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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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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qinglin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4월 28일 (일) 15: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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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위치
사리원시 위치

사리원시(沙里院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서중부에 있는 시이자, 도 소재지이다. 시의 서부에는 재령강이 북쪽으로 흐르며, 재령평야의 동부에 위치한다. 경의선과 황해청년선이 교차하는 철도 교통의 요지로 도시가 성장하였다. 무연탄 등의 자원이 풍부한 공업도시이다.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조선로동당 황해북도당위원회 등이 소재한다.[1][2]

개요

  • 행정구역: 황해북도
  • 면적: 87.91km²
  • 인구: 310,440명(2008년)

사리원시북부는 황주군, 북동부는 연탄군, 동부는 봉산군, 남부는 은파군과 인접해 있으며 서부는 재령강을 경계로 황해남도 재령군 · 안악군에 면해 있다. 동서(성산리~봉의리) 간의 길이는 22km이고, 남북(미곡리~성문동) 간의 길이는 약 11km이며, 도 전체면적의 1.99%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31동 9리로 구성되어 있다.

사리원은 '-원(院)'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평양과 개성을 잇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교통 취락으로 발전한 곳이다. 고려시대까지 평양과 개성을 잇는 주요 교통로는 자비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자비령을 넘는 길을 폐쇄하고 서쪽의 동선령(洞仙嶺)을 넘는 길이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되었다. 이때 동선령을 넘는 사람들이 동선령 남쪽 사리(沙里)에서 숙박을 많이 하게 되었고 이윽고 사리에 숙박시설인 원이 설치되어 '사리원'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사리원은 교통의 요지로 번창하여 읍치인 동선면보다 더욱 번화하게 되었다. 유명한 봉산탈춤도 여태 전승되던 동선면이 아닌 사리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국사를 열심히 공부했다면 고려 시대 다포식(多包式) 건축 양식을 보전하고 있는 응진전이 있는 성불사가 부근에 있음을 알 것이다. 참고로 이 성불사가 가곡 <성불사의 밤>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지금도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리원의 관광명소로 성불사가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성불사를 보호하듯이 두르고 있는 정방산성 역시 고려 시대에 세워지고 조선 후기 김자점이 대대적으로 보수한 12km 규모의 거대한 산성으로, 전근대 시기 황해도 최대의 군사 거점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이 5천여 병력과 주둔했으나, 청나라 군대가 산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한성으로 바로 진격하면서 무력화되었다. 정문격인 남문 정방루 인근 성벽은 7~9m에 달하 위용을 자랑하고, 치성과 곡성 및 4개의 장대를 갖추고 있다. 성벽의 성가퀴 및 여장도 잘 남아 있으며, 총안과 사혈용 구멍이 무려 6천여개나 있다. 북한의 국보 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의정부시사리원시와 가장 유사한 도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의정부시와 사리원시가 해당 도의 제2청사(황해북도황해도에 속하면 해주-사리원 이원체제) 위치이기도 하고, 남북 분단 상황에서 (개성을 제외하고) 각각 접경지에 가장 가까운 지역 중심 도시라는 점이 같다.

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과 동일한 위도에 위치해 있다.[3]

자연환경

황해북도는 재령강(載寧江)의 하류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해북도 서부저지의 고기하성층 위에 놓여 있다. 지형은 북부지역에서 남부지역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져 평야로 변하는데, 북동부에는 정방산줄기(正方山-)의 서부를 이루고 있는 정방산(正方山, 481m), 발양산(發陽山, 440m), 가마봉(481m)이 솟아 있다. 정방산은 규암이 오랜 세월 깎이고 씻기면서 험한 절벽들과 기묘한 바위를 이루고 있다. 정방산과 그 주변의 산들이 사리원시 북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도시의 풍치를 더해주고 있다. 서쪽 한복판에는 경암산(景岩山, 140m)이, 남쪽 변두리에는 미아산(嵋峨山, 150m)이 솟아 있다. 서쪽으로는 봉산나무리벌과 잇닿아 있다.

사리원시는 해발 50m도 못되는 지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전체면적에서 해발 100m 이하의 지역이 6.3%, 해발 100~300m 지역이 82.6%, 해발 300~500m 지역이 11.1%이다. 지질은 가장 오랜 지층인 원생대 상원계층의 규암이 사리원시의 북부 정방산줄기에 분포되어 있다. 사리원시의 중부에 놓인 경암산을 중심으로 한 북동부에는 고생대 석회질편암이, 남서부인 미곡리 · 중부인 경암동 일대에는 중생대층의 사암, 분사암, 역암이 분포되어 있다.

