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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파가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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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파가스타
안토파가스타 위치

안토파가스타(스페인어: Antofagasta, 문화어: 안또파가스따)는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산티아고로부터 북쪽으로 약 1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안토파가스타주주도로 인구는 40만 명이다.[1]

개요[편집]

안토파가스타는 칠레 북부, 안토파가스타주의 주도로 서쪽으로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안토파가스타는 칠레의 1인당 GDP가 37,000달러로 가장 높으며, 산티아고 광역권, 마가야네스주에 이어 인간개발지수 3위이다. 칠레 북부에서는 이키케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도시이다. 안토파가스타는 1860년대에 초석광과 은광이 차례로 발견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칠레에서는 안토파가스타를 ‘북부의 진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시 건설 초기에는 볼리비아의 영토에 속해 있었으나, 칠레 인들에 의해 광산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볼리비아와 칠레 간에 광물 자원을 사이에 둔 갈등이 발생하였다. 칠레는 1866년 볼리비아의 안토파가스타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지만 1879년 볼리비아의 국경 조약 위반을 이유로 다시 주권을 주장하였다. 안토파가스타는 태평양 전쟁(1879–83)을 촉발시킨 1879년 2월 칠레에 의해 점령되었다. 칠레의 주권은 1904년 평화 우호 조약에 따라 볼리비아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안토파가스타는 칠레의 주요 광산 지역 중 하나인 항구이자 주요 서비스 중심지로 광산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은과 초석 채굴은 역사적으로 안토파가스타에게 중요한 일이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구리 채굴은 건설, 소매, 호텔 숙박, 인구 증가, 그리고 20년 말까지 스카이라인 개발의 지속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안토파가스타에게 가장 중요한 채굴 활동이었다. 2010년대 이후로 안토파가스타는 리튬 채굴의 서비스 허브이기도 하며 주로 채광과 채광된 광물을 수출하는 무역업이 발달하였다. 도시에는 안토파가스타 대학교(Universidad de Antofagasta)와 노르테 가톨릭 대학교(Universidad Católica del Norte)를 비롯한 다수의 고등 교육 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안토파가스타 대학교는 1981에 칠레 대학교(Universidad de Chile)와 칠레 공과 대학교(Universidad Tecnológica de Chile)가 통합하여 출범한 지역의 최고 명문 대학교이다. 안토파가스타는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에서 채광된 광물 자원의 수출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카지노 산업과 비즈니스 관광업이 발달하고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안토파가스타는 칠레 북부 아타카마사막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태평양과 연해 있는 칠레 북부의 주요 항구도시이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로부터는 북쪽으로 약 1,100㎞ 떨어져 있다. 안토파가스타의 위도는 남위 23°38′으로 도시 북쪽으로 남회귀선이 지나간다. 안토파가스타시(comuna)는 주(region), 지역(Provincia), 시로 이어지는 칠레의 행정 구역 체계 중 세 번째 위계에 해당한다. 안토파가스타시의 면적은 30,718㎢이다.

안토파가스타는 태평양 연안의 해안 평야 지대에 자리하고 있어 도시의 평균 고도는 해발 40m 정도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동쪽에는 해안 산맥에 속하는 해발 400~500m의 구릉이 형성되어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는 복잡한 형태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해안은 바위가 많고,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사빈 등의 해안 퇴적 지형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최근 도시의 성장에 따라 인공적으로 모래 해변을 조성하였다.

안토파가스타는 열대 기후온대 기후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류인 페루 해류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이 16.3℃로 온화한 편이다. 여름철 평균 기온은 17~20℃, 겨울철 평균 기온은 12~16℃로 기온의 연교차가 작은 편이다. 아타카마사막이 도시를 전체적으로 에워싸는 형태로 분포하고 있으며, 연 강수량이 4㎜에 불과한 매우 건조한 지역이다.

기상 관측 자료에는 1940년의 39㎜와 1991년의 42㎜가 강수량이 가장 많았을 때로 기록되어 있다. 적은 강수량으로 인해 도시에 필요한 용수는 약 450㎞ 떨어진 산페드로(San Pedro) 강에서부터 연결된 송수관을 통해 공급받는다. 해안 지역은 건조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페루 해류의 영향으로 구름이 많은 날씨를 보인다. 페루 해류 위로 따뜻한 공기가 지날 때 카만차카(camanchaca)라고 불리는 안개가 형성되기도 한다. 건조한 기후와 지형으로 인해 화산 활동의 부산물인 다양한 광물이 지표면 가까이에 그대로 보존되어 대규모 노천광이 발달하였다. 도시 인근의 초석(질산칼륨) 광상과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250㎞ 떨어진 추키카마타(Chuquicamata)의 구리 광상이 유명하다.[3]

역사[편집]

형성[편집]

1837년, 볼리비아 정부가 이 지역 일대를 리토랄(Litoral) 주에 포함시키면서 볼리비아의 영토가 되었다. 1866년에 한 칠레 광부가 도시 동쪽 아타카마사막의 살라르델카르멘(Salar del Carmen)에서 초석을 발견하면서 버려진 사막이었던 이 지역이 칠레와 볼리비아 정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1870년에는 아타카마사막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이를 채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칠레의 후안 로페스(Juan Lopez)가 이 지역에 최초로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볼리비아 정부는 칠레로부터 안토파가스타의 광물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1872년 5월 안토파가스타의 시장을 임명하고 국제적 보호를 받기 위해 무역 개방을 지시하였다.

