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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엠대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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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
대우차는 1950년대 미군 차량을 개조해 팔던 ‘신진자동차’가 모태다. 신진은 닛산의 블루버드를 조립 생산하던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한 뒤 부평공장에서 도요타의 코로나 등을 조립 생산하였다. 1972년 도요타의 철수 이후 50%의 지분을 인수한 지엠과 손잡고 ‘지엠코리아’로 사명을 바꿨으나 지엠의 모델 시보레 1700을 들여다 조립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오일쇼크로 현대의 포니와 기아의 브리사를 당하지 못한 채 1976년 산업은행관리체제로 넘어가자 다시 간판을 ‘새한’으로 바꿨고, 대우가 1978년 산업은행의 보유지분을 인수한 뒤 1982년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대우차가 탄생했다. 대우차는 1980년 기아를 중소형 상용차 전문으로 일원화하고,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으로 이원화한 정부의 중화학공업 합리화조치에 따라 사실상 ‘복점체제’를 유지하며 이윤을 보기도 했지만 현대와는 달리 고유모델 개발에는 소홀했다. 대우차는 지엠의 월드카 오펠 카데트 모델인 르망으로 기회를 엿봤으나 사실상 실패했다. 1991년 경영위기를 맞은 뒤 1992년에는 지엠과 결별하고 품질관리와 무이자 할부판매로 내수점유율을 유지하며 이른바 세계경영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대우와 대우중공업의 힘을 빌려 동구권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완성차 조립공장을 짓고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등 3개 모델을 동시에 개발했다. 1991년 가동에 들어간 창원 국민차공장과 1996년 만든 군산공장은 국내 최고는 물론 일본 업체에 근접한 생산성을 올렸고, 특히 창원공장은 1998년 1인당 생산대수 165대로 세계 1위의 생산성을 가진 공장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도한 무이자할부 판매와 차입경영으로 허점이 생긴 가운데 1997년 12월 쌍용차를 인수하는 모험을 또다시 감행했다. 결국 1999년 8월 대우 계열사까지 끌어들여 동반 워크아웃을 맞이하게 됐다. 그러다 포드가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되는 등 매각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내수점유율은 2000년 6월 27.5%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포드가 9월 중순 갑자기 도중하차, 워크아웃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2000년 10월 말 1800억 원의 어음이 만기가 돌아왔으나 채권단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대우차가 자구계획으로 마련한 3500명 감원과 임금삭감안에 대한 노조의 반발은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2000년 11월 6일 도래한 어음 중 441억 원을 막지 못해 1차 부도를 냈고 7일 이후 수차례 이어진 노사 간 담판에서 노조가 채권단이 요구한 자구계획 동의서 제출을 거부함에 따라 최종부도를 내고 말았다. 대우차는 2000년 11월 10일 법정관리(정리절차) 개시 신청을 냈고 노사가 극적으로 노사협의회 합의문에 합의, 같은 달 30일 법원에 의해 법정관리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대우차는 GM으로의 매각을 전제로 9992억 원의 자구계획을 마련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가 인력을 7300여 명 줄이고 재료비ㆍ경상비ㆍ투자비 등을 대폭 감축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평공장 생산직 1750명이 강제로 거리로 내몰리는 최대 규모의 정리해고가 단행되기도 했다. 지엠은 2001년 6월초 인수제안서를 제출했고 9월 21일 양해각서(MOU)가 체결되었다. 2002년 4월 계약을 체결한 후 지엠은 대우차 특정자산의 인수절차를 마무리 짓고 2002년 10월 신설법인 ‘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GM Daewoo Auto & Technology)’로 공식 출범했다. 기존 대우차는 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 외에 대우인천차(부평공장), 대우버스(부산 버스공장), 대우상용차(군산 상용차공장) 등 신설법인과 대우차 잔존법인 등 5개로 분류되었었다. 대우자동차와 대우인천차는 지엠에 인수되었으며 대우상용차는 2004년 인도의 다국적 자동차 기업인 타타모터스에 인수되었다. 그리고 대우버스는 2002년 사업다각화에 나선 영안모자에 인수되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7225&cid=43667&categoryId=4366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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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에서 GM코리아, 새한, 그리고 대우자동차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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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는 1955년 설립된 ‘신진자동차공업’을 모태로 한다. 미군에서 쓰던 차량을 인수, 개조해 판매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1963년에는 일본 닛산 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생산하던 새나라자동차를 인수,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업체인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바꿨다. 초기의 신진자동차는 일본 토요타와의 제휴를 통해 ‘코로나’, ‘크라운’등의 인기 모델을 생산,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72년, 일본정부가 중국과의 통상을 하기 위해 저우언라이 4원칙(한국, 대만과의 거래를 끊어야 중국과의 무역이 가능)을 받아들임에 따라 토요타는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끊었고, 신진자동차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토요타의 모델을 생산할 수 없게 된 신진자동차는 미국 GM과 합작해 ‘GM코리아’를 설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시보레 1700’, ‘카미나’, ‘레코드’ 등의 GM 기반 자동차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GM 계열 차량들은 토요타 계열 차량에 비해 한국 시장에서 인기가 없었다. 