사리원시의 동부 도림동과 어수동에는 봉산퇴적층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서부의 해서리, 미곡리, 봉의리, 선정리 일대의 평야지대는 감탕층과 모래층으로 되어 있다. 어수동 일대에는 갈탄과 내화물생산의 원료인 규암이, 만금동 일대에는 석고가, 정방리와 문현리 일대에는 중정석이, 도림동 일대에는 천매암이 매장되어 있다. 토양은 갈색산림토양, 충적토, 논토양, 간석지토양으로 되어 있다.

사리원시는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비교적 적으며 봄철에 가뭄이 심하다. 연평균기온은 10℃, 1월 평균기온은 -6.6℃, 8월 평균기온은 24.5℃, 연최고극기온은 35.4℃(1961년 8월 1일), 연최저극기온은 -22.9℃(1957년 1월 17일)로서 그 차는 58.3℃나 된다. 10℃이상 적산온도는 3,724℃이다. 연평균강수량은 937.8mm이며 그 중에서 여름에 52%가 내린다. 연최대강수량은 1,339.4mm(1972년), 하루최대강수량은 233.3mm(1971년 9월 3일)이다. 첫서리는 10월 17일경에, 마감서리는 4월 18일경에 내린다. 연평균풍속은 2.7m/s이며 봄, 가을, 겨울에는 북서풍이 우세하고 여름에는 남동풍이 우세하다. 최대풍속은 24m/s(1956년 5월 5일)이다.

하천은 서부경계지역으로는 재령강이 유입되어 있으며 이밖에 황주군(黃州郡) 삼봉산(三峯山)에서 발원한 원주천(原州川), 상매천(桑梅川) 등 계절적으로 흐르는 하천들이 있다. 1954년 2월 사리원시내의 한복판에는 운하가 건설되고 경암산 기슭에는 두 개의 큰 경암호(景岩湖)가 건설되었으며 길성포(吉星浦)에 현대적 항구가 꾸려져 서해와 이어지게 되었다.

산림은 사리원시 전체면적의 20.9%를 차지하는데 사리원시의 정방산, 발양산을 비롯한 북부의 산들에서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신갈나무, 잣나무, 잎갈나무, 아까시나무, 노간주나무, 오리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밤나무, 산초나무 등이 분포되어 있다. 전체 산림면적에서 소나무숲이 68.2%, 참나무숲이 14.6%, 아까시나무숲이 11%를 차지한다.[4]

역사

봉산군(鳳山郡) 지역에서(지탑리, 송신리 등 지역)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원시사회에서부터 사리원시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지탑리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신석기시대 말부터 사리원시 지역에서 이미 농업생산이 시작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휴암군(鵂嵒郡) 영역으로서 4세기 초반에 휴류산성(鵂鶹山城)이 축조되었고, 사리원시 지역에서 고구려의 고분군(古墳群)이 발견된 것도 당시 문화적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판도로 되었으며 748년(경덕왕 7년)에 이르러 서암군(棲嵒郡)으로 편성되었다. 후삼국시대에 고려태조 왕건의 근거지로 되면서 봉주(鳳州)로 개칭되었고,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그 후에 폐지되어 황주(黃州)의 속군(屬郡)으로 되었다. 1285년(고려 충렬왕 11년)에 봉양군(鳳陽郡)으로 개칭되어 방어사를 다시 두었다가 봉주로 복귀되어 지군사(知郡事)가 부임되었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년)에 봉산군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초엽에 남북으로 통하던 교통의 요충지였던 자비령(慈悲嶺) 길이 두절되고 그 대신 정방산(正方山) 동쪽에 있는 동선령(洞仙嶺)으로 넘나들게 되었고 사리원은 교통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이용하여 확충 발전되어 갔다.

1895년에 봉산군 사원방을 봉산군 사원면으로 개편하였다. 1905년에 경의선(京義線)철로가 개통되고 해주선(海州線), 장연선(長淵線)의 두 가닥 철도가 사리원에서 뻗어 나가게 됨으로써 사리원시 지역은 교통중심지로서 더욱 부각되게 되었다. 교통의 편리와 더불어 광산이 개발되고 산업도 흥성하면서 인가가 몰리어 1912년 12월에는 봉산읍(鳳山邑)에 있던 군청도 사리원으로 이전하였다.

