '토지'에서 최참판댁의 촬영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솟을대문에는 다섯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음을 알리는 5개의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걸려 있고, 솟을 대문을 지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하는 '충효절의' 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는 '백세청풍'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걸려 있으나 고증은 안된 상태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안채의 대청마루 뒤로 사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안채 뒷편으로 사당 외에 별당과,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개평한옥마을은 14세기에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 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살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은 530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가 유명하다. 하동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솔잎술로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의 골목길은 골목마다 종가와 고가가 자리 하고 있다. 1880년에 지어졌다는 하동정씨고가, 1838년에 지어진 오담고택, 또, 풍천노씨 대종가 등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전통 가옥들이 보인다.[6]

오성한옥마을[편집]

오성한옥마을

종남산과 위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쌓고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에 한옥고택 등 전통한옥 20여 채가 자리 잡고 있는 한옥마을로 실제 주민들의 거주공간이자 품격 있는 카페, 갤러리, 숲속 체험길 등 체험공간이 공존하는 전통과 문화, 자연과 더불어 휴식하는 힐링 장소로 전국적인 명성과 인지도를 높여가며 많은 관광객이 찾고있는 완주군의 가장 핫한 관광명소이다. 마을 내 예술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한옥고택 등을 활용한 작은 갤러리와 감성카페, 독립서점 등이 위치해 있어 자연경관과 함께 즐기는 소소한 감성여행지이다. 2019년 BTS(방탄소년단)이 1주일간 머무르며 ‘BTS 2019 SUMMER PACKAGE’ 뮤직비디오 및 화보집을 촬영한 장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BTS 팬클럽 아미(ARMY)는 물론 일반관광객의 방문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7]

구조[편집]

재료[편집]

삼국 시대의 가옥은 경주 북군동 기와집모양 토기 같은 여러 유물이나 벽화 등 당시 가옥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평민들이 살던 곳은 단칸집이긴 하지만 여러 기둥을 세워 지은 비교적 넓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가옥이라 부를만한 수준으로 발전하게 됐다.고구려같이 추운 북부는 상술한 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열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과 문을 좁게 튼 반면 남쪽에서는 보다 개방적인 형태를 띄었다. 한편 이 시기 중국에서 기와와 단청이 전래되어 왕궁같은 상류층의 가옥들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기와로 된 화려한 가옥 형태에서 주거 생활을 누렸다.

뼈대의 형태[편집]

크게 수직으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기둥과, 가로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보로 나뉘는 구조다. 기둥밑에는 주춧돌을 두어 땅속의 수분이 기둥에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고 기둥과 보로 토대를 구성했으면 그위로 서까래를 얹어 지붕의 뼈대를 만들고 널판지와 기와를 얹는 식이다. 한옥의 모든 구조는 지붕의 무게를 버티는 것이 관건이다. 기와 - 흙 - 적심(흙을 받치기 위한 나무 껍데기쪽의 널판자) - 개판(서까래 사이를 덮어주는 판자) - 서까래 - 도리(서까래 받침목 ; 통상 마지막 도리를 얹는 일을 상량이라고 한다.) - 장여(도리 받침: 원형의 도리는 돌아가기에 원형으로 홈을 파서 이 도리를 잡아주는 부재를 말한다.) - 보(제일 큰 보를 대들보, 그 보다 작은 것을 중보라 한다.) - 창방(기둥과 기둥에 놓인 나무 이곳에 보를 올려 보의 무게로 인한 흔들림을 옆의 기둥이 함께 잡아준다.) - 기둥 - 주춧돌 - 흙의 순으로 지붕 전체의 무게가 내려오는 구조이다. 기와까지 올라갔을 때 한옥 지붕의 무게는 톤 단위로 계산될 정도로 무거워진다. 기와 한옥은 이를 버티기 위해 기둥의 크기가 최소 7치(지름 21 cm 가량) 이하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초가한옥은 지붕의 무게가 가벼워 통상 4치(12 cm)가량이면 건축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가장 큰 지붕을 가진 사찰이나 궁궐의 경우에는 최소 1자(지름 30 cm) 이상의 나무가 기본적인 크기가 된다. 이는 공포와 관련되어 있는데 대들보 위에 장여를 놓고 바로 서까래를 걸면 천장의 크기가 높지 않다. 이는 아래와 위의 크기가 같아야 하는데 예전이라도 지름도 크고 높이도 큰 나무를 구하기 쉽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운반상의 어려움이 있었고, 현재로서는 그런 지름도 크고 길이도 긴 나무 자체를 구하기 쉽지 않다. 불상을 모셔야 하는 절이나 위엄(크기)을 갖추어야 할 입장의 궁궐 건축에서는 낮은 천장은 선호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포를 포개어 쌓아 놓고 도리의 높이를 강제로 높인다. 이것이 공포가 등장한 계기였다.

