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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 페라리의 풀 네임은 엔초 안셀모 주세페 마리아 페라리(Enzo Anselmo Giuseppe Maria Ferrari)이며 엔초 안셀모 페라리(Enzo Anselmo Ferrari)라고도 부른다.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나 10살 때 우연히 볼로냐에서 열린 자동차 레이스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13살 때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16세에는 스포츠 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하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엔초는 이탈리아 3차 포병연대에 입대하여 참전하여 복무하였으며 그 무렵 엔초의 아버지 알프레도와 형이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엔초도 당시 독감으로 크게 앓아누었지만 회복하며 혼자만 퇴원을 하게 된다. 아버지와 형의 사망으로 인해 가내수공업을 이어오던 목공 사업이 문을 닫게 되면서 엔초 페라리는 20세에 본인이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자동차 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취직하였으며 그러던 중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 중 한 명인 펠리체 나차로(Felice Nazzaro)를 만나 그의 소개로 밀라노의 스포츠카 제조사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으로 직장을 옮기고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하는 동시에 트럭 차체를 승용차로 제조하는 일도 하였다. 1919년 엔초 페라리는 처음으로 레이싱 대회에 출전하여 전체 4위를 기록하여 운전 실력을 인정받아 레이싱에 데뷔하게 된다. 1920년에 알파 로메오 팀에 입단 후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1923년에는 처음으로 그랑프리 수상을 이루게 되며 1년 후 1924년에는 3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동료였던 안토니오가 주행 중 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되자 엔초 페라리는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으며 1932년 그의 아들 알프레도 디노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경주 차량 관리와 개발에 더욱 집중을 하게 되었다. 1929년에는 마구간을 뜻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라는 자신의 F1 레이싱 팀을 차려 진정한 페라리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페라리 엠블럼에는 말 그림과 함께 "SF"라는 영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뜻하는 약자이다. 1939년에는 스쿠데리아 팀을 흡수하면서 자신을 내쫓으려는 알파 로메오를 뛰쳐나와 기존 스쿠데리아 페라리 본사에 자신의 회사인 오토 아비오 코스트루찌오니(Auto Avio Costruzioni)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1940년에는 첫 생산 차량인 1,500cc 8기통 Tipo 815를 만들었지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파 로메오와의 계약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싱카를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자동차 경주가 중단됐고 1943년 말 오토 아비오 코스트루찌오니 작업장은 모데나에서 마라넬로로 이전했다. 1944년 11월과 1945년 2월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생산은 계속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디자인과 자동차 생산이 재개돼 페라리의 가장 첫 번째 차량인 1,500cc 12기통 125 Sport 가 탄생했다. 이 차는 프랑코 코르테즈(Franco Cortese)에 의해 1947년 5월 11일에 열렸던 삐아첸짜(Piacenza) 서킷에서 데뷔했다. 2주 뒤인 그 달 25일에는 떼르메 디 까라깔라(Terme di Caracalla) 서킷에서 열린 로마 그랑프리(Rome Grand Prix)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페라리의 진가가 그랑프리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1988년까지 무려 5,000번이라는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막강한 팀으로 성장하게 된다. 1969년 엔초 페라리는 늘어나는 시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 지분 중 50%를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그룹에 매각했으며 그 지분은 1988년에 이르러서 90%까지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라리는 그 제품들의 특수성 덕분에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돼 온 것이 사실이다. 1977년에는 1950년대부터 페라리의 GT 섀시와 차체를 만들어온 카로체리아 스칼리에티(Carrozzeria Scaglietti)라는 모데나의 자동차 디자인 및 설계 회사가 페라리에 합병됐다. 1988년 8월 14일 페라리는 90세의 일기로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ref>〈[https://namu.wiki/w/%EC%97%94%EC%B4%88%20%ED%8E%98%EB%9D%BC%EB%A6%AC 엔초 페라리]〉, 《나무위키》</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7%94%EC%B4%88_%ED%8E%98%EB%9D%BC%EB%A6%AC 엔초 페라리]〉,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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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 페라리의 풀 네임은 엔초 안셀모 주세페 마리아 페라리(Enzo Anselmo Giuseppe Maria Ferrari)이며 엔초 안셀모 페라리(Enzo Anselmo Ferrari)라고도 부른다.