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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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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시 시기
나가사키시' 휘장
나사사키항 야경
오우라 천주당

나가사키시(일본어: 長崎市)는 나가사키현 소재지로 나가시키현의 최대규모 도시이다. 1997년 4월 1일 나가시키현의 중핵도시로 지정되었다. 나가사키는 쇄국정책을 유지했던 에도 시대부터 유일한 막부 공인 국제 무역항 데지마(出島)가 있던 항구도시로 네덜란드, 중국, 조선 등과 대외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항구도시로서의 특성에 힘입어 나가사키에는 다양한 해외 문물이 활발하게 유통되어 왔다. 특히 나가사키 일대는 역사적으로 천주교의 주된 활동 기반이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도 나가사키현 대교구는 도쿄대교구, 오사카대교구와 함께 일반의 3개 대교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른 한편 나가사키시는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 미쓰비시 전기 등의 각종 공장이 집중되어 있어, ‘미쓰비시의 기업도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편 나가사키시는 히로시마시와 함께 원자폭탄이 실전에서 사용된 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편집]

근대 일본 나가사키시의 역사는 개항과 함께 시작한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인 1550년 히라도항포르투갈 선박이 입항하며, 일본과 서양의 문화적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1570년 막부와 포르투갈 사이에 나가사키 개항 협정이 성립했고, 이듬해인 1571년에는 포르투갈인이 거주하는 마을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후 나가사키는 포르투갈로부터 각종 상품 및 문화가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나가사키는 특히 일본 내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580년에는 다이묘 영주이자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했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나가사키 6개 마을을 예수회 관할로 기증하면서 예수교의 영향력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중앙 정치권력과의 긴장 역시 존재했다. 오다 노부나가를 따라 그리스도교 포교를 용인하는 입장에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후 1587년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을 통해 선교사의 퇴거 및 가톨릭 선교의 제한을 표명하고 이어 예수회 지행소(知行所)를 몰수했다. 1597년에는 선교사 및 신자 26명이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에도막부 시대에 쇄국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일본과 서구 국가들의 관계는 크게 줄어들었으나, 해외 무역항으로서 나가사키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해졌다.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 도항이 금지되는 한편, 외국 선박의 입항지가 나가사키 1개로 한정되었다. 나가사키에는 데지마(出島) 항이 설치되고,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 상업회관(商館) 역시 데지마로 이전하면서 나가사키를 유일한 국제 항구로 하는 쇄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후 나가사키는 이국 문물과 정서가 강한 일본 내 유일무이한 국제 항구로서 계속 기능했다.

19세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편집]

1800년대 이후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국가들의 압력이 가해지며 나가사키를 둘러싼 긴장 역시 고조되었다. 1803년에는 미국 선박이 나가사키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으나 막부에 의해 거절되었다. 이후 러시아, 영국, 네덜란드 선박 등이 이후 지속적으로 찾아와 통상 및 개항을 요구하기도 했다. 페리 제독의 무력 시위와 개항 요구 이후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져 나가사키항 이외에 시모다, 하코다테 2개 항구가 추가로 미국에 개항되었다. 1858년에는 에도 막부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와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 五個國 條約)을 맺고 나가사키와 가나가와, 하코다테 3개 항구가 개항했다. 1870년에는 나가사키에 외국인 거류지가 완성되어 서양인 상인, 선교사 등이 거주하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남았으며, 이러한 외국인 거류지로서 나가사키의 정체성은 1889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거류지가 회수되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나가사키는 일본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공업도시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1857년에는 에도 막부가 직영했던 ‘나가사키 제철소’가 착공, 1861년에 완성되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관영 공장으로서 운영되던 나가사키 제철소는 1884년부터 미쓰비시가 경영하면서 ‘나가사키 조선소’로 개칭되었고, 이후 1887년에 미쓰비시가 공장 전체를 불하받으며 민영화되었다. 조선소를 모태로 했던 미쓰비시의 기업 활동은 전기 공장 등 인접 분야로 확대되었다. 20세기 이후 나가사키시의 경제에서 미쓰비시 기업의 중요성은 대단히 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가사키는 각종 군함 건조 등 군수 기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1940년에 미쓰비시 중공업이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전함 무사시(武蔵)를 건조, 진수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미국에 의한 원자폭탄 투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에 이어 세계 역사상 두 번째이자 최후의 원자폭탄 피폭 도시가 되었다. 나가사키는 2차대전 기간 동안 1945년 8월 이전까지는 대규모의 공습을 겪지는 않았다. 1945년 8월 1일 재래식 폭탄을 활용한 미국의 대규모 공습이 이루어져 미쓰비시 중공업과 군수공장, 나가사키 의과대학 등에 타격이 있었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9일 미국의 원자폭탄 대상이 되었다. B-29 폭격기에서 나가사키 상공에 투하된 팻맨(fat man)은 본래 타격 지점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지점에서 폭발하여 나가사키시 중심부의 피해는 당초 계획보다는 적었다. 그러나 나가시키 원폭으로 4만~7만 5천 명이 즉사했고, 시내 가옥의 약 36%가 파괴되었다. 1945년 말까지 총 8만여 명이 원폭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편집]