지붕의 형태[편집]

한옥은 [[[조선]]왕조의 신분제도의 영향을 받아 지붕의 형태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였는데 왕족이나 양반 계급의 경우는 장식적이고 호화롭게 보이는 기와 지붕을 사용하였고 일반 평민 계급의 경우는 짚으로 이은 초가 지붕을 사용하였던 것이 특징이다. 기와의 수명은 10년 이상이고 초가의 경우 2~3년에 불과하다. 기나긴 장마철에 비가 조금씩 새는 것이 다반사이기에 초가 한옥와 기와 한옥의 선택은 부의 편중에 의해 선택이 나뉜다.

초가한옥에서는 휘고 짧은 나무를 선택하기에 지붕이 낮다. 기와한옥의 경우 곧고 굵은 나무를 구해 짓기에 지붕이 상대적으로 높아 단열은 초가한옥이 우수한 편이다. 근본적으로 참나무에 비해 열량이 높은 소나무를 장작으로 썼던 한반도에서 구들에 장작으로 난방을 하면 등이 뜨거울 정도로 온도가 상승한다. 그래서 완벽한 단열보다는 뜨거움울 적당히 감해줄 위풍을 허용하고 또 필요하기까지 하다.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의 모양에 측면은 삼각형의 모양을 띤 것이 우진각 지붕인데 이는 보통 초가한옥의 근본을 이룬다.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에 사다리꼴이 붙어 있는 형태가 팔작지붕이라고 한다. 이러한 팔작지붕은 멋스러움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처마를 길게 내뻗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통 5자 이상을 내미는데 모퉁이 처마는 추녀를 사용하여 10자 이상 내미는 경우도 있다. 모퉁이 기둥이 비에 젖고 강한 햇빛에 노출되면 뒤틀림이 발생하고 이는 집의 근본 축이 돌아가는 경우까지 이어지기에 비와 강한 햇볕으로부터 보호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가 나온 듯하다. 이에 반해 초가 한옥에서 기둥은 벽을 만들고 진흙으로 덮기에 처마 길를 길게 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

가장 안정적인 구조는 맞배 지붕인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각형의 두 면이 만나는 구조이다. 측면은 따로 지붕을 만들지 아니한다. 비로부터 벽 구조를 보호하기 위해 서까래를 따라 한자로 8자 모양으로 크고 넓은 나무를 다는데, 이를 '박공'이라고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박공 밑에 나무 판을 대는데 이를 풍판이라고 한다. 바람으로부터 벽을 보호하기 위함인데, 사람 사는 집은 온기가 있어 이를 수분 제거를 위한 기제로 사용 되어 풍판의 필요성이 감소하나, 맞배 지붕은 주로 사찰이나 장서보관, 창고, 제실 등으로 사용되어 구들을 놓지 않고 마루로만 구성되기에 풍판이 더욱 필요하다.

지붕의 형태는 대략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

맞배집[편집]

맞배집 정면

지붕구조가 제일 간단한 형태로, 마주보는 두 개의 지붕면이 있고 측면에는 지붕이 없는 대신, 박공이라는 삼각형의 벽이 있다. 보통 행랑, 곳간 등의 간단한 건물 혹은 사당 건물에서 많이 보인다. 흔히 팔작 지붕이 아름답고 대중이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맞배지붕만의 심플하고 경건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자주 사용 됐다.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건물 중에 가장 으뜸은 단연 '종묘'일 것이다.

팔작집[편집]

팔작집 정면

팔작이란 우진각집의 양쪽 측면 지붕 윗부분을 수직으로 잘라낸 모양의 지붕을 말한다. 이 경우, 수직처리 된 부분의 삼각형 모양을 합각이라고 한다. 맞배지붕의 특징이 엄숙하고 경건한 느낌이라면 팔작지붕은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이 가장 화려하고 장식적이기 때문에 궁궐과 불교건축의 중요한 건물에서, 살림집에서는 안채,사랑채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한옥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지붕 모양이다.

