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하트퍼드

해시넷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하트퍼드
하트퍼드 위치

하트퍼드(Hartford)는 미국 코네티컷주 중부에 있는 코네티컷주의 주도이다. 도시 인구 기준으로는 12만 명으로 코네티컷주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도시권 인구 기준으로는 121만 명으로 코네티컷주 최대도시이자 미국 48위 규모의 도시권이다. 하트퍼드는 1635년에 설립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1]

개요[편집]

하트퍼드는 코네티컷주 북부의 코네티컷강(江) 연안에 있으며 롱아일랜드만에서 61㎞ 떨어져 있다. 지명은 1637년 새뮤얼 스톤(Samuel Stone)의 고향인 영국의 하트퍼드를 기념해 지어진 것이다. 1633년 뉴암스테르담에서 온 네덜란드 상인들이 코네티컷강의 지류인 파크강(江) 어귀에 교역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1635년 매사추세츠주 뉴타운(지금의 케임브리지)에서 온 60명의 영국인 개척자들이었다. 이어 1632년 뉴타운에서 설립된 토머스 후커(Thomas Hooker)와 새뮤얼 스톤(Samuel Stone)이 이끄는 그리스도의 제일교회(회중중심교회) 교도들이 1636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1784년 시(市)와 읍(郡)이 동시에 인가를 받았으며 1896년에 통합되었다. 하트퍼드는 현재도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주의 심장부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특히 1794년 이래 보험업이 발달하여, 현재 30여 개의 유명 보험회사가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어, '보험의 도시'라고 불린다. 19세기 초에는 치과용 금, 리볼버, 방수포, 시계 등의 생산에 주력하였는데, 19세기 후반부터 각종 기계, 인쇄, 제본 등의 공업도 성해졌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찰스 불핀치(Charles Bulfinch)가 설계하여 1796년에 완공한 옛 주의회 의사당이다. 주 청사 건물에는 미국독립혁명 때 활약했던 이즈레이엘 퍼트넘(Israel Putnam)의 묘비가 있다. 1844년 문을 연 워즈워스 학술진흥원은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예술박물관이며, 행위예술을 강조하는 화랑인 리얼아트웨이스, 많은 종류의 장미를 전시하고 있는 엘리자베스공원 등이 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트리니티대학(1823), 하트퍼드 신학대학(1834), 모스 직업학교(1860), 하트퍼드여자대학(1939), 하트퍼드주립기술대학(1946), 더그레이터하트퍼드지역사회대학(1967), 코네티컷대학교 분교(1940) 등이 있다. 웨스트하트퍼드에는 하트퍼드대학교(1957)와 세인트조지프대학(1932)이 있다. 하트퍼드시의 유명한 도시재개발사업인 콘스티투션 플라자가 1964년에 시행되어 정비된 시가지에는 공원, 문화시설 등이 많다. 1764년에 창간된 《하트퍼드 신보 Hartford Courant》는 미국내 신문 중 가장 오래된 신문 중 하나이다.[2]

역사[편집]

다양한 부족들이 하트퍼드나 그 주변에 살았으며 모두 알곤킨(Algonquian) 민족이였다. 여기에는 주로 코네티컷강의 동쪽인 포덩크족, 하트퍼드의 북쪽과 서쪽인 포쿠녹족, 심즈베리 지역의 마사코족, 웨스트 하트퍼드와 파밍턴의 툰시스족, 남쪽의 왕궁족, 그리고 하트퍼드 자체의 사우키오족이 포함되었다.

초기[편집]

이 지역을 탐험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유럽인은 1614년 코네티컷강을 거슬러 올라간 아드리안 블록(Adriaen Block) 휘하의 네덜란드인이다. 뉴암스테르담에서 온 네덜란드 모피 상인들은 1623년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를 위해 교역소를 세우고 이 지역을 요새화하라는 사명을 띠고 돌아왔다. 원래 부지는 현재의 셸던, 차터 오크 지역의 파크강 남쪽 둑에 위치해 있었다. 이 요새는 포트 후프 또는 '희망의 집'으로 불렸다. 1633년 제이콥 반 컬러(Jacob Van Curler)는 공식적으로 포트 후프 주변의 땅을 피쿼트 족장으로부터 적은 금액에 샀다. 요새는 1654년에 버려졌지만, 오늘날 이 지역은 더치 포인트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교역소를 설립한 중요한 이유는 뉴네덜란드와 뉴잉글랜드 일부 지역의 사실상 통화인 왐품(wampum) 의 흐름을 귀중한 아메리카 원주민 모피 상인과 주고받는 흐름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네덜란드 전초기지와 그곳에 주둔한 소수의 네덜란드 병사들은 영국인의 이주를 거의 막지 못했고, 네덜란드인들은 곧 자신들이 수적으로 열세임을 깨달았다. 희망의 집은 전초 기지로 남아 있었지만 영국 정착민들의 물결에 의해 꾸준히 삼켜졌다. 1650년, 피터 스타이베산트(Peter Stuyvesant)는 네덜란드와 영국 식민지 사이의 영구적인 경계를 협상하기 위해 영국 대표들을 만났다. 그들이 합의한 선은 원래 정착지에서 서쪽으로 8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영국인들은 1636년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현재의 다운타운과 셸던, 차터 오크 지역 근처의 포트 후프 상류에 정착했다.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와 사무엘 스톤 (Samuel Stone)은 주지사 존 헤인즈(John Haynes )와 함께 매사추세츠 베이 콜로니(현 케임브리지)의 뉴타운에서 도보 여행을 하면서 100명의 정착민과 130마리의 소를 이끌고 네덜란드 요새 바로 북쪽에 정착을 시작했다. 정착지는 원래 뉴타운(Newtown)이라고 불렸지만 스톤의 고향인 영국 하트퍼드(Hertford)를 기리기 위해 1637년에 하트퍼드(Hartford)로 변경되었다.