경영위기에 처한 GM코리아는 1976년, 산업은행이 신진자동차 몫의 지분을 인수함에 따라 ‘새한자동차’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1978년에는 대우그룹이 이를 다시 인수하고 GM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음에 따라 1983년에 ‘대우자동차’가 출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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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로 시작해 ‘르망’으로 터 다진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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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은 넓은 인맥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춘 인물이었다.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급격히 사세를 넓혔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경영을 중시했다. 대우자동차 역시 무리해서 완전 신차를 개발하기 보다는 기존 제품의 상품성을 개선한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을 다수 출시하는 마케팅에 주력했다. 새한자동차 시절의 ‘제미니’를 개량한 ‘맵시(1982년)’, ‘레코드 로얄’를 개량한 ‘로얄 XQ(1983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맵시는 최대의 경쟁사인 현대자동차에서 출시한 ‘포니’ 시리즈에 밀려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로얄 시리즈는 큰 차체와 품위 있는 디자인을 인정받아 고급차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후 로얄 시리즈는 ‘로얄 프린스(1983년)’, ‘로얄 살롱 슈퍼(1986년)’ 등의 파생 모델을 다수 낳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고급차 시장에서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 그동안 약세를 면치 못했던 소형차 시장에서 반격을 준비했다. 특히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맞물려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본격화 되고 있어 생애 첫 차로 적합한 소형차의 선호도가 높았다. 당시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였던 현대자동차는 국내 소형차 시장의 최강자였던 포니 시리즈의 후속 모델, ‘포니 엑셀(1985년)’을 선보이며 기선 제압에 나섰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당시 제휴 관계에 있던 GM 산하의 오펠에서 개발한 ‘카데트 E’를 기반으로 한 ‘르망’을 생산, 월드카를 기치로 1986년부터 판매에 나섰다. 르망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보기 힘들었던 날렵한 유선형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으며, 탄탄한 하체 및 고급스런 편의기능도 겸비해 특히 젊은 운전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대우 르망은 현대 포니 엑셀의 판매량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대우자동차가 현대자동차와의 양강구도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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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성공 거둔 ‘국민차’ 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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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다. 자동차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작고 저렴한 차량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는데, 이를 위한 경형 자동차(이하 경차) 생산 업체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대우국민차가 1991년에 내놓은 한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티코’다. 일본 스즈키의 경차인 ‘알토’를 기반으로 개발한 티코는 796cc의 저배기량 엔진에 전장 3,340mm크기의 초소형 차량이었다. 300만 원대의 저렴한 가격에 우수한 연비가 장점이었지만, 빈약한 편의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 때문에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카(기존 차량와 함께 운용하는 추가 차량)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IMF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인기가 높아졌다. 티코로 시작된 대우 경차의 계보는 1998년 출시된 ‘마티즈’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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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눈 뜬 기술개발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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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우자동차는 나름의 영역은 확보했지만 여전히 현대자동차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독자적인 기술 개발 보다는 이미 검증된 외부 기술을 사오는 것을 선호했던 대우그룹 전반의 성향과도 무방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역시 일부 기술을 외부(미쓰비시)에 의존한 것이 사실이지만, 1975년에 최초의 독자모델인 ‘포니’를 개발하고, 1991년에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알파엔진’을 자사 차량에 탑재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반면,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여전히 대부분의 주력 제품이 GM을 비롯한 해외 업체의 모델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신차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아닌 기존 차량을 일부 개선해 나온 것들이 많았다. 이런 차량의 경우, 연비나 주행 특성이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지 않거나 최신의 트랜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한때 고급차 시장을 지배하던 로얄 시리즈 역시 현대 그랜저(1986년)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기술력 향상에도 힘썼다. 