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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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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
오를레앙 위치

오를레앙(프랑스어: Orléans)은 프랑스도시이며 상트르발드루아르 레지옹루아레주의 중심도시이다. 인구는 약 11만 명이고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130km가량 떨어져 있다. 로마 시대에는 아우렐리아누스의 이름이 붙어서 아우렐리아눔이라 불렸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가가 변해서 '오를레앙'이 된 것이다.[1]

개요[편집]

오를레앙은 상트르발드루아르 지방과 루아레주의 주도이며 루아르강 북쪽에 있다. 루아르강이 센강과 접근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상트랄마시프(중앙산지), 파리분지, 대서양 연안 등을 연결하는 요지이자 상품의 환적항이다. 도시의 기원은 BC 52년 카이사르에게 반항한 카르누트족(族)의 상업도시 게나붐이라고 전한다. 4세기 초부터 주교좌의 소재지가 되었고, 5세기에는 아우렐리아눔이라고 불렀다. 451년 아틸라에게 공격당했으나 마을의 수호성인이 된 에낭에 의해 구출되었다. 498년 메로빙 왕조의 클로비스는 이 마을을 빼앗고 자손을 위하여 511년 오를레앙 왕국을 세웠다. 9세기 카를 대머리왕(禿頭王)은 이곳에서 서(西)프랑크 국왕을 선언한 뒤, 노르망디인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으나 10세기에는 카페 왕조에게 넘어갔으며, 그 뒤 카페 왕조의 중요한 영토를 이루고 파리와 함께 왕국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역대 국왕은 즐겨 이 도시에 머물렀다. 15세기, 백년전쟁(1338∼1453) 때는 아르마냐크파를 지지하고 부르고뉴파에 대항, 영국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잔 다르크(오를레앙의 소녀)의 출현으로 1429년 5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이 싸움을 기념하여 현재에도 5월 7, 8일에는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워털루전투(1815)가 있은 뒤, 그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때 프로이센군에게 점령되었다. 511년 이후 종종 종교회의의 개최지가 되고 14세기 초에는 대학이 세워졌다. 1962년부터 아카데미(大學區) 소재지이다. 직물, 통조림제조, 식초양조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나 루아르강의 수운이 쇠하고 철도가 발달하자 중심은 역이 있는 레조브레로 옮겨지고 루아르 연안과 보스 지방, 솔로뉴 지방의 산업중심지가 되었다. 북부 교외는 공업지대로서 인근 마을을 합병하였으며, 남부의 대안(對岸)은 생마르소 지구라고 부른다. 전기, 기계, 약품, 화학, 직물, 가구 등의 공업이 발달했다. 구시가는 성벽터의 큰 길과 강으로 경계를 이루며,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다시 부흥되어 생트 크루아 대성당(종교개혁 때 불타고 17세기에 재건), 생테냥 성당, 시청사 등의 옛 건물과 조화를 이룬다. 유네스코는 루아르강 일대의 자연풍광과 유적을 높이 평가해 2000년 쉴리쉬르루아르와 샬론쉬르루아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2]

역사[편집]

선사 시대와 로마 제국[편집]

세나붐은 갈리아의 강력한 요새로, 드루이드족이 연례 집회를 열었던 카르누테스 부족의 주요 마을 중 하나이다. 카르누테스족은 학살당했고, 도시는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시비타스 아우렐리아노룸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착민들에 의해 폐허 위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그 이름은 후에 오를레앙으로 바뀌었다.

442년 갈리아 지역의 로마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이 지역 알란족의 족장인 고아르에게 오를레앙으로 와서 반항적인 원주민과 비시고트족을 통제할 것을 요구했다. 알란족은 반달족과 함께 408년에 루아르강을 건넜다. 고아르 휘하의 그룹 중 하나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로마군과 합류해 아틸라와 싸웠다. 아틸라는 451년 그들의 왕 산기반 아래서 샬론 전투에 참가했다.