하트퍼드의 청교도 목사로서 토마스 후커는 큰 권력을 행사했다. 1638년 그는 코네티컷의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분리 및 시민 정부의 형성에 대한 틀을 제공한 코네티컷 기본 명령(Fundamental Orders of Connecticut)의 집필에 영감을 준 설교를 했다. 코네티컷의 기본 명령은 찰스 2세가 코네티컷에 부여한 1662년 왕실 헌장이 있기 전까지 코네티컷 식민지의 법적 근거였다.

19세기[편집]

1814년 12월 15일, 5개의 뉴잉글랜드주의 대표자들이 하트퍼드 협약에 모여 뉴잉글랜드의 미국으로부터의 분리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19세기 초, 하트퍼드 지역은 노예폐지론자들의 활동의 중심지였고, 가장 유명한 노예폐지론자들은 비처(Bechers) 가문이었다. 라이먼 비처 (Lyman Beecher) 목사는 노예제 반대 설교로 알려진 중요한 회중 목사였다.

1860년, 하트퍼드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폐지론 지지자였던 최초의 와이드 어웨이크스(Wide Awakes)가 있던 곳이다. 이 지지자들은 링컨의 도시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종종 불꽃놀이와 음악을 포함한 정치적, 사회적 행사인 횃불 퍼레이드를 조직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인기를 끌었고 결국 19세기 중후반 캠페인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하트퍼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주요 제조업 도시였다. 20세기 중반의 산업 혁명 동안, 코네티컷 리버 밸리 도시들은 많은 주요 정밀 제조 혁신을 만들어냈다. 그중에는 하트퍼드의 선구적인 자전거 및 자동차 제조업체인 포프가 있었다. 거의 모든 이전 북부 제조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공장이 폐쇄되거나 이전되거나 운영이 축소되었다.

1850년경 하트퍼드 출신 새뮤얼 콜트는 교환 가능한 부품으로 수천 대의 리볼버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정밀 제조 공정을 완성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산업이 이러한 기술을 채택하고 적용하였고, 하트퍼드는 재봉틀, 자전거, 자동차, 그리고 주요 타자기 제조업체를 포함한 다양한 제품의 생산 중심지가 되었다.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 컴퍼니(Underwood Typewriter Company) 20세기 전반기에 하트퍼드를 "세계의 타이프라이터 의사당"으로 만들었다.

프랫 앤 휘트니 회사(Pratt & Whitney Company)는 1860년 하트퍼드에 설립되었다. 회사는 미국 남북전쟁 동안 북군이 사용할 총기 제조 기계를 포함하여 다양한 공작기계를 제조하는 대규모 공장을 건설했다. 1925년 회사는 하트퍼드 공장에서 항공기 엔진 설계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사업가 앨버트 포프(Albert Pope)는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에서 본 영국제 하이휠 자전거에서 영감을 얻어 미국에서 자전거 생산을 위한 특허권을 구입했다. 하지만 그는 첫 주문을 도급받고 싶어 1878년 포프의 첫 자전거를 생산한 위드 재봉틀 회사의 조지 페어필드와 접촉했다. 자전거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공장에서 생산은 확대되었고, 위드는 타이어를 제외한 모든 부품을 생산했다. 1890년까지 자전거에 대한 수요는 쇠퇴한 재봉틀 시장을 가렸다. 그래서 포프는 위드 공장을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포프 제조 회사로 이름을 변경했다. 자전거 붐은 단명하여 점점 더 많은 소비자가 개인 자동차 여행을 갈망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사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포프는 자동차 부서를 개설하고 1897년 "Mark III"을 시작으로 전기 마차를 선보였다. 헨리 포드의 전성기가 아니었다면 그의 벤처는 하트퍼드를 자동차 산업의 수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20세기[편집]

1909년 4월 12일 주에 코네티컷강은 저조위 기준 7.47m의 기록적인 홍수 단계에 도달하여 하트퍼드 시를 범람시키고 큰 피해를 입혔다. 1944년 7월 6일 하트퍼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 현장 중 하나였다. 168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주로 어린이와 어머니 등 168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푸에르토리코의 많은 주민들은 하트퍼드로 이주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하트퍼드를 둘러싼 교외 지역이 성장하고 번영하기 시작했고 수도인 하트퍼드는 오랜 쇠퇴를 시작했다. 거대 보험사인 코네티컷 제너럴(현재의 CIGNA)은 블룸필드 교외에 있는 새롭고 현대적인 캠퍼스로 이전했다.