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나 10살 때 우연히 볼로냐에서 열린 자동차 레이스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13살 때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16세에는 스포츠 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하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엔초는 이탈리아 3차 포병연대에 입대하여 참전하여 복무하였으며 그 무렵 엔초의 아버지 알프레도와 형이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엔초도 당시 독감으로 크게 앓아누었지만 회복하며 혼자만 퇴원을 하게 된다. 아버지와 형의 사망으로 인해 가내수공업을 이어오던 목공 사업이 문을 닫게 되면서 엔초 페라리는 20세에 본인이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자동차 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취직하였으며 그러던 중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 중 한 명인 펠리체 나차로(Felice Nazzaro)를 만나 그의 소개로 밀라노의 스포츠카 제조사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으로 직장을 옮기고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하는 동시에 트럭 차체를 승용차로 제조하는 일도 하였다. 1919년 엔초 페라리는 처음으로 레이싱 대회에 출전하여 전체 4위를 기록하여 운전 실력을 인정받아 레이싱에 데뷔하게 된다. 1920년에 알파 로메오 팀에 입단 후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1923년에는 처음으로 그랑프리 수상을 이루게 되며 1년 후 1924년에는 3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동료였던 안토니오가 주행 중 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되자 엔초 페라리는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으며 1932년 그의 아들 알프레도 디노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경주 차량 관리와 개발에 더욱 집중을 하게 되었다. 1929년에는 마구간을 뜻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라는 자신의 F1 레이싱 팀을 차려 진정한 페라리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페라리 엠블럼에는 말 그림과 함께 "SF"라는 영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뜻하는 약자이다. 1939년에는 스쿠데리아 팀을 흡수하면서 자신을 내쫓으려는 알파 로메오를 뛰쳐나와 기존 스쿠데리아 페라리 본사에 자신의 회사인 오토 아비오 코스트루찌오니(Auto Avio Costruzioni)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1940년에는 첫 생산 차량인 1,500cc 8기통 Tipo 815를 만들었지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파 로메오와의 계약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싱카를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자동차 경주가 중단됐고 1943년 말 오토 아비오 코스트루찌오니 작업장은 모데나에서 마라넬로로 이전했다. 1944년 11월과 1945년 2월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생산은 계속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디자인과 자동차 생산이 재개돼 페라리의 가장 첫 번째 차량인 1,500cc 12기통 125 Sport 가 탄생했다. 이 차는 프랑코 코르테즈(Franco Cortese)에 의해 1947년 5월 11일에 열렸던 삐아첸짜(Piacenza) 서킷에서 데뷔했다. 2주 뒤인 그 달 25일에는 떼르메 디 까라깔라(Terme di Caracalla) 서킷에서 열린 로마 그랑프리(Rome Grand Prix)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페라리의 진가가 그랑프리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1988년까지 무려 5,000번이라는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막강한 팀으로 성장하게 된다. 1969년 엔초 페라리는 늘어나는 시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 지분 중 50%를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그룹에 매각했으며 그 지분은 1988년에 이르러서 90%까지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라리는 그 제품들의 특수성 덕분에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돼 온 것이 사실이다. 1977년에는 1950년대부터 페라리의 GT 섀시와 차체를 만들어온 카로체리아 스칼리에티(Carrozzeria Scaglietti)라는 모데나의 자동차 디자인 및 설계 회사가 페라리에 합병됐다. 1988년 8월 14일 페라리는 90세의 일기로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ref>〈[https://namu.wiki/w/%EC%97%94%EC%B4%88%20%ED%8E%98%EB%9D%BC%EB%A6%AC 엔초 페라리]〉, 《나무위키》</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C%97%94%EC%B4%88_%ED%8E%98%EB%9D%BC%EB%A6%AC 엔초 페라리]〉, 《위키백과》</ref>
 
