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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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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
아를 위치

아를(프랑스어: Arles)은 프랑스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지역에 있는 부슈뒤론주에 위치한 도시이자 코뮌이다. 인구는 약 5만 명이고 면적은 758.93km²로서 프랑스 본토의 코뮌들 중에서 가장 넓다. 고대 로마 시대에 번성하여 아를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고대 로마 유적은 1981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세기에는 빈센트 반 고흐가 머물면서 300여 점의 작품을 그린 곳으로도 유명하다.[1]

개요[편집]

아를은 프랑스 남부, 론강 하류 좌안에 면해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이다. 지리적으로는 론강이 갈라져 마르세유 북서쪽에 있는 삼각주를 형성하는 카마르그(Camargue) 평원에 위치해 있다. 로마시대에는 바다로 통하는 석호(潟湖)에 면하여 운하로 해안과 연결되었으며 론강과 지중해를 항행하는 선박들이 이곳에서 화물을 바꿔 실었다. 육상교통에서도 프로방스지방의 중심지가 되어 5세기 전후에는 오리엔트·아프리카 등지에서 다양한 산물이 모여들었다. 4세기 말에는 갈리아주의 주도로서 대주교구가 설치되고 공의회의 개최지가 되었다. 8∼13세기에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모든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중세에는 무역항으로서 번영하였다. 16세기 무렵 론강 하구가 토사가 퇴적되어 메워지게 되자 상권이 마르세유로 넘어가 쇠퇴하였다. 현 전체의 논 면적 중 1/2을 차지하는 논농사의 중심지로서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화학, 금속, 제지공업도 활발하다. 주요 산업은 관광이며 로마의 원형극장, 원형경기장, 목욕탕, 수도(水道), 알리스캉(지하묘지), 12세기의 생트로핌성당 등 고대·중세시대의 유적이 풍부하다. 원형경기장은 옛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관객 2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타원 모양의 경기장을 2층으로 된 아케이드가 둘러싸고 있다. 과거에는 투기장으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투우경기가 벌어진다. 원형극장은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서 무대 뒤쪽의 장식벽에 토대와 대리암으로 된 원기둥 2개가 남아 있다. 도시 가운데에 있는 생트로핌성당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로마네스크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성당 문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북쪽과 동쪽의 회랑에는 성스테파누스와 유다에 관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아를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고대 로마 유적들은 198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역사[편집]

고대[편집]

아를은 고대 라틴어로는 아렐라테(Arelate)로 불렸으며, 리구리아(Ligurian) 부족의 시대에 이미 중요성이 부각되어 서로마 제국의 주도적인 도시가 되었다. 리구리아인들은 기원전 800년경부터 이 지역에 있었다. 이 지역은 후에 켈트족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페니키아 중요 무역항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123년에 이 마을을 점령해 도시로 키웠으며, 기원전 104년에 지중해로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폼페이에 맞서 싸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군대를 지원하면서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마살리아(현 마르세유)는 폼페이를 지원했다. 카이사르가 승리했을 때, 마살리아는 모든 소유권을 박탈당했고, 그 소유권은 아를에 보상으로 주어졌다.

아를은 공식적으로 로마 군단 레기오 6 페라타(Legio 6 Ferrata)에서 퇴역한 군인들의 식민지로서 건설되었고, 레기오 6 페라타 군단도 그곳에 주둔해 있었다.

아를은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 도시였다. 원형극장, 개선문 등을 포함하는 많은 기념물들이 있었다. 고대 아를은 지금보다 바다에 가까웠기 때문에 주요 항구 도시로서의 역할을 했다.

아를에는 현재에도 남아 있는 론강의 최남단 다리가 있다. 매우 이례적으로, 로마식 다리이지만 고정식이 아니라 폰툰(pontoon)이라는 보트를 엮어서 위에 다리를 놓았고, 다리 양쪽 끝에는 탑과 도개교가 설치되었다. 보트들은 닻으로 고정되었고, 다리의 상류 쪽으로 설치된 쌍둥이 탑에 묶여졌다. 이 독특한 디자인은 강의 빈번한 대형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다리보다 건설 기간이 짧았다. 이 로마 다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고, 보다 현대적인 다리로 바뀌었다.

아를은 로마 황제들이 군사 작전을 펼치면서 빈번하게 사령부로 사용하던 4~5세기에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395년에 골족의 프레토리안(Praetorian) 현의 청사가 들어서면서 서로마 제국의 서부를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아를에는 7만 5,000~10만 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를은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가 즐겨 찾는 도시가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곳에 목욕탕을 지었고 아직도 상당 부분 원형이 남아 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아를에서 태어났다. 콘스탄티누스 3세(407~411)는 자신이 서로마 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하고, 408년 아를을 수도로 삼았다.