하트퍼드는 1990년대에 인구가 11% 줄어들면서 문제를 겪었다. 1987년 캐리 색슨 페리는 하트퍼드 시장으로 선출되어 미국 주요 도시의 첫 흑인 여성 시장이 되었다. 리버프런트 플라자는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강변과 시내를 잇는 광장으로 1999년 개장했다.

2017년 7월, 하트퍼드는 제9장 파산을 신청하는 것을 고려했다. 수년간 인구 기반 축소 및 고액 연금 의무 이후, 2018년에는 6,500만 달러의 예산 격차가 예상되었다. 시는 공공 서비스 예산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의 양보를 얻었지만 이러한 조치는 균형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해 말 주정부의 구제금융으로 그 도시는 파산 신청을 할 수 없게 되었다.[3]

하트퍼드대학교[편집]

하트퍼드대학교(University of Hartford, UHart)는 미국 코네티컷주 웨스트하트퍼드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4km²에 조성된 메인 캠퍼스가 인근 하트퍼드와 블룸필드까지 뻗어 있다. 미국 48개주와 43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수학한다. 학사과정 82개와 준학사과정 10개, 대학원과정 28개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 및 학위 프로그램은 공학기술인증원공학인증위원회(EAC/ABET)와 경영학선도대학협회(AACSB), 뉴잉글랜드고등교육위원회 등의 인증을 받았다. 이 대학교는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미국대학순위에서 234위를 기록했다. 2023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801-1000위권, 미국 대학 가운데 181-190위권에 들었다.

하트퍼드대학교는 1957년 하트퍼드미술학교(Hartford Art School), 힐리어칼리지(Hillyer College), 하트스쿨(Hartt School)의 합병을 통해 설립 인가를 받았다. 헌장을 받기 전까지 하트퍼드대학은 독립된 법인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1877년에 문을 연 하트퍼드미술학교는 소설 '톰 아저씨 오두막'의 저자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와 마크 트웨인의 부인 올리비아 랭던 클레멘스(Olivia Langdon Clemens) 등이 포함된 하트퍼드 여성단체가 하트퍼드장식미술회(Hartford Society for Designal Art)로 설립했다. 원래 위치는 미국 최초의 공공미술관인 워즈워스 아테네움(Wadsworth Atheneum)이었다. 하트퍼드대학교는 여전히 이 박물관과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장군 찰스 힐리어(Charles Hillyer)의 이름을 딴 힐리어칼리지는 1879년 하트퍼드 YMCA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20세기 초 하트퍼드가 자동차산업의 신흥 중심지였던 시기에 자동차기술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1947년 공식적으로 YMCA와 분리되고, 제대군인원호법(G.I. Bill)에 따라 대학교육을 받으려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합병 당시 힐리어칼리지는 교육 · 간호 · 보건전문대학과 바니경영대학, 공학 · 기술 · 건축대학, 문리대학, 기초교양대학(College of Basic Studies)으로 알려진 힐리어칼리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트스쿨은 1920년 율리우스 하트와 모셰 파라노프에 의해 설립되었다. 하트스쿨은 하트퍼드대학교의 종합공연예술원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에서 음악과 무용, 연극으로 가장 인정받는 학교 중 하나로 꼽힌다. 1988년부터 하트퍼드대학교는 코네티컷 스페이스그랜트칼리지컨소시엄(Connecticut Space Grant College Consortium)의 선도 기관이었다. 1990년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하트퍼드여자대학(HCW)을 인수했다. 2003년 하트퍼드여자대학을 폐쇄하고 모든 학과를 인문과학대학으로 이전했다. 하트퍼드대학교는 하트퍼드와 인근 교외지역 출신 학생들을 위해 특수반 학교로 하트퍼드마그넷스쿨(초등학교)과 이공계 고등학교 등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월터 해리슨(Walter Harrison) 총장 재임 시절에 새로운 생활관인 호크홀 등 몇 가지 야심찬 건축계획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3,400만 달러를 들여 통합 과학 · 공학 · 기술(ISET)단지와 르네새뮤얼스센터(Renée Samuels Center), 모트 · 이르마헨델공연예술센터(Mort and Irma Handel Performing Arts Center), 고등학교 등이 신축되었다. 2008년 여름 캠퍼스의 교사와 생활관을 연결하는 파크강 다리를 재건축했다.[4]

지도[편집]

미국 행정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Grayball.png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하트퍼드 (코네티컷주)〉, 《위키백과》
  2. 하트퍼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하트포드 (코네티컷 주)〉, 《요다위키》
  4. 하트퍼드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카리브제도 국가
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북아메리카 주변 지역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하트퍼드 문서는 북아메리카 도시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