1917년에 봉산군 만천면(萬泉面)의 대원리, 상하리와 영천면(靈泉面)의 구천리, 신양리, 경암리가 편입되었다. 1923년 4월에는 만천면의 대원리 · 광성리 각 일부, 영천면의 경암리 · 길양리 각 일부를 병합하였고, 1929년에 사원면을 사리원면으로 개칭하였다가, 1939년에 사리원읍으로 개편하였다. 일제 말기 사리원읍은 12개의 리와 25개의 구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인구는 5만 명을 넘어서서 시로 승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광복 후 1947년 6월에 봉산군에서 분리되어 사리원시로 승격하면서 신양동을 신양리로, 철산동을 철산리로, 상하동을 상하리로, 신창동을 신창리로, 경암동을 경암리로 각각 개편하여 서리(西里), 대원리(大院里), 신창리(新昌里), 경암리(景岩里), 구천리(駒泉里), 동리(東里), 북리(北里), 신양리(新陽里), 철산리(鐵山里), 사원리(沙原里), 사리(沙里), 상하리(上下里)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52년 12월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사원리와 사리를 병합하여 원주리(原州里)로, 철산리와 구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매리(桑梅里)로, 신양리와 구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양리로, 대원리와 상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성리(大城里)로, 서리 일부와 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리로 각각 개편하고 신창리를 봉산군에 편입하였다.

1953년 12월에 봉산군 미곡리 일부가 경암리에, 봉산군 구룡리 · 만금리 각 일부와 은파군(銀波郡) 묘송리 일부가 상하리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봉산군 구룡리 · 만금리 각 일부와 은파군 묘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광성리(廣成里)와 구룡리(九龍里)로 각각 개편하였다.

1954년 10월 황해도가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분리되면서 사리원시는 황해북도에 소속되어 도 소재지로 승격하였다. 1955년에 구천리를 구천일동(駒泉一洞)과 구천이동(駒泉二洞)으로, 동리를 동일동(東一洞)과 동이동(東二洞)으로, 북리를 북일동(北一洞) · 북이동(北二洞) · 북삼동(北三洞) · 북사동(北四洞)으로, 서리를 서일동(西一洞)과 서이동(西二洞)으로, 경암리를 경암동(景岩洞)으로 각각 개편하였다.

1956년 9월 상매리 일부를 분리하여 오강리와 철산동(鐵山洞)을 신설하고 나머지 부분을 상매동(桑梅洞)으로 개편하였다. 1957년 6월에 북삼동을 북일동과 북이동에, 서일동 일부를 북이동에, 동삼동을 동이동에, 북일동 일부를 동일동에, 동이동 일부를 북이동에, 동일동 일부를 동이동에 각각 편입하고 서이동과 북이동 일부 그리고 서일동의 나머지 부분을 병합하여 서리동(西里洞)을 신설하였다. 1959년 2월에 신양리를 신양동(新陽洞)으로 개편하였다.

1961년 3월에 오강리 일부와 상매동 일부를 구천일동에, 구천이동 일부를 동이동과 신양동에, 상하리 일부를 서리동과 북이동에, 서리동 일부를 상하리에, 대성리 일부를 광성리에 각각 편입하고, 구천일동 일부와 구룡리 일부 · 오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천삼동(駒泉三洞)을, 신양동 일부와 구룡리 일부를 병합하여 운하동(運河洞)을, 오강리 일부와 상매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흥동(新興洞)을 각각 신설하였으며, 상하리 일부와 경암동을 병합하여 경암리로, 상하리를 상하동(上下洞)으로, 대성리를 대성동(大城洞)으로, 원주리를 원주동(原州洞)으로, 봉산군 송산리 일부와 도림리 일부를 병합하여 사리원시 도림리(桃林里)로 각각 개편하였다.

1965년 1월에 구천이동 일부를 운하동에 편입하고 운하동을 분리하여 운하일동(運河一洞)과 운하이동(運河二洞)으로, 상매동을 분리하여 상매일동(桑梅一洞)과 상매이동(桑梅二洞)으로, 북사동 일부와 북일동 일부를 병합하여 북삼동(北三洞)으로, 구천삼동 일부를 분리하여 산업동(産業洞)으로, 구천일동 일부를 분리하여 구천사동(駒泉四洞)으로 각각 개편하였으며 운하동과 상매동을 폐지하였다.

