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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묘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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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普賢寺)
보현사 해탈문과 천왕문. 조계문부터 대웅전까지 전각들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2020.11.28.© 뉴스1
보현사 조계문. 관서지방의 사찰을 모두 관장하는 지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관서총림규정문(關西叢林糾正門)’이란 편액을 걸려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비. 보현사의 내력을 기록한 보현사비는 1141년에 세워졌으며, 김부식(金富軾)이 내용을 썼다.
보현사 4각9층탑과 만세루. 만세루는 6.25전쟁 때 파괴돼 1979년에 복원됐고, 4각9층탑은 1962년에 복구됐다
보현사 대웅전과 8각13층탑. 대웅전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고, 8각13층탑은 1962년에 보수됐다.
일제강점기 때 보현사 대웅전과 8각13층탑. 보현사에는 원래 24채의 전각이 있었데, 6.25전쟁 때 관음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다. 8각13층탑의 상륜부도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 관음전. 조선 초기에 중건한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 처영의 영정을 모신 수충사
팔만대장경의 인쇄본과 경전들이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보관고 외부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普賢寺)는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어구 향천산 기슭에 위치한 불교 사찰이다. 784년에 의상에 의해 세워졌다는 전승이 있으며, 고려 중기에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행정구역상 주소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이다. 사찰에 보관하고 있던 팔만대장경의 판본은 1984년에 북한의 평안북도 당 인민위원회가 향산문헌보존고를 만들어 옮겼다.

오늘날 북한 불교의 총본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

개요[편집]

보현사는 북한의 묘향산에 있는 사찰이다. 영변 3대 사찰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혔던 절이었다. 현지에서의 행정구역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향암리이다.

보현사가 위치한 묘향산은 아미산 혹은 향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미산은 보현보살의 신령한 도량이 있는 산을 의미하며, 향산은 《증일아함경》의 묘사대로 역풍이나 순풍이 불어도 향기를 내는 산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양자 모두 불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 이름이다. 또한 묘향산은 태백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단군신화의 무대로도 알려져 있다. 묘향산에는 불교, 도교, 민간신앙의 흔적과 전승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단군이 탄생한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인식됐다. 또한 묘향산은 고려 때부터 선승들의 수도처로 이름이 높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휴정이 일으킨 승병의 근거지가 되면서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됐다.

묘향산에는 7세기경부터 사찰들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그 중 대표적인 사찰이 보현사다(국보유적 제40호). 현재 보현사 경내에 남아 있는 보현사비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지어질 당시의 이름은 안심사(安心寺)였다. 원래 황해도 황주군 출신의 탐밀(探密)이라는 승려가 연주산(묘향산)에 들어 와서 수행하고자 지은 난야(蘭若, 암자)였는데, 정종 4년(1038년) 탐밀의 조카로써 제자가 된 굉곽(宏廓)이라는 승려가 숙부의 암자에 찾아왔고, 사방에서 제자들이 몰려들면서 4년 만인 정종 8년(1042) 동남쪽 100보 되는 곳에 243칸 대찰로 중창했다고 한다. '보현사'라는 이름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이후 문종 21년(1067) 보현사에 전답을 기증하였다고 한다. 이와 달리 또 다른 기록에는 968년 안심사가 창건됐고, 굉확법사가 982년(성종 1)에 보현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 이 절에 주석하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승병장으로 유명한 휴정대사가 보현사에 머물렀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살아남은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해주와 강화도를 거쳐서 이곳에서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쭉 보관하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31본산의 하나로서 부속건물들을 많이 거느렸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대부분 절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복원하면서 가람배치의 기본인 대웅전과 산자락에 바짝 붙어서 폭격을 피한 건물 중심으로 새단장을 하고 부서진 건물 터에는 그냥 잔디를 섬고 꽃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보현사는 여러 차례 중건됐고,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과 만세루 등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후 197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보현사란 이름은 실천·행동·도덕 등을 관장한다는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따온 것이다. 북한은 1947년 5월 보현사 전체를 '묘향산력사박물관'으로 지정해 현재까지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쓰이고 조선불교도연맹이 관리한다. 물론 남한에도 성보박물관이 딸린 사찰들은 많지만 경우가 다르다. 북한 전역의 많은 불교문화재를 보현사에 있는 불교력사박물관에 모아놓은 것이다. 절의 경내에는 인근의 불교 유물을 가져다 놓기도 했으며, 북한 전국의 사찰에서 나온 많은 불교 유물들을 이곳에 모아 보관, 전시해 놓았다. 2018년 기준으로 6793권을 소장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묘향산 관광객의 관광 코스에 포함시켰다. 북한이 김씨 부자 숭배 이외의 종교에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사의 많은 문화재가 불교 미술품이고 특유의 민족주의 성향으로 역사는 또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북한 땅 전체의 불교 문화재를 여기에 가득 모아 놓고 관광코스로 포함시킨 데서 보현사라는 절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함을 알 수 있다.