나가사키의 전후 재건은 원폭 피해의 복구로부터 시작되었다. 1949년에는 ‘나가사키국제 문화도시건설법’이 국회에서 통과하면서 도시 재건에 대한 정부 지원 및 각종 평화기념 시설 조성이 본격화되었다. 1949년에는 시장으로서는 최초로 나가사키 시장의 ‘평화선언’이 이루어졌고, 1955년에는 평화기념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후에도 근대 개항도시로서의 문물 교류의 역사, 피폭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활용한 나가사키시의 국제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1975년 이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시는 평화 문화도시 제휴를 맺고, 이듬해 양 도시 시장이 유엔에서 핵무기 폐지와 군축을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1985년에는 제1회 세계평화연대 도시시장회의가 나가사키에서 개최되었다.

전후 일본의 경제부흥은 미쓰비시 중공업 등 조선업, 기계업을 기반으로 한 나가사키시 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전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재벌 해체 정책에 따라 기존 미쓰비시 중공업은 3개사로 분할되었고, 기존의 나가사키 조선소는 ‘미쓰비시 조선 주식회사 나가사키 조선소’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이후 1964년 중공업 계열의 3개 회사가 합병하며 ‘미쓰비시 중공업 주식회사 나가사키 조선소’로 재편되었고, 이듬해 20만 톤급 도크가 완성되면서 생산능력 역시 확대되었다. 종전 이후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공산당 및 사회당 계열 노동운동 역시 1960년대 중반 이후 협조적 노사관계로 재편되었다. 이는 기업별 노동조합과 협조적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일본적 노사관계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지리[편집]

나사사키시 전경

총 면적 약 406㎢의 나가사키는 규슈 본섬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나가사키 반도(Nagasaki Peninsula)와 니시소노기 반도(Nishisonogi Peninsula) 모두에 걸쳐져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아카이(Saikai), 동북쪽으로는 오무라 만(Omura Bay), 동쪽으로는 이사하야(Isahaya)와 접한다. 나가사키 반도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있는 형태를 보여 도시는 일찍이 규슈 섬 최고의 천연 항구를 보유한 항구도시로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

주요 상업시설과 주거지역은 도시를 관통해 흐르는 우라카미 강(Urakami River)과 나카시마 강(Nakashima River)을 따라 발달해있고, 시가지 주변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부족한 평지로 인해 주택지의 상당수는 산의 경사면을 따라 개발되어 있다.

기후[편집]

나가사키는 규슈혼슈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습한 아열대기후(쾨펜기후구분 Cfa)를 보이며 온난한 겨울과 길고 습한 여름이 특징이다. 연평균 기온은 17.4℃로 온화하고 1월 평균 기온은 7.2℃, 8월 평균 기온은 28℃를 기록한다. 난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규슈의 다른 도시보다 기온의 연교차는 적은 편이다.