그 첫번째 결과물이 1990년 출시된 대우자동차의 첫 번째 고유 모델인 ‘에스페로’였다. 에스페로는 본래 로얄 프린스의 뒤를 잇는 2000cc급 엔진의 중형 세단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엘란트라(1990년)’가 준중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높은 인기를 끌자 대우차동차 역시 계획을 변경, 1991년부터 1500cc급 엔진을 탑재해 준중형차 시장을 공략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스페로는 준중형급이면서도 중형급의 큰 차체를 가진 매력적인 상품성을 어필할 수 있게 되었고, 이탈리아 디자인 스튜디오의 손을 거친 미려한 외형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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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찾아온 정상의 자리, ‘응답하라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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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로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술 개발 부서를 확장하고 본격적으로 플랫폼(뼈대) 및 파워트레인(엔진, 변속기)의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1997년은 대우자동차 최고의 해였다. 해에 대우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고유 모델 3종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시했다. 소형차인 ‘라노스’, 준중형차 ‘누비라’, 중형차 ‘레간자’가 그것이었는데, 이들 신제품들이 인기를 모으며 1998년 상반기에 대우자동차는 사상 처음으로 현대자동차를 누르고 국내 자동차 판매량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진자동차 출범 43년, 대우자동차 출범 15년 만에 거둔 짜릿한 쾌거였다. 미국 수출도 본격화하고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등, 당시 대우그룹이 추진하는 ‘세계경영’도 궤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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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영광 뒤 너무 빨리 찾아온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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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우자동차의 위기는 최 전성기와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1997년말 한국경제 전체를 뒤흔든 IMF 외환위기와 더불어 모 기업인 대우그룹이 경영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오히려 투자를 확대해 1998년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의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룹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상당수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대우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한 김우중 회장이 1999년 해외로 도피하는 등의 사태가 겹치면서 대우자동차를 포함한 대우그룹 전체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결국 2000년, 대우그룹은 해체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우자동차는 ‘마티즈(1998년)’, ‘매그너스(1999년), ‘레조(2000년)’등의 고유모델을 꾸준히 출시하는 등, 마지막 사력을 다했다. 특히 경차인 마티즈는 당시 IMF 경제위기 속에서 높은 경제성을 인정 받아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중형차 매그너스는 국내 최초로 개발한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하기도 했다. 레조 역시 LPG 연료를 이용하는 미니밴이라는 점을 무기로 시장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대우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던 소비자들은 대우차를 사는 것을 점차 꺼리게 되었고 판매량 역시 그에 비례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대는 물론, 기아자동차에도 밀려 업계 3위 이하로 자리하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2000년 11월, 대우자동차는 최종 부도 처리되었고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당초 미국 포드에서 대우자동차의 인수를 고려해 협상을 진행했으나 2001년, 포드는 대우자동차의 인수를 포기했다. 대신 미국 GM이 대우자동차의 승용차 부문을 인수, 2002년 대우자동차는 ‘GM대우(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외에 버스 부분은 영안모자에서 인수해 ‘자일대우버스’로, 트럭 부분은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해 ‘타타대우상용차’로 이름이 바뀐다. GM대우는 2011년에 ‘한국지엠’으로 회사명을 변경했으며, 그동안 판매하던 차량들 역시 ‘쉐보레’로 브랜드를 바꾼다. 이로서 승용차 브랜드로서의 ‘대우’는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f>김영우, 〈[https://it.donga.com/27999/ [브랜드 흥망사] 영광과 좌절의 그 이름, 대우자동차]〉, 《IT동아》, 2018-07-3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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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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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새한 자동차는 인기가 없어 판매에 실패한 시보레 1700 승용차의 섀시를 이용해 차체를 순 국산 디자인으로 개발한 픽업트럭이다. 튼튼하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고 험로 주파능력이 우수해 새마을 운동 작업장 운반용과 용달용으로 꽤 많이 팔린 트럭이다. 4기통 1700cc 79마력의 시보레 1700 가솔린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25km로 1톤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이 새마을 트럭은 현재 국내 박물관에 두 대가 남아 있다.<ref>채영석,〈[http://global-autonews.com/bbs/board.php?bo_table=bd_021&wr_id=221 GM코리아의 새마을 픽업트럭]〉, 《글로벌 오토 뉴스》, 2006-03-05</ref>   
 