사실 보현사가 북한 정권으로서도 나름 의미가 있다면 있다. 당장 김일성이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94년 사망하기 전까지 126회에 걸쳐 역사 유적 현지 지도를 했는데, 그 중 50회가 사찰 방문이었고, 그 50회 중 17회는 보현사를 찾았다고 한다. 김일성 본인의 묘향산 별장인 향산특각이 마침 보현사 옆에 있었다고.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이 사망한 곳도 바로 이 향산특각이다. 향산특각은 김일성 사망 뒤인 2013년 10월 이전에 김정일이 철거하였다.

여담으로 역사스페셜에서 북한문화유산 특집으로 보현사가 소개되었는데, 소장 유물 가운데 북한 측이 백제 시대 것이라고 하면서 보여준 금동불상이 있었다. 취재진이 그 불상을 촬영해서 남한의 학자에게 보여주고 고증을 부탁했더니, 백제 때가 아니라 고려 말기나 조선시대의 작품 같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보현사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관음전, 영산전, 수충사이 있고, 고려 당시의 유물로는 8각 13층 석탑이 있다. 유홍준에 따르면 북한에서 보현사는 가장 큰 절일 뿐 아니라 북한 불교의 총림(叢林)으로, 남한으로 치면 서울의 조계사에 삼보사찰인 송광사, 해인사를 합친 것과 같은 위상이라고 소개하였다. 다만 자신이 좋아하는 절에서 느꼈던 한국 산사(山寺)의 그윽하고 깊은 향취를 느낄 수는 없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절의 스님들이 기거하면서 일상생활을 하는 곳인 요사채가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더라고 감상을 적었다.

요사채는 성속(聖俗)이 어우러진 격조 높은 공간으로 승화되어, 빈틈없고 냉랭한 신앙행태에 숨통을 열어주고 부처님과 대중의 중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승려들이 대부분 대처승이고 절에서 기거하는 일 없이 따로 사하촌(寺下村) 격인 아랫마을에 살면서 외국인 관광객이나 기자가 올 때 급히 출퇴근하는 입장이다. 이들의 정체는 노동당 통일전선부 사람들로 평소에는 가발 쓰고 제 직장에 출근하다가 외국인 올 때만 급히 연습하고 방문객을 대접한다고 한다. 아예 가짜 승려 노릇만 하는 건 아니고 불교관련 유적 관리와 유물 연구도 한다곤 하는데 북한 체제에서 그런게 잘 될 리가 없다. 훔쳐다 팔아나 먹지 않으면 다행. 그렇다 보니 남한에서처럼 수도자나 성직자이 아닌에 군청이나 시청 문화재과 공무원이나 다름없고, 따라서 붓다와 대중의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사채가 복원될 겨를도 없었다고 평하였다.

2013년 북한에서는 미국 CNN에 보현사 취재를 허용했다. 북한 입장으로서는 체재 건재를 선전하고 싶었겠지만, 정작 기자들이 취재한 영상에는 폭우로 지반이 무너지거나 도로가 아주 폭삭 내려앉은 꼴이며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빨래하고 머리 감는 주민들의 모습까지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그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보현사의 모습이 차라리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 누가 봐도 연출된 것임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결과가 되었다. [2] [3]

관람[편집]

평양에서 보현사까지는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평양-향산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이 612년(영양왕 23) 중국 수나라의 군대와 맞서 대승을 거둔 살수대첩의 현장인 청천강을 볼 수 있다.

보현사는 5만여 평방미터의 부지에 남북 축으로 1전(대웅전)-2탑-1루(만세루)-3문(조계문·해탈문·천왕문)의 형식을 갖추고 동서 축으로 만수각, 관음전, 영산전과 수충사, 팔만대장경보존고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경내에 다라니석당과 종각이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관서지방의 사찰을 모두 관장하는 지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관서총림규정문(關西叢林糾正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조계문을 들어서면 보현사비(1141년), 보현사중건비(1788년), 묘향산보현사사적비(1739년), 보현사향불답비(1701년), 보현사령산전불답비(1749년) 등 보현사역사를 기록한 많은 비석들이 서 있다.

그중 보현사비(국보유적 제144호)는 보현사의 연혁을 기술한 사적비로 1141년(고려 인종 19)에 세웠다. 높이 2.45m, 너비 1.1m, 두께 0.12m이다. 비신 앞면 윗부분에 인종의 글씨로 새긴 '묘향산보현사지기'(妙香山普賢寺之記)라는 제액이 있고, 그 아랫부분과 뒷면에 보현사의 내력을 적은 1200여 자의 비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이 짓고, 문공유(文公裕)가 썼다.

