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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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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파리 위치

파리(프랑스어: Paris)는 프랑스수도로, 중북부 일드프랑스 지방의 중앙에 있다. 센강 중류에 있으며 면적은 105km², 인구는 2023년 1월 기준으로 2,102,650명이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권에 해당되는 일드프랑스 레지옹의 주도이자 그랑 파리 메트로폴의 핵심 코뮌이다. 파리시를 포함한 일드프랑스의 전체 인구는 2023년 기준 12,271,794명으로 집계되어 프랑스 전체 인구의 19%에 달한다. '예술의 도시'라는 별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파리는 회화에서 조각, 패션,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1]

개요[편집]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자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프랑스 북부 일드프랑스 지방의 중앙에 있다. 센강 중류에 있으며, 행정 구역은 총 20구로 나뉘어 있다. 센강이 남동쪽에서 시가지로 들어와 생루이섬과 시테섬을 감싸면서 북쪽으로 크게 만곡을 이룬 다음 남서쪽을 거쳐 시외로 흘러나간다. 크게는 센강을 기준으로 우안(rive droite)과 좌안(rive gauche)으로 나뉜다. 우안은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정부 기관, 사무실, 백화점, 주요 기차역 등이 집중해 있다. 반면 좌안은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좌안의 라틴 지구에는 소르본을 비롯한 대학 및 그랑제콜, 연구소 등이 집중해 있다. 17세기 이후 파리는 유럽의 금융, 외교, 상업, 패션, 과학, 예술 중심지다. 오랫동안 센 데파르트망의 수도였으나 1964년부터 파리는 독립 데파르트망이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 경제, 교통, 학술, 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로 불리는데, 대로와 기념물에 가스 조명을 대규모로 사용한 최초의 유럽 대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파리는 프랑스의 경제 중심지이며, 유럽에서도 손에 꼽는 금융 중심지이다. BNP 파리바, 토탈, 악사 등 세계 유수의 대기업의 본사가 소재하고 있으며, 세계 500대 기업의 본사 수는 뉴욕런던을 앞지르고 서양의 도시에서는 최다이다. 생활비가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도시다. 샤를르 드골 공항과 오를리 공항이 있고, 유럽의 주요 철도, 고속도로, 항공 교통의 허브이며, 루브르 등 관광명소가 많아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파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다. 괴테의 말대로 ‘거리의 모퉁이 하나를 돌고,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바로 그곳에 역사가 전개’된다. 또한 파리는 역사적 유적의 무한한 보고일 뿐만 아니라 현대에 살고 현대에서 활동하는 도시이다.[2]

이름[편집]

고대 로마 시대에는 라틴어명인 루테티아(Lutetia), 또는 루테티아 파리시오룸(Lutetia Parisiorum) 이라고 불렸다. 이 파리의 옛 명칭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뤼테스(프랑스어: Lutèce)이다. 오늘날 쓰이는 ‘파리’라는 이름은 현재 파리 지역에 살고 있던 켈트족 중의 하나인 파리시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른 별칭은 빛의 도시(프랑스어: Ville lumière)이다.

파리 출신 거주자는 남성이 파리지엥(프랑스어: 'Parisien', parizjɛ̃ 빠리지엥), 여성이 파리지엔느(프랑스어: Parisienne, parizjɛn빠리지엔느)로 불린다. 1960년대 이후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중부와 북부, 인도차이나 반도, 최근에는 중동, 동유럽, 중국 등지에서 빠리지엥과 빠리지엔느도 다민족, 다인종화되고 있다.

지리 및 기후[편집]

파리는 프랑스 중북부, 일쌩루이(Île Saint-Louis)와 일드라시떼(Île de la Cité) 등 두 개의 섬이 있는 센강의 북쪽 끝을 둥글게 감아 도는 곳에 위치해 있다. 영국 해협(라만체)에 있는 센강의 하구는 파리 시내로부터 하류로 375km 거리에 있다. 도시는 센강 양쪽 둑에 넓게 퍼져 있는데 전반적으로 비교적 평탄하며, 가장 낮은 지점은 해발 35m다. 파리에는 여러 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곳이 몽마르트르(해발 130m)다. 파리는 외곽에 펼쳐져 있는 ‘부아 드 불로뉴’와 ‘부아 드 방센느’ 공원을 제외하고 약 87km²의 타원형이며, 길이 35km의 순환도로인 페리페리크 대로(大路)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의 도시 형태는 1860년 확정되었는데 20개의 자치구로 이뤄졌다. 파리시는 노트르담 대성당 앞을 기준으로 런던의 남동쪽 450km, 칼레의 남쪽 287km, 브뤼셀의 남서쪽 305km, 마르세유의 북쪽 774km에 위치해 있다.

