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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2009년 : 돌아온 창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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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의 요구에 따라 창업자 제리양이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나, 주주들의 기대와 달리 제리 양에게는 야후를 회생시킬 만한 비전과 전략이 없다 판단한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야후에게 450억달러에 달하는 인수를 제안한다. 상당히 큰 금액이었지만 적정가격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리 양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Carl Icahn)이 나선다. 칼 아이칸은 야후의 현 상황을 볼 때 매우 합리적인 가격의 인수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여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 주장한다. 이후 칼 아이칸의 적대적 인수 공격에 대한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결국 미래를 위한 전략 고민은 하지도 못하게 되면서 2008년 10월 15,000명의 직원중 10%를 해고해야만 했고, 제리 양은 11월 사임한다.<ref name="역사"></ref>
 
:이사회의 요구에 따라 창업자 제리양이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나, 주주들의 기대와 달리 제리 양에게는 야후를 회생시킬 만한 비전과 전략이 없다 판단한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야후에게 450억달러에 달하는 인수를 제안한다. 상당히 큰 금액이었지만 적정가격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리 양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Carl Icahn)이 나선다. 칼 아이칸은 야후의 현 상황을 볼 때 매우 합리적인 가격의 인수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여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 주장한다. 이후 칼 아이칸의 적대적 인수 공격에 대한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결국 미래를 위한 전략 고민은 하지도 못하게 되면서 2008년 10월 15,000명의 직원중 10%를 해고해야만 했고, 제리 양은 11월 사임한다.<ref name="역사"></ref>
* '''2009~2012년 :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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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양이 사임한 이후, 야후는 손쓸 틈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2009년 1월 [[오토데스크]](Autodesk) 최고 경영자를 역임한 [[캐롤 바츠]](Carol Bartz)를 최고 경영자로 영입한다. 캐롤 바츠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수익이 안나는 사업부문을 폐쇄하는 등 비용절감에 집중하지만, 비용절감만으로 회사 성장은 당연히 실패한다. 심지어 캐롤 바츠는 야후의 주요 투자결정 중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알리바바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하지 못하고 2009년에는 자사의 검색엔진을 없애고 [[마이크로소프트 빙]](Microsoft Bing)과 제휴를 맺는 전략을 채택한다. 2010년에는 페이스북마저 야후를 방문자수에서 앞서고, 재무실적이 더 악화되자 2011년 9월 캐롤 바츠는 해고된다. 급하게 최고 재무 관리자(CFO)였던 [[팀 모스]](Tim Morse)가 최고 경영자로 지명되었다가, 2012년 1월 [[페이팔]](PayPal) 사장을 역임한 [[스캇 톰슨]](Scott Thompson)을 최고 경영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스캇 톰슨은 학력 허위 기재 혐의로 4개월만에 물러난다. 스캇 톰슨을 대신하여 야후 미디어 책임자였던 [[로스 레빈스]](Ross Levinson)가 최고 경영자를 맡는다.<ref name="역사"></ref>
 
:제리 양이 사임한 이후, 야후는 손쓸 틈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2009년 1월 [[오토데스크]](Autodesk) 최고 경영자를 역임한 [[캐롤 바츠]](Carol Bartz)를 최고 경영자로 영입한다. 캐롤 바츠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수익이 안나는 사업부문을 폐쇄하는 등 비용절감에 집중하지만, 비용절감만으로 회사 성장은 당연히 실패한다. 심지어 캐롤 바츠는 야후의 주요 투자결정 중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알리바바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하지 못하고 2009년에는 자사의 검색엔진을 없애고 [[마이크로소프트 빙]](Microsoft Bing)과 제휴를 맺는 전략을 채택한다. 2010년에는 페이스북마저 야후를 방문자수에서 앞서고, 재무실적이 더 악화되자 2011년 9월 캐롤 바츠는 해고된다. 급하게 최고 재무 관리자(CFO)였던 [[팀 모스]](Tim Morse)가 최고 경영자로 지명되었다가, 2012년 1월 [[페이팔]](PayPal) 사장을 역임한 [[스캇 톰슨]](Scott Thompson)을 최고 경영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스캇 톰슨은 학력 허위 기재 혐의로 4개월만에 물러난다. 스캇 톰슨을 대신하여 야후 미디어 책임자였던 [[로스 레빈스]](Ross Levinson)가 최고 경영자를 맡는다.<ref name="역사"></ref>
 