6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여름은 높은 습도와 함께 무더위가 찾아온다. 이 시기에 나가사키는 가나자와(Kanazawa)와 시즈오카(Shizuoka)와 함께 가장 습한 도시로 손꼽힐 정도로 습하다. 겨울에는 해양의 영향으로 규슈 내륙보다 약간 더 온화한 날씨가 나타나지만, 여전히 높은 습도가 유지된다.

연강수량은 약 1,900mm로 연중 비교적 고르게 발생하는 편이지만, 여름철 특히 6월과 7월에 집중되며 상대적으로 겨울철에 비가 가장 적게 내린다. 1980년대까지는 눈이 쌓일 만큼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내리지 않는다.

행정[편집]

나가사키현청 소재지로서, 현의 전체 행정, 경제 등 각종 기능이 집중된 도시이다. 1997년 4월 1일 일본 <지방자치법>에 의거하여 중핵시(中核市)로 지정된 이후 나가사키시의 권한 및 자율성은 이전에 비해 강화되었다. 정령으로 중핵시로 지정될 경우 도도부현이 담당하는 경찰, 광역도로, 하천 관리 등 사무를 제외하고 생활, 사회복지 등의 사무를 독자적으로 담당할 수 있다.

나가사키시의 행정구역은 2023년 기준 776개의 정(町)으로 나뉘어 편제되어 있다. 나가사키시는 전전(戰前) 시기부터 주변 군 소속 지역을 시로 편입시키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 당시 나가사키시의 면적은 41.1㎢였으나, 1938년(쇼와 13년)에 이는 90.5㎢, 전후인 1955년(쇼와 30년)에는 121.3㎢로 증가했다. 1960년대 경제성장과 도시화 추세가 본격화되면서 시의 면적은 더욱 빠르게 증가하여 1963년(쇼와 38년)에는 206.6㎢, 1980년(쇼와 55년)에는 240.4㎢로 증가한다. 2000년대 이후에도 인근 시정촌 합병은 계속되어 2006년(헤이세이 18년)에는 406.3㎢으로 시 면적이 증가하여 오늘날의 시 경계가 대체로 확정되었다.

2017년 10월 이후 나가사키시의 시정 구조가 변경되어, 시 전체를 전체 20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중앙, 동부, 남부, 북부에 4개의 종합사무소를 설치하여 각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특히 중앙종합사무소가 관할하는 8개 지역의 세대 및 인구 규모가 가장 큰데, 2021년 기준 전체 20만 5,774세대 중 15만 500세대, 총 인구 40만 6,116명 중 28만 7,449명이 해당 관할지역 내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나가사키시의 중심부 지역은 도시 중심부까지 이어지는 긴만의 끄트머리 부분에 나가사키항과 인접한 평야, 시의 북쪽에서 나가사키항으로 흘러 들어오는 우라카미강, 시의 북동쪽에서 나가사키항으로 흘러오는 나카지마강이 위치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평지가 많은 해당 지역은 주로 상업지구나 공공시설이 밀집해 있다. 중심지구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주택 지구의 상당부분은 경사면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경제[편집]

