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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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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나스 시기
카우나스 휘장
카우나스 성
카우나스 구시가지

카우나스(리투아니아어: Kaunas[ˈkəʊ.nəs], 폴란드어: Kowno, 러시아어: Каунас)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다. 카우나스주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카우나스시와 카우나스 군청이 동시에 자리해 있다. 또 카우나스 대교구 교회도 이곳에 있다.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네무나스강네리스강 사이에 있으며,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카우나스 저수지가 부근에 있다. 인구는 31만 명 가량이다.

빌뉴스가 폴란드령이었던 기간에는 대신 수도 역할을 맡아온 유서깊은 도시이며, 전쟁 전 유럽의 아르데코 양식이 잘 보존된 도시로도 유명하여 유럽유산등급 (European Heritage Label)으로도 지정됐다. 또 동유럽 도시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디자인 도시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22년에는 룩셈부르크에슈쉬르알제트와 함께 유럽문화수도에 이름을 올렸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현재 카우나스시에 해당하는 지역에 10세기 무렵 수운 교통을 이용하기 편리한 전략적 위치를 바탕으로 요새가 건설되었다. 요새와 수운을 바탕으로 14세기 한자 동맹 상인들이 머무르며 성당이 건설된 것이 카우나스 시의 시초가 되었다. 1408년에 도시는 마그데부르크 법의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1만여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14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나 카우나스 인근 주민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건 조금 더 늦어서 15세기에나 개종이 이루어졌다. 카우나스에 새로이 건설된 고딕 성당에는 폴란드인 성직자들이 파견되어 가톨릭뿐만이 아니라 서유럽 문화 전반도 전파하였다. 1441년에 도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도시 중 유일하게 한자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카우나스시에도 많은 학교와 병원들이 지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멸망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어 코브노 현(Ковенская губерния)의 소재지가 되었다. 러시아에 통치하던 당시의 리투아니아에서도 리투아니아인 귀족 지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이들은 꾸준히 리투아니아어를 보존 및 발전시켜나갔다. 폴란드인 귀족들이 자신들이 사르마트인으로부터 기원했다고 생각하며 고대 동방 유목민 문화를 흉내낸 것과 다르게, 코브노 현을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가톨릭의 성도인 로마에서 찾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카우나스시의 역사는 종종 귀족들의 낭만적인 상상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나폴레옹러시아 원정 당시 카우나스는 나폴레옹의 침략을 두 번이나 받고 두 번이나 크게 파괴되었다. 때문에 패퇴하고 돌아온 대육군을 카우나스 사람들은 잔혹하게 대했고, 리투아니아에서는 이 시기를 흑역사 취급한다. 러시아 제국 지배 말기로 갈수록 리투아니아어를 금지한다든지, 리투아니아어를 로마자 대신에 강제로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1861년 카우나스시에 철도가 뚫리면서, 카우나스시는 독일 제국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철도가 건설되고 새로운 이주민들이 러시아 제국 곳곳에서 유입되면서 도시의 리투아니아인 비중은 더 줄어들었다. 1897년 러시아 제국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유대인은 도시 인구의 35.3%, 러시아인은 25.8%를 차지했지만 카우나스시의 리투아니아인 인구 비율은 6.6%에 불과했다. 리투아니아인은 대부분 카우나스 교외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시대에 뒤쳐진다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독일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어 1918년까지 독일의 점령하에 놓였으며 전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였을 때는 폴란드 제2공화국에 점령된 빌뉴스를 대신하여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임시수도 역할도 했다. 이 상황은 1939년의 폴란드 제2공화국 붕괴 때까지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유대인이 도시 인구의 32%를 차지했고, 폴란드인도 30%를 차지하여 리투아니아인의 비중이 30%에 불과했으나 일시적인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중 벌어진 홀로코스트소련으로의 강제편입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지금은 리투아니아인이 인구의 94%를 차지한다.

지리[편집]

카우나스의 면적은 총 157km2로, 울산 북구만한 크기이다. 이 중 공원과 정원, 숲지대, 자연보호구역, 농경지는 83.2km2에 달하며 절반을 넘는다.

카우나스는 대륙성 습윤 기후 (Dfb)이며 평균기온은 6°C 가량이다. 비교적 높은 위도에 위치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발트해의 난류 덕분에 같은 위도의 다른 도시보다 기후가 선선한 편이다. 다만 그 위도 때문에 낮 시간이 한여름에는 17시간, 한겨울에는 7시간에 불과하다. 카우나스의 서쪽에 위치한 카즐루루다 숲은 도시 주변에 소기후를 형성해 습도와 기온을 조절하며,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막는 역할을 한다.

카우나의 여름은 따뜻하고 습하며 낮 최고기온은 21-22도에 달하고 최저는 12도에 달한다. 다만 날에 따라 최고기온이 30도까지 치솟는 경우가 있다. 이에 반해 겨울은 춥고 눈도 오며, 평균기운은 영하 8도, 최저기온이 영하 15도까지 다다른다. 봄과 가을은 선선하고 포근하다.

행정 구역[편집]

카우나스는 12개 구로 나뉜다.

인구[편집]

오늘날 카우나스에 사는 주민의 94%가 리투아니아인이다. 카우나스는 총인구가 31만 명으로 리투아니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2011년 기준 총인구는 315,933명이었으며 그 중 리투아니아인이 93.6%, 러시아인이 3.8%, 우크라이나인이 0.4%, 폴란드인이 0.4%, 벨라루스인이 0.2%, 기타가 1.6%였다.

역사적으로는 1897년 러시아 제국 시절엔 총인구 70,920명이었으며 유대인이 35% (25,052명), 러시아인이 26% (18,308명), 폴란드인이 23% (16,112명)이었고 리투아니아인은 4,092명으로 6%에 불과했다. 독일인이 4.5% (3,340명), 타타르인이 1.5% (1,084명)이었다.[16] 1923년에는 총인구가 92,446명으로 불어났으며 리투아니아인이 58.97% (54,520명)을 차지했다. 그밖에도 유태인이 27.09 % (25,044명), 폴란드인이 4.54% (4,193명), 독일인이 3.54% (3,269명), 러시아인이 3.54% (2,914명), 벨라루스인이 0.18% (171명), 라트비아인이 0.13% (123명), 기타 2.39% (2,212명)이었다.

문화[편집]

카우나스는 예술의 도시이다. 카우나스의 구도심 '센트라스'는 네무나스강과 네리스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해 있으며 유서 깊은 옛날 건축물이 다수 들어서 있다. 구도심의 동쪽에는 신도심이 있으며, 1847년부터 개발을 시작하여 어느 정도 시가지가 조성되자 신도심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카우나스 중심부에는 보행거리가 조성되어 있는데, 도시 중앙을 관통하는 자유의 거리 (Laisvės alėja)가 특히 유명하다. 이밖에도 구도심의 각 거리는 보행가가 조성되어 있어 걸으며 여행하기에 좋다.

구도심의 주요 명소로는 카우나스 성, 카우나스 시청, 카우나스 대통령궁 등이 있다. 카우나스 시청은 중세 시대 교역과 축제, 그리고 범죄자의 처형 등이 이뤄지던 만남의 광장 역할을 했다.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54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때 재건하면서 돌로 다시 지었다. 하지만 이 석조건물 역시 소실되면서 1771년 지금의 시청 건물이 지어진 것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도자기 박물관이 들어서 있으며, 결혼식장으로도 많이 쓰인다.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교 아시아 연구 센터와 카우나스 다민족문화센터는 카우나스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행사를 구성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국가
북유럽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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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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