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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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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갤리
16세기의 갤리선 모형

갤리선(Galley)은 노젓기(Rowing)를 보조 동력으로 하는 의 일종이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지중해의 지배자였던 범선이다. 그리스로마에서 주로 사용했지만, 이집트페르시아에서도 유사한 배들을 사용했고 그 배들도 갤리라고 부른다.

갤리는 길고 얇은 선체, 얉은 흘수, 낮은 선현이 특징이다. 사실상 모든 종류의 갤리선은 적절한 바람이 불어올 때 항해를 해서, 인력이 보조 추진력이었다. 고대시대 때 지중해에서 군함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범선이지만 바람보다는 를 이용해 주로 움직였다. 노는 주로 죄수나 전쟁포로를 노잡이 노예로 만들어, 강제로 젓게 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갤리는 대항해시대가 되자 갈레아스, 갤리온으로 진화한다. 바람보다는 인력을 이용해 주로 움직였으므로 원양항해에는 부적합하여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차츰 쇠퇴하였다.

개요

갤리선은 교류의 교통사적 전거로서의 선박이다. 중세 유럽에서 사용하던 군용선으로 마스트 1개와 삼각범(三角帆)으로 운항하는데, 적재량은 50~200톤이다. 일반 운송용으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향료 같은 가벼우면서도 고가인 물품을 수송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근대까지도 지중해를 주름잡았으나, 강력한 군용선인 북방선이 지중해에 투입되면서부터 갤리선은 열세에 몰렸다. 프랑스 지중해 함대는 18세기까지도 이 갤리선을 주력선으로 삼았다. 갤리선을 개량한 것이 바로 갤리온(galleon)이다.

역사

노를 주로 쓰고 을 보조로 쓴다라고 국내 사전에는 나와있지만 실은 그 반대이다. 노를 젓는다는 건 상상 이상의 중노동으로서, 제아무리 숙련된 노잡이라고 할지라도 노만으로 배를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전투 시 민첩한 기동을 위해 노에 집중하던 군함도 평상시에는 돛으로 다녔다. 더욱이 당시의 노 젓기법은 수많은 노잡이들이 전부 작은 노를 하나씩 붙잡고 젓는 센실레(alla sensile) 방식이라 비숙련자가 손을 댔다간 노가 엉켜 대참사를 일으키기 쉬웠다.

때문에 당시 갤리선의 노잡이는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철저하게 자유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예 노잡이들은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비상상황에서나 보이는 존재들이고, 이 경우 비숙련자들인 노예들의 사기라도 올려 노를 열심히 저을 수 있도록 해방을 약속해주었다.

이처럼 노잡이들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재산이나 병역이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던 고대 지중해의 아테네에서는 빈민층도 부유층과 대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었다. 육군 중심 국가였다면 중장보병 정도는 되어야 병역에 기여했음을 인정받아 어느 정도의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즉, 값비싼 중장보병의 무기와 갑옷을 마련하고 유지할 수 있는 재산이 있어야만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는 해군도 중시되었고, 그만한 활약과 공적을 보였다. 그래서 무기와 갑옷을 마련할 돈이 없는 빈민층들도 해군의 노잡이로 기여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갤리선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지중해대양과 달리 바람이 불규칙하고 변덕스러웠기 때문에 상선이고 전투선이고 할 것 없이 노라는 보조 엔진을 사용할 수 있는 갤리선이 유리했고, 이쪽이 주력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투시에는 돛을 내리고 노만으로 조정하였다.

