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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해시넷
grpiao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9일 (화) 09:53 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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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제철

제철(iron manufacture, 製鐵)은 철광석을 제련하여 을 뽑아내는 방법으로 주로 선철을 만들 때까지의 공정을 이른다. 철광석을 석회석, 코크스와 함께 용광로에 넣고 열풍으로 용융시켜 비중차에 의해서 철분을 분리하고 평로나 전로를 써서 탄소나 불순물을 제거하여 강을 만든다.[1][2]

개요

제철은 철광석 또는 토철, 사철에서 철을 추출하여 각종 철재를 만드는 공정을 말한다. 철기 문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족의 융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철기는 생활 도구에서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인 중요성이 높았다. 특히 삼국이 각축을 벌였던 고대에는 철의 생산이 곧 국가의 힘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항이었던 만큼 각국은 철의 생산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였으며 제철공정에 다양한 기술들이 접목 되었고 그 결과 고대 원 삼국시대에는 효율적인 제철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였고 상품의 용도와 성격에 맞춰 다양하고 복잡한 공정들을 만들어냈다.

제철이라는 것은 야금의 한 분야이고 철광석 또는 사철로부터 철을 추출하고 정련해서 각종 용도와 성격에 맞게 철의 조직을 필요한 형태로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이러한 제철기술은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분야이며 이와 같은 야금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야금학 또는 금속공학이라고 하며 제철, 야금 기술을 주체로 하는 공업을 금속공업이라고 한다. 금속 공업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우리나라에서 중요 산업 중 하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서 철강공업은 매우 큰 생산량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중원재단문화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철강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1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3]

제철 과정

제철작업의 시작은 철광석(혹은 토철, 사철)을 채취하는 채광 작업부터 시작된다. 제철에 주로 쓰이는 철광석은 황철석(Pyrite, FeS2), 자철석(Magnetite, Fe3O4), 적철석(Hematite, Fe2O3), 갈철석(Limonite, FeO(OH) · nH2O) 등이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주로 자철석과 적철석이 사용되었다. 사철(砂鐵)은 해안이나 강변 등에서 주로 채취되는데 자철광이 주성분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는 적철광, 갈철광, 티타늄 철석(Ilmenite, FeTiO3) 혼합되어 있다. 채광된 철광석들은 철 성분이 높은 광석을 선별하는 과정인 선광(選鑛, Mineral dressing)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제련에 앞서 광석을 선광하면 운송 노동력의 절감, 제련 공정에서의 금속 손실 감소, 총 제련비 감소 등의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그다음 공정으로는 배소(焙燒, Roasting)작업에 들어간다. 배소는 광석이 용해되지 않는 정도의 고온으로 철광석 표면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환원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광석 표면에 균열을 일으켜 파쇄하기 용이하게 하는 공정이다. 철광석이 쉽게 파쇄되면 제련로까지 운반이 용이해져 전반적인 생산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후 제련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는 철광석을 노 내에서 철광석을 목탄을 매개로 환원시켜 철을 얻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철광석에 있는 맥석 등의 불순물들이 노 밖으로 배출되는데 이를 철재(鐵滓, 슬래그, Slag)라고 한다.

제련 과정에서 탄소량과 온도 등 노 내의 분위기에 따라 탄소량이 높은 선철과 탄소량이 낮은 괴련철이 생산되는데 중간 단계인 반환원괴가 생산되기도 한다. 형성된 철괴는 다음 단계로 정련 공정에 들어가는데 괴련철은 정련 단야를 통해 철괴에 남아있는 불순물들을 반복하여 제거하게 된다. 이후 정련된 소재는 단련 단야 공정에서 반복 단련 후 성형 단조를 통해서야 단조 철기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침탄(浸炭)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소재가 개선되고 추가적으로 강화 열처리를 통해 표면을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선철은 탄소 함유량 3~5%정도로 높은 철로 다음 공정인 용해 정련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용해는 제련 과정에서 생성된 환원괴를 융해시켜 액체화 시키는 작업으로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쇳물을 용범에 부어 주조 철기를 생산하게 된다. 주조 철기는 주로 단조 철기에 비해 기형이 복잡한 철기들을 제작하는데 이용되었다. 추가적인 열처리를 통해 주조 철기에서 부족한 연성을 증가시키게 되는데 그 종류로는 담금질(Quenching), 뜨임(Tempering), 풀림(Annealing), 불림(Normalizing) 등이 있다.[4]

역사

철기문화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민족의 융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고대 우리나라의 여러 유적지에서 출토된 철기 유물들이 대부분 이기류와 무기류로 구성된 것은 우리 선조들이 일찍부터 철을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과 인간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생활 도구에서부터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적인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역사학적으로나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제철은 것은 야금의 한 분야이며 철광석으로부터 철을 추출하고 정련해서 각종 사용목적에 적합하게 그 조성 및 조직을 필요한 형태로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또한 담금질, 뜨임 등의 열처리에 의해서도 사용목적에 적합한 성질의 재료가 얻어지고 금속을 녹여서 필요한 형태로 주입, 성형하여 주물도 만들 수 있으며 금속을 압연, 단조, 압출, 인발 등의 조업에 의해 변형시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야금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야금학 또는 금속공학이라 하고 야금을 주체로 하는 공업을 금속공업이라고 한다. 금속공업은 우리나라 중요 산업의 하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철강공업은 선진 공업국가에 이어 큰 생산량을 보유하고 있다.