* '''2012~2016년 : 야후의 마지막'''
 
* '''2012~2016년 : 야후의 마지막'''

2020년 7월 8일 (수) 17:42 판

야후(Yahoo)
야후(Yahoo)

야후(Yahoo)는 미국의 인터넷 검색엔진 사이트이다. 1994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학생이었던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비드 파일로(David Filo)가 만들었다. 야후(yahoo.com)는 한때 세계 최대의 검색 사이트였으나, 구글에게 밀려서 1위 자리를 내어줬다. 2003년 검색광고 대행 회사인 오버추어(Overture)를 인수했고, 2005년 사진 공유 사이트인 플리커(flickr.com)를 인수했다. 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다.

개요

야후는 기본적으로 디렉터리(directory) 검색을 전문으로 하지만 동시에 검색엔진도 제공하며 유지넷(use net)과 이메일(e-mail) 주소도 검색할 수 있다. 적은 데이터베이스(DataBase,DB) 를 갖고 있으면서도 양질의 검색 결과를 제공하는 검색엔진으로 꼽힌다. 전 세계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 W3) 서버가 분야별, 장르별로 메뉴화되어 있어 원하는 분야를 검색하는 데 편리하다. 알렉사 인터넷 등의 업체들에 따르면, 야후는 오늘날 4억 1200만 명 이상의 고유 방문자를 보유하며, 2012년에는 야후 전체 네트워크의 하루 평균 페이지뷰는 44억 페이지를 기록한다. 네이버(NAVER)의 지식인 서비스를 벤치마킹야후 앤서즈는 미국 지식시장 점유율 96%를 달성하고, 2006년 미국 웹 검색시장의 50%를 점유한다. 그러나 인터넷 시장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야후는 구글에 밀려 2007년 8월 시장점유율이 23.3%까지 내려감에 따라, 경영실적 악화로 마이크로소프트사 및 구글과 인수 합병을 진행한다. 2008년 2월 1일 마이크로소프트사가 1주당 31달러 규모의 야후 인수를 제안했지만 야후는 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야후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안은 자사의 가치를 저평가한 것이며 야후의 장래성, 잠재적 가치 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이라고 밝힌다. 2006년부터 야후는 40달러 이상으로 거래된 적이 없으나 2014년, 야후의 40달러 이상으로 거래된다. 당시 인수 제안이 있기 전 야후의 주가는 19.18달러로 기록된다. 야후 자회사로 오버추어가 있으며, 오버추어는 야후 서치마케팅으로 서비스 된다.[1] 한편, 1997년 후반에 야후와 소프트뱅크의 합작을 통해 야후 코리아가 대한민국에 동명의 현지법인을 세워 진출하며 상륙직후 순식간에 당시 대한민국 인터넷 포털계 1위이었던 심마니를 제치고 야후 코리아가 1위 사이트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너무 낮은 점유율로 야후 코리아는 2012년 12월 31일자로 모든 서비스가 중단된다.[2]