<ref> 포튼가먼트 부산점, 〈[https://blog.naver.com/fotton051/221886946771 엔초페라리 전세계가 열광하는 빨간차를 만든자, 부산맞춤정장 포튼가먼트]〉, 《네이버 블로그》, 2020-04-02</ref>
 
<ref> 포튼가먼트 부산점, 〈[https://blog.naver.com/fotton051/221886946771 엔초페라리 전세계가 열광하는 빨간차를 만든자, 부산맞춤정장 포튼가먼트]〉, 《네이버 블로그》, 2020-04-02</ref>
  

2021년 4월 29일 (목) 11:19 판

엔초 페라리(Enzo Ferrari)
페라리(Ferrari)

엔초 페라리(Enzo Ferrari)는 이탈리아 명품 자동차 브랜드이자 고성능 스포츠카 제조 업체인 페라리(Ferrari)의 창시자이며 유명한 레이싱 선수이자 F1 자동차 경주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창설자이다.[1]

개요

엔초 페라리의 풀 네임은 엔초 안셀모 주세페 마리아 페라리(Enzo Anselmo Giuseppe Maria Ferrari)이며 엔초 안셀모 페라리(Enzo Anselmo Ferrari)라고도 부른다.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나 10살 때 우연히 볼로냐에서 열린 자동차 레이스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13살 때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16세에는 스포츠 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하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엔초는 이탈리아 3차 포병연대에 입대하여 참전하여 복무하였으며 그 무렵 엔초의 아버지 알프레도와 형이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엔초도 당시 독감으로 크게 앓아누었지만 회복하며 혼자만 퇴원을 하게 된다. 아버지와 형의 사망으로 인해 가내수공업을 이어오던 목공 사업이 문을 닫게 되면서 엔초 페라리는 20세에 본인이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자동차 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취직하였으며 그러던 중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 중 한 명인 펠리체 나차로(Felice Nazzaro)를 만나 그의 소개로 밀라노의 스포츠카 제조사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으로 직장을 옮기고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하는 동시에 트럭 차체를 승용차로 제조하는 일도 하였다. 1919년 엔초 페라리는 처음으로 레이싱 대회에 출전하여 전체 4위를 기록하여 운전 실력을 인정받아 레이싱에 데뷔하게 된다. 1920년에 알파 로메오 팀에 입단 후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1923년에는 처음으로 그랑프리 수상을 이루게 되며 1년 후 1924년에는 3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동료였던 안토니오가 주행 중 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되자 엔초 페라리는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으며 1932년 그의 아들 알프레도 디노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경주 차량 관리와 개발에 더욱 집중을 하게 되었다. 1929년에는 마구간을 뜻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라는 자신의 F1 레이싱 팀을 차려 진정한 페라리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페라리 엠블럼에는 말 그림과 함께 "SF"라는 영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뜻하는 약자이다. 1939년에는 스쿠데리아 팀을 흡수하면서 자신을 내쫓으려는 알파 로메오를 뛰쳐나와 기존 스쿠데리아 페라리 본사에 자신의 회사인 오토 아비오 코스트루찌오니(Auto Avio Costruzioni)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1940년에는 첫 생산 차량인 1,500cc 8기통 Tipo 815를 만들었지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파 로메오와의 계약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싱카를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자동차 경주가 중단됐고 1943년 말 오토 아비오 코스트루찌오니 작업장은 모데나에서 마라넬로로 이전했다. 1944년 11월과 1945년 2월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생산은 계속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디자인과 자동차 생산이 재개돼 페라리의 가장 첫 번째 차량인 1,500cc 12기통 125 Sport 가 탄생했다. 이 차는 프랑코 코르테즈(Franco Cortese)에 의해 1947년 5월 11일에 열렸던 삐아첸짜(Piacenza) 서킷에서 데뷔했다. 2주 뒤인 그 달 25일에는 떼르메 디 까라깔라(Terme di Caracalla) 서킷에서 열린 로마 그랑프리(Rome Grand Prix)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페라리의 진가가 그랑프리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1988년까지 무려 5,000번이라는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막강한 팀으로 성장하게 된다. 1969년 엔초 페라리는 늘어나는 시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 지분 중 50%를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그룹에 매각했으며 그 지분은 1988년에 이르러서 90%까지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라리는 그 제품들의 특수성 덕분에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돼 온 것이 사실이다. 1977년에는 1950년대부터 페라리의 GT 섀시와 차체를 만들어온 카로체리아 스칼리에티(Carrozzeria Scaglietti)라는 모데나의 자동차 디자인 및 설계 회사가 페라리에 합병됐다. 1988년 8월 14일 페라리는 90세의 일기로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2][3] [4]

주요 활동

페라리 125 스포츠

각주

  1. "Enzo Ferrari", "wikipedia"
  2. 엔초 페라리〉, 《나무위키》
  3. 엔초 페라리〉, 《위키백과》
  4. 포튼가먼트 부산점, 〈엔초페라리 전세계가 열광하는 빨간차를 만든자, 부산맞춤정장 포튼가먼트〉, 《네이버 블로그》, 2020-04-02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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