고아르는 오를레앙에 수도를 세웠다. 그의 후계자들은 후에 오를레앙과 파리 사이의 이 지역에 있는 땅을 차지했다. 현 도시 주변의 많은 주민과 지명은 알란족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중세 시대[편집]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이 도시는 클로비스 1세의 왕국 분할에 이어 오를레앙 왕국의 수도였고, 카페 왕조 아래서는 발루아오를레앙 가문에 의해 속지가 된 후 백작의 영지, 그리고 공작의 영지가 되었다. 발루아오를레앙 가문은 후에 루이 12세, 그리고 프랑시스 1세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다. 1108년 랭 밖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오를레앙에서 프랑스 군주의 봉헌이 있었는데, 프랑스의 루이 6세가 센의 대주교 댕베르에 의해 오를레앙 성당에 봉헌되었다.

오를레앙은 항상 루아르강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파리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에는 다리가 거의 없었지만, 오를레앙은 그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고 루앙 및 파리와 함께 중세 프랑스의 3대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남쪽 둑에서는 ‘샤틀레 데 투렐’이 다리의 접근을 막았다.

이곳은 잔 다르크가 무공을 세운 현장이었다. 백년전쟁 중 잔 다르크는 1429년 5월 8일 왕실 장군인 뒤누아와 플로랑 딜리에의 도움으로 플랑타주네의 포위를 해제할 수 있게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그녀를 ‘오를레앙의 성처녀’라고 부르며, 도시의 중산층 집을 그녀에게 제공했고,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몸값을 기부했다. 백년전쟁이 끝나자 오를레앙은 이전의 번영을 되찾았다. 다리는 시내를 지나는 상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통행료와 세금을 징수했다. 루이 11세도 그 번영에 크게 기여해 주변 지역의 농업, 특히 보스 주변의 비옥한 땅을 활성화시키고 피티비에의 향신료인 샤프란 농업을 부활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부유한 성주의 부인들이 루아르 계곡을 따라 여행할 수 있게 되어 도시 전체가 유행하게 된 덕을 보았다. 오를레앙 대학도 도시의 특권에 기여한 공로로 유럽 전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 칼뱅은 그곳에서 환대를 받고 지내며 개혁 논문의 일부를 썼다, 그 대가로 영국의 헨리 8세는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많은 다른 개신교 신자들이 오를레앙의 보호를 받았다. 몰리에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장밥티스트 포클랭도 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대학 규칙에 반하는 카니발에 참석했다가 퇴학당했다.

프랑스가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을 때, 정복한 영토는 미시시피강(첫 번째 유럽 이름은 콜베르강이었다) 전체를 포함해 캐나다 국경의 입구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했다. 수도는 오를레앙의 공작인 루이 15세의 섭정을 기리기 위해 라누벨오를레앙으로 명명되었으며, 영국군이 북동부까지 위협하는 것에 대항해 프랑스 주민들과 함께 정착했다.

오를레앙의 공작들은 왕의 형제나 사촌으로서 그들의 도시를 거의 방문한 적이 없는데, 그 이후로 그들이 거의 떠날 수 없을 정도로 궁중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를레앙의 공작은 프랑스 공작 그룹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는데, 아르파종에서 시작해 샤르트르, 방돔, 블루아, 비에르종, 몽타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공작의 아들은 샤르트르 공작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위대한 가문으로부터의 상속과 결혼동맹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인 필리프 에갈리테는 그 당시 세계 최고 부자였다고도 한다. 그의 아들 루이필리프 1세는 팡티에브르와 콩데 가문의 가산을 물려받았다.

1852년 파리~오를레앙 철도 동맹이 창설되었고, 그 유명한 오르세역이 파리에 만들어졌다. 1870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서 오를레앙은 지리적 위치 덕분에 다시 전략적으로 중요해졌고, 그해 10월 13일 프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했다. 루아르 군대가 도렐 드 팔라딘 장군의 명령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보스의 오를레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본부를 두었다.