: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새한 자동차는 인기가 없어 판매에 실패한 시보레 1700 승용차의 섀시를 이용해 차체를 순 국산 디자인으로 개발한 픽업트럭이다. 튼튼하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고 험로 주파능력이 우수해 새마을 운동 작업장 운반용과 용달용으로 꽤 많이 팔린 트럭이다. 4기통 1700cc 79마력의 시보레 1700 가솔린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25km로 1톤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이 새마을 트럭은 현재 국내 박물관에 두 대가 남아 있다.<ref>채영석,〈[http://global-autonews.com/bbs/board.php?bo_table=bd_021&wr_id=221 GM코리아의 새마을 픽업트럭]〉, 《글로벌 오토 뉴스》, 2006-03-05</ref>   
  
===대우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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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83%88%ED%95%9C%20%EC%B9%B4%EB%AF%B8%EB%82%98
 
*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83%88%ED%95%9C%20%EC%B9%B4%EB%AF%B8%EB%82%98
 
* 채영석,〈[http://global-autonews.com/bbs/board.php?bo_table=bd_021&wr_id=221 GM코리아의 새마을 픽업트럭]〉, 《글로벌 오토 뉴스》, 2006-03-05
 
* 채영석,〈[http://global-autonews.com/bbs/board.php?bo_table=bd_021&wr_id=221 GM코리아의 새마을 픽업트럭]〉, 《글로벌 오토 뉴스》, 200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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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우, 〈[https://it.donga.com/27999/ [브랜드 흥망사] 영광과 좌절의 그 이름, 대우자동차]〉, 《IT동아》, 2018-07-30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2020년 9월 11일 (금) 17:35 판

지엠대우(GM Daewoo)
지엠대우(GGM Daewoo)

지엠대우(GM Daewoo)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General Motors)가 한국 대우자동차를 인수하여 설립한 회사이다. 주로 GM대우라고 쓴다. 이후 회사명을 한국지엠(GM Korea)로 변경했다.

개요

지엠대우는 구 대우그룹 계열 자동차 회사이다. 1972년 6월에 제너럴 모터스 코리아(General Motors Korea)로 신진자동차와 지엠의 합작 형태로 설립되었다. 2002년 최종 부도처리 이후, 현재는 승용, 알브이(RV)는 한국지엠이, 버스는 자일대우상용차, 트럭은 타타대우상용차로 각각 분할매각되었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dm.co.kr'이었으며, 노조는 1963년 결성 이후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이었다가 1994년 탈퇴 이후 2002년 지엠대우 변경 전까지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이었다.[1]

주요 인물

김우중(대우그룹 회장)
  • 김우중(Kim Woo jung, 金宇中, 1936년 12월 19일 ( 1936-12-19 ) ~ 2019년 12월 9일 ( 2019-12-09 ) )은 대우그룹 회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1936년 12월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전쟁으로 부친이 납북된 이후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과 경기고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3~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다 만 30세인 1967년에 자본금 500만 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실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내쇼날의류 등 섬유회사,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 등을 인수하고 대우건설·대우중공업 등을 설립하며 금융·전자·중공업 등의 분야로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올랐고,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 확장을 진행했다. 특히 1990년대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면서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출범 30여 년 만인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로 성장했다. 특히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1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하기도 했다. 여기에 1989년 내놓은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6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이에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그리고 그해 10월 중국으로 도피한 김 전 회장은 21조 원대 분식회계와 9조 9800억 원대 사기대출 혐의가 드러나면서 귀국하지 못하고 5년 8개월간의 해외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2005년 귀국했다. 그리고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 만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하지만 17조 원이 넘는 추징금은 아직 그대로 남은 상태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베트남 등에서 머물면서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17년 3월 서울에서 열린 ‘대우창업 5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2018년 말 건강 악화로 귀국했으며, 2019년 12월 9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2]

역사

신진에서 GM코리아, 새한, 그리고 대우자동차가 되기까지

대우자동차는 1955년 설립된 ‘신진자동차공업’을 모태로 한다. 미군에서 쓰던 차량을 인수, 개조해 판매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1963년에는 일본 닛산 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생산하던 새나라자동차를 인수,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업체인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바꿨다. 초기의 신진자동차는 일본 토요타와의 제휴를 통해 ‘코로나’, ‘크라운’등의 인기 모델을 생산,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72년, 일본정부가 중국과의 통상을 하기 위해 저우언라이 4원칙(한국, 대만과의 거래를 끊어야 중국과의 무역이 가능)을 받아들임에 따라 토요타는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끊었고, 신진자동차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토요타의 모델을 생산할 수 없게 된 신진자동차는 미국 GM과 합작해 ‘GM코리아’를 설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시보레 1700’, ‘카미나’, ‘레코드’ 등의 GM 기반 자동차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GM 계열 차량들은 토요타 계열 차량에 비해 한국 시장에서 인기가 없었다. 경영위기에 처한 GM코리아는 1976년, 산업은행이 신진자동차 몫의 지분을 인수함에 따라 ‘새한자동차’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1978년에는 대우그룹이 이를 다시 인수하고 GM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음에 따라 1983년에 ‘대우자동차’가 출범하게 된다.