나가사키의 경제는 제조업 비율이 높지 않은 대신 조선 및 대형기계 등 특정 중공업 부문으로 업종이 편중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나가사키에는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와 이와 전후방으로 연결되어 있는 미쓰비시 전기 등의 전기, 기계공업이 집중되어 있어 ‘미쓰비시의 기업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2020년대 이후 새로운 흐름 역시 관찰된다. 전기자동차반도체 기술을 둘러싼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본의 유력 반도체 기업들이 규슈 일대에 대규모 설비투자를 단행하면서 나가사키도 그중 일부를 유치하고 있다. 소니(SONY)는 스마트폰에 내장된 카메라용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한 신규 공장을 2021년에 완공했다. 인터액션 역시 나가사키시에 전력반도체 생산 거점을 신설하면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1차산업의 경우, 나가사키항을 중심으로 하는 어업이 전통적으로 발전해왔다. 특히 동중국해를 주요 어장으로 하는 저인망 어업이 발전해왔으나, 1990년대 이후 나가사키항의 어항으로서의 기능은 인근 타 항구로 이전되는 추세다. 그밖에 시 남부 외곽지역에서는 육우 및 젖소 사육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나가사키의 또 다른 산업 기반은 관광업이다. 에도 시대 이후 일본의 주요 개항 항구이자 가톨릭 성지, 원자폭탄 피폭도시로서의 성격을 살린 다양한 관광 문화자원들이 존재한다. 특히 성지순례, 평화학습 및 수학 여행 등을 목적으로 나가사키시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교통편의 경우, 항공편으로 나가사키시를 방문할 시에는 나가시키 북부인 오무라시에 위치한 나가사키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오무라만에 있는 미시마(箕島) 섬을 매립지로 활용하여 1975년 세계 최초 해상공항으로 개항한 나가사키 공항은 또 다른 규슈의 주 공항인 후코오카공항에 비해 이용객 수가 적어 주로 국내선 노선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2023년 현재 한국에서 나가사키공항으로 바로 운항하는 항공 노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나가사키 공항에서 나가사키 시내까지 직접 이어진 철도 노선도 존재하지 않아 버스나 택시, 배 편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가사키는 규슈 내 주요 도시와 신칸센으로 연결되어 있다. 규슈여객철도(JR九州)가 보유, 운영한 신칸센 노선인 니시큐슈신칸센(西九州新幹線)은 나가사키역과 타케오온센(武雄温泉)역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2008년 착공, 2022년에 개통되었다.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 등 기타 주요 도시로 신칸센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타케오온센역을 통해 다른 신칸센 노선으로 환승해야 한다.

그밖에 나가사키 내에는 전기궤도 노면전차가 다수 운영되고 있다. 나가사키전기궤도주식회사(長崎電気軌道株式会社)에서 운영하는 나가사키 내 노면전차는 총 5개 노선으로 운행되면서 시내 중심부 주요 지역들을 연결시켜 준다. 특히 나가사키 노면전차는 다양한 차량이 특징인데, 이는 후쿠오카, 도쿄 등 일본 주요 도시에서 노면전차가 폐선될 때 인수한 전차들이 나가사키에서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1958년 나가사키에서 인수한 일부 차량은 1911년에 만들어진 목재 차량인데, 해당 차량은 6월 10일 노면전차의 날, 10월 14일 철도의 날, 11월 16일 나가사키전기궤도 개업기념일 등 1년에 3회 특별한 날에 이벤트로 운행된다. 산 비탈길이 많은 나가사키 시내의 특성상 노면전차가 다니지 못하는 다른 지역들에는 주로 나가사키현 교통국 및 민간 버스회사 소속의 버스가 운영되며 대중교통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인구[편집]

2022년 12월 기준 나가시키시 인구는 39만 8,357명이며, 세대수는 18만 6,541가구이다. 같은 시점의 나가사키현 전체 인구는 128만 1,111명, 55만 8,327가구로, 나가사키시는 현 전체 인구의 약 31%를 차지한다. 나가사키시의 인구규모는 전전(戰前) 도시 확장 및 산업화가 본격화된 20세기 초반 이후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1900년 12만 9,597명이었던 인구는 1919년 20만 5,958명, 중일전쟁 발발 직전인 1937년 27만 6,918명으로 정점에 달한다. 이는 인근 시정촌 합병에 따른 도시 확장, 미쓰비시 조선소 등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 발전과 도시 노동자층 증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20세기 중반 나가사키시의 인구 동태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나타난다. 1944년 27만 113명이었던 인구는 원자폭탄 투하 등 전쟁 피해가 집중되었던 1945년 종전 시점에 크게 감소, 14만 2,748명을 기록한다. 2차대전기 징병과 전쟁피해 등이 맞물려 인구감소가 나타나는 것은 일본 도시 전반에 걸친 현상이었으나, 나가사키의 인구규모 감소는 매우 급격하게 특기할 만하다. 이는 히로시마시와 함께 원자폭탄 피해도시로서의 성격을 깊이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후에는 소개민, 피난민이나 출정군인의 귀환 등에 힘입어 인구가 다시 증가, 1948년에는 21만 3,698명을 기록했다. 나가사키시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전 수준의 인구를 회복하는 것은 1953년이 되어서였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에 따른 전쟁특수와 호황이 조선업 도시 나가사키의 회복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도시 면적 확대 및 산업화와 더불어 인구 규모도 빠르게 증가했다. 1965년 40만 명을 돌파한 인구는 1983년 45만 명을 넘어서며 정점을 기록했다. 이후 인구 규모는 주변 시정촌 합병으로 인한 일시적인 인구증가를 제외하면 대체로 정체 및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2022년에는 40만 명 선이 붕괴되었다. 인구 감소 및 고령화와 함께 남녀 성비 변화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일본 전체 현청소재 도시 중에서도 나가사키시의 남성 성비는 가장 낮은 편이다.

