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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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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산

연희산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104.3m이다.

개요[편집]

  • 연희산은 무악산(안산)의 한 지맥이 연희동에서 솟아오른 봉우리로 높이는 약 100m이다. 남서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상이며 주변은 주택가를 형성한다. 조선시대 정종(正宗)이 머물기 위해 서쪽에 이궁(離宮)으로 연희궁(延禧宮)을 지었고 세종(世宗)이 부왕인 태종이 머물곳으로 다시 중건하였다고 기록이 전한다. 그런 연유로 연희산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 일대를 연희동(延禧洞)이라고 부른다. 연산군 이후 연희궁은 축소되어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왕궁으로서 역할하지 않다가 점차 폐쇄되었다. 하지만 당시 연희궁의 위치가 어디인지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군의 훈련장이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104고지로 불렀는데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하는데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당시 격전을 벌여 고지를 탈환하였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해병대 104고지 전적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군부대 시설이 있다. 199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궁동공원(宮洞公園)으로 부르게 되었다. 연희궁동체육관이 있고 북동쪽으로 안산도시자연공원이 이어진다. [1]
  • 연희산은 연희고지라고도 한다. 서대문구 연희제1 · 2동에 있는 산으로서, 연희104고지 · 104고지 · 염산이라고도 한다. 연희동 서쪽에 둘러 있는 능선의 높이 88m, 65m, 104m의 고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1950년 9월 21일 16시 15분 미 해병 제5연대는 기왕의 연대 기동계획 일부를 조정하여 새로운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르면 연대 우측방에서 경의선과 한강 사이를 전투지대로 하여 성산동의 68고지(성서초등학교 뒷산)를 향하여 전진하는 제1대대의 임무에는 변함이 없으나 연대 좌측방에 있는 백련산의 216고지를 제3대대의 이날 공격목표로 한정시키는 한편 배속된 한국 해병 제1대대는 연대 중앙에 위치하여 모래내 건너편의 104고지(연희산)를 확보하고 그 일대에 야간 방어진지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수색에서 서울의 도심으로 들어서려면 안산의 주봉인 296고지로부터 남쪽과 서쪽으로 뻗어내린 여러 갈래의 능선들을 넘어야만 한다. 수색에서 불광천을 건너 백련산과 경의선 사이의 광활한 야지인 남 · 북가좌동 일대를 지나면 그 최초의 나지막한 능선과 마주치게 된다. 철로 변에서 멎는 그 끝 봉우리가 염산이라는 104고지이다. 적의 저항 없이 불광천을 건너선 한국 해병 제1대대는 북가좌동 일대에 좌로부터 건제순으로 3개 소총 중대를 전개시켰다.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이름 그대로인 모래내(홍제천)가 목표 바로 전방에 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모래내 주변에는 확연한 구분도 없는 전답들이 이어져 목표를 점령하려면 지형에 따라 100~300m 폭의 개활지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도 탈환을 위하여 넘지 않으면 안 될 사선은 한국 해병 제1대대의 바로 눈앞에 있던 56고지(연세대학교 운동장 서쪽 언덕)였다. 고지 남동쪽 기슭, 곧 염비 뒤 우뚝 솟은 바위에 '104고지전첩기공비(104高地戰捷紀功碑)' 열자를 새기고, 그 밑에 구리판에다 사적을 적었다. 이 고지에 현재 상수도의 저수지인 연희배수지와 지적삼각점이 있으며, 근린공원인 궁동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연희산은 인왕산에서 안산으로 이어진 산줄기이다. 안산 서쪽으로 서대문구청을 감싸고 모래내의 남쪽으로 연하여 연희2동의 100m 봉우리와 연희1동의 104.3m 봉우리로 연이어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봉우리를 연희산이라 부른다. 이른바 104고지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6·25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을 위한 격전지로 유명하며, 성산회관 뒷길로 50m쯤 올라가면 '海兵隊一O四高地戰蹟碑'라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연희고지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한국 해병 제1·2대대가 미 해병대와 더불어 1950년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악전고투 끝에 탈환하여 공산군의 서부방어선 돌파와 서울탈환의 기폭제가 된 전쟁터였다. 연희고지는 이미 일제 때 용산에 있던 일본군의 진지훈련장으로 견고한 요새로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적은 이러한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여 최후의 결전을 위한 서부방어선의 핵심 진지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측은 연희고지의 탈환을 발판으로 와우산을 점령하고 노고산 북쪽을 제압하여 서부방어선을 돌파하였다. 104고지 정상에는 인근 주민의 식수원이 되는 상수도를 공급하는 연희배수지가 위치해 있다. 또 지적삼각점(地籍三角點)이 있어 국토 측량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무악산[편집]

  • 연희산은 무악산의 한 개 지맥이다. 무악산은 안산(鞍山)이라고도 하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산이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으며 높이는 295.9m로 나지막한 도심의 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재, 추모련이라고 불렀고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불러왔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어머니의 산이라고 해서 모악산(母岳山)이라고 불렀으며 호랑이가 출몰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모아서 산을 넘어가야 했기에 모악산라고도 불렀다는 설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을 정할 때 하륜(河崙)이 안산 남쪽을 도읍지로 추천하였다. 조선시대 인조 때인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다.
  • 무악산은 서울 시내 중심에서 홍제동으로 향하는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해발 340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대문독립공원, 이진아도서관이 위치한다.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평안도에서 올라온 봉화가 안산에 연결되어 최종 남산으로 연결되었다. 정상 부근에는 큰 바위들이 많고 서울시 중구 일대를 관망하는 전망이 뛰어나다. 태고종의 총본산인 봉원사(奉元寺)가 남쪽에 있으며 관음보살을 닮았다는 관음바위가 유명하다. 그리고 근래 새로운 모습으로 보수한 봉수대(서울특별시 개념물 제13호) 등을 볼 수 있다. 수맥이 풍부한 27개의 약수터가 있어 등산로가 발달하였다. 옥천약수, 백암약수, 맥천약수, 봉화약수 등이 유명하다. 서대문구청, 연희동지구 시민아파트, 연세대학교 기숙사, 봉원사 등에서도 등반할 수 있고, 주변에 백련산과 인왕산이 있어 함께 등반할 수 있다. 지하철 무악재역, 독립문역 쪽에서도 등반이 가능하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최장코스는 경기대학교 뒤편에서 금화터널 위로 정상에 오른 뒤 홍제 1동 고은초등학교 쪽으로 내려오는 4㎞ 길이다.