‘로얄’로 시작해 ‘르망’으로 터 다진 1980년대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은 넓은 인맥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춘 인물이었다.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급격히 사세를 넓혔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경영을 중시했다. 대우자동차 역시 무리해서 완전 신차를 개발하기 보다는 기존 제품의 상품성을 개선한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을 다수 출시하는 마케팅에 주력했다. 새한자동차 시절의 ‘제미니’를 개량한 ‘맵시(1982년)’, ‘레코드 로얄’를 개량한 ‘로얄 XQ(1983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맵시는 최대의 경쟁사인 현대자동차에서 출시한 ‘포니’ 시리즈에 밀려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로얄 시리즈는 큰 차체와 품위 있는 디자인을 인정받아 고급차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후 로얄 시리즈는 ‘로얄 프린스(1983년)’, ‘로얄 살롱 슈퍼(1986년)’ 등의 파생 모델을 다수 낳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고급차 시장에서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 그동안 약세를 면치 못했던 소형차 시장에서 반격을 준비했다. 특히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맞물려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본격화 되고 있어 생애 첫 차로 적합한 소형차의 선호도가 높았다. 당시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였던 현대자동차는 국내 소형차 시장의 최강자였던 포니 시리즈의 후속 모델, ‘포니 엑셀(1985년)’을 선보이며 기선 제압에 나섰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당시 제휴 관계에 있던 GM 산하의 오펠에서 개발한 ‘카데트 E’를 기반으로 한 ‘르망’을 생산, 월드카를 기치로 1986년부터 판매에 나섰다. 르망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보기 힘들었던 날렵한 유선형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으며, 탄탄한 하체 및 고급스런 편의기능도 겸비해 특히 젊은 운전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대우 르망은 현대 포니 엑셀의 판매량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대우자동차가 현대자동차와의 양강구도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절반의 성공 거둔 ‘국민차’ 티코

이 시기에 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다. 자동차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작고 저렴한 차량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는데, 이를 위한 경형 자동차(이하 경차) 생산 업체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대우국민차가 1991년에 내놓은 한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티코’다. 일본 스즈키의 경차인 ‘알토’를 기반으로 개발한 티코는 796cc의 저배기량 엔진에 전장 3,340mm크기의 초소형 차량이었다. 300만 원대의 저렴한 가격에 우수한 연비가 장점이었지만, 빈약한 편의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 때문에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카(기존 차량와 함께 운용하는 추가 차량)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IMF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인기가 높아졌다. 티코로 시작된 대우 경차의 계보는 1998년 출시된 ‘마티즈’로 이어진다.

뒤늦게 눈 뜬 기술개발의 중요성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우자동차는 나름의 영역은 확보했지만 여전히 현대자동차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독자적인 기술 개발 보다는 이미 검증된 외부 기술을 사오는 것을 선호했던 대우그룹 전반의 성향과도 무방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역시 일부 기술을 외부(미쓰비시)에 의존한 것이 사실이지만, 1975년에 최초의 독자모델인 ‘포니’를 개발하고, 1991년에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알파엔진’을 자사 차량에 탑재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반면,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여전히 대부분의 주력 제품이 GM을 비롯한 해외 업체의 모델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신차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아닌 기존 차량을 일부 개선해 나온 것들이 많았다. 이런 차량의 경우, 연비나 주행 특성이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지 않거나 최신의 트랜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한때 고급차 시장을 지배하던 로얄 시리즈 역시 현대 그랜저(1986년)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기술력 향상에도 힘썼다. 그 첫번째 결과물이 1990년 출시된 대우자동차의 첫 번째 고유 모델인 ‘에스페로’였다. 에스페로는 본래 로얄 프린스의 뒤를 잇는 2000cc급 엔진의 중형 세단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엘란트라(1990년)’가 준중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높은 인기를 끌자 대우차동차 역시 계획을 변경, 1991년부터 1500cc급 엔진을 탑재해 준중형차 시장을 공략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스페로는 준중형급이면서도 중형급의 큰 차체를 가진 매력적인 상품성을 어필할 수 있게 되었고, 이탈리아 디자인 스튜디오의 손을 거친 미려한 외형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드디어 찾아온 정상의 자리, ‘응답하라 1997’

에스페로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술 개발 부서를 확장하고 본격적으로 플랫폼(뼈대) 및 파워트레인(엔진, 변속기)의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1997년은 대우자동차 최고의 해였다. 이 해에 대우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고유 모델 3종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시했다. 소형차인 ‘라노스’, 준중형차 ‘누비라’, 중형차 ‘레간자’가 그것이었는데, 이들 신제품들이 인기를 모으며 1998년 상반기에 대우자동차는 사상 처음으로 현대자동차를 누르고 국내 자동차 판매량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진자동차 출범 43년, 대우자동차 출범 15년 만에 거둔 짜릿한 쾌거였다. 미국 수출도 본격화하고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등, 당시 대우그룹이 추진하는 ‘세계경영’도 본 궤도에 올랐다.