1973년 3월에 봉산군 미곡리(嵋谷里), 만금리(萬金里), 어수노동자구(御水勞動者區)가 편입되었고, 1974년 1월에 어수노동자구가 어수동(御水洞)으로 강등되었다. 1981년 6월에 경암리를 경암동으로, 광성리를 광성동(廣成洞)으로, 도림리를 도림동(桃林洞)으로 각각 개편하고 봉산군 해서리(海西里)와 신창리(新昌里)를 흡수하였다.

1986년 10월에 봉산군 선정리(蟬井里), 봉의리(鳳儀里), 대룡리(大龍里), 문현리(文峴里), 정방리(正方里)가 이관되었고, 1990년 12월에 연탄군(燕灘郡) 성산리(城山里)가 넘어왔다. 1991년 9월 신창리 일부와 신흥동을 병합하여 신흥일동(新興一洞)과 신흥이동(新興二洞)을, 광성동 · 원주동 · 정방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성문동(城門洞)을, 북사동 일부를 분리하여 은별동(銀-洞)을 각각 신설하고 원주동 일부를 철산동에, 경암동 일부를 상하동에, 신창리 일부를 산업동에, 상매일동 일부를 구천사동에, 구천사동 일부를 신흥일동에 각각 편입하였으며 만금리를 만금동(萬金洞)으로, 신창리를 신창동(新昌洞)으로 개편하였다.

2002년 10월 현재 행정구역은 31동(경암동, 광성동, 구천일동, 구천이동, 구천삼동, 구천사동, 대성동, 도림동, 동일동, 동이동, 만금동, 북일동, 북이동, 북삼동, 북사동, 산업동, 상매일동, 상매이동, 상하동, 서리동, 성문동, 신양동, 신창동, 신흥일동, 신흥이동, 어수동, 운하일동, 운하이동, 원주동, 은별동, 철산동), 9리(구룡리, 대룡리, 문현리, 미곡리, 봉의리, 선정리, 성산리, 정방리, 해서리)로 구성되어 있다. 사리원시 소재지는 구천일동이다.[5]

산업

황해북도는 교통의 요지라는 천혜의 조건을 이용하여 광복 전에 이미 탄광이 개발되고 섬유공업 등 산업과 함께 제분, 양조, 농기구제조 등 가공업과 경공업도 일정한 규모로 형성되어 있었다. 광복 후 현대적 공업과 발전된 농촌경리를 가진 지역으로 발전되었으며 특히 황해북도 소재지로 되면서 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현재 사리원시는 기계 및 금속가공 공업, 건재공업, 비료공업, 방직공업, 식료품공업, 피복공업, 일용품공업 등 발달되어 있다.

공업 총생산액에서 중앙공업은 71.6%, 지방공업은 28.4%를 차지한다. 기계공업은 도에 필요한 기계설비와 기계부속품 뿐 아니라 전국적 의의를 가지는 대상설비들과 함께 농업에 직접 복무하는 부문광산설비를 생산하는 부문, 방직기계설비를 생산하는 부문, 열설비를 생산하는 부문, 자동차, 트랙터를 비롯한 운전기계 수리부문, 전기, 통신, 탐사 기계부문 등 여러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직 및 피복 공업생산액은 시 공업생산액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전국적 의의를 가지는 방직, 편직, 견직, 직물, 타월 등 여러 부문의 공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국토연구원은 농업·행정 기능 중심에서 상업 기능에의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으며, 2013년경 같은 시기에 탈북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청진에 비해 민간 주택 개발은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하였다. 계층별 주거지 분화가 시작된 정도다. 그러나 큰 차이는 아니라서 2019년 인근 봉산군 등지에서 주택 건축이나 물류 사업을 하는 개인 돈주들에 고용되면 농촌에서 일하는 것보다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소위 '농민 일공'이라고 하는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민이 이렇게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그 돈으로 곡식을 바치겠다고 해도 불법이다.