우진각집[편집]

우진각집 정면

마주보는 지붕 전후와 좌우, 네 면 모두가 경사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 집이다. 지붕 앞뒤에서 보면 사다리꼴 형태이고, 측면에서는 삼각형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격식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민가나 초가에서 많이 사용되었다.[3]

주거의 형태[편집]

한옥은 신분제도가 짙었던 조선왕조 때 이르러서 계급마다 주택 선호방식이나 건축방식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왕족(王族)이나 상류층 양반의 경우 신분과 남녀 그리고 장유(長幼)를 구분하여 공간을 만들고 주거 공간을 상중하로 나뉘었는데 상(上)의 공간은 안채와 사랑채가 속하여 남녀 양반이 주로 사용하였고 중(中)의 공간은 중문간 행랑채로 양반을 보좌하는 청지기나 서기(書記) 그리고 집사 등이 사용했으며 하(下)의 공간은 대문 주변에 위치해 있는 행랑채로 주로 양반댁 머슴이나 노비들이 사용하던 점을 보아 사람 뿐만 아니라 한옥의 구조에 있어서도 신분제도가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평민의 경우에는 양반과 달리 장식적인 면보다 기능성과 안전성을 중시하여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를 사용하고 벽에 짚과 흙을 발라서 적은 비용으로 방수와 보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짓는 점이 특징이었다.[3]

지역별 특징[편집]

각 지역별 가옥의 평면도

한옥은 한반도 지방의 기후나 성향에 따라 위치나 건축방식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추위가 잦은 북부 지방의 경우 외부에 불어오는 한기(寒氣)를 막아내고 보온(保溫)을 유지하기 위해 방을 두 줄로 배열하는 겹집 구조와 지붕이 낮아보이는 것이 특징이고, 반대로 더위가 잦은 남부 지방의 경우는 자연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방을 한 줄로 배열하는 홑집 구조와 지붕이 높아보이는 것이 특징으로 지방마다 건축방식이 다른 편이다.

남부 지역이나 제주도같은 경우 배랑이 열려있고 통로가 개방되어 통풍이 잘되어 있는 반면 함경도나 황해도같이 북부 지방에 위치한 한옥들은 공간이 폐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함경도식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인 정주간은 겨울이 추워 마당 대신 실내에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 만들어졌다.[3]

한옥의 종류[편집]

초가집[편집]

갈대나 볏짚 등을 이용하여 만든 집이다.초가(草家)는 볏짚·밀짚·갈대 등으로 지붕을 이은 집이다. 단열이 잘 되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하지만 썩기 쉬워 한두 해마다 바꿔주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초가는 선사 시대 집이 생겼을 때부터 짓기 시작해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주택이었다.

기와집[편집]

흙을 다듬어 불에 구워 만든 기와를 사용한 집이다.기와집은 기와로 지붕을 만든 집이다. 보통 찰흙으로 만든 검은색 기와를 많이 썼으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로 지붕을 이기도 하였다. 기와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기와집을 짓고 살거나 사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기와집은 조선시대의 유교의 영향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철저히 구분되어있다.

너와집[편집]

지붕을 붉은 소나무 껍질을 모아 만든 집이다. 너와집은 와 지붕 전통 집 예전에 화전민이 사용했던 집으로, 맑은 날은 지붕 재료가 수축하여 통풍이 잘되고, 비오는 날은 습기를 빨아들여 빗물이 새는 것을 막는다. 지금은 보기가 힘들어졌다.원래 함경도 산촌에서 발달한 가옥 형태이다. 건조한 겨울에 너와의 틈새로 집안 온기가 빠져나가는 단점이 있다.

귀틀집[편집]

귀틀집은 큰 통나무를 정(井)자 모양으로 층층에 맞추어 얹고 그 틈을 흙으로 메워 지은 집이다.[2]

현재[편집]

서울 흥천어린이집

불편하다는 이미지로 현대 한국인들에 의해 멀리되었지만 최근 들어 그 가치가 상당히 재평가되고 있다. 1960~70년대에만 하더라도 그저 헐어버릴 대상이었지만 2000년대 중반 웰빙 바람과 함께 아토피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아파트에 대비되며 건강할거란 이미지로 주목받더니 2010년대에는 사람들이 보다 더 개성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특유의 고풍스런 멋과 전통이 있는 한옥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져가고 있다. 기존의 고택들이 개량되어 TV나 인터넷 블로그 등에 소개되기도 하며 전국의 여러 지자체들도 거주 목적으로 신식 한옥 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시 또한 북촌, 서촌의 한옥 보존 계획을 넘어서 성북동 재개발 지구에 시범적으로 현대화 된 한옥 주택 지구를 만들었다.