주요 인물

창업자

  • 제리 양(杨致远, 양치원, Jerry Yang, yáng zhì yuǎn, 1968년 11월 6일 ~ )
인터넷 검색 포털 사이트인 야후(Yahoo)의 공동창업자 출신으로서, 신기술 분야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인 아메클라우드벤처스(AME Cloud Ventures)의 공동창업자이다.제리 양은 1968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세 때 영문학 교수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해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서 성장한다. 1990년 스탠퍼드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4년 만에 학사·석사 과정을 마친 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1994년 스탠퍼드대학교 박사과정에 있을 때 동료인 파일로(David Filo)와 함께 재미삼아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데 이 프로그램이 세계 최초의 검색 엔진인 야후이다. 그후 야후가 네티즌의 인기를 끌자, 1995년 제리 양은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인 재일교포 손정의(孫正義)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야후를 설립하였다. 이후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싱가포르·일본에 이어 1997년에는 한국에도 지사를 설립하였고, 2000년에는 야후를 시가 총액 916억 달러의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1998년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사이버 공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명 가운데 6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야후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3]
  • 데이비드 파일로(David Filo, 1966년 4월 20일~ )
미국의 사업가이자, 제리 양과 더불어 야후의 공동 설립자이다.회사가 PHP로 전향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된 그의 파일 서버 프로그램이 야후 웹 사이트를 방문하는 다양한 웹 페이지를 유동적으로 처리하는 데 쓰이는 서버 측면 스크립트 소프트웨어(파일로 서버 페이지)가 된다.그는 튤레인 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 학사 학위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력이 있다.[4] 파일로는 위스콘신에서 태어나 루이지애나에서 성장한다. 건축가 아버지와 기업체 관리직원인 어머니는 교수가 돼주기를 바라지만, 박사과정 막바지에 제리양을 만나면서 진로를 수정하게 된다.[5]

등장배경 or 역사

등장배경

1994년 4월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전기공학 박사과정이었던 대만계 미국인 제리양과 데이빗 필로는 박사 논문 작성에 필요한 정보가 있는 사이트들을 찾아보기 쉽게 분류하는 웹사이트 목록을 만들었다. 두 사람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던 이 웹사이트 리스트는 스탠포드 대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전화번호부처럼 찾고자 하는 분야의 인덱스(Index)를 몇 단계 거치면 원하는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는 디렉토리 검색 서비스는 이들의 최대 강점이 된다. 제리 양과 데이빗 필로는 1995년 4월 한 벤처캐피탈로부터 4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사이트를 본격적으로 사업화하기 시작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야후!(Yahoo!)'의 탄생의 순간이다. [6]

