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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미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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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미쇼아라
티미쇼아라 위치

티미쇼아라(루마니아어: Timişoara, 헝가리어: Temesvár, 독일어: Temeswar / Temeschburg / Temeschwar, 세르비아어: Temišvar / Темишвар, 바나트 불가리아어: Timišvár)는 루마니아 서부에 있는 도시로 티미슈주의 주도이다. 루마니아 서부의 최대 도시이며 인구는 약 32만 명으로 루마니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2013년 세계에서 인터넷 다운로드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로, 2023년 유럽 문화 수도 중 한 곳으로 지정되었다.[1]

개요[편집]

티미쇼아라는 중부유럽의 알프스산맥, 카르파티아산맥, 디나르알프스산맥 사이에 위치한 판노니아 평원(Pannonian Plain)의 루마니아 부분인 바나트 평원(Banat Plain)에 자리한다. 카르파티아산맥에서 발원하는 베가강 유역에 위치하여 헝가리세르비아와의 국경과 가깝다. 도시의 이름은 14세기 초 헝가리식 이름인 티티미슈강(Temes)과 성(vár)의 합성어, 티미스바르(Temesvár)에서 유래했다. 13세기부터 헝가리왕국의 영토였다가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세르비아 등 수 세기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티미쇼아라에 1717년 바나트 지역 최초로 맥주 공장이 건설되었다. 1760년 가로등이 설치된 합스부르크 군주국 최초의 도시였으며 1884년 전기 가로등이 불을 밝힌 최초의 유럽 도시였다. 1869년에는 최초로 마차철도를 도입했고 현재 루마니아 영토 범위에서 최초로 항해 가능한 운하를 건설한 도시이기도 하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독서실이 있는 최초의 공공 대출 도서관을 개관했고, 비엔나보다 24년 먼저 시립병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동남유럽에서 최초의 독일어 신문(Temeswarer Nachrichten)을 발행하기도 했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당시 루마니아 혁명의 핵심 도시였다. 루마니아의 주요 산업, 상업, 의료, 문화 및 대학의 중심지이다. 도심의 랜드마크는 티미쇼아라 정교회 대성당과 승리광장의 루마니아 국립 오페라극장, 바나트 박물관 등이 있다.[2]

티미쇼아라는 전란이 잦아서볼거리는 많지 않다. 과거 헝가리 왕국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의 성은 박물관으로 썼으나 현재는 시 외곽으로 옮겨가 폐허 상태이며 과거 테메슈바르 요새의 일부였던 테레지아 보루가 남아있다. 중심지는 루마니아 정교회 성당이 바라보는 승리 광장(Piața Victoriei),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의 네오바로크 양식 건물이 다수 있는 자유 광장(Piața Libertății),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유서 깊은 중심지였던 통일 광장(Piața Unirii) 3곳이다. 승리광장은 주요 쇼핑몰이 있고 통일 광장은 시청사나 가톨릭 교회 성당이 있는 정치적인 중심지이다. 영화와 예술 축제에서 민속 축제 등 일 년 내내 축제가 열린다. 티미쇼아라는 루마니아의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치과 치료에 특화된 의료 관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학술기관의 수준도 매우 높아 매년 전 세계로부터 수천 명의 학생들을 대학에 유치하고 있다. 루마니아 기술의 중심지로 부쿠레슈티, 클루지나포카, 이아시, 브라쇼브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IT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에 보도된 바 있다.[3]

지리[편집]

티미쇼아라는 티미슈강과 베가강의 분기점 근처에 있는 판노니아 평원의 일부인 바나트 평원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고도는 해발 90m다. 두 강은 늪이 많고 자주 범람한다. 티미쇼아라는 늪을 지나 이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에서 발전했다. 이 늪지대는 아주 오랫동안 성곽 주변의 자연적인 보호벽을 이루었지만, 습하고 좋지 못한 기후를 형성해 주민의 수가 증가하기 어려웠고 또한 페스트와 콜레라의 확산을 조장해 도시의 발전을 막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강의 유량이 줄었고, 댐이 건설되고 강물의 흐름이 변화했다. 18세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이 도시는 더이상 티미슈강 유역이 아니라 베가 운하 유역에 놓여 있다. 베가 운하가 건설되고 주변 습지는 완전히 건조되었다. 그러나 도시 전체의 토지는 높이 0.5~5m에 불과한 지하수맥 위에 놓여 있어 고층건물을 지을 수 없다. 영양가 있는 검은 흙과 비교적 높은 수위 덕분에 이 지역은 비옥한 농업 지역에 해당한다.

역사[편집]

티미쇼아라라는 이름은 1315년 테메스와르(Temeswar)로 기록상에 처음 나타났다. 헝가리어로 티미슈(temes)강에 있는 성(vár)을 뜻하며 여기서 루마니아어 이름 티미쇼아라가 파생되었다.