잠깐의 영광 뒤 너무 빨리 찾아온 몰락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우자동차의 위기는 최 전성기와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1997년말 한국경제 전체를 뒤흔든 IMF 외환위기와 더불어 모 기업인 대우그룹이 경영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오히려 투자를 확대해 1998년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의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룹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상당수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대우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한 김우중 회장이 1999년 해외로 도피하는 등의 사태가 겹치면서 대우자동차를 포함한 대우그룹 전체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결국 2000년, 대우그룹은 해체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우자동차는 ‘마티즈(1998년)’, ‘매그너스(1999년)’, ‘레조(2000년)’등의 고유모델을 꾸준히 출시하는 등, 마지막 사력을 다했다. 특히 경차인 마티즈는 당시 IMF 경제위기 속에서 높은 경제성을 인정 받아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중형차 매그너스는 국내 최초로 개발한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하기도 했다. 레조 역시 LPG 연료를 이용하는 미니밴이라는 점을 무기로 시장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대우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던 소비자들은 대우차를 사는 것을 점차 꺼리게 되었고 판매량 역시 그에 비례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대는 물론, 기아자동차에도 밀려 업계 3위 이하로 자리하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2000년 11월, 대우자동차는 최종 부도 처리되었고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당초 미국 포드에서 대우자동차의 인수를 고려해 협상을 진행했으나 2001년, 포드는 대우자동차의 인수를 포기했다. 대신 미국 GM이 대우자동차의 승용차 부문을 인수, 2002년 대우자동차는 ‘GM대우(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외에 버스 부분은 영안모자에서 인수해 ‘자일대우버스’로, 트럭 부분은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해 ‘타타대우상용차’로 이름이 바뀐다. GM대우는 2011년에 ‘한국지엠’으로 회사명을 변경했으며, 그동안 판매하던 차량들 역시 ‘쉐보레’로 브랜드를 바꾼다. 이로서 승용차 브랜드로서의 ‘대우’는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3]


연혁

  • 1972년 6월 : 김우중(金宇中)에 의하여 신진자동차와 미국 제너럴모터스사의 공동출자(185억 원)로 종합자동차 제너럴모터스코리아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
  • 1972년 9월 : 소형승용차 시보레1700을 생산하고, 국내 최초로 신차발표회를 가졌으며, 중형승용차 레코드1900을 생산
  • 1973년 3월 : 고속화물차 6.5t·8t카고트럭, 대중 승합 자동차 대형버스, 소형화물 2.5t카고트럭을 생산개시한 후 대원 강철 공업 주식회사를 인수
  • 1974년 5월 : 가솔린엔진공장을 준공, 중장비차량을 생산 개시
  • 1975년 5월 : 자동차종합전시장을 개장
  • 1975년 8월 : 레코드 로얄을 생산 개시
  • 1975년 12월 : 작업훈련소를 설립, 10.5t 덤프트럭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처음 수출
  • 1976년 11월 : 새한자동차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
  • 1977년 9월 : 동양 최대규모의 서울정비센터를 준공, 10월 프레스공장을 완공, 12월 소형승용차의 생산을 개시
  • 1978년 7월 : 대우실업이 경영에 참여
  • 1979년 5월 : 차체조립공장이 완공
  • 1980년 6월 : 국내 최초의 로얄디젤승용차와 픽업트럭 맥스디젤의 생산을 개시
  • 1983년 1월 : 대우자동차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
  • 1984년 1월 : 트랙터(39t·53t)를 생산
  • 1991년 5월 : 아이알오십이(IR52) 장영실상을 수상(1.5DOHC 16V 엔진)
  • 1992년 10월 : 미국 지엠사와 합작관계를 청산하여 100% 대우그룹 출자회사가 됨
  • 1998년 : 쌍용자동차(주)를 인수하여 경차부터 대형승용차, 사륜구동 지프형차에 걸쳐 전 차종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춤
  • 1999년 8월 :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
  • 2004년 4월 : 쌍용자동차(주)가 분리, 그해 11월 회사정리가 결정
  • 2001년 9월 : 제너럴모터스와 매각 양해각서를 체결
  • 2002년 4월 : 신설법인 설립에 대한 최종계약을 체결
  • 2002년 10월 : 지엠대우자동차기술(주), 대우인천자동차(주), 대우버스자동차(주)로 회사를 분리 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로 새롭게 출범
  • 2003년 4월 : 지엠대우로 상호를 변경
  • 2004년 5월 : 보령공장을 인수
  • 2011년 3월 1일 : 지엠대우에서 한국지엠으로 사명을 변경