고대~고려시대

우리나라의 제철 역사는 우리 문화의 역사와 기원을 같이하는 비교적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철기문화와 동기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금속의 제련 및 주조 기술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우리 조상이 가진 찬란한 철기문화의 자취를 역사학적으로는 물론 기술사적 측면에서 검토할 때 고고학적으로는 가야가 출발한 기원 전후의 시기부터 300년경까지는 완전한 철기시대로 인정되고 있어 적어도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1세기부터는 철기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는 996년(성종 15)에 철전을 주조해서 사용했으나 고려 중기 이후 거듭되는 전란과 금속광의 채굴, 야금에 대한 행정정책의 빈곤은 우리나라 금속기술이 부진한 요인이 되어 서서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정은 초기부터 금속광을 채굴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철장(鐵場)은 안동, 합천, 용궁, 산은, 무주, 영덕, 무안, 고산 등 17개소가 있었다. 이들 철장, 즉 제련소에서는 농한기에 광석을 취련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서 약 5세기 동안은 각종 지하자원의 채광, 제련이 자주 일어나려다가도 조정에 의해 금압(禁壓)되어 왔는데 이는 동시대에 일본이나 유럽이 광업을 육성함으로써 발전을 거듭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실로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1424년 당시에 가장 풍부한 철산지로 알려진 황해도 서흥에서 철광을 채굴하여 제련한 정철(正鐵)의 생산량(헌납량)이 584t이라고 하니 많은 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철의 생산은 그 뒤에도 여전히 부진하여 1502년(연산군 8)에도 서북도에 파견된 군사 가운데 철갑을 착용한 자가 아주 적은 정도였다. 조선에 들어서서 지하자원의 채굴 제련이 조정에 의해 금압되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후 병기의 부족을 느껴 철광석의 채굴을 명했지만 육성조차 없이 당시 병기용 주물마저 부족한 정도였으며 1607년까지도 무기조차 완전히 갖추지 못했을 정도였으므로 제철 분야도 정체 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600년대에 이미 중화기의 철통(鐵筒)에서 발사되는 각종 탄환에 철탄자, 진천뢰(震天雷) 등 철제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의 생산용 용해로나 주물용 기구 등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그 상세한 내용은 할 수 없다. 19세기에는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로 바뀌어 광산 경영은 민채(民採)가 주가 되었으며 철광물도 다른 광물과 더불어 채굴이 활발하였다. 제철기술, 주조기술, 단야기술 등 전통적으로 내려온 우수한 기술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근대적 기술의 기초를 형성하는 일 없이 발전하지 못한 채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1905∼1945년은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가 간섭, 통치를 당하던 시대이며 모든 일은 일본인에 의해 그들의 필요에 따라 수행되었고 우리나라 사람은 여기에 끌려가는 처지에 있었다. 일본 자본에 의한 제철공업은 장치공업에 속하기 때문에 입지조건만 적당한 경우에는 비교적 초기부터 건설이 추진되어 왔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철강재 수요가 왕성한 관계도 있어 1913년에 겸이포제철소가 건설되었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 종식과 군축으로 정체상태에 있다가 1937년경부터 급격하게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우리나라 철강공업이 비교적 근대화된 것은 1941년을 전후해서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군사적, 경제적인 필요를 느껴서 건설한 흥남제철소와 삼화제철소 등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공장이 설립되었다. 특히, 이 분야에서는 제품이 군수품 생산에 직결되는 소재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웠고 오로지 노력을 제공하는 처지에 불과하였다.

광복 이후

광복 후 국토가 둘로 갈라지고 광물자원 개발이 미흡하여 1962년 후의 제1, 2차 경제개발을 거쳐 제3차 경제개발의 중화학공업정책으로 1973년 7월 포항종합제철(주)이 조강생산 103만 t의 제1기 설비를 종합 준공한 이래 설비 확장을 거듭하여 1981년 2월에는 제4고로 화입 및 제4기 설비 준공으로 조강연산 850만 t 체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1983년 6월 제4기 설비 2차 확장공사 준공으로 조강연산 910만 t 규모의 국제적인 대형 제철소를 갖게 되었으며 현대 제철기술의 기간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제조기술의 도입, 소화 또는 자체 개발에서 경이적인 발전을 성취하였다. 특히 1981년 11월 제2제철소를 전라남도 광양만으로 확정 발표하여 1985년 7월에 조강연산 270만 t 규모의 고로 1기를 착공하여 1987년 4월에 완공하였으며 그 후 1988년 7월에 제2기, 1990년 12월에 제3기, 1992년 9월에 제4기, 1999년 3월에 제5기가 준공되었다.[5]

방법

코크스 제철법

각주

  1. 제철〉, 《위키백과》
  2. 제철〉, 《네이버 지식백과》
  3. 제철〉, 《나무위키》
  4. 제철 기술의 공정〉, 《국립문화재연구원》
  5. 제철(製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 제철〉, 《위키백과》
  • 제철〉, 《나무위키》
  • 제철〉,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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