나가사키시 도시 인구의 고령화도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만 65세 이상 노년인구가 전체 인구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에 이미 19.0%, 2005년에 22.0%를 기록하면서 빠르게 증가했다. 유엔의 기준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고령화사회(7% 이상), 고령사회(14% 이상), 초고령사회(20% 이상)으로 규정되는데, 이에 따르면 나가사키시는 2005년에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이러한 추세는 201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젊은층 인구의 이주와 총인구 규모 감소와 더불어 노년인구 비율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010년에 25%를 기록했던 노년인구 비율은 2020년 33.1%를 기록했다. 연소 인구의 감소세도 뚜렷하여 2000년에 6만 2,327명이었던 0-14세 인구는 2020년 4만 6,319명으로 감소했다.

문화 및 관광[편집]

나가사키시는 근대 일본의 주요 개항장이자 가톨릭교 등 서구 문물이 일본이 유입되었던 통로로서의 전통, 그리고 원폭 피해도시라는 정체성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 및 역사기념 공간을 가지고 있다.

데지마[편집]

역사유적지로서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지의 교역 상인들이 체류하면서 무역 및 상업활동을 했던 데지마(出島)가 있다. 데지마는 1636년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바다를 메워 부채꼴 모양으로 건설한 인공섬으로, 전체 규모는 1.5ha 정도였다. 1636년부터 1639년까지는 포르투갈 무역, 1641년부터 1859년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대 네덜란드 무역이 이루어졌다. 1904년 항만개량공사를 통해 주변이 모두 매립되어 인공섬의 모습은 현재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 1996년 이후 나가사키시에서 데지마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각종 건물이 복원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란다자카(オランダ坂)[편집]

데지마 인근에는 19세기 중반 이후 주로 네덜란드인들이 모여 거주했던 주택가 언덕인 오란다자카(オランダ坂)가 있다. 언덕길을 따라 자리 잡은 건물은 대부분 서양식으로 축조 되었으며, 오래된 유럽풍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어 관광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862년에는 이곳에 최초의 영국 성공회 교회가 건립되기도 했다. 현재는 회당터에 세워진 기념비만이 남아있다. 구라바엔(グラバー園) 또는 글로버 가든(Glover Garden)은 개항 이후 상륙한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의 저택이 있던 부지에 나가사키지방법원 장관 숙사, 구 미쓰비시 제2 도크하우스 등 기타 역사적 건축물을 이전한 야외 박물관이다.

‘일본 26성인 기념관’[편집]

나가사키시는 근세 일본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선교사를 통해 가톨릭교가 전래된 가장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가사키시는 가톨릭 성당 및 각종 순교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있어 일본 가톨릭의 성지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성지순례를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들도 많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톨릭교에 대한 최초 탄압 당시 6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20명의 일본인 신도가 순교한 니시자카 언덕에는 ‘일본 26성인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관 내 전시실에는 일본 그리스도교 포교 및 박해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막부가 그리스도교를 식별하게 위해 밟게 했던 예수 및 성모마리아 상, 신도들이 탄압을 피해 숨겨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성화 등의 귀중한 유물들이 있다.