역사

  • 1994~1995년 : 창업
1994년 제리 양은 연구실 동료인 데이비드 파일로와 함께 인터넷상의 주요 웹사이트를 주제별로 카테고리화한 뒤 목록으로 엮어서 보여주는 웹사이트를 만든다. 웹사이트의 이름은 "제리와 데이비드의 월드와이드웹 가이드(Jarry and David's Guide to the World Wide Web)". 인터넷 상의 업종별 전화번호부 정도로 보면 된다.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는 박사 논문 작성에 필요한 사이트를 찾아보기 쉽게 분류해서 만든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 웹사이트는 예상보다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개발한 해 9월까지만 해도 등록된 웹사이트 목록이 2,000개에 불과했으나 그 다음해에는 10,000개 이상을 등록한다.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는 1994년말에 웹사이트의 이름을 야후로 변경하고, 캘리포니아 산타 클라라에서 정식으로 창업을 한다. 창업 후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트래픽(Traffic)이 폭주하자, 1995년초 야후 사이트는 넷스케이프(Netscape)사의 임시 지원을 받아 서버(Server)를 옮긴다. 자금이 필요했던 두 창업자들은 투자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는데, 첫 투자의 손길을 내민 회사는 벤처 캐피털인 세쿼이어 캐피털(Sequoia Capital)이다. 세쿼이어 캐피털은 야후의 장래성을 인식하고 1995년 4월 100만달러를 투자한다. 이후 1995년말 즈음 손정의가 이끄는 소프트뱅크도 야후에 200만달러를 투자하고 다음 해 1996년에 100만달러를 추가 투자한다.[7]
  • 1995~2001년 : 확장
야후는 본격적인 경영을 위해 1995년 8월 팀 쿠글(Tim Koogle)을 최고 경영자(CEO)로 선임한다. 팀 쿠글은 야후를 테크기업이 아니라 미디어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온라인 광고와 스폰서십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사업적 토대를 닦는다. 그 결과 1996년 4월 나스닥에 주당 13달러로 성장하던 야후는 불과 4년 후인 2000년에 시가총액이 1250억 달러에 달하게 된다. 이는 주당 237달러를 기록한 것이다.1997년에는 한국에 야후 코리아 법인을 설립한다. 당시 한국은 다음의 전신인 한메일넷이 무료 웹메일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인터넷 시장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는데, 일찍이 한국 포털 시장을 선점한 야후는 1999년 국내 최초로 2000만 페이지뷰를 돌파하며 한국 인터넷 태동기를 이끌었다.[6] 야후는 필요한 기능을 신속하게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타 기업들을 인수한다. 사용자들이 사이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로켓메일(RoketMail)을 인수하여 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온라인 오디오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로드캐스트닷컴(Broadcast.com)을 인수한다. 또한 야후의 위치를 미디어 기업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자체적인 검색 엔진을 개발하기보다는 외부 업체와 계약을 맺어 검색 엔진을 사용하게 된다. 최초로 채택한 외부 검색 엔진이 바로 구글(Google)이다. 훗날 이 선택은 야후에게 전략적 실패로 판명된다.[7]
  • 2001~2007년 : 위기
2001년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거래 첫날 주가가 154% 폭등하고 1250억달러라는 시가총액을 기록하며[8], 그해 3월 팀 쿠글이 사임한다. 새로운 최고 경영자로 워너브라더스(Warner Brothers)에서 오랫동안 일한 테리 시멜(Terry Semel)이 된다. 전임인 팀 쿠글과 달리 테리 시멜은 인터넷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어서 야후 내부의 불안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의 경쟁력은 뛰어난 협상력에 있었는데, 그가 최고 경영자가 된 이후 다양한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여 온라인 광고 일변도의 수익원을 다각화하는데 애쓰게 된다. 이 시기에 테리 시멜은 향후 야후를 뒷받침해주는 중요 거래를 성사시킨다. 2002년 12월 검색엔진인 잉크토미(Inktomi)를 인수한 데 이어 2003년 7월 유료 검색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오버추어를 16달러에 인수한다. 오버추어의 유료 검색 결과를 야후의 검색결과에 노출시키고 수익을 얻는 것이었는데, 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판명된다. 당시에는 매우 조그마한 중국 기업에 불과했던 알리바바(Alibaba)의 지분 40%를 10억 달러에 인수하는데, 이 거래는 지금까지 야후를 생존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선택이 된다. 야후는 경쟁 업체에 대한 대응이 전반적으로 약했는데, 2004년 구글을 야후의 검색엔진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리지만, 구글은 이미 2002년에 검색엔진 사용률에 있어서 야후를 추월한 상태를 보여준다. 2002년 구글, 2006년 페이스북 각각 10억달러 인수 제의 등 당시 뜨고 있던 기업들을 아예 인수하려 하지만, 공격적인 가격을 제시하지 않아 실패한다. 2006년에 유튜브(Youtube)인수를 시도하지만 구글에게 뺏기고 만다. 2006년 말에는 야후가 인터넷의 전 분야에 걸쳐서 서비스를 하고는 있으나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비판한 내부 문건이 유출되어 파문이 일기도 한다. 결국 2007년 6월 수익악화에 따른 주주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테리 시멜이 퇴사한다.[7]