티미쇼아라 지역은 13세기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으나 헝가리의 왕 카로이 1세가 1307년 티미쇼아라에 성벽과 궁전을 짓도록 지시하고 1315년부터 1323년까지 8년간 수도로 지정했다. 14세기 중엽 티미쇼아라는 오스만 제국이 이끄는 이슬람 세력과 유럽 기독교 세력이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전선으로 수차례에 걸쳐 오스만 진영의 침략을 받았다.

1552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후 약 160년 동안 부다페스트와 베오그라드 등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술탄의 직접 지배하에 놓여 대규모 이슬람 공동체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그리고 1716년 사보이 왕자가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을 통해 이 지역 통치권을 회복한 뒤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부로 20세기 초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1848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헝가리 혁명 당시 107일 동안 헝가리군에 포위되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티미쇼아라 요새의 성벽은 1892년부터 1910년에 걸쳐 철거되었고, 교외와 도심지를 연결하기 위해 몇 개의 주요 도로망이 건설되어 도시의 추가 확장을 위한 길을 열었다.

티미쇼아라는 합스부르크 정권이 들어선 18세기 이후 중요한 경제 중심지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인종과 종교의 다양성, 혁신적인 법 등의 요인으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도시에 정착한 기술자와 장인들은 길드를 설립하고 도시 경제 발전을 도왔다.

1918년 10월 31일, 지방 군대와 정치 엘리트들은 이 지역의 주요 민족 단체 대표들과 함께 바나트 국가 협의회를 설립했다. 참여한 국가는 독일, 헝가리, 세르비아, 루마니아였다. 11월 1일 그들은 단명 바나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바나트 지역은 루마니아 왕국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으로 나뉘었고, 티미쇼아라는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세르비아의 점령 이후 루마니아로 들어왔다. 이 도시는 1920년 6월 4일 트리아논 조약에 의해 헝가리에서 루마니아로 양도되었다. 1920년에 페르디난드 1세는 티미쇼아라에 대학 센터 지위를 수여했고, 전쟁 시기 지속적인 경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티미쇼아라는 소련화를 거쳐 대대적인 도시계획 프로그램이 이루어졌다. 도시의 인구는 1948년과 1992년 사이에 세 배로 증가했다. 티미쇼아라는 새로운 투자와 더불어 기계 조립, 섬유 및 신발, 전기, 식품, 플라스틱, 광학, 건축 자재, 가구 등 다양한 산업에서 기존 기업들의 능력을 발전시킴으로써 고도로 산업화되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일련의 대규모 거리 시위가 이루어지고 이는 루마니아 반공 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으로 인한 유혈사태가 시작된 지 사흘 후인 12월 20일, 티미쇼아라는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최초의 도시로 선포되었다.[4]

경관[편집]

티미쇼아라 정교회 대성당은 1936년에서 1941년 사이에 세워졌으며, 동방 기독교의 3성인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에게 바쳐졌다. 11개의 탑이 있으며, 그 중 중앙의 가장 높은 탑의 높이는 90.5m다. 대성당 건물은 국립역사박물관에 등재되어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 대성당은 티미쇼아라와 바나트 지역 바로크 건축의 가장 귀중한 건물 중 하나다. 1736년 8월 6일 건설이 시작되었고 1774년 완공되었다. 내부는 고급스럽고 화려하며, 비엔나의 화가와 조각가들에 의해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성당의 음향과 악기가 매우 훌륭해 다수의 오르간 콘서트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후니아데 성은 14세기에 지어진 옛 왕궁 성 위에 존 후냐디(John Hunyadi)와 파올로 산티니 데 두치오(Paolo Santini de Duccio)가 1443년부터 1447년 사이에 지은 티미쇼아라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성은 17세기 터키 사령관과 18세기 외젠 드 사부아 공자에 의해 재건되었고, 1850년대 재건 운동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바나트 박물관의 역사 부문과 자연과학 부문 전시를 담당하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1884년 11월 12일 티미쇼아라가 공공 전기 조명을 도입한 최초의 유럽 도시임을 상기시키는 두 개의 램프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딴 테레시아 요새(Bastionul Theresia)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 티미쇼아라 요새의 방어벽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큰 부분이다. 도심의 약 1.7헥타르를 차지하는 규모다. 1732년에서 1734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오늘날 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나, 상업시설, 식당, 술집, 도서관을 비롯하여 바나트 박물관의 상설 전시장도 포함하고 있다.[5]

지도[편집]

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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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티미쇼아라〉, 《위키백과》
  2. 티미쇼아라〉, 《나무위키》
  3. 티미쇼아라(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티미 ș오아라〉, 《요다위키》
  5. 티미쇼아라(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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