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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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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學術)은 학문기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학문의 방법이나 이론을 말한다.

학문[편집]

학문(學問, 영어: academic discipline)은 과거의 모든 사건과 일 중에서도 지식적인 부분들만 정리해놓은 지식체계이다. 혹은 그 지식을 익히는 행위도 포함하기도 한다. 학문을 익히기 위해선 지식을 다른 사람과 사물, 기록과 경험, 간접경험으로부터 얻어 배우고 이를 익혀서 체득하는 과정을 거친다. 지식, 기술과 가치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은 교육을 통해 얻어질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탐구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사회와 국가는 구성원을 학문을 통해 교육시키고 바른 품성과 문화의 발전을 이루도록 활동하도록 하여야 한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또는 학문에 능통한 사람을 학자(學者, 영어: scholar)라고 부른다. 학문에서 주장 또는 사상, 철학 등을 달리 하는 갈래 또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을 학파(學派, 영어: school)라고 한다.

기술[편집]

기술(技術, technology)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거나 또는 성취하는 방법을 말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인간의 욕구나 욕망에 적합하도록 주어진 대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인간적 행위를 말한다. 기술이란 말은 그리스어(語) '테크네(technē)'에 유래되는 유럽계 언어의 번역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어원적(語源的)으로는 예술·의술 등도 포함하나 오늘날은 주로 생산기술의 뜻으로 사용된다.

즉, 보통 물적 재화(物的財貨)를 생산하는 생산기술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기술은 자연의 생성(生成)이나 인간의 생산적 사고 등과는 구별된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기술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고찰한 최초의 철학자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로서, 그는 인간정신의 진리를 파악하는 한 방법으로 테크네를 프로네시스[思慮]·에피스테메[認識]·소피아[知慧]·누스[理性]와 같은 선상에 놓고 그 이동(異同)을 논하여, 테크네를 외적인 것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프래크시스[製作]라고 정의하였다.

이 정의는 고대·중세를 거쳐 산업혁명 시대까지 가장 포괄적인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산업혁명에 의한 기계문명의 출현으로 기술의 새로운 정의가 요구됨에 따라 기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흔히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가령 영어의 테크닉이나 테크놀러지도 반드시 엄밀하게 구별되어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기술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주로 논하는 학문분야를 기술론이라고 한다. 현재 유력한 설은 다음의 2가지이다. 그 하나는 의식적용설(意識適用說)인데, 인간의 생산적 행위에 객관적 법칙을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것, 즉 과학의 응용이라는 설이며, 인간행동의 목적의식성과 합법칙성을 지적하고 인간행동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설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수단체계설(手段體系說)이며, 인간의 생활활동에 있어서의 노동수단과 그 체계를 기술이라고 보는 설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기술을 '어떤 사회적 체계 내에서 발전하는 노동수단' 또는 '자연에 관한 인식에 의지하여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노동수단의 총체’ 등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한편, 기술은 언제부터 발생하여 어떻게 발달하여 왔는가에 대해 오늘날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B.프랭클린은 인간을 '도구의 창조자'라고 하면서 기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같이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기술발달의 역사적 법칙을 구명하는 학문을 기술사(技術史)라고 한다.

학문과 기술의 발달[편집]

삼국의 학문과 기술[편집]

삼국시대에는 우수한 문화를 가진 중국의 한자와 그 문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대부분이 한자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한자의 음과 뜻'을 따와서 만든 이두로 우리말을 기록하여 널리 사용하였는데, 삼국 시대의 지명에 이것이 많이 나타나며,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였고, 태학을 세워 중국의 한학을 가르쳤으므로 지삭층에서는 유교의 경서와 역사서가 읽혀졌다. 또 여러 곳에 경당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울 가르쳤다.

태학은 중앙에 세워진 국립학교로 상류층 자녀들을 교육하였고, 경당은 지방에 설치한 사학 기관으로 평민층 자녀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과 중원 고구려 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한학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도 일찍부터 한학이 발달하여 5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등 유교의 5가지 경서),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가 있었다.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는 그 문장이 매우 세련되었으며, 당시의 국제 정세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의자왕 때 사택지적이라는 귀족이 인생의 무상함을 기록한 비석인 사택지적 비문은 노장사상이 세련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도 한학이 널리 연구되었으며 임신 서기석에는 신라의 청년들이 유교 경서를 공부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은 정치및 사회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한학이 발달됨에 따라 역사서를 만들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만들어져 전해 오던 역사서인 유기를 이문진이 간추려 신집을 편찬하였고, 백제에서는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서의 편찬은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신라의 진흥왕 때와 같이 국력이 크게 번성하던 때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주목된다.

삼국은 모두 농업이 기본이었으므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는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며, 물리학적 지식까지 응용하여 만들었다. 또 절을 지을 때 법당과 탑을 적절히 배치하는 등 건축에는 기학적의 원리를 사용하였으며, 역법에는 수학을 응용하였다.

신라의 금관이나 백제의 칠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금, 은, 구리의 세공 및 도금 기술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통일 신라의 학술[편집]

통일 초기의 문장가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였으며, 설총은 경서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화왕계를 지어 임금도 도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6두품 귀족 출신으로 유교를 신봉하였으며, 도덕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설립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 원성왕 때에는 독서 삼품과를 만들었다.(788년) 이것은 국학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졸업할 때, 그들이 배운 내용에 대해 시험을 치게한 후,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관리를 뽑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람의 능력보다는 신분에 중점을 두었던 골품제도에서 벗어나 실력위주로 인재를 뽑으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6두품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학문을 널리 보급시키는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성덕왕 때에 진골 귀족 출신인 김대문은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저술을 통해 신라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살았던 때는 전제 왕권이 강하였고 6두품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로, 그가 이와같이 신라의 전통을 강조한 것은 6두품 중심의 중국 유교 사상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나라에서 공부한 유학생으로 유명한 사람은 김운경과 최치원 등이 있다. 이들은 골품제도의 모순점을 점차 느끼게 되었고, 특히 최지원은 진성여왕 때 문란해진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 하였으나, 받아 드려지지 않자 정치에 뜻을 잃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글을 많이 남겼다. 그가 지은 계원필경과 비문의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천문학, 역법, 의학, 병학 등의 기술학도 발달하였는데, 병학과 천문학에서는 김암이 조예가 깊었다.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잡힌 모습은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응용된 것이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중엽에 만든 것으로 현재 존재하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당시 목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이 중국에서 받아드린 풍수 지리설은 경험에 의한 인문 지리적 지식과 예언적인 도참 사상이 결합하여 발전하였다. 풍수 지리설은 그 때까지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운영해 오던 행정 조직을 고쳐서 지방 중심으로 국토를 다시 편성하도록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지방의 호족 세력들은 자기들의 근거지를 명당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려 하였으므로 풍수 지리설은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하게 만들었다.

발해의 학문[편집]

발해도 당나라와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당으로부터 많은 책을 수입하였고, 당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일찍부터 학문이 발달하였다. 유학생 중에는 당의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왔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발해는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녀들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대외적인 외교문서는 물론 국내외에서의 공식 기록에도 한문을 사용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 공주 묘지와 정효 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과 발해의 외교 문서를 볼 때 한문학의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묘지란 죽은 사람의 이름, 관직, 살았을 때의 행적, 자손의 이름, 태어난 때, 죽은 때 등을 기록한 것으로 대개 이 묘지는 판이나 돌 등에 새겨 무덤 옆에 묻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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