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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피에히는 1937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안톤 피에히는 당시 독일의 저명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법률자문을 맡다가 1928년 포르쉐 박사의 딸인 루이제와 결혼했다. 이 같은 집안 내력 덕분에 피에히는 일찍부터 자동차 마니아가 됐다. 1962년 취리히 연방공대를 졸업하고 1963년 외할아버지 포르쉐가 설립한 '''[[포르쉐]]'''에 입사하여 전설적인 스포츠카 포르쉐 917 개발을 주도했다. 이 차는 1970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떨쳤고 천부적 엔지니어 소질을 바탕으로 미래 CEO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971년 포르쉐의 주식을 절반씩 가진 포르쉐 가문과 피에히 가문이 경영권 다툼을 벌였고 양쪽 모두 포르쉐 경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이 때문에 피에히는 1972년 아우디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아우디가 속한 폭스바겐 그룹에서 36년에 걸친 화려한 경력을 시작한다. 피에히는 아우디로 옮긴 후에도 눈부신 능력을 발휘했다. 기술 엔지니어링 부서의 책임자로 취임해 아우디80, 아우디100 등 모델 개발을 주도하고  직분사 엔진인 TDI와 4륜구동 시스템 콰트로를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개발 담당 임원까지 오른다. 1988년 아우디 최고경영자로 되었으며 1993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모기업 폭스바겐의 최고경영자까지 오른다. 피에히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노조 그리고 폭스바겐의 대주주이기도 한 니더작센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제품만이 살길이다고 하며 제품군을 혁신적으로 바꿨다. 그는 그룹 산하의 브랜드에서 공통 사용 가능한 모듈 구조 기술 개발을 주도하며 회사를 살렸다. 동시에 스코다와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자동차 명가 이미지를 구축했고 트럭 제조업체 만과 카니아, 오토바이 두카티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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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나이 제한에 걸려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이사회 의장을 맡았지만 심복들을 그룹 내 요직에 심어 실권을 장악했다.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그룹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최대 위기는 친정인 포르쉐에서 나왔다. 포르쉐 CEO인 비데킹은 폭스바겐과 SUV를 공동 개발 이후 포르쉐에서는 카이엔, 폭스바겐에서는 투아렉, 아우디에서는 Q7로 출시하면서 폭스바겐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당시 저평가돼 있던 폭스바겐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최대주주 등극을 시도한다. 비데킹은 포르쉐 이사회 의장이자 피에히의 사촌인 볼프강 포르쉐의 지원 아래 2005년부터 폭스바겐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 결국 2008년 말 33% 이상을 인수했다. 연산 10만 대의 포르쉐가 연산 600만 대의 폭스바겐 그룹을 자회사로 편입하게 되는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포르쉐는 무리하게 빌려온 자금이 경제위기로 회수당할 처지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자본금이 많은 폭스바겐에 도움을 청했고 피에히는 궁지에 몰린 볼프강 포르쉐를 압박해 비데킹을 쫓아내는 동시에 포르쉐를 폭스바겐 그룹의 10번째 브랜드로 편입하였다.<ref>박상원,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17/2009091701302.html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페르디난트 피에히]〉, 《조선일보》, 2009-09-1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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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트 피에히는 1999년 세계자동차선거재단에 의한 "세기의 자동차 기업가"(Car Executive of the Century)에 선정됐고 2014년에는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15년 폭스바겐 그룹에서 물러난 후 조용히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다가 2015년 8월 25일 세상을 떠났다.<ref>배수경, 〈[https://www.etoday.co.kr/news/view/1792258 ‘자동차 업계 전설’ 페르디난트 피에히 별세.향년 82세]〉, 《이투데이》, 2019-08-27</ref>
  
 
==주요 활동==
 
==주요 활동==

2021년 4월 21일 (수) 10:06 판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ech)
폭스바겐(Volkswagen)
아우디(Audi)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ech)는 포르쉐(Porsche)와 폭스바겐의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이며 포르쉐 엔지니어, 아우디 경영이사회 이사, 부의장, 의장, CEO로 활동하였으며 1993년부터 2002년까지 폭스바겐 CEO를 역임하고 2002년부터 이사회 의장으로 회사를 이끌었으며 2015년 4월 사임하였다. 그는 폭스바겐을 경영하며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추진하여 부가티, 벤틀리, 포르쉐, 두카티, 스카니아, 만트럭 등을 그룹에 합류시켰다.[1]

