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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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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
해밀턴 위치

해밀턴(영어: Hamilton)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으며 온타리오호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캐나다에서 10번째이자 온타리오주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 인구는 약 57만 명이고 도시권 인구는 약 79만 명이다.[1]

개요[편집]

해밀턴은 온타리오주 남부, 온타리오호 연안에 위치한다. 해밀턴은 토론토 남서쪽 58km에 위치한 대토론토와 해밀턴 지역(GTHA)에 속하며 해밀턴 지방자치구(Hamilton Regional Municipality)의 일부이자 중심도시로써 기능하고 있다. 해밀턴은 1669년 프랑스인 탐험가가 발견한 땅에 1778년 영국의 보수주의들이 모여 만든 마을을 근간으로 한다. 1792년 영국 왕실은 지금의 미시소거를 비롯한 토론토 서남부 땅을 구입해 왕실 충성파들 및 영국 측에 협조한 이로쿼이 연맹에게 헌사하였으며, 미국 독립 전쟁으로 미국 땅을 떠나온 영국계 이주민들의 정착지가 된다. 얼마 후 1812년 전쟁이 끝나고,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퀸스턴(Queenston)의 사업가 로버트 해밀턴(Robert Hamilton)의 아들인 조지 해밀턴(George Hamilton)이 지금의 해밀턴 지역 땅을 사들였다. 해밀턴은 본인의 소유지가 된 땅에 사업체와 사회기반시설을 들여놓는 등 마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과 함께 북아메리카에도 산업화의 바람이 불자, 미국 동부 및 중서부와 가깝고 온타리오호와 맞닿아 있어 지리적인 유리함까지 갖춘 해밀턴이 캐나다의 주요 산업 기지로 성장한다. 1846년 정식으로 캐나다 연방의 승인을 받은 도시는 조지 해밀턴의 이름을 따 해밀턴(Hamilton)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그만 마을이었던 해밀턴은 온타리오호 서쪽에 있는 인구 700만의 황금 말발굽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해밀턴 항은 온타리오호의 서부 끝에 있는 세인트 로렌스 수로의 진입점으로 캐나다의 5대호 상업항 중 가장 물동량이 많다. 해밀턴은 철강제조와 기계가공, 자동차 부품 제조업, 식음료 제품, 유통업, 건축 제품 및 골재, 화학 등 온타리오주의 5대 주요 산업의 중심이며 인접한 토론토 광역권과 함께 캐나다 최대의 공업지대를 형성한다. 캐나다 최대 철강회사 스텔코(Stelco)와 여러 제철 관련 기업이 연간 66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해밀턴은 미국 북동부 주요 산업도시와 가까워 경쟁력이 높다. 교육 기관으로 맥마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 리디머 신학 대학교(Redeemer University) 및 모호크 대학(Mohawk College), 총 3개 고등교육기관의 본거지이다. 1887년에 설립된 침례교 계열의 맥마스터대학은 신학, 의학분야에서 유명하며, 맥클린스 잡지에 의해 캐나다에서 가장 혁신적인 의과대학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형적인 공업도시다 보니 관광 산업은 다소 부실하지만, 주요 관광지로 해밀턴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al Gardens), 캐나다 전투기 박물관(Canadian Warplane Heritage Museum), 트래킹 장소인 브루스 트레일 등이 있다.[2]

역사[편집]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중립 원주민이 토지의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들은 휴론과 그들의 프랑스 동맹에 대항하여 영국과 동맹을 맺은 5개 국가에 의해 점차적으로 쫓겨났다. 웨스트오버의 마을은 원래 세네카 이로쿼이 부족 마을이었던 티나와타와의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티나와라 마을은 1699년 9월에 프랑스인에 의해 처음 방문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후, 약 10,000명의 연합 제국 충성파가 미국을 떠나 현재 온타리오 남부인 어퍼 캐나다에 정착했다. 1792년, 왕실은 해밀턴이 현재 있는 땅을 매입했다. 국왕은 이 지역의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이번 구매로 충성파에게 토지를 부여했다. 이 새로운 정착민들은 곧 값싸고 경작 가능한 땅에 이끌려 더 많은 미국인들이 뒤따랐다. 동시에, 영국과 동맹을 맺은 많은 이로쿼이족들이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여 현재의 미국에서 잃어버린 토지에 대한 보상으로서 온타리오 호수 서쪽의 보호구역에 정착하였다. 1812년 전쟁 동안, 영국 정규군과 캐나다 민병대는 스토니 크릭 전투에서 침략한 미군을 물리쳤고, 현재 해밀턴 동부에 있는 공원에서 싸웠다.

해밀턴 마을은 조지 해밀턴이 전쟁 직후 어퍼 캐나다 입법부 지역 의원이었던 제임스 듀랜드(James Durand)의 농장 소유물을 구입하면서 만들어졌다. 북쪽의 부동산 소유주인 나타니엘 휴슨은 조지 해밀턴과 협력하여 해밀턴의 사유지에 법원과 감옥의 제안을 준비했다. 해밀턴은 미래의 부지를 위해 그 땅을 왕에게 제공했다. 듀랜드는 휴슨과 해밀턴에 의해 나중에 마을의 부지가 된 부동산을 팔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지시받은 대로, 듀랜드는 해밀턴 타운사이트가 소속된 새로운 고어 구역을 설립하는 입법회의 회기 동안 요크에서 제안서를 돌렸다.