‘운젠지옥’[편집]

운젠(雲仙) 온천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운젠지옥’은 땅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및 열기와 유황 냄새가 지옥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곳은 그리스도교인의 순교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운젠지옥 언덕 위에는 순교 기념비 2개가 세워져 있어 성지순례 장소로 활용된다.

가톨릭 성당[편집]

개항을 전후로 그리스도교 선교가 허용되면서 건립되었던 가톨릭 성당 역시 나가사키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은 1853년 일본 정부의 쇄국주의가 막을 내린 뒤에 곧바로 건립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일본 ‘26위 성인 성당’으로 불리기도 하는 오우라 천주당은 일본 국보 중 유일하게 서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이다.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은 우라카미 지역의 가톨릭 신도들이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던 터에 1895년 주임 사제 프레노 신부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쇼와 3년인 1914년 완공되었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지점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1950년 대에 재건되었다. 현재는 파괴된 성당의 잔해 더미에서 발견된 성모 마리아상의 머리 부분이 ‘피폭의 마리아상’으로 성당 내에 전시되고 있다. 또한 당시 두 개의 종탑 중 하나가 성당 아래로 날아간 채 보존되어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가사키 평화 공원[편집]

원폭 피폭지역인 마츠야마마치역 인근에 있는 나가사키 평화 공원은 피폭도시로서 나가사키의 역사적 기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1949년 나가사키 국제문화도시 건설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 투표가 이루어진 이후, 1950년 나가사키 시립공원으로서 ‘국제평화공원’이 개설된 것이 그 출발이다. 1955년에는 평화공원 내 높이 9.7m, 무게 30톤의 청동상인 평화기념상이 건립되었다.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1996년에는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이 개관하여 각종 역사적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평화공원은 세계 평화 및 핵무기 반대를 주창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활용되어 왔다. 1981년 2월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평화공원에서 세계평화선언을 발표했으며,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일 당시에도 평화공원에서 연설한 바 있다. 일본의 저명한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문학과 생애를 소개하는 엔도슈사쿠문학관도 있다. 소토메(外海) 지역에 위치한 문학관에는 《침묵》, 《예수의 생애》 등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문제에 깊이 천착했던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생애와 각종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축제[편집]

그밖에 나가사키시에는 각종 축제와 연중행사가 존재하는데, 나가사키시에 공존한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나가사키에 정착한 화교들이 차이나타운에서 시작한 음력 설 기간의 ‘나가사키 랜턴 페스티벌’은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다. 축제기간 내 용춤과 곡예, 사자춤 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2000년부터 시작된 범선 축제는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각국의 범선들이 줄을 이어 입항하는 퍼레이드와 카누 타기 등 체험 활동이 유명하다.

나가사키 페이롱 선수권 대회는 여름철 축제로, 36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전통 보트 대회다. 폭풍을 피해 피신한 어부들이 바다의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배를 탄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14m 페이롱선에 탑승한 26명의 사공이 북과 징의 박자에 맞추어 총 1.15km의 거리를 경주한다.

음식[편집]

나가사키시의 음식도 개항 항구로서의 역사를 긴밀히 반영하고 있다. 나가사키시에 존재했던 차이나타운에서 발전한 나가사키 짬뽕, 전통 일본요리에 중국요리와 서양요리가 혼합된 싯포쿠요리가 유명하다. 싯포쿠요리는 커다란 둥근 식탁에 여러 요리를 올려놓고 여러 명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1950년대에는 돈가스와 스파게티, 카레 등이 한 접시에 담겨져 있는 경양식 요리인 토루코라이스가 만들어져 서민적인 양식 메뉴로 자리잡았다. 그밖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들고 왔던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빵을 현지화한 카스테라도 나가사키의 명물 중 하나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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