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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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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량치

팔량치(八良峙)는 전라북도 남원시경상남도 함양군 사이에 있는 높이 513m의 고개이다.

개요[편집]

  • 팔량치는 전북 남원시 인월면(引月面)과 경남 함양군 함양읍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높이 513m. 소백산맥에 속하는 연비산(鳶飛山:843 m)과 삼봉산(三峰山:1,187 m)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다. 동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가파르나 서쪽 사면은 완만하다. 동쪽으로 흐르는 계류는 팔량천(八良川)을 이루며 남강의 지류인 위천(渭川)으로 흘러들고, 서쪽으로 흐르는 계류도 남강의 지류인 임천강(臨川江)으로 이어진다. 이 고개를 지나는 남원~함양 간 국도도 이들 계곡을 따라 뻗어 있다. 옛날부터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군사상의 요지였고, 전북 남동부 산간지역과 경남 북부 산간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오늘날에는 팔량치의 북쪽으로 88올림픽고속국도가 개통되어 영남 ·호남의 교류가 더욱 원활해졌다. 부근에는 신라 때 축성하였다는 산성이 있다.[1]
  • 팔량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그 높이는 513m이다. 소백산맥의 연비산(鳶飛山, 843m)과 그 남쪽의 삼봉산(三峰山, 1,187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팔량치의 북쪽으로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지리산 I.C.를 통해 인월로 연결되어 지리산을 찾는 주요한 교통로가 되고 있으며 소백산맥을 횡단하여 영남·호남의 교류가 원활하여졌다. 24번 국도는 동쪽으로 함양을 거쳐 대전∼진주간 고속도로에 직접 연결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뱀사골을 거쳐 전라남도의 구례로 연결되는 지리산을 통과하는 주요한 접근로로서 팔량치를 통과하는 국도는 여전히 그 구실이 크다. 팔량치 주변은 흥부 출생지, 전적지 피바위가 유명하며, 고랭지 채소, 감자, 흑돼지, 농공단지, 목기, 도자기, 유흥업, 음식업, 숙박업, 재래시장 등이 위치하고 있다.[2]
  • 팔량치는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조선시대에는 팔량재에 팔량관(八良關)을 설치하여 왜적으로부터 호남 지방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인월면 성산리 성산마을에는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재에서 여원치까지 이르는 도처에 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마한의 마지막 왕이 행궁을 삼아 최후의 항전을 벌인 무대가 운봉 일대라고 전한다. 그중 노고단 아래 성삼재는 성이 다른 3명의 장수가 지켰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팔량재는 8명의 뛰어난 병사가 지켰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천연적 요새를 이루어 군사상·교통상의 요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신라 때의 성이 남아 있고, 예로부터 전라북도의 남동 산간 지역과 경상남도의 북부 산간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1984년 팔량재의 북쪽으로 광주 대구 고속 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소백산맥을 횡단하여 영남과 호남의 교류가 원활해졌으나, 팔량재를 통과하는 국도 24호선도 여전히 큰 역할을 맡고 있다.[3]

팔량치의 자연환경[편집]

  • 동쪽사면은 소백산맥의 분수령에서 함양에 이르는 비교적 급경사면이고, 서쪽은 운봉(雲峰)을 거쳐 남원에 이르는 사면으로 인월리ㆍ운봉 등 분지 사이의 작은 고개를 넘어간다.
  • 동쪽은 남강(南江)의 상류인 함양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팔량천(八良川)의 계곡으로 통하고, 서쪽도 같은 남강의 지류인 임천(臨川)의 지곡과 이어진다. 따라서 이 고개의 양쪽 사면은 같은 하천의 하곡에 의하여 연결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 팔량치를 통과하는 24번 국도도 이들 하곡을 따라 개통되고, 동쪽으로 함양ㆍ안의(安義)를 거쳐 거창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운봉을 거쳐 남원에 이른다. 천연적 요새를 이루어 군사상ㆍ교통상의 요지로 중요시되며 신라 때의 성이 남아 있고, 옛날부터 경상남도의 북부 산간지방과 전라북도의 남동 산간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주변에는 흥부전에서 나타나는 흥부일가의 출생지로 알려진 흥부마을이 있다.

팔량치의 지형[편집]

  • 팔량치는 백두대간이 아니고 정령치는 백두대간의 일부분이다. 두 곳 모두 전북에 속해있고 산 이름이 특이해서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팔량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경계의 주요고개로 등산로의 시작점이다. 높이 513m. 북쪽의 상산과 남쪽의 삼봉산(1,186m)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다. 함양군에서는 팔령, 남원군에서는 팔량이라고 부른다.
  • 동쪽 사면은 비교적 급경사로 함양읍에 이르며, 서쪽 사면은 완경사로 남원군 인월면에 이른다. 동쪽 계곡을 흐르는 하천은 남강의 지류인 위천으로 흘러들고, 서쪽 계곡을 흐르는 하천 중 하나는 서류하여 광천으로 흘러들며, 다른 하나는 남동류하여 역시 남강의 지류인 임천강에 흘러든다. 팔량치를 둘러싼 양쪽 사면은 같은 하천의 하곡으로 연결된다. 이 고개는 오래 전부터 군사·교통상의 요지였으며, 남원군 인월면 성산마을 주민들은 고개 너머 함양읍에서 농사를 지어 소출해가고, 함양읍 죽림마을 주민들은 함양장보다는 오히려 고개 너머 남원의 인월장을 더 많이 이용하는 등 영·호남의 문화가 교차하는 첫 번째 관문이기도 했다.
  • 팔량치 부근에 신라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 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팔령을 넘어 남원으로 진격해오던 왜군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재 남원-함양을 잇는 국도가 이 고개를 지나며 북쪽에 88올림픽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어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더욱 원활히 이어 준다.