처음에 이 마을은 고어 구역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아니었다. 해밀턴의 갑작스러운 번영의 초기 징후는 1816년 온타리오주 앤캐스터를 제치고 새로운 고어 지구의 행정 중심지로 선정되었을 때 나타났다. 해밀턴의 또 다른 극적인 경제적 전환은 1832년에 운하가 마침내 외부 모래톱을 뚫고 해밀턴이 주요 항구가 될 수 있게 되었을 때 일어났다. 영구 감옥은 1816년에 만들어진 두 개의 광장 중 하나인 프린스 광장에 절단석 디자인이 완성되었을 때인 1832년까지 건설되지 않았다. 그 후 1833년 2월 13일, 최초의 경찰청과 도시 경계가 법령에 의해 정의되었다. 공식적인 도시 지위는 1846년 6월 9일 캐나다 의회의 법률에 의해 달성되었다.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1855년 캐나다 그랜드 로지, 1879년 웨스트 플램보로 감리교 교회, 1890년 공공 도서관, 1893년 라이트 하우스 백화점 등 몇몇 유명한 건물들이 19세기 말에 지어졌다. 캐나다의 첫 번째 상용 전화 서비스, 대영제국 최초의 전화 교환기, 북미의 두 번째 전화 교환기는 각각 1877년에서 1978년 사이에 도시에 설립되었다.

1906년 해밀턴 거리 철도 파업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산업체들이 확장되면서 해밀턴의 인구는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에 두 배로 증가했다. 스틸코와 도파스코라는 두 개의 철강제조 회사가 각각 1910년과 1912년에 설립되었다. 인구와 경제 성장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에는 도시의 첫 고층 건물인 피갓 빌딩이 건설되었고, 1930년에는 맥마스터대학이 토론토에서 해밀턴으로 이전하였고, 1934년에는 캐나다에 있는 두 번째 캐나다 타이어 매장이 이곳에 문을 열었다. 1940년에는 공항이 완공되었고, 1948년에는 스터드베이커 조립라인이 건설되었다

2001년 1월 1일, 새로운 해밀턴시는 해밀턴과 인근 5개 자치단체인 앤캐스터, 던다스, 플램버러, 글랜브룩, 스토니 크리크가 합병하여 형성되었다. 합병 전에 "구" 해밀턴시에는 331,121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100개의 동네로 나뉘었다. 해밀턴-웬트워스의 이전 지역은 490,268명의 인구가 있었다. 합병으로 교외에 대한 보조금이 폐지되는 단일 지방 자치체가 탄생했다. 새로운 합병 도시는 100개 이상의 동네와 주변 지역사회에 51만 9,949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3]

교통[편집]

토론토에서 403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다 보면 금방 도착하며, 토론토와 비슷한 거리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어 미국과도 매우 가깝다. 시내 대중교통은 시내버스 하나뿐이며, 장기적으로 LRT를 지을 계획이 있다. 시외 대중교통은 GO 트랜짓이 있으며, 시내의 해밀턴 GO 센터(Hamilton GO Centre) 역과 다운타운 북쪽의 웨스트 하버 GO(West Harbour GO) 역에서 레이크쇼어 웨스트 선(Lakeshore West)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시내 남쪽에 존 C. 먼로 해밀턴 국제공항(John C. Munro Hamilton International Airport)이 있다.

맥마스터대학교[편집]

맥마스터대학교(McMaster University)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에 있는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줄여서 ‘맥(Mac)’이라고도 한다. 1887년 온타리오주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에 의하여 토론토의 맥마스터홀에 설립되었다. 역사적으로는 1830년대 초기에 침례교회가 중앙캐나다에서 벌인 교육사업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학교 이름은 그리스도교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 많은 유산을 기부하도록 유언한 상원의원이자 은행가 윌리엄 맥마스터(William McMaster:1811∼1887)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

1890년부터 예술과 신학 강의를 시작하고, 1894년 첫 학위를 수여했다. 1930년 해밀턴에 새로 조성한 지금의 주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캠퍼스 부지와 건물들은 졸업생들,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의 침례교 교인들, 해밀턴 시민들이 내는 기부금 등으로 마련되었다. 1957년 무종파의 사립대학으로 되기까지는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의 침례교 협의회에서 대학 총장을 선출하였다. 무종파 대학이라 해도 이후 맥마스터신학대학과의 연계교육이 계속되었다.

1969년 제정된 '맥마스터법'에 의하여 맥마스터신학대학 이외의 학부는 대학의 부총장들이 학장을 겸임하는 예술대학, 과학대학, 보건과학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74년 대학 조직을 드그루트 상학부(DeGroote School of Business), 공학부, 보건과학부, 인문학부, 과학부, 사회과학부의 6개 학부로 나누고, 부총장을 각 학부의 학장으로 대체하는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각 학부에서는 학부·대학원과정을 제공하며, 평생 교육센터에서는 다양한 인증·학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주 캠퍼스는 토론토에서 남서쪽으로 68km 떨어진 온타리오호(湖) 서쪽 끝에 있으며 해밀턴 시내에서 가깝다. 본래 있던 6동의 건물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웃 도시인 벌링턴에도 2004년 새로운 캠퍼스를 조성했다. 부설시설로 도서관, 미술관, 핵반응로, 탠덤형 가속장치, 온실, 체독 맥마스터 병원, 통신연구소, 버트런드 러셀 기록보관소, 휴머니티 커뮤니케이션 센터, 컴퓨터 연구소 등이 있다. 1994년 버트넘 브록하우스 교수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4]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해밀턴 (온타리오주)〉, 《위키백과》
  2. 해밀턴(캐나다)〉, 《나무위키》
  3. 온타리오 주 해밀턴〉, 《요다위키》
  4. 맥마스터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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