파리는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을 받는 전형적인 서유럽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일 년 내내 전반적인 기후는 온화하고 적당히 습하다. 여름 평균 기온은 15~25°C로 따뜻하고 쾌적한 편이다. 그러나 매년 며칠씩 기온이 32°C 이상 오르기도 한다. 봄과 가을에는 평균적으로 온화하지만 가끔 날씨가 오락가락해 갑자기 더워지거나 추워지는 등 변덕을 부리기도 한다. 겨울에는 햇볕이 부족해 낮에 서늘하고 밤에는 추운 날씨지만, 일반적으로 3°C 정도여서 얼어붙지는 않는다. 매년 눈이 내리지만, 땅에 머무는 경우는 드물다. 파리는 연평균 강수량이 641mm로 연중 골고루 내린다. 기록상 가장 높은 온도는 2019년 7월 25일의 42.6°C이고, 가장 낮은 온도는 1879년 12월 10일의 -23.9°C이다.[3]

역사[편집]

'파리'라는 명칭은 기원전부터 이곳에 살던 갈리아족(族)의 한 부족인 파리시이(Parisii) 부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로마인들은 지금의 시테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락을 '루테티아(Lutetia)'라고 불렀으며, '파리'라는 이름은 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갈리아 지방을 원정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점령한 후 로마화(化)가 진행되어 목욕탕, 투기장, 주피터신전 등이 축조되었다. 4세기에 게르만족의 침입, 5세기에는 훈족의 침입으로 대부분 어민, 선원인 마을 사람들이 섬에 유폐되기도 했으나 6세기 초 메로빙거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10∼11세기경 랭스가 수도였던 시기를 제외하고)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당시에 훈족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지켰던 성녀 주느비에브(Geneviève)는 파리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후 9세기에 북방의 해적이었던 노르만인들이 침입해왔을 때 그들을 무찔렀던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카페왕조를 세운 곳도 파리였다.

로마의 지배 밑에서는 선원 조합이 생기고 상업이 활발했으나 6∼10세기에 주교와 신부의 도시로 바뀌었다. 1000년경부터 두 번째 성벽이 축조되고 시정(市政)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중세 도시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은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때이다. 이때 축조된 성벽의 이름이 지금도 두 군데에 남아 있다. 십자군이 활발하였던 시대에 파리에서는 노트르담대성당의 건설이 진행되고 신학 중심의 소르본대학(Collège de la Sorbonne)이 창설되었다. 교황과 국왕이 세력 다툼을 벌였던 14세기 초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삼부회(三部會, États généraux)를 소집, 시민들의 재력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백년전쟁(1337∼1453)이 한창이었을 때 상인조합(길드)이 선출한 시장 에티엔 마르셀은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시정의 독립을 꾀했다. 당시 파리는 3개의 도시가 결합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즉, 시테섬은 왕과 사제의 도시(궁전과 노트르담대성당), 오른쪽 강변은 좁은 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 상인의 도시(항구와 조합), 왼쪽 강변은 문교도시(소르본대학)였다. 15세기 전반에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파리 시내는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살인과 숙청이 잇따르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잔 다르크의 노력 등이 주효하여 샤를 7세는 파리로 돌아왔으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루이 11세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아, 영주나 상인들이 금전을 상납하는 어용금 징수 때나 봉건 영주에게 파리를 점령당할 위험이 있을 때에만 나타났다.