주로 3단(트리에레스)에서 5단 갤리선이 전투의 주력이었는데 여기서 몇 단이라는 것의 의미는 갑판의 수로서 3단은 3층의 복합갑판에 각각 노잡이와 노가 있다라는 식이다. 즉 단수가 높을수록 노잡이가 더 많은 것이기 때문에 배의 크기와 기동성에서 유리했다. 당시 해전은 상대방의 옆구리를 노려 충각으로 들이받거나 나란히 접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주된 전술이었는데, 덩치도 좋고 기동성도 나은 고단 갤리선이 더 강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대부분 1단 갤리선이었기에 살라미스 해전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의 3단 갤리선을 이기지 못했고, 알렉산더 대왕 사망 이후 디아도코이 전쟁 무렵부터 출현한 5단 갤리선은 헬레니즘 제국 해군의 주력함이 되었다.

헬레니즘 제국들이 몰락한 후에 지중해의 지배자는 5단 갤리선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페니키아인이 세운 국가, 즉 카르타고였다.

그러나 여기서 나타난 변수가 로마인이었다. 로마는 소형선 이상을 몰아본 적 없는 농경민족이었으나, 포에니 전쟁에서 신병기인 까마귀(코르부스)를 앞세워 카르타고를 격파하였다. 까마귀는 일종의 다리를 세워 놓은 구조물로서 고정용 밧줄을 끊으면 상대방의 배에 내리 꽂혀서 양쪽 배를 고정시켜 버린다. 이렇게 되면 항해술을 발휘할 여지는 없고 잘 훈련된 로마 군단병들이 무제한으로 건너갈 수 있었기 때문에 용병과 뱃사람들로 이루어진 카르타고군보다 훨씬 유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포에니 전쟁 당시에 로마군의 5단층 갤리선은 많은 병력을 탑승시키기 위해서 카르타고 측 5단층 갤리선보다 좌우폭이 더 넓었다고 한다. 덕분에 배의 안정성이나 병력 탑승 공간 등에서 카르타고보다 유리했으나 그만큼 배의 무게가 늘어나서 속도가 줄어든 데다 배를 다루는 숙련도 등에서도 카르타고보다 떨어져서 선상백병전을 위해 가변식 도개교인 까마귀가 도입되었다. 반면 카르타고 해군은 숙련된 군선 운영능력을 바탕으로 한 충각전술을 선호했다.

그러나 까마귀를 장착할 경우 무게가 늘어나고 바람의 영향을 더 크게 받게 되어 결과적으로 배의 안전성이 매우 크게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고, 결국 코르부스는 얼마 안 가 사라진다. 그 대신 갑판 위에 작은 성채 같은 전투용 탑이 설치되어 접현전 시 적함의 갑판에 투창과 화살을 높은 위치에서 쏟아부을 수 있게 개량되었다.

이런 로마식 도선 전술이 먹히지 않았던 상대는 바로 켈트족. 갈리아 전기에는 로마와 켈트의 해상전에서 켈트 쪽의 배가 범선이라서 더 크고 높으면서 튼튼해 개전 초기에 켈트족이 선단을 요새처럼 사용해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원거리 무기들을 사용해 로마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기록이 나온다. 거기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해당 지역의 갈리아인들은 거친 바다에서의 항해 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당시 켈트족의 배에 이동수단이 돛밖에 없다는 점을 노려 돛을 무력화시키고, 접근전에 로마군이 더 강하다는 점을 활용해 최대한 접근전으로 끌고가 적의 배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전법을 사용해 로마군이 승리하게 된다. 마침 도망가던 갈리아 범선들도 바람이 멈춰서 전부 로마군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를 사실상 내해로 장악해버린 로마 제국은 해적만 퇴치하면 큰 문제는 없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배의 발전이나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전면전이 없어졌으므로 점차 10단선, 5단선 등 퀸키어림들이 전부 퇴역하고 2단선인 리부르니안이 주력함으로 되었다. 리부르니안은 동로마 제국 시대에 더 개량되어 드로몬으로 발전한다.