  • 2007~2009년 : 돌아온 창업자
이사회의 요구에 따라 창업자 제리양이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나, 주주들의 기대와 달리 제리 양에게는 야후를 회생시킬 만한 비전과 전략이 없다 판단한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야후에게 450억달러에 달하는 인수를 제안한다. 상당히 큰 금액이었지만 적정가격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리 양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Carl Icahn)이 나선다. 칼 아이칸은 야후의 현 상황을 볼 때 매우 합리적인 가격의 인수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여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 주장한다. 이후 칼 아이칸의 적대적 인수 공격에 대한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결국 미래를 위한 전략 고민은 하지도 못하게 되면서 2008년 10월 15,000명의 직원중 10%를 해고해야만 했고, 제리 양은 11월 사임한다.[7]
  • 2009~2012년 : 몰락
제리 양이 사임한 이후, 야후는 손쓸 틈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2009년 1월 오토데스크(Autodesk) 최고 경영자를 역임한 캐롤 바츠(Carol Bartz)를 최고 경영자로 영입한다. 캐롤 바츠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수익이 안나는 사업부문을 폐쇄하는 등 비용절감에 집중하지만, 비용절감만으로 회사 성장은 당연히 실패한다. 심지어 캐롤 바츠는 야후의 주요 투자결정 중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알리바바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하지 못하고 2009년에는 자사의 검색엔진을 없애고 마이크로소프트 빙(Microsoft Bing)과 제휴를 맺는 전략을 채택한다. 2010년에는 페이스북마저 야후를 방문자수에서 앞서고, 재무실적이 더 악화되자 2011년 9월 캐롤 바츠는 해고된다. 급하게 최고 재무 관리자(CFO)였던 팀 모스(Tim Morse)가 최고 경영자로 지명되었다가, 2012년 1월 페이팔(PayPal) 사장을 역임한 스캇 톰슨(Scott Thompson)을 최고 경영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스캇 톰슨은 학력 허위 기재 혐의로 4개월만에 물러난다. 스캇 톰슨을 대신하여 야후 미디어 책임자였던 로스 레빈스(Ross Levinson)가 최고 경영자를 맡는다.[7]
  • 2012~2016년 : 야후의 마지막
2012년 7월 야후 이사회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는데, 구글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마리사 메이어(Marissa Mayer)를 최고 경영자로 영입한다. 마리사 메이어는 야후 회생을 위해 과감한 인수 전략을 채택한다. 또한 미디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스타 앵커인 케이티 커릭(Katie Couric)을 영입하고 검색 기능 강화에도 노력한다. 그러나 마리사 메이어의 정책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된다. 시장점유율은 계속 하락하고 광고 단가도 올라가지 않게 된다. 마리사 메이어가 11억달러를 주고 인수한 텀블러는 절반 가까이 상각처리해야 할 만큼 추락한다. 회사 내에서는 분란이 일어났다. 대규모 영업손실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주의 투자자로 알려진 스타보드 밸류(Starboard Value)가 경영에 간섭을 하게 된다. 이후 마리사 메이어는 애초 영입된 목적과 달리 주주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야후 매각에 전념한다. 그결과 금년 7월 24일, 버라이즌이 야후를 48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한다. 이로써 야후는 20년간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7]

특징

각주

  1. , 〈[ 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D%9B%84!]〉, 《위키백과 》, 2012-01-01
  2. 위키백과 - https://namu.wiki/w/%EC%95%BC%ED%9B%84!%20%EC%BD%94%EB%A6%AC%EC%95%84#s-2
  3. 두산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24745&cid=40942&categoryId=32828
  4.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B%8D%B0%EC%9D%B4%EB%B9%84%EB%93%9C_%ED%8C%8C%EC%9D%BC%EB%A1%9C
  5. , 〈[야후를 만든 사람들 데이비드 파일로]〉, 《국제 - 조선일보》, 1999-03-02
  6. 6.0 6.1 노동균 기자, 〈(굿바이 야후) ①역사 속으로 사라진 닷컴 원조 '야후'〉, 《아이티 조선》, 2016-07-27
  7. 7.0 7.1 7.2 7.3 7.4 7.5 알콩아빠, 〈[1]〉, 《이슈터치 티스토리》, 2016-07-27
  8. hw 에디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YAHOO!〉, 《사이다 경제》, 20217-06-19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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