16세기부터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계기로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는 등 궁중문화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시민들도 이것을 지지하였다. 고딕 양식 대신에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생 외스타슈 성당·생 에티엔 뒤 몽 교회 등의 종교건축물도 세워졌다.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고 상업이 번창했다. 종교전쟁(1559∼1598) 때에는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으며, 루이 13세와 재상(宰相) 아르망 리슐리외는 파리를 절대군주제의 본거지로 삼았다. 생루이섬을 정비하여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저택을 세우고 마레(Marais), 생제르맹(Saint-Germain), 포부르(Faubourg) 지구는 귀족들의 주택지로 만들었다. 리슐리외가 나중에 팔레루아얄극장이 된 팔레 카르디날(Palais Cardinal)을 세운 것도 이때이다. 루이 14세는 파리에 살지 않았으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력은 강화되고 고전문화가 번창했으며 파리의 인구도 50만으로 팽창하였다. 이와 함께 생 뱅상 드 폴(Saint Vincent de Paul) 등의 노력으로 복지사업이 발전하였다.

18세기는 경제적 발전기로, 파리는 계몽주의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카페에는 철학자들이 모여 새로운 사상, 학문, 예술의 발전을 논의했다. 그러나 혁명 중에는 건설보다 파괴가 더 많았고, 특히 교회는 폐허로 변했다. 나폴레옹전쟁 중에도 틈틈이 지역 확장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가로망이 구축되었으며, 수도설비가 개선되는 등 위생과 안전 여건이 발전했다.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에는 지사 샤브롤의 노력으로 시청사를 개축하고, 새로운 다리가 가설되었으며 화랑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7월왕정 시대에도 120km에 이르는 새로운 하수도가 축조되고, 많은 도로가 포장되었으며, 콩코르드광장에는 오벨리스크가 건설되기도 했다. 최후의 성벽인 티에르(Thiers) 성벽은 1845년에 완성되었으며, 그 자취는 지금의 파리 외곽 순환도로(le boulevard peripherique)이다.

그러나 현재의 파리 모습은 제2제정 시대에 오스망(Baron Haussmann) 남작의 개조로 이루어졌다. 그는 파리에서 실직을 없애고 살기 좋고 청결하며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싸움과 혼란이 없는 파리를 만드는 데 뜻을 두었다. 생미셸(Saint Michel), 세바스토폴(Sébastopol), 리볼리(Rivoli), 도메닐(Domenil), 라스파유(Lasfaille) 등의 큰 거리가 개통되고, 주변 건물이 헐리면서 에투알개선문, 노트르담대성당, 파리오페라극장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중앙시장이 정비되고 주위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가스등에 불이 들어왔다. 이에 따라 파리의 모습은 새롭게 변했다. 시가지가 확장되어 몽수리 공원, 뷔트 쇼몽 공원 등의 녹지도 조성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파리코뮌(1870∼1871)으로 파리는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그 와중에도 파리오페라극장이 완성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체펠린(Zeppelin) 비행선의 폭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피해는 작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비무장 도시여서 큰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샤를 드골 정권이 들어선 뒤 파리의 건물들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하얀 파리’가 되었다. 지금도 도시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파리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1814년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하여 연합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밀어닥쳤을 때, 파리는 붕괴되거나 잿더미가 될 위기에 직면했으나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역사상 이 도시에서 개최된 중요한 회의도 무수히 많다.

2019년 4월 프랑스의 상징이자 850년 고딕 양식을 간직한 노트르담대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12세기에 건설된 이 성당은 프랑스 혁명 당시 약간의 훼손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온전한 성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공격을 받지 않고 보존되었기에 파리 시민들에게는 노트르담대성당은 국가의 상징과도 같았다. 화재가 난 뒤 복구를 위해 이틀만에 1조 2200억원이 모금되었고, 2020년 7월, 19세기 건축양식에 맞춰 본래의 모습 그대로의 원형 복원을 결정하였다.[4]

교통[편집]

해마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맞아들이는 파리에는 남쪽에 오를리 공항, 북쪽에 르부르제 공항, 북동쪽에 샤를 드골 공항이 있다. 철도는 종합역이 없고 6개의 종착역과 4개의 교외선 종점이 있다. 각 역의 주변은 1968년부터 실시된 새 도시계획에 따라 부도심이 되었다. 르아브르에서 오는 화물을 하역하는 하항(河港)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독일, 벨기에, 지중해를 잇는 운하도 발달되어 있다.