한편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의 신흥 해양 세력인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역시 단수가 낮은 갤리선을 사용했다. 이런 도시국가들은 인구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노잡이들도 전투에 참가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려면 다단 갤리선은 불편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갤리선 노예가 대중화된 것은 1520년대에 들어서 였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여러 사람이 하나의 큰 노를 젓는 '스칼로치오'라는 새로운 노젓기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인데, 이전에 쓰던 '센실레'(alla sensile) 방식은 노꾼 하나가 작은 노를 하나씩 잡고 저었기에 노가 많은 갤리선의 경우 숙달된 노꾼이 아니면 엉키기 쉬웠다. 그래서 이때는 노꾼이 상당한 고급 인력이었고, 노꾼도 자유민들을 모병해서 동원했다.

그러나 '스칼로치오'(a scaloccio) 방식은 여러 사람이 하나의 큰 노를 젓는 방식으로, 노 하나에 4명이 붙어서 노를 조종할 때 노의 통제는 노의 제일 끝에서 조종하는 1명뿐이었기에 숙련자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고, 이때부터 노예나 죄수들을 노잡이로 쓰는 것이 일반화되어 스페인이나 바르바리 해적, 오스만 제국은 물론 심지어 성 요한 기사단까지도 노예 선원들을 사용했다. 이렇게 여럿이 하나의 큰 노를 젓는 스칼로치오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노잡이의 대우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스칼로치오 방식은 노를 저을 때 제일 끝의 노를 직접적으로 부리는 노잡이만 숙련자면 충분했기 때문에(다른 노잡이들은 거드는 일만 한다) 예전처럼 숙련자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자연히 노예들을 노잡이로 부리게 되었고, 처우도 바닥을 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여담으로 노예를 쓰는 갤리선은 배 전체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수백명의 노예들이 씼지도 못하고, 땀과 오물에 절어 사슬에 묶여있기에 사람들은 갤리선이 지나가기만 해도 악취에 몸을 떨었고, 항구에서는 배가 도착하기 전에 냄새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몰락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약 1500년경을 기점으로 갤리선은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과 로도스 섬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면서 동지중해가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오스만 제국이 동방의 물산을 전부 통제하자 유럽 세력 입장에서는 지중해 무역의 가치가 떨어졌으며, 게다가 이슬람 해적의 존재 때문에 상선이 위협받기까지 했다. 때문에 유럽 세력은 대항하기 힘든 이슬람 세력보다는 새로운 미지의 땅을 향해 나가는 길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같은 신흥 해상 강대국의 등장으로 이제 바다의 패권을 다투는 무대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쪽으로 옮겨갔다.

문제는 갤리선이 대서양 같은 대양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갤리선은 특성상 범선에 비해 선체가 길쭉하고 직선형인데, 이렇게 되면 구조적으로 먼 바다의 강한 파도에 취약해진다. 대서양의 풍향은 지중해보다는 훨씬 예측가능했으며, 따라서 항해 계획을 잘 짜면 노 없이 돛만으로도 얼마든지 항해가 가능했다. 게다가 갤리선은 다수의 노잡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인원이 많고, 인원이 많으니까 상대적으로 배의 체급에 비해 적재량이 떨어지는데, 범선은 노잡이가 필요없으니 필요인원이 갤리선보다 적을 뿐만 아니라 갤리선에 비해 대형화가 쉬운 구조라 적재량도 많고 경제성도 좋았다. 한편 갤리선은 노가 해수면에 닿아야 하기 때문에 선체를 높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며, 흘수가 낮아 파도가 높은 먼 바다의 경우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림이 심하고 갤리선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침수할 위험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복합돛이 등장하면서 범선도 불규칙한 바람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게 되면서 갤리선의 역풍에 대응에 쉽다는 장점이 무색해졌다.