주요 활동

신진 자동차

신진자동차공업(新進自動車工業, Shinjin Motor Company)은 1955년 설립된 신진그룹의 자동차 회사로, 한국지엠의 전신이다. 외환사정의 악화로 에스케이디(SKD)부품수입이 도입금지된 1963년 5월 새나라자동차가 문을 닫고 경기도 부평(현재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던 새나라자동차의 현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은 1965년 김창원씨의 신진공업으로 소유주가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토요타 자동차와 제휴해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려고 했으나 토요타가 1972년 주4원칙 을 따라 한국에서 철수 하면서 계획은 공중분해되고 지엠과 제휴하였다. 1965년에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한 신진공업은 1966년에 상호를 신진자동차로 바꾸고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국산화율 20% 수준의 코로나, 크라운, 에이스, 퍼블리카, 랜드크루저 픽업, 토요타 중형 트럭, 토요타 디브이백씨(DB100C) 중형 버스, 이스즈 비알이십(BR20) 대형 버스, 대형 히노 티씨 트럭, 히노 중형 트럭, 히노 알씨삼백이십티피(RC320TP) 고속버스를 생산하였다. 1972년에 토요타 자동차가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신진자동차와 제휴를 청산하자 신진자동차는 제너럴 모터스와 합작으로 지엠코리아를 설립 했다. 지엠코리아는 1972년에 '시보레 1700', '카미나', '캬라반', '레코드 1900', 중형 지엠씨 씨 시리즈 트럭, 이스즈 티디엑스오십이(TDX50E) 트럭, 이스즈 티엑스 트럭, 새마을 픽업 등을 양산하였고, 한국측 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하여 1976년 11월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 이 후 1978년에 산업은행의 보유지분을 대우그룹에 넘기고 제너럴 모터스와의 경영권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1983년 1월부터 대우자동차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신진자동차의 계열사였던 신진지프자동차는 신진자동차로 이름을 개명하고 다시 1981년에 ㈜거화로 바꾸고 코란도를 1983년에 출시하였으나, 회사 내부 갈등으로 흑자도산을 일으켜 코란도를 동아자동차(현 쌍용자동차)에게 넘기는 계기를 맞았다.[4]

  • 신진 코로나 1200
신진 코로나는 최고 시속 145km로 도로상황에 맞게 설계되어서 나온 차량이다. 그 당시에 코로나의 가격은 83만원으로 다소 높게 측정되어진면이 있었지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국 도로사정에 제일 알맞는 차량으로 인기가 많았다. 2세대에 나온 코로나 차량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내구성이 낮고 가는 필러와 차체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많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6세대에서는 각등식 헤드라이트를 적용하였고, 8세대부터는 후륜구동방식이 아닌 전륜구동방식으로 바뀌었다. 10세대 신진자동차 코로나는 지금 차량들과 많이 비슷한 형태로 변했으며 차체가 커지고 디자인이 각이 진 것이 아닌 곡선 형태로 변형되었다.[5]
  • 신진 크라운
크라운은 신진 자동차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차종이다. 신진 자동차에서 생산 되었던 크라운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승용차로 통했다. 신진 크라운은 토요타 크라운의 2세대 모델부터 4세대 모델에 걸쳐 생산되었으며, 당대 국내에서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 통했다.[6]
  • 신진퍼블리카
신진 퍼블리카는 ‘토요타 퍼블리카(Toyota Publica)’를 라이센스 생산한 것으로, 20%정도의 국산화율을 맞추며 생산을 개시했다. 원본에 해당하는 토요타 퍼블리카는 오늘날 일본 경차 산업의 시발점이 되는 1950년대 일본 통산성(通商産業省, 現 일본 경제산업성)의 ‘국민차 구상’에 따라 개발된 차종 중 하나였다. 국민차 구상은 마치 독일의 국민차 계획에 가까운, ‘저렴한 가격과 높은 실용성을 양립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퍼블리카는 당시 토요타에서 생산하는 승용차 중 가장 작은 크기의 자동차였다. 차명인 퍼블리카는 ‘공공의, 대중의’를 의미하는 영단어 ‘Public’과 자동차를 의미하는 ‘Car’를 합쳐, ‘대중의 자동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토요타 퍼블리카는 이후 토요타 스탈렛(Starlet), 다이하츠 콘소르테(Consorte) 및 샤레이드(Charade), 그리고 오늘날의 토요타 비츠(Vitz, 수출명 야리스) 및 파소(Passo) 등으로 이어지는 토요타계 소형차 계보의 시조에 해당한다. 신진자동차의 이름을 달고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퍼블리카는 당시 대한민국의 자동차 보급에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 운전하기 쉬운 작은 차체와 4명을 태울 수 있는 실용성, 그리고 국민차 구상에서 비롯된 간소한 구조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갖췄다. 당시 신진 퍼블리카의 가격은 최고급 세단 크라운의 절반 가격에 불과했다. 신진 퍼블리카의 저렴한 가격은 대한민국의 ‘마이카 시대’를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신진에서 생산한 퍼블리카는 퍼블리카의 2세대 모델에 해당하는 섀시코드 P20 계열의 모델이었으며, 1967년 11월 생산 개시 이래 1971년까지 총 2,005대가 생산되었다. 상용차를 포함하여 연 평균 생산량 2만대를 약간 넘었던 이 시기, 퍼블리카의 판매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특유의 작은 차체와 그에 걸맞은 귀염성 있는 외형 덕분에 ‘꼬마 차’, ‘왕눈이 차’와 같은 친근한 애칭으로 불렸다.[7]
  • 신진뉴크라운
신진 뉴 크라운은 3세대 크라운으로 정숙하면서도 강력한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무기로 당시 고급 세단 시장에 혜성처럼 나타난 현대 자동차의 포드 20M을 밀어내는 실적을 올리며 인기를 누렸다. 뉴 크라운은 역대 신진 크라운 중 가장 많이 생산된 자동차로 신진자동차의 전성기와 함께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 통했다.