1939년 이후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없어지고 1900년에 건설된 지하철(메트로)은 16개 주요 노선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으며, 요금이 싸고 빨라 평일에는 매일 500만 명이 이용한다. 또 고속특급 지하철망이 교외까지 뻗어 있다. 버스는 300여 개의 노선이 있으며 장거리 운행도 하고 있다. 시 외곽을 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으며, 간선국도와 연결되어 있다. 국영철도망을 고속열차가 파리∼리옹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로 운행된다. 가로에 대응하여 지하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하수도가 완전히 정비되어 있고, 전선, 가스관, 지급배송관(至急配送管)도 함께 매설되어 있다. 상수도는 음료수용과 청소, 공장용수가 따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쓰레기 소각열을 이용한 도시난방도 발달했으며 하수의 정화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5]

경제[편집]

파리는 프랑스 경제의 중심지이다. 특히 서비스업과 상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2018년 기준 파리를 찾는 관광객수는 9천만 명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프랑스 제1의 관광도시로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 통번역, 운송, 통신, 쇼핑 등 각종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이외 제조업으로는 기계 및 장치 제조업, 건설, 전기, 가스, 수도 등의 산업지구가 남쪽에 조성되어있다. 파리는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1인당 국내총생산이 높은 도시로서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하다. 또한 2015년에서 2017년 사이 파리의 평균 연 경제성장률은 1.86%를 기록하였다. 이는 같은 기간 프랑스의 평균 연 경제성장률은 1.39%를 기록한 것보다 높은 수치였다. 파리의 1인당 GDP 또한 국가 전체의 1인당 GDP보다 훨씬 높았다. 2017년 프랑스의 1인당 GDP는 30,600유로(한화 약 4,200만 원)를 기록하였는데, 파리의 1인당 GDP는 52,100유로(한화 약 7,138만 원)를 기록하였다. 생산품은 가구, 의류 등의 사치품이 많다.

관광[편집]

파리는 “예술의 도시”,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만큼 그 문화적 영향을 세계에 지속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1989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다. 매년 약 4,5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그 60%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주요 관광 자원으로는 역사적인 건축물, 수많은 유명한 미술품, 명품으로 대표되는 패션과 음식 등이다. 건물은 중세 이전의 것들도 남아있지만, 제3공화국 시대의 파리 개조 및 벨 에포크 건물이나 프랑스 혁명 200주년 그랑 프로젝터 건축물 등 각 시대의 세계의 최첨단 건축물들이 많다. 미술관에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저명한 예술가의 미술품 외에도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이나 구입에 의하여 수집된 세계적인 소장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명소[편집]

  • 파리 개선문 :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기공되어 그의 사후 준공된 세계 최대의 개선문이다. 프랑스 역사의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는 50m이다. 개선문의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계절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다. 샹젤리제 거리의 서쪽, 샤를 드골 광장에 위치해 있다.
  • 에펠탑 : 1889년 파리 마르스 광장에 지어진 탑이다.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인 이 탑은 격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할 만큼 세계적인 유료 관람지이다. 이를 디자인한 귀스타브 에펠의 이름에서 명칭을 얻었으며,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다.
  • 노트르담 대성당 : 프랑스 파리의 시테섬의 동쪽 반쪽에 있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 건물로서 파리 대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히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이야기된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파괴된 상태에서 보호되어 복구되었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의미함). (현재 화재로 인해 복구작업중이다)
  • 루브르 박물관 :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인 리볼리 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이다. 소장품의 수와 질 면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대영박물관와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박물관이다. 지금의 건물은 루브르궁을 개조한 것으로, 파리의 센 강변에 포함하여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 조형물은 근대에 건설된 것으로 한 때 어울리지 않다는 평이 많았으나 현재는 루브르를 대표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프랑스어로 뮈제 뒤 루브르, 그랑 루브르, 또는 단순히 루브르 라고도 불린다.
  • 오르세미술관 : 프랑스 파리 센강 좌안에 자리한 미술관이다. 소장품 중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을 비롯한 19세기 인상파 작품이 유명하다.[6]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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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파리 (프랑스)〉, 《위키백과》
  2. 파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3. 파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4. 파리〉, 《요다위키》
  5. 파리의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6. 파리(프랑스)〉,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국가
서유럽 도시
서유럽 지리
지중해
서유럽 문화
서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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