대포의 발달도 갤리선의 몰락을 앞당겼다. 범선은 양 선측에 다량의 대포를 적재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브릭 같은 범선도 20문 가까이 탑재할 수 있고, 전열함 같은 본격적인 주력전함은 보통 80문, 많게는 100문이 넘게 대포를 탑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갤리선은 선측에 이미 노가 들어서 있기 때문에 대포를 적재하기 곤란했다. 판옥선이나 다른 범선처럼 여러 층의 갑판을 쌓고 대포 층과 노잡이 층을 분리하는 방법, 또는 베네치안 갤리어스처럼 갑판에 포탑을 증설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렇게 하자니 노 때문에 대포를 무조건 높은 층에만 배치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대포의 위치가 높으면 그 자체의 중량 때문에 무게중심 위치가 높아지고, 때문에 풍랑을 만나면 전복되기 쉬워진다. 게다가 대포를 좀 강한 걸 쓰다가는 대포 사격 반동과 파도가 합쳐져 배가 전복될 가능성이 커진다. 강한 대포일수록 대체적으로 무겁단 건 덤이다. 덕분에 갤리선은 대포를 별로 탑재하지 못하는데, 가장 커다란 베네치안 갤리어스조차 14문 정도밖에 탑재하지 못했을 정도다.

무풍지대에서는 갤리선이 좋을 것 같지만, 무풍지대는 유럽 인근 해역과 지중해에선 발생하지 않는다. 무풍지대는 적도 주변과 북위/남위 30도 인근에서 발생하는데 남유럽인 스페인조차 북위 40도(마드리드 기준)에 있고, 북위 30도는 모로코 남부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나마도 서아프리카에서는 무풍지대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멕시코 인근 해안인 사르가소 해의 무풍지대가 유명하지만, '지대'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현상은 특정 지역에서만 발생했기 때문에 그곳을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무풍 지대로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으며, 무풍지대를 돌파하겠답시고 갤리선으로 사람이 노저어서 대서양을 건넌다는 무모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흔한 오해가 범선은 바람이 적당한 방향에서 불어주지 않으면 선회조차 못한다는 것인데 범선 운용에 기초 지식만 있으면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다. 무풍지대만 아니라면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든 간단히 선회가능하다. 속도로는 산들바람만 불어도 브릭같은 중형범선은 갤리선보다 훨씬 빠른 8kn 이상의 고속력을(15세기 전후의 중세 기준) 낼 수 있으며 비교적 강한 바람이 불면 갤리선으로는 꿈도 못꾸는 20kn 이상을 낼 수 있다.참고 다만, 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톱 세일이나 갤런트 세일은 물론 로얄 세일, 스카이 세일 등 여러 종류의 돛을 장비해야 하므로 18세기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15kn 정도가 한계였다. 때문에 1600년대까지는 지중해에서 갤리선이 혼용되기도 했다. 특히 영국 등 대서양 연안 국가들보다 항해기술이 부족한 바르바리 해적들은 17세기까지 갤리선을 널리 사용했지만, 이들도 18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범선으로 바꾸게 된다.

스페인은 연안 방어용도로 갤리를 운영했고 다른 나라도 해안 방어용도로 노를 쓰는 건보트를 운영한 적이 있지만, 연안방어에만 한정된 용도를 쓰느니 불편함을 감소하더라도 범선을 쓰는 게 나았고, 애초에 연안 방어의 주력은 해안포대였던 데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원양에서 해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없는 것보단 나은 신세였다.

결과적으로 18세기에 이르면 전 지중해에서 현역으로 남아있던 갤리는 50척 정도에 불과했고, 그 절반은 지중해에서만 활동하던 베네치아 소속이었다. 심지어 18세기부터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조차 갤리선을 버리고 지벡을 사용했을 정도. 반면, 지형이 좁고 복잡하던 발트 해에서는 19세기까지도 사용되었는데 그나마도 본격적인 해전에 투입되기보다는 일종의 상륙함에 가까웠다.

현대에는 당연히 사라졌고, 아주 가끔 리인액터들이 직접 제작해서 갤리선으로 항해를 재현하는 정도로만 남아 있다. 레저, 스포츠 용으로 흔히 사용하는 카누나 카약 등은 갤리가 아닌 보트에 속한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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