이 도시는 6세기에 비지고트(Visigoths)족에 함락되었고, 그 후 730년에는 무슬림에게 함락되었다. 아를은 로마 제국 말기에 문화 및 종교의 중심지로 유명해졌다. 그곳은 회의주의 철학자 파보리누스(Favorinus)의 탄생지였다. 또 로마 기독교의 요충지였으며 골족의 기독교화를 위한 중요한 근거지였다.

이 도시의 주교직은 225년경 성 트로피무스(Saint Trophimus)를 시작으로 5세기 전반에는 성 호노라투스(Saint Honoratus), 성 홀릴리우스(Saint Holilius)로 이어지는 일련의 뛰어난 성직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비지고트족의 아리안 기독교와 로마에서 파견된 주교들의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옥시탄(Occitan:남프랑스) 문화에 종교적 이단의 깊은 뿌리를 내렸다. 385년 트레브스(Treves)에서 프리실리안(Priscillian)은 이단으로 처형된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러한 긴장과 야만적인 침략에 직면해 도시가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를은 수백 년 동안 빈(Wien)의 라이벌인 종교의 위대한 중심이자 교회협의회 개최지로 남아 있었다.

735년 안달루시아의 사라센은 론강 하류를 급습한 후, 모론투스(Maurontus) 백작이 구축한 거점으로 치고 들어갔다. 모론투스 백작은 카를 마르텔(690?-741)의 팽창주의 야망을 두려워했다. 다음 해, 카를 마르텔은 남쪽에서 셉티마니아(Septimania)와 프로방스(Provence)로 진격해 아비뇽(Avignon)을 파괴한 후 아를을 공격하고 점령했다. 739년 카를은 모론투스를 일시적으로 추방하고 프로방스를 굴복시켰다.

중세 시대[편집]

855년 아를은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의 일부를 포함하는 프랑크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사라센과 바이킹에 의해 자주 테러를 당했다. 888년 오세르(Auxerre)의 백작 루돌프(Rudolph)가 트랑쥐랑 부르고뉴 왕국을 세웠는데, 이 왕국은 지금의 스위스 서쪽을 포함했다.

933년 아를의 위그 드 프로방스(Hugues de Provence)는 자신의 왕국을 루돌프 2세에게 내주고, 루돌프 2세는 두 왕국을 새로운 아를 왕국으로 병합했다. 1032년 루돌프 3세가 죽었고, 왕국은 콘라트 2세(Conrad II) 황제인 살릭(Salic)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도시는 12세기에 정치, 경제적 명성을 되찾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가 대관식을 위해 1178년에 이곳을 여행했다. 12세기에는 선출된 시장이 통치하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아를은 12세기에 이탈리아 공화국들처럼 상업과 항해술이 발달한 독립 지구로 부상했다. 1239년에 프로방스로 흡수되었지만 다시 한 번 마르세유에 의해 이 도시의 명성이 가려졌다. 137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 4세(Charles IV)는 아를 왕국을 프랑스의 도팽(Dauphin, 후에 프랑스 왕 샤를 6세)에게 양도했다.

아를에는 로마 시대와 15세기 말 사이에 큰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위치하고 있었다. 아를은 항구 도시로서 스페인유럽의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중요한 교차로였다. 중세 내내 유대교에 가장 중요했던 학자, 번역가, 철학자들로 이루어진 하치메이 프로방스(Hachmei Provence) 그룹의 업적에 큰 역할을 했다.

8세기에 아를의 유대인에 대한 관할권은 지역 대주교에게로 넘어갔고, 이로 인해 유대인은 십자군 전쟁 때 가장 빈번한 폭도 공격으로부터 공동체를 위한 방패가 되었다. 유대인은 15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으며 도시에서 추방당하지 않았다. 수 세기 동안 몇몇 유대인들이 그 도시에서 살았지만, 그 이후로는 공동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날 유대인의 흔적은 지역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편집]

아를은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 거주하던 곳이다. 1888년 2월 21일에 아를에 도착한 반 고흐는 프로방스지방의 경치에 매료되어 아를에 있는 동안 300점이 넘는 그림과 소묘를 그렸다.

폴 고갱은 아를에 있는 반 고흐를 방문했다. 그러나 반 고흐의 정신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는 놀랄 만큼 괴팍해졌으며, 1888년 12월 귀를 자른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아를의 오래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아를은 문화의 핫스팟이다. 잘 알려진 사진 축제인 아를의 랑콩트르(Rencontres d'Arles)는 매년 개최되며, 프랑스 국립 사진학교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최근 몇몇 문화단체들이 아를에 설립되었는데, 루마(LUMA) 재단, 빈센트 반 고흐 아를 재단, 마뉘엘 리브라오르티즈(Manuel Rivera-Ortiz) 재단, 리 위팡(Lee Ufan) 재단 등이다. 그 외에도 도시 곳곳에 수많은 갤러리가 흩어져 있다.