1873년 1월에는 볼리비아 자치시법에 의거하여 안토파가스타를 자치시로 승격시켰다. 1873년 11월에는 칠레의 초석 기업인 안토파가스타 살리트레페로카릴 사(Compañía de Salitres y Ferrocarril de Antofagasta)가 볼리비아 정부와 그동안 안토파가스타에서 초석을 채굴한 것에 대해 15년간 세금을 납부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안토파가스타는 볼리비아의 영토로 확정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향후 칠레와 협상의 여지를 고려한 볼리비아 의회가 계약의 비준을 거부하였고, 이듬해 체결된 국경 조약과 함께 볼리비아와 칠레 간 외교적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남아메리카 태평양 전쟁[편집]

1873년 볼리비아는 페루의 동의하에만 칠레와의 국경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페루와 상호방위 비밀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874년에 볼리비아는 페루와의 비밀 동맹을 어기고 페루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칠레와 새로운 국경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국경 조약에는 볼리비아 영토 내에 체류하는 칠레 인의 재산에 대해서 25년 동안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1873년에 체결된 볼리비아 정부와 칠레의 초석 기업 간의 계약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이전의 계약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해 효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칠레와 새로 계약을 체결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칠레 정부는 새로운 국경 조약에 따라 볼리비아가 칠레에 대해서 부과하는 어떠한 세금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에 따라 칠레 정부는 칠레 기업에 대한 볼리비아의 세금 정책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청했으며,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칠레 기업이 운영하는 채굴 시설을 폐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1879년 2월 볼리비아 정부는 비밀 동맹에 따른 페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안토파가스타의 칠레 광산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여기에 대해 칠레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하면서 남아메리카 태평양 전쟁(Guerra del Pacífico)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은 결국 칠레의 승리로 끝이 났고, 볼리비아와 페루의 연합군은 1884년에 로아(Loa)강과 그에 인접한 볼리비아의 23개 영토를 칠레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볼리비아의 모든 해안 영토가 칠레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볼리비아는 영해를 상실하고 내륙국으로 전락하였다.

전쟁 이후[편집]

안토파가스타는 1884년 남아메리카 태평양 전쟁의 결과에 따라 칠레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이후 경색되었던 칠레와 볼리비아의 관계는 1904년 평화 및 우호 조약과 1905년 영구적 국경 설립 조약 등으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칠레는 안토파가스타를 볼리비아에 개방하고 안토파가스타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를 잇는 안토파가스타-볼리비아 철도(Ferrocarril de Antofagasta a Bolivia, FCAB)를 건설하였다. 이후 안토파가스타 내에서 볼리비아 인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허용되었으며, 안토파가스타는 칠레와 볼리비아를 잇는 가교(架橋)적 입지를 바탕으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2월에는 안토파가스타-볼리비아 철도공사의 노조가 회사 측에 근무 시간을 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회사 측이 이를 거부하자 대규모의 파업을 시작하였다. 철도공사의 노조는 안토파가스타의 콜론 광장(Plaza Colón)에서 항의 시위를 펼쳤고,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3,000여 명에 달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병력이 투입되었고 시위대 58명이 진압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콜론 광장의 대학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12년, 영국 공동체(라 콜로니아 브리타니카)는 공화정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콜론 광장에 빅벤을 모방한 시계탑을 세웠다.

1937년, 안토파가스타 시는 안토파가스타의 국가 작곡을 전국적으로 요청했다. 이 도시의 유명한 의사이자 시인인 안토니오 렌딕과 음악가 후안 바우티스타 콰글리오토가 각각 작사와 음악의 권리를 주장했다. 1948년 2월 2일, 시장 후안 데 디오스 카르모나는 시청에서 열린 회의에서 2월 14일을 안토파가스타 기념일로 제정할 것을 제안했다. 나중에, 대중의 승인 후에, 의회는 그 날짜를 승인했다.

1956년 발파라이소 가톨릭 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북부 가톨릭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10월 9일, 칠레 대학교의 일부인 센트로 유니버시티리오 조나 노르테 (대학 센터 북구)의 설립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1968년 대학 개혁 협정에 따라 칠레 대학교의 안토파가스타 센터가 설립되었다. 1981년 칠레 대학교와 기술 주립 대학교가 합병하면서 안토파가스타 대학교가 탄생했다.