현재[편집]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은 오를레앙 플뢰리레조브레 철도역을 설치했는데, 그들의 중심 물류 철도 거점 중 하나였다. 퐁게오르주는 퐁 데 투렐로 개칭되었다. 추방자들을 위한 환승 캠프가 본라롤랑드에 건설되었다. 해방 당시 미 공군은 도시와 역을 집중 폭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오를레앙은 전쟁 후 가장 먼저 재건된 도시 중 하나였다. 장 케리젤과 장 루아예가 시작한 재건 계획과 도시 복구는 일찍이 1943년에 채택되었고, 복구작업은 1945년 초에 시작되었다. 이 재건 사업은 부분적으로 똑같이 재현해 냈지만, 건축가 폴 아브라함의 지시에 따라 혁신적인 사전 제작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전의 큰 도시였던 오를레앙은 파리에서 1시간 거리도 안 돼 여전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활용해 운송비 절감에 관심이 있는 기업들을 끌어들이고 있다.[3]

교통[편집]

오를레앙 대중교통버스전차로 서비스된다. 최초의 전차선은 2000년 11월 20일에 개통되었으며, 두 번째 전차노선은 2012년 6월 30일에 개통되었다.

오를레앙은 A10(파리~보르도 연결)으로 연결되며, A71은 오를레앙을 기점으로 해 A75와 교차되는 클레르몽페랑을 거쳐 지중해로 향한다.

오를레앙은 북부 교외에 있는 중앙 오를레앙역과 오브레조를레앙의 두 개 열차역에 의해 열차편이 제공된다. 파리, 릴, 투르, 느베 등으로 연결되는 대부분의 장거리 열차는 오브레조를레앙레스역에서만 운행을 한다.[4]

유적[편집]

오텔 그로슬로는 1550~1555년 사이에 자크 그로스로를 위해 자크 안드루에 뒤 세르소에 의해 건축됐는데, ‘오를레앙의 대법관’이라는 별명이 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는 1560년에 이곳에서 죽었다. 프랑스의 왕 샤를 9세, 앙리 3세, 앙리 4세 등이 이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1790년에 오를레앙의 마을회관이 되었으며, 1850년에 복원되었다. 내부에서 결혼식이 열리기도 한다.

오텔 드 라비에유 앙탕당스는 15세기 초 벽돌로 만들어진 고딕르네상스 스타일의 성이다. 오늘날 오를레앙 행정법원이 사용하고 있다. 브르토네리 거리에 있는 입구에서부터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일부 왕들, 즉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의 동상을 정원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오텔 드 라모트상갱은 18세기에 지어졌고, 정원은 루이 16세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의 지시에 따라 건축되었다. 그는 1789년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를 언급하며 필리프 에갈리테(평등)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구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자신의 사촌인 루이 16세에 대한 사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이곳은 필리프 에갈리테의 후계자가 루이 필리페 1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왕좌에 접근한 이후부터 고전적인 스타일의 왕실 거주지가 되었다.

보자르 박물관은 1797년에 설립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지방 박물관 중 하나이다. 15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2,000여 점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구스타브 쿠르베르,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등의 그림이 있으며, 오귀스트 로댕을 비롯한 조각가들의 작품 700여 점도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백년전쟁 당시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특히 프랑스의 전쟁 영웅 잔 다르크가 영국군으로부터 구해낸 도시로도 유명하며, 오늘날도 잔 다르크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겨져 있다. 잔 다르크의 집은 프랑스의 영웅으로 여겨지며 로마 가톨릭 성인으로 공표된 잔 다르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지도[편집]

서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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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오를레앙〉, 《위키백과》
  2. 오를레앙(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오를레앙〉, 《요다위키》
  4. 오를레앙(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국가
서유럽 도시
서유럽 지리
지중해
서유럽 문화
서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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