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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2일 (일) 18:39 판

예테보리(스웨덴어: Göteborg, 영어: Gothenburg)는 스웨덴에 있는 도시로 베스트라예탈란드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581,822명(2018년 기준)으로 수도 스톡홀름에 이어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 이름은 스웨덴어로 "고트인의 도시"를 뜻한다. 스웨덴 남서부, 예타강의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로, 예타강과 예타 운하를 비롯한 여러 개의 운하로 동부의 스톡홀름과 연결된다.

1619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설립하였고, 상업과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과 연결되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주요 산업은 식품 가공, 자동차, 섬유 공업이고, 예테보리 대학교의 소재지이다.

예테보리의 주요 관광지로는 예테보리 해상 박물관, 놀이공원 리세베리(Liseberg) 등이 있다. 아베뉜(Avenyn)은 가게와 식당들로 이루어진 인기 있는 거리이다. 아베뉜 남부에 있는 미술관 앞에는 스웨덴 출신 조각가 칼 밀레스가 지은 포세이돈의 상이 있다.

개요

  • 행정 단위: 스웨덴 베스트라예탈란드주 주도
  • 면적: 447.76 km²
  • 인구: 581,822명 (2018년)
  • 지역어: 스웨덴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goteborg.se/

역사

예테보리의 전신은 14세기경 건설된 마을인 뢰되세(Lödöse)이다. 예타강 하구에 자리잡은 지금의 예테보리와 달리 뢰되세는 예테보리로부터 약 40km 떨어진 내륙에 자리잡고 있었다. 뢰되세는 대서양으로 통하는 스웨덴의 창구이자 무역 중심지로 기능했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후스 성에 주둔 중인 덴마크군과 노르웨이군이 뢰되세를 봉쇄할 수 있다는 위험성으로 1473년 지금의 예테보리가 위치한 앨프스보리 성 근처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 니야뢰되세(Nya Lödöse, 새로운 뢰되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럼에도 이 마을은 여전히 적의 공격에 취약했다.

스웨덴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이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앨프스보리(Älvsborg) 성 바로 옆에 마을을 새로이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스웨덴의 독립 이후 스웨덴과 덴마크는 완전한 라이벌이 되었고 덴마크는 스웨덴의 유일한 대서양 창구인 니야뢰되세를 차지해 덴마크 본토와 노르웨이를 연결하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스웨덴은 북방 7년 전쟁을 치루었으며 1570년에 체결된 슈테틴 조약에서 스웨덴은 이미 죄다 불타버리고 허물어진 성과 예테보리 일대의 지배권을 돌려받기 위해서 150,000 릭스달러(Riksdaler)를 덴마크에게 배상했는데 이는 스웨덴 전체 국력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스웨덴은 이를 완전히 지불했다.

1603년, 구스타브 1세의 아들 칼 9세가 불타버린 니야뢰되세와 앨프스보리 성을 대신해 예타강 기슭 북쪽과 건너편 섬에 마을을 하나 세웠다. 그는 새로 세운 마을이 예타강 바로 옆에 지어졌다는 뜻에서 새로 세운 마을의 이름을 '예타 강의 도시'라는 뜻의 '예테보리'라고 명명했다. 예테보리에는 주로 네덜란드 출신의 상인들과 이민자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해운 강국으로 전성기에 접어든 참이었고 네덜란드의 기술력을 탐낸 칼 9세는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해 네덜란드인들을 끌어들였다. 종교의 자유는 기본이며 20년 간 세금 면제에 관세 인하, 심지어 의회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와 금은화 주조권까지 인정받았다. 이런 조건을 제시한 대가로 스웨덴은 네덜란드인의 기술력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짧은 전성기를 누린 예테보리였으나 여전히 적의 공격에 취약한건 매한가지였다. 예테보리 건설과 동시에 앨프스보리 성도 재건했지만 1611년, 칼마르 전쟁 당시 예테보리는 덴마크군에 의해 다시 전소되었고 1613년에 스웨덴은 크네레드(Knäred) 조약을 통해 이 도시를 다시 돌려받기 위해 무려 국력의 30%를 덴마크에 지불해야 했다.

162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불타버린 예테보리를 재건할 것을 명해 오늘날의 예테보리가 세워졌다. 재건된 예테보리는 스웨덴의 서방 창구이자 네덜란드, 독일, 스코틀랜드유럽 각국 출신의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번영하였다. 이후 스웨덴이 유럽 열강 중 하나로 성장하면서 숙적 덴마크를 두들겨 패고 예테보리를 위협하던 직접적 원인인 보후슬랜과 할란드를 할양 받으면서 도시를 향한 위협은 대폭 낮아졌다. 도시의 안전이 보장되면서 예테보리는 스웨덴의 중요 항구로 성장하였고 그 중요성은 스웨덴의 도시 중 유이하게 외국 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도시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18세기에는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어 아시아 국가와의 교역으로 번성하였으며 19세기에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상업 도시에서 공업 도시로 전환하여 스웨덴 제2의 도시라는 지위를 굳혔다. SKF나 볼보 등 스웨덴 유수의 기업이 처음 생겨난 곳도 바로 이 예테보리였다.

지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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