지엠 코리아

  • 시보레 1700
시보레 1700은 1972년 출시해 1975년까지 3년 동안 8105대가 생산됐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소품 차량 대여 업체 금호상사가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시보레 1700은 독특한 이름처럼 복잡하고 오랜 역사를 담은 모델이다. 시보레는 쉐보레의 옛 표기다. 한국지엠의 전신 신진공업은 1971년 합작사 도요타가 발을 빼자 지엠과 손잡았다. 이 때문에 1971~1976년 잠시 지엠코리아로 이름을 바꿨다. 시보레 1700은 이때 지엠 산하 자회사 호주 홀덴의 엘제이(LJ) 토라나를 들여온 모델이다. 시보레 1700은 미국차답게 연비가 나빴다. 더욱이 출시 이듬해 1차 오일 쇼크로 기름값이 급등했다. 결국 현대 포니 등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8]
  • 카미나
기존에 판매되었던 시보레 1700의 저조한 판매량으로 인해 대체 투입이 이루어진 차량이며, 제너럴 모터스가 경영 상의 이유로 철수하면서 새한자동차를 통해 판매되었다. 물론, 시보레 1700 역시 카미나가 단종될 때까지 병행 판매가 이루어졌다. 당시 파워트레인은 배기량 1,492cc의 가솔린 직렬 4기통 엔진을 탑재했는데 시보레 1700에 얹힌 엔진을 베이스로 실린더 내경을 5.5mm 줄이고 배기량을 206cc 줄인 엔진으로 4단 수동변속기를 장착해 최고 출력 66마력 / 5,000rpm, 최대 토크 11.2kg°m / 3,100rpm / 최고 시속 140km 의 성능을 냈으며, 앞,뒤 외관에 크롬 범퍼 장착 등 변화를 주고 실내 콘솔 박스와 헤드 레스트도 적용하는 등 차별화에 나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엔진 및 차체의 부조화와 낮은 지상고 등 기존 시보레 1700이 갖고 있던 단점을 그대로 안고 출시되어 판매 성적은 더 형편없었는데, 총 판매대수가 992대로 포니와 브리사의 벽을 넘지 못한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단종되었다. 중간에 헤드램프가 4등식으로 변경되는 페이스리프트가 있었고, 새한 캬라반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9]
  • 새마을 트럭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새한 자동차는 인기가 없어 판매에 실패한 시보레 1700 승용차의 섀시를 이용해 차체를 순 국산 디자인으로 개발한 픽업트럭이다. 튼튼하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고 험로 주파능력이 우수해 새마을 운동 작업장 운반용과 용달용으로 꽤 많이 팔린 트럭이다. 4기통 1700cc 79마력의 시보레 1700 가솔린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25km로 1톤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이 새마을 트럭은 현재 국내 박물관에 두 대가 남아 있다.[10]

각주

  1.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B%8C%80%EC%9A%B0%EC%9E%90%EB%8F%99%EC%B0%A8
  2. 네이버 지식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7225&cid=43667&categoryId=43667
  3. 김영우, 〈[브랜드 흥망사 영광과 좌절의 그 이름, 대우자동차]〉, 《IT동아》, 2018-07-30
  4. 박카수와빵, 〈GM대우와 쌍용자동차의 전신인 신진 자동차〉, 《네이버 블로그》, 2020-05-06
  5. JNBusiness, 〈신진자동차 코로나〉, 《네이버 블로그》, 2016-03-23
  6. 모토야, 〈[특별했던 차신진자동차 크라운]〉, 《네이버 포스트》, 2018-02-16
  7. 박병하, 〈[특별했던 차신진자동차 크라운]〉, 《다음 자동차》, 2018-06-18
  8. 김형욱,〈[그때 그 차들③시발·시보레 영화소품된 희귀 국산차 10選]〉, 《이데일리》, 2015-04-10
  9.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83%88%ED%95%9C%20%EC%B9%B4%EB%AF%B8%EB%82%98
  10. 채영석,〈GM코리아의 새마을 픽업트럭〉, 《글로벌 오토 뉴스》, 2006-03-05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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