개요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1937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안톤 피에히는 당시 독일의 저명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법률자문을 맡다가 1928년 포르쉐 박사의 딸인 루이제와 결혼했다. 이 같은 집안 내력 덕분에 피에히는 일찍부터 자동차 마니아가 됐다. 1962년 취리히 연방공대를 졸업하고 1963년 외할아버지 포르쉐가 설립한 포르쉐에 입사하여 전설적인 스포츠카 포르쉐 917 개발을 주도했다. 이 차는 1970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떨쳤고 천부적 엔지니어 소질을 바탕으로 미래 CEO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971년 포르쉐의 주식을 절반씩 가진 포르쉐 가문과 피에히 가문이 경영권 다툼을 벌였고 양쪽 모두 포르쉐 경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이 때문에 피에히는 1972년 아우디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아우디가 속한 폭스바겐 그룹에서 36년에 걸친 화려한 경력을 시작한다. 피에히는 아우디로 옮긴 후에도 눈부신 능력을 발휘했다. 기술 엔지니어링 부서의 책임자로 취임해 아우디80, 아우디100 등 모델 개발을 주도하고 직분사 엔진인 TDI와 4륜구동 시스템 콰트로를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개발 담당 임원까지 오른다. 1988년 아우디 최고경영자로 되었으며 1993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모기업 폭스바겐의 최고경영자까지 오른다. 피에히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노조 그리고 폭스바겐의 대주주이기도 한 니더작센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제품만이 살길이다고 하며 제품군을 혁신적으로 바꿨다. 그는 그룹 산하의 브랜드에서 공통 사용 가능한 모듈 구조 기술 개발을 주도하며 회사를 살렸다. 동시에 스코다와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자동차 명가 이미지를 구축했고 트럭 제조업체 만과 카니아, 오토바이 두카티도 손에 넣었다.

2002년 나이 제한에 걸려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이사회 의장을 맡았지만 심복들을 그룹 내 요직에 심어 실권을 장악했다.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그룹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최대 위기는 친정인 포르쉐에서 나왔다. 포르쉐 CEO인 비데킹은 폭스바겐과 SUV를 공동 개발 이후 포르쉐에서는 카이엔, 폭스바겐에서는 투아렉, 아우디에서는 Q7로 출시하면서 폭스바겐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당시 저평가돼 있던 폭스바겐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최대주주 등극을 시도한다. 비데킹은 포르쉐 이사회 의장이자 피에히의 사촌인 볼프강 포르쉐의 지원 아래 2005년부터 폭스바겐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 결국 2008년 말 33% 이상을 인수했다. 연산 10만 대의 포르쉐가 연산 600만 대의 폭스바겐 그룹을 자회사로 편입하게 되는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포르쉐는 무리하게 빌려온 자금이 경제위기로 회수당할 처지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자본금이 많은 폭스바겐에 도움을 청했고 피에히는 궁지에 몰린 볼프강 포르쉐를 압박해 비데킹을 쫓아내는 동시에 포르쉐를 폭스바겐 그룹의 10번째 브랜드로 편입하였다.[2]

페르난트 피에히는 1999년 세계자동차선거재단에 의한 "세기의 자동차 기업가"(Car Executive of the Century)에 선정됐고 2014년에는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15년 폭스바겐 그룹에서 물러난 후 조용히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다가 2015년 8월 25일 세상을 떠났다.[3]

주요 활동

각주

  1. "Ferdinand Piëch", "wikipedia"
  2. 박상원,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페르디난트 피에히〉, 《조선일보》, 2009-09-18
  3. 배수경, 〈‘자동차 업계 전설’ 페르디난트 피에히 별세.향년 82세〉, 《이투데이》, 2019-08-27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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