아를은 2013년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된 이후 1년 동안 이 지역에서 개최된 일련의 문화 행사인 ‘마르세유 프로방스 2013’에서 큰 역할을 했다. 시는 론강 강둑에서 그루프(Groupe) F의 불꽃놀이 공연으로 개막식 코너를 진행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출판사 악트 쉬드(Actes Sud)사가 본사를 이곳에 두고 있다.[3]

경제[편집]

아를은 론강의 주요 항구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지켰다. 19세기에 철도가 건설되면서 강을 통한 무역은 줄어들었고, 도시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로마 지배 하의 해군 기지였던 아를은 여전히 유조선들을 위해 항구가 건설되어 있다. 산업은 화학, 금속, 종이 제조업 등이 있지만, 경제는 대체로 관광과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4]

교통[편집]

아를 기차역은 아비뇽, 님, 마르세유, 파리, 보르도 등으로 연결된다. 아를에는 자체 민간 항공회사가 없지만 이 지역의 여러 공항, 특히 마르세유 프로방스의 주요 국제공항이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A54번 고속도로는 살롱드프로방스와 님을 연결하고, 넓게는 유럽 노선인 E80번 고속도로와 연결된다. 또한 론강은 역사적으로 주요 교통로 역할을 해 왔으며 지중해와 내륙 론-알프지방을 연결해 준다.

유적[편집]

아를은 로마의 중요한 유적을 다수 가지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1981년 이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로마 극장 부지에서의 발굴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아를의 비너스’를 포함한 많은 예술품들이 수집되었다.

로마의 극장은 전반적으로 초기 그리스 극장에서 진화했다. 실제로 로마인들에게 미치는 건축적 영향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으며, 극장 구조 설계도 다른 건물과 다르지 않았다. 로마 극장은 스페인에서 중동까지 제국의 모든 지역에 지어졌다. 지역 건축에 영향을 미치는 로마인들의 능력 때문에, 우리는 독특하게 로마적인 속성을 지닌 세계의 수많은 극장을 본다.

아렌 다를 극장(Arénes d'Arles)은 아를에 있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이다. 이 2단 원형경기장은 로마 시대에 번성했던 아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다. 꼭대기에서 뻗어 올라가 우뚝 솟은 타워는 중세식 부속물이다. 서기 90년에 지어진 이 원형경기장은 2만 명이 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고, 전차 경주와 피비린내 나는 격투기 형태의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지어졌다.

오늘날에는 아를의 연례 축제(Feria d'Arles) 기간 동안 투우를 위해 많은 군중을 모을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연극과 콘서트를 연다. 이 건축물은 길이 136m, 폭 109m로 120개의 아치가 있다. 테라스로 둘러싸인 타원형 경기장, 2개 층(전체 60개 층)의 아케이드, 옥외 관람석, 갤러리 시스템, 출입구 복도의 배수 시스템, 빠른 퇴장을 위한 계단이 있다.

레아튀 미술관[편집]

레아튀 미술관(Réattu Museum)은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 부슈뒤론 데파르트망의 아를에 있는 유명 미술관이다. 자크 레아튀를 비롯한 아를 출신 화가들의 작품과 19~20세기 유명 예술가들의 그림, 사진, 조각 등을 풍부하게 전시하고 있다. 뮈제옹 아를라탕(Museon Arlaten), 아를 고고학 박물관(Musée Départemental Arles antique) 등과 함께 지역의 주요 전시관으로 꼽힌다. 현재 론 강이 내려다보이는 그랑 프리외레 거리(Rue du grand Prieuré)에 세워진 중세 수도원 건물 미술관의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몰타(Malta) 기사들이 15~17세기 장기간 머물렀기 때문에 몰타 대수도원(Grand prieuré de Malte)이라 불리며 1958년에는 그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레아튀 미술관(Musée Réattu)'은 일찍이 1868년 대중들에게 처음 문을 열었다. 미술관의 명칭은 1791년 로마 대상을 받은 아를 출신의 프랑스 화가 자크 레아튀(Jacques Réattu, 1760~1833)에게서 따온 것이다. 현대식으로 꾸며진 전시관 내부에 자크 레아튀를 비롯한 18세기 프랑스 혁명기 화가들과 르네상스 시대 회화, 19~20세기 근현대 예술가들의 작품 등을 다양하게 진열해 놓고 있다. 1971년경에는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의 그림을 다량 기증받기도 했다. 1965년 프랑스 최초로 대규모 사진 전시회를 개최한 미술관답게 루시아 클레그(Lucien Clergue), 세실 비튼(Cecil Beaton)과 같은 세계적인 사진 작가들의 작품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으며 독특한 특별 전시회도 자주 개최한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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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아를〉, 《위키백과》
  2. 아를(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아를〉, 《요다위키》
  4. 아를(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5. 레아튀 미술관(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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