연희궁[편집]

  • 연희궁(衍禧宮)은 조선시대의 서이궁(西離宮)이다. 1420년(세종 2) 당시 상왕(上王)이던 태종이 서쪽에 이궁(離宮)이 없다고 해서 서울 신촌 연세대학 부근인 무악(毋岳) 밑에 지었으며, 후에 첫 한자가 연(延)으로 바뀌어 연희동(延禧洞)의 동명이 생겼다. 100칸이 채 못 되는 규모였으며 1425년에 연희궁으로 명명되었고 때때로 세종이 이곳을 들렀다고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연희궁에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했고 세조 때에는 이곳을 서잠실(西蠶室)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왕들이 이곳을 찾아 머물렀는데, 연산군 때는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쓰기도 하다가 후에 폐쇄되었다.

연희동[편집]

  • 연희동(延禧洞)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법정동.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법정동으로,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한다. 북쪽으로는 홍제동, 동쪽으로는 봉원동·신촌동, 서쪽으로는 남가좌동·홍은동, 남쪽으로는 창천동 및 마포구 연남동과 접한다. 동쪽으로 안산(295.9m)이 위치하며 안산공원, 메타세콰이어길이 조성되어 있다. 안산 일대는 봄철마다 벚꽃이 만개하여 서울의 벚꽃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4월 '안산자락길 벚꽃음악회'가 열린다. 서쪽으로는 홍제천이 흐르며, 홍제천과 안산이 접하는 곳에 홍제천 인공폭포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동 내에는 안산도시자연공원, 궁동공원 등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궁동공원 인근에는 연희 104고지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북쪽으로 안산 초입에는 서대문구청, 서대문구의회, 서대문구보건소, 서울특별시립 서대문청소년센터, 서대문구 평생학습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등 각종 공공기관 및 시설이 모여 있다. 서쪽으로 내부순환로(연희IC), 북쪽으로 모래내로와 접하고 있으며, 가좌로, 성산로(연희IC), 연희로, 연희맛로, 증가로, 홍제천로 등이 연희동을 지난다.
  • 연희산이 위치한 연희동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동으로 서대문구청이 있다. 단일 행정동으론 서대문구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 원래 마포구 연남동 역시 연희동에 속했으나, 1975년 서울특별시 자치구 경계 조정 당시 연희동의 경의선 이남을 떼어 마포구로 편입시키면서 '연희동의 남쪽' 이라 하여 연남동(延南洞)이라 명명되었다. 본래는 행정동이 연희1~3동까지 나뉘어져 있었으나 2008년 연희동으로 통합되어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며, 통합 이후 동사무소는 구 연희2동 청사를 쓰고 있다. 연희동 북동쪽에는 안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홍제천이 흘러 남가좌동, 홍은동과 경계를 이룬다. 전반적으로 동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멀어질수록 표고가 높아지는 분지 지형이다. 경의선 이남은 마포구 연남동인데 1970년대 이전에는 여기도 연희동이었다. 동쪽으로 넘어가면 연세대학교가 있는 신촌동인데 사실 연세대학교 일부는 연희동에도 걸쳐져 있다.

연희산 전투[편집]

  • 연희고지 전투라고도 한다. 연희산 전투는 해병대가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퇴하고 이 104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서울 탈환의 발판을 마련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한국 전쟁 최대의 전환점이 된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이 전투의 전후로는 인천 상륙 작전과 9.28 서울 수복이 있었고 연희고지 전투는 이 두 사건을 이어주는 초석을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후 시흥, 안양, 수원을 차례로 점령하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인민군 최후의 보루였던 연희고지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이를 점령하는 것이 서울 수복의 최대 관건이었다. 이 전투는 불굴의 해병대 정신을 알려주는 전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해병대는 매년 9월 서울 수복을 축하하는 행사를 연다. 이를 기리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에선 1982년 9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산100-1에 면적 200평, 기단 높이 0.5m, 비 높이 7.8m의 전투 전적비를 세웠다.

궁동근린공원[편집]

  • 서대문구 연희동 산 118번지 일대에 있는 산지형 근린공원으로서 연접 연희 시범아파트가 노후되어 아파트 10개 동을 철거하고 공원 및 실내체육관을 조성하였다. 인왕산에서 안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안산 서쪽으로 서대문구청을 감싸고 모래내의 남쪽으로 연하여 연희 1동의 104.3m 봉우리 등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 보면 104고지 지맥 남쪽에 옛 연희궁(衍禧宮)이 표시되어 있다. 궁동공원과 연접한 이른바 104고지라고 불리는 이곳은 6.25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을 위한 격전지로 유명하며, 성산 회관 뒷길로 50m쯤 올라가면 '海兵隊一0四高地戰績碑'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새워져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연희산(延禧山)〉,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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