팔량치산성[편집]

  •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에 있는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합미성(合米城) 또는 성산산성이라고도 한다. 팔량재(513m)에서 오봉산(상산, 871m)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중간지점에 있는 해발고도 약 550m의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쌓은 테뫼식산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쌓은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는 상태로, 현재 둘레 약 500m, 높이 약 3m에 이르는 성벽이 남아 있다. 성문터와 암문(暗門)의 흔적이 보이며, 성 안쪽에는 밭이 조성되어 있다. 성터 주변에서 삼국시대의 회백색 연질토기편을 비롯하여 승문(繩文; 새끼줄모양의 무늬)과 선문(線紋; 줄무늬)이 새겨진 경질토기편, 적갈색 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남원시(南原市)[편집]

  • 전라북도 남동부에 있는 시. 동쪽으로 경남 함양군, 동남쪽으로 경남 하동군, 서쪽으로 전북 순창군·임실군, 남쪽으로 전남 곡성군·구례군, 북쪽으로는 전북 장수군과 접한다. 시의 동쪽 끝은 산내면 중황리, 서쪽 끝은 대강면 생암리, 남쪽 끝은 금지면 하도리, 북쪽 끝은 보절면 성시리이며, 동서 간 거리는 44.7㎞, 남북 간 거리는 28.6㎞이다. 분지를 이룬 산악 지형의 영향으로 기온의 연교차가 크고 강수량도 많은 편이며, 고원지대인 운봉읍·인월면 지역은 강설량이 많고 여름에도 서늘한 고랭지 기후가 나타난다.
  • 하천은 진안군과 장수군 경계의 팔공산에서 발원하는 섬진강이 남원시와 순창군, 전남 곡성군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요천과 합쳐진 뒤 남류 하여 광양만으로 유입된다. 장수군 장안산에서 발원하는 요천은 산동면으로 흘러들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남원시 중앙부를 관통하면서 대상천·강기천·갈치천·고죽천·백암천·원천천·광치천·옥률천·송내천·대곡천·풍촌천 등의 지류와 합쳐져 금지면과 송동면 경계에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팔량치의 역사[편집]

  • 팔량치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팔량산성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운봉현 비고 성지에 '팔량관(八良關):신라·백제 때부터 성을 쌓고 지켰으며, 지금도 옛터가 있다'고 나온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 산천에 "팔량현(八良峴)은 군 서쪽 30리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 요충지대다. 고개 위에 신라 때 진터가 있다"고 나온다. 이 진터가 바로 팔량산성(경남도기념물 제172호)이며, 서쪽 할미성과 짝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팔량현은 교통 요충으로 인식되어 전라·경상을 오가는 이 고개가 군사적으로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운봉현에는 이곳이 요해처로 나오며 함양과 오가는 지로(指路)라 했다. <선조실록>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1월 1일에서 "방어사 곽영이 운봉의 팔량현과 구례의 석주(石柱) 두 성을 쌓아 영남의 적로를 방어하였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팔량현이라 했고, <함양군지지도>·<함양부지도>·<경상도읍지>에는 팔량령(八良嶺)이라 나와 있으며, <대동여지도>는 팔량치(八良峙)라 적었다. 고개를 이르는 한자말 치·현·령이 고루 쓰인 점이 특이하다.
  • 팔량치 관련 기록은 조선시대 특히 임진왜란 때에 집중되어 있다. 그만큼 전략적 요충이라는 뜻이니, 이름도 한결같이 팔량관(八良關)이라 했다. 팔량현에 둔 관문이란 의미로 용재 이행李荇(1478~1534)의 율시에 나오며, 임진왜란 의병장 함양 선비 정경운(1556~?)이 남긴 <고대일록(孤臺日錄)> 1593년 정월 19일 일기에 "성주 사람으로 적진에 투항해 들어간 자가 왜적의 지휘를 받고서, 합천·거창을 넘어 팔량관을 지나 장차 호남으로 들어가 형세를 살피려다 운봉의 수령에게 잡혀서 하나하나 승복했다고 하니, 통분할 일이다"고 한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행은 그의 시 '삼십일에 팔량관을 지나며'에 "중관천설험(重關天設險)"이라 하여 이중 관문성으로 표현하였으니, 팔량산성과 서쪽 성산리의 할미성을 동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 그 이름을 팔량관이라 하여 고개를 막은 관문성으로 인식하고 있어 고개 양쪽을 살펴보아도 남쪽에서는 성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경주의 관문성이나 통영로 상경 길에 지난 함안의 대현관문성이나 전주의 만마관처럼 고개 양쪽으로 날개를 펼친 듯 쌓은 성이래서가 아니라 고개를 방어하는 기능을 중시하여 붙인 이름인 거 같지만 사실은 이곳 팔량관은 팔량치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마루금의 동서쪽에 병립해 있는 쌍성(雙城)을 그리 불렀던 것이다.
  • 팔량산성은 전북 남원 아영면의 아막산성과 함께 신라와 백제가 영토 쟁탈을 하던 격전지였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지만 북서쪽은 잘 남아 있다. 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으로 수평줄눈쌓기를 하였고, 기울기가 밋밋한 남서쪽은 지세를 잘 이용하여 쌓았다. 팔량치는 지금은 팔령재라 불리며, 동쪽 팔령산성 아래 옹기종기 정겹게 모여 있는 마을은 함양읍 죽림리 팔령마을이다. 옛날 삼국시대부터 전란이 있을 때마다 최전선을 형성했던 마을은 이제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팔량치(八良峙)〉, 《두산백과》
  2. 팔량치(八良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팔량재〉,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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