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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해시넷
sms1208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2월 13일 (월) 11:0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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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家畜, domestic animal)은 인류가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개량한 것으로 인류생활에 유용한 동물을 통틀어 이른다. 주로 축산물을 제공하고, 사역에 이용된다. 조류에 속한 것을 가금이라하여 이를 제외하고 포유류 만을 좁은 뜻의 가축이라 하기도 한다.

현재 세계에서 가축으로 취급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포유류에는 ·당나귀··물소·면양·염소·낙타·순록·돼지··고양이·토끼, 조류에는 닭·칠면조·거위·집오리·화조·집비둘기·메추리, 어류에는 잉어·금붕어, 곤충류에는 누에·꿀벌 등이 있다. 보통 가축이라 할 때는 어류와 곤충류를 제외하고 포유류와 조류만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류에 속한 것을 가금(家禽)이라 하여 이를 제외하고, 포유류만을 좁은 뜻의 가축이라 하기도 한다.

과거 우리 나라의 가축 생간은 마산(馬産)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정도로 말은 일찍부터 군사용이나 교통수단으로 중요한 가축으로 간주되어 왔다. 역사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 나라 말의 사육 기원은 기원전 108년, 즉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의 재래마는 전부 소형마로서 '스키토시베리아'문화의 유입에 따른 타르판(Tarpan)계의 중형마가 시초가 되어 북방의 몽고마나 아랍 계통의 영향을 받으면서 내려와 정착된 우리 고유품종이다.

가축의 종류

김해의 조개무덤에서도 기원전 1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소의 유골이 발견된 바 있다. 우리 나라에서 소는 주로 농사를 짓는 데 이용되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싣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고구려에서 300년경에 소달구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나 416년 신라의 눌지왕이 소달구지를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는 것 등도 소가 역용(役用)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처음에 소는 시체를 나르는 데 이용되다가 물건을 운반하거나 농사에 쓰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지증왕 때인 498년에는 소로 농사를 짓는 것이 경주 일대의 농민에게 실용화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용 이외에 식용으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소는 매우 귀중한 짐승으로 옛날에는 소의 소유 정도에 따라 부유함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남의 소를 죽이거나 손상을 입힌 사람을 노비로 삼는 벌을 주어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소의 전염병이 유행하면 논·밭갈이를 사람이 대신하기도 하였으며, 소의 도살을 금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세조는 목장을 많이 만들었고 우경을 장려하였으며, ≪양우법≫이라는 책을 만들어 소의 이용과 증식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삼국지≫에는 진한 사람들이 을 탔다는 기록이 있고, 350년경의 고구려벽화 중에는 말이 수레를 끄는 그림이 있으며, 신라 문무왕 9년에는 전국에 174개 소의 목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군용이나 교통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의 재래마는 부여의 명마(名馬)와 과하마(果下馬), 고구려의 삼척마(三尺馬), 예(濊)와 백제의 과하마처럼 왜소한 품종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만주 등을 거쳐 유입된 호마(胡馬)와 재래종인 향마가 있었다고 한다. 또, 1273년 고려 원종 이후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서역마와 재래마가 교잡되어 제주도말이 생겼는데, 조선시대에 본토 또는 북방에서 수입된 말에 의하여 혈액이 혼합되면서 오랜 시일에 걸쳐 체격이 왜소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이 123개 소가 있어 군용, 궁실의 식용, 수렵과 통신 등에 이용하였으나 농경에는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목장도 없어졌다가 민족항일기 이후 일본군에 의해서 대형의 개량종이 증가하게 되었고 농업에도 이용하게 되었다.

1915년 강원도 회양군 난곡에 목장을 설치하여 사육, 번식시킴과 함께 좋은 말을 개량하기도 하였으며, 함경북도 경원에서는 종마목장을 세워 군용말을 생산하였다. 1920년에는 우리의 재래종에 일본산을 교배하여 '신조선종'이라는 품종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에는 말젖이 갈증 해소에 좋다고 되어 있으나, 말고기의 식용은 대중화되어 있지 않고, 내장을 이용한 기록도 없다. 다만 말고기의 포(脯)는 옛날 일부층에서 이용하였다고 한다.

말 사육두수의 변천을 보면, 1910년도에 4만 5000여 두가 사육되던 것이, 제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일제의 군수용말 증식계획으로 1944년에는 8만 4000두까지 증가하였지만, 1945년 광복이 되면서 3만 4000두로 크게 감소하였다.

그 뒤 도로교통 및 철도의 발달과 자동차 등 운송수단의 급증과 함께 말 사육은 가속적으로 감소하게 되었고 국민경제 향상으로 쇠고기의 생산이 필요하게 되면서 말 생산은 소 사육에 압도되어 더욱 위축되었다.

1980년대 초에 불과 3,000여 마리에 불과하던 말은, 경제가 성장하고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승용 또는 경주용 개량마가 도입 사육되면서 그 수가 불어나, 1999년 말 현재 국내에는 약 8,400마리가 사육되고 있는데, 이 중 약 5,000마리가 재래마인 소형조랑말로서 제주도에서 사육되고 있다.

그나마 혈통이 흐려지고 숫자도 감소일로를 걷게 되자 정부에서는 멸종을 막기 위하여 혈통의 순도가 높은 일부 제주마를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장차 국민소득과 생활이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승마·경마 등 오락용으로 인기가 더해 가면서 승용마의 사육두수는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돼지

참고자료

  • 가축〉, 《두산백과》
  • 〈[url 제목]〉, 《사이트명》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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