보현사비를 뒤로 하고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4각9층탑(국보유적 제7호)과 만세루가 나온다. 1044년(고려 정종 10)에 건립된 9층 석탑이다.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사각형의 탑으로 화강암으로 된 장대석 여러 개를 결구한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올리고, 그 위로 9층의 탑신석을 쌓은 후 꼭대기에 상륜을 장식했다.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3.55m이며, 탑의 전체 높이는 6m이다. 위층 탑신석들보다 높게 올린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네모난 감실이 있다. 예전에 이 불감 속에 다보여래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해 다보탑이라고도 한다. 1층 감실 뒷면에는 탑을 세우게 된 내력과 목적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

1979년에 복원된 만세루를 지나면 보현사 8각13층탑(국보유적 제143호)과 대웅전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 후기에 세워졌으며,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으로 높이가 8.58m이다. 3단의 지대석 위에 단층기단, 13층의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된 다각다층석탑이다. 지대석과 기단의 장식이 화려하고 상륜부를 금속으로 장식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는 층수가 가장 많으면서도 그 형태가 완전한 탑이다.

8각으로 된 매층 옥개석은 각각 2단씩의 옥개받침이 있고 추녀 끝마다 풍경이 104개 달려 있다. 80개의 풍경이 달려 있는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을 연상시킨다.

대웅전은 전쟁 때 파괴돼 1976년에 복원됐다. 대웅전에는 현재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관음전(국보유적 제57호)이 있다. 관음전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1894년에 고쳐지었다. 6·25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아 현재 보현사의 전각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이 건물은 큰 부엌 칸과 여러 개의 온돌방이 덧붙어있어 주로 승려들이 생활하던 곳으로 보인다.

관음전의 동쪽에 나란히 영산전(국보유적 제141호)이 서 있다. 원래 보현사 동쪽 500m 지점에 있던 것을 1983년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지금의 건물은 1875년(조선 고종 12)에 다시 지은 것이다. 예로부터 이 영산전에서 불공을 올리면 특히 영험이 있다고 하여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보현사 안의 주요 전각의 처마는 짧은 서까래를 덧댄 부연(婦椽) 형태로 지어져 있다.

관음전과 영산전을 지나면 서산대사와 사명당·처영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수충사(국보유적 제143호)가 있다. 조선 정조 때 서산대사를 기려 세운 사당이다. 수충사 앞 쪽에 새로 지은 팔만대장경 보관고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해인사 팔만대장경으로 찍은 판본을 비롯해 여러 불경들이 소장돼 있다. 이 유물들은 6·25전쟁 때 묘향산 비로봉 밑 금강암으로 옮겨 보관해 소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팔만대장경 보존고를 둘러보고 입구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다리니석당(陀羅尼石幢, 국보유적 제59호) 하나가 서 있다. 다라니석당이란 다라니불경을 돌에 새겨 기둥처럼 세워놓은 돌구조물을 말한다. 이 석당은 원래 평안북도 용천군의 불정사라는 옛 절터에 있었는데, 1987년 이곳으로 옮겼다. 6각형 석주에는 '대불정다라니당(大佛頂陀羅尼幢)'이라고 쓴 제목과 2388자의 범어로 된 경문을 음각해 놓았다. 이 석당은 고려시대 석당의 전형적인 형식이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당 가운데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당시의 수준 높은 조각술과 건축술을 보여준다. 석당의 높이는 6.23m이다.

성동리다리니석당을 지나 절 입구 쪽에 조그만 종각이 있고, 이 안에 유점사 종(국보유적 제162호)이 걸려 있다.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처음 제작되었고, 1729년(영조 5)에 처음 것보다 크게 주조했다고 한다. 원래 강원도 금강산의 최대 사찰인 유점사(楡岾寺)에 있던 것을 유점사가 6·25전쟁 때 폐사되자 보현사 경내로 옮겨왔다.[3]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보현사〉 《위키백과》, 
  2.  〈보현사〉 《나무위키》, 
  3. 3.0 3.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uhttps://www.news1.kr/articles/?4132443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⑦ 묘향산 보현사]〉, 《뉴스원》, 2020-11-28

참고자료[편집]

  • 보현사〉 《나무위키》
  • 보현사〉 《위키백과》
  •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uhttps://www.news1.kr/articles/?4132443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⑦ 묘향산 보현사]〉, 《뉴스원》, 2020-11-28
  • 하일식, 〈http://www.koreanhistory.org/1847 묘향산 보현사를 찾아(2)]〉, 《한국역사연구회》, 2005-10-31
  • 국제부, 〈미국 CNN, 북한 묘향산 보현사 소개〉, 《와이티엔》, 2013-08-07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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