방직공업과 함께 피복공업도 합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시에는 경암산피복공장(景岩山被服工場)을 비롯하여 동복, 학생복, 여복, 남복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피복공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식료품공업은 방직공업 다음 자리를 차지한다. 날로 늘어나는 주민들의 수요에 맞게 옥수수, 과일 및 채소, 고기와 물고기 가공, 장류, 당과류, 담배 생산 등 식료품공업이 부문별로 전문화되어 있으며 합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용품공업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1958년 6월전원회의 이후에 새롭게 발족된 부문이다. 일용품공업 가운데서 가정용품, 학용품 및 문화용품, 일용잡화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리원시는 현대적인 공업과 함께 교외농업을 가지고 있다. 농경지는 시 전체면적의 45%, 그 중 논이 40.5%, 밭이 35.4%, 과수밭이 21.5%이다. 주요 곡물은 벼, 옥수수, 콩, 밀, 보리, 수수 등이다. 채소업에서는 주로 배추, 무, 양배추, 고추, 시금치, 호박, 오이, 미나리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과수업에서는 사과, 배, 포도, 복숭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리원포도는 맛이 좋아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축산업에서는 주로 돼지, 닭, 오리, 젖소 등을 사육하고 있는데 닭공장, 오리공장, 돼지공장, 젖소목장 등 전문화 된 축산기지가 있다. 길성포에는 수산사업소가 있다.[6]

교통

사리원시는 평양과 개성시, 황해남도의 해주시 그리고 서해바닷가로부터 내륙산지까지 이어지는 교통요지로서 평부선(平釜線)과 해주청년선(海州靑年線)이 교차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구내에 사리원청년역(沙里院靑年驛), 동사리원역(東沙里院驛), 정방역(正方驛) 등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으며 사리원~해주 간 1급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밖에 황해북도 내 각 지역과 이어지는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다. 길성포항(吉星浦港)을 통하여 재령강과 대동강을 따라 송림항(松林港)과 평양시 등 지역 그리고 남포항(南浦港)을 비롯한 서해안의 여러 항구들과 이어진다. 평양까지는 65km, 개성까지는 127km, 해주까지는 75km이다.[7]

행정 구역

현재 사리원시는 31동, 9리로 구성되어 있다.

  • 경암동(景岩洞)
  • 광성동(廣成洞)
  • 구천1동(九泉1洞)
  • 구천2동(九泉2洞)
  • 구천3동(九泉3洞)
  • 구천4동(九泉4洞)
  • 대성동(大城洞)
  • 도림동(桃林洞)
  • 동1동(東1洞)
  • 동2동(東2洞)
  • 만금동(萬金洞)
  • 북1동(北1洞)
  • 북2동(北2洞)
  • 북3동(北3洞)
  • 북4동(北4洞)
  • 산업동(産業洞)
  • 상매1동(上梅1洞)
  • 상매2동(上梅2洞)
  • 상하동(上下洞)
  • 서리동(西里洞)
  • 성문동(城門洞)
  • 신양동(新陽洞)
  • 신창동(新昌洞)
  • 신흥1동(新興1洞)
  • 신흥2동(新興2洞)
  • 어수동(御水洞)
  • 운하1동(運河1洞)
  • 운하2동(運河2洞)
  • 원주동(原州洞)
  • 은별동(銀별洞)
  • 철산동(鐵山洞)
  • 구룡리(九龍里)
  • 대룡리(大龍里)
  • 문현리(文峴里)
  • 미곡리(嵋谷里)
  • 봉의리(鳳儀里)
  • 선정리(禪井里)
  • 성산리(城山里)
  • 정방리(正方里)
  • 해서리(海西里)

문화

교육기관은 계응상사리원농업대학·강건사리원의학대학·사리원지질대학·이계순사리원제1사범대학·사리원제2사범대학·사리원교원대학·사리원공업대학·사리원체육대학·사리원예술학원 등 10여 개의 대학과 전문학교, 고등중학교 30개교, 인민학교 11개교가 있다. 또 10여 개의 도서관과 문화회관, 가무극장과 영화관, 사리원청년경기장, 역사박물관 등의 문화시설이 있다. 의료기관은 도인민병원을 비롯하여 10여 개의 병원과 치료기관, 위생방역소 등이 있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사리원시〉, 《위키백과》
  2. 사리원시〉, 《나무위키》
  3. 조선향토대백과: 황해북도 사리원시 개요 〉, 《네이버 지식백과》
  4. 조선향토대백과: 황해북도 사리원시 자연〉, 《네이버 지식백과》
  5. 조선향토대백과: 황해북도 사리원시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6. 조선향토대백과: 황해북도 사리원시 경제〉, 《네이버 지식백과》
  7. 조선향토대백과: 황해북도 사리원시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동아시아 국가
동아시아 도시
동아시아 지리
동아시아 바다
동아시아 섬
동아시아 강
동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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