공주시, 경주시, 부여군 등 과거 수도였던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한옥 신축시 지원금을 주는 등 한옥 신축을 장려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도시들은 2010년대에 건립된 신축 한옥이 여럿 있으며, 주거용 이외에도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촌 한옥 마을이나 전주 한옥 마을 같은 관광지가 늘어났다.

건축 공법적으로도 수입목재의 등장으로 길이가 긴 나무를 구하기 쉬워지다보니, 조선 후기 건축에서 비교적 짧은 나무를 이어 긴 부재를 만드는 방식이 다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수입목재외에도 공학목재를 이용하였고 최근에는 국산 낙엽송을 이용한 대형 부재도 생산되어, 이와 함께 복층 구조같은 대형 한옥 구조가 쉬워졌다. 또 현대식 시설을 도입하여 기존의 불편하다는 편견에서도 탈피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옥에 대한 지진에 대한 저항성인 내진설계에 대한 자료 미비로 인해, 전통 한옥의 건축물 허가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서양 중목이나 경목구조의 목조주택은 바닥을 고정하는 형태이나, 주춧돌에 기둥을 올려놓는 한옥의 특성상, 내진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자료를 얻지 못한 것. 그러나 신한옥으로 인증을 받으면 무리없이 통과되어 건축할 수 있다.[3]

한옥에 대한 교조적 이미지[편집]

일제강점기 경주 서봉총 발굴 당시 찍힌 2층한옥의 모습
일제강점기 평양 시가지 속 2층한옥의 모습

이런 2층 한옥이나, 화장실, 세면대가 설치된 한옥을 보고 "이건 한옥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건 한마디로 편견에 의해 범하게 되는 오류이다.

당장 상술한 한옥의 역사 문단과 위 사진속 한옥들처럼 한국의 전통 가옥은 수천년의 긴 세월 동안 당연히 특정한 형태를 늘 유지해오지 않고 1층, 2층, 3층 등의 형식으로 층수와 모습이 변하여 왔다. 그랬다면 진정한 한옥은 땅파서 풀떼기를 얹은 집이 되어야 한다. 시대적 발전과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되고 계승되어 온, 유동적인 이미지로서 이해하는 것이 한옥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며,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려온 전통 가옥 양식의 특정 요소들을 가져와 현대인의 요구와 기술과 접목시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당연히 전통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한옥의 역사의 연장 선상에 서서 전통을 계승하고 유지해나가는 일인 것이다.

여담으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수한 단층 한옥이 조선 후기에 절대적으로 보편화된 것에 대해서는 17세기 조선 소빙하기설과 연결지어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당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를 다 땔감으로 베어가 자재로 쓸 목재가 없어지고,[4] 구들장을 까는 것이 필수가 되면서 이런 무거운 바닥을 2층 이상에 설치하긴 힘들기 때문에 복층 구조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져서 전국적으로 수수한 단층 한옥 형태로 나아가게 됐다고 한다.

조선집[편집]

일제강점기에 많이 지어진 일종의 퓨전 한옥. 전통 한옥을 상당 부분 변형하여 수도, 전기가 들어오게했다. 그리고 행랑방과 장독대, 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는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한 한옥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사업가인 정세권 등에 의해 많이 지어져 주로 조선인 서민들이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전통 한옥에 비해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오늘날 남아있는 한옥들의 대부분은 조선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은 실상 없다시피하며 대부분은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집이다.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이 있는 가회동, 삼청동과 익선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행당동, 휘경동, 서대문 및 왕십리 일대 등 곳곳에서 발견되며 현재도 남아있어 관광코스가 된 곳도 있고 때론 낙후된 주택으로 지정되어 허물어 새 집으로 바뀌고 있다.[3]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한옥〉, 《네이버지식백과》
  2. 2.0 2.1 한옥〉, 《위키백과》
  3. 3.0 3.1 3.2 3.3 3.4 3.5 한옥〉, 《나무위키》
  4. 전주한옥마을〉, 《네이버지식백과》
  5. 북촌한옥마을〉, 《네이버지식백과》
  6. 개평한옥마을〉, 《네이버지식백과》
  7. 오성한옥마을〉, 《네이버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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