1991년 6월 18일, 산사태가 도시의 대부분을 황폐화시켰고, 2,464채의 가옥과 493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물질적 피해는 약 7천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이 재난으로 9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실종되었으며 약 2만 명이 집을 잃었다. 1995년 7월 30일 리히터 규모 7.3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비록 3명의 사망자와 1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사건의 규모에 비해 구조적인 피해는 미미했다.

건설 산업은 최근에 건설된 많은 고층 건물들, 도시의 북쪽으로의 도시 지역의 확장, 그리고 코스타네라 애비뉴 전체의 리노베이션과 도심 보행로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경제 발전에 있어서, 다양한 고급 호텔 체인뿐만 아니라 많은 소매 체인과 슈퍼마켓이 정착하여 광업과 항만 활동에서 자본과 무역 파트너를 끌어들이기 위해 비즈니스 관광을 촉진했다. 비슷하게, 그 도시는 카지노 엔조이 안토파가스타의 설치를 받았다.[4]

경제[편집]

안토파가스타는 구리의 채광, 초석, 요오드 등의 비철금속 광물의 채광이 주요 산업이다. 칠레 전체 구리 생산량의 50% 이상을 안토파가스타에서 담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중요성으로 인해 ‘북부의 진주(La perla del Norte)’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한 채굴된 광물의 제련업과 교역을 위한 항만 기능이 함께 발달하는 등 관련 산업이 도시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주요 광물의 국제적인 수요 변동에 따라 도시 경제가 크게 영향을 받는다.

안토파가스타 항(Puerto de Antofagasta)은 주변 지역에서 산출되는 광물뿐만 아니라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에서 산출되는 광물 자원의 수출항으로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북쪽의 메히요네스(Mejillones)에 대규모 항만이 건설되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20㎞ 지점에 위치한 시우다드엠프레사리알 라네그라(Ciudad Empresarial La Negra) 산업 단지와 북부의 페드로아기레 세르다아베니다(Pedro Aguirre Cerda Avenida) 산업 단지에는 구리 정제를 위한 시설과 용광로 등이 밀집해 있으며, 시멘트와 기타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도 분포하고 있다.

안토파가스타는 광업과 관련된 자원 박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대표적인 행사로는 구리 생산업체를 중심으로 안토파가스타 산업조합(Asociación de Industriales de Antofagasta, AIA)이 주관하는 ‘엑스포노르(EXPONOR)’가 있다.[5]

교통[편집]

안토파가스타의 도심은 도로가 협소해서 출퇴근 시간대의 교통 정체가 심각하다. 주요 간선도로는 도심과 외곽의 안토파가스타 주를 연결하는 5번 지방도와 도심 북쪽의 공항과 라포르타다(La Portada) 해안을 연결하는 CH-1 지방도 등이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택시와 함께 트란스안토파가스타(TransAntofagasta)라고 불리는 소형 버스가 총 13개의 노선에 걸쳐 운행되고 있다.

안토파가스타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를 연결하는 총연장 900㎞의 국제 철도 노선인 안토파가스타 볼리비아 철도는 안토파가스타의 광산 지대에서 채굴된 광물들을 수송한다. 이 철도는 볼리비아의 안디노(Andino) 철도와 아르헨티나의 벨그라노(Belgrano) 철도와도 연결된다.

도심 북쪽의 세로 모레노(Cerro Moreno)에 있는 안드레스 사베야 갈베스 공항(Aeropuerto Nacional Andrés Sabella Gálvez)은 페루 리마(Lima)의 직항선이 유일한 국제선인 국내선 중심의 공항이다. 주요 취항사로는 페루 타카 항공(Taca, 또는 Avianca Peru)을 비롯하여 란 항공(LAN, Línea Aérea Nacional de Chile), 팔 항공(PAL Airlines) 등이 있다.

항만 시설로는 안토파가스토 항만 공사(EPA, Empresa Portuaria Antofagasta)가 운영하는 제1터미널과 안토파가스타 국제 터미널(ATI, Antofagasta Terminal Internacional)이 운영하는 제2터미널이 있다. 두 터미널은 각각 3개, 4개의 부두를 보유하고 있어 연간 500만 톤의 화물을 취급하고 있으며, 크루즈 선의 정박 시설도 갖추고 있다. 이 외에도 도심 남쪽의 콜로 언덕 부근에 칠레 최대의 광산 기업인 에스콘디다(Escondida)의 전용 부두가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안토파가스타〉, 《위키백과》
  2. 안토파가스타(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Antofagasta", Wikipedia
  4. 안토파가스타〉, 《요다위키》
  5. 안토파가스타〉,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남아메리카 국가
남아메리카 도시
남아메리카 